시네토크 

역사의 새로운 시각들이 힘을 갖고 반향을 일으켰던 시기의 영화   

- 민규동 감독이 말하는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지난 2월 16일, 민규동 감독의 선택작인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 상영 후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들을 열렬히 지지하기 보다는 기본적인 애정을 갖고서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민규동 감독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선택작들 중 가장 의외의 선택이라는 인상도 잠시, 시네토크가 끝날 즈음 민규동 감독이 만든 역사극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여러 편을 추천해 주셨는데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는 <남부군>(1990)을 상영하게 되었다. 처음 선택하신 영화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민규동(영화감독): 2차 세계대전 말기를 배경으로 독일군의 패배를 다룬 전투 영화 <벌지 대전투>(1965),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초기작인 <미행>(1998)이나 <뮤직 박스>(1989), <레미제라블>의 예전 버전의 영화 등을 추천했지만 모두 상영이 어려웠다. 해방 공간에 대해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서 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보니,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즈음 <닥터 지바고>(1965)를 봤다. 두 영화 모두 사상적인 압박 속에서 개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남부군>은 당시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었고, 당시 흥행에도 성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한 번쯤 언급하곤 했던 영화였다. 


김성욱: 90년대 초에 <남부군>, <우묵배미의 사랑>(1990), <그들도 우리처럼>(1990) 같은 영화들, 대학가에서는 자주제작으로 만든 영화들이 나왔다. 사회적인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고, 소비에트 붕괴나 천안문 사태 등 여러 면에서 사회 격변기였다. 감독님은 90년대 초반, 그 시절에 어떻게 살아가고 계셨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90년대 전세 값이 급하게 올라서 파동이 있었다. 어딜 가도 비싸다 보니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시도하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못 버틸 거라는, 세상이 곧 뒤집혀질 거라는, 낭만적인 혁명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남부군>과 같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고, 우리가 잘 몰랐고 언급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이런 분위기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었다.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전쟁이나 빨치산, 좌우대립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들이 언급되면서 역사에 관심이 없었거나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굉장한 카오스를 겪으며 흔들리게 된다. 그 흔들림에서 오는 에너지들이 문화에 반향을 일으켰었다. 『태백산맥』이 워낙 깊이 있고 진동이 큰 문학이었기 때문에 그에 비해 『남부군』은 상대적으로 얕고, 또한 전향을 해서 살아남은 사람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수정주의적이고 타협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 자체도 빨치산의 인간적인 면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빨치산을 미화하는 것이라고 격하게 비난하는 시각과 더 흔들림 없는, 진짜 빨치산을 그리기에는 너무 온정적이지 않느냐는 비판 사이에 묘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김성욱: <벌지 대전투>나 <남부군>처럼 주로 대규모로 인물이 등장하고 소셜한 관계들을 다룬 영화들을 선택하셨는데. 

민규동: 어릴 때부터 전쟁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혐오감이 많았지만, 그렇게 굉장히 큰 필드에서 벌어지는 생과 사의 문제, 국가 사이의 정치적인 역학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이런 것이 주는 긴장과 재미를 즐겼던 것 같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작은 영화들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역사를 관통하는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소우주로 넓혀내는 개인에 얽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지금도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전쟁과 혁명을 다룬 그런 큰 영화들을 떠올려보다가 <남부군>까지 온 것 같다. 


김성욱: 이런 류의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영화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보셨나. 

민규동: 이 영화는 <피아니스트>(2002)처럼 한 인물을 끝까지 따라간다. 안성기 씨의 시점으로 존재하고 중간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인물들이 많다. 실화에 많이 근거하다 보니 실제 공간, 실제 인물들에 맞춰져 있어 전형적이지 않는 인물 배치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실제 일지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장르적으로 균형을 맞추는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그리도 빨치산 내에서의 인물군을 잘 뽑아서 균형 있게 배치하려고 많이 노력하신 것 같다. 


김성욱: 말씀하신 것처럼 <피아니스트>와 전체적인 이미지의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피아니스트>를 만들면서 로만 폴란스키가 염두에 둔 하나의 이미지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것, 완전히 폐허 더미가 된 가운데 혼자 서 있는 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남부군>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는 아무래도 안성기 씨가 하얀 눈밭에 혼자 남겨져 있거나 시체들이 뒹구는 가운데 혼자 서 있는 상태의 느낌들이 크게 와 닿는다. 

민규동: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적인 부분, 따뜻한 점들을 덜어내고, 좀 더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을 따라다녔으면 좀 더 냉정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김성욱: 근래에 나왔던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당시에는 이런 내용을 다루면 굉장히 문제가 많이 됐다. 대학생 때 학교에서 북한 영화를 상영한다는 날 대학에 헬기가 뜨고 최루탄이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상영하거나 본다는 행위 자체가 사람들이나 세상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나라에서 진압을 할 정도였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이런 영화들을 편하게 볼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있다. 오히려 무관심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의미가 없어진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영화를 보려고, 혹은 만들려고 했던 힘들이 증발되고, 이제는 전쟁을 하더라도 반드시 재미가 담보되어야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데 정말 좋은 세상이 오겠지?’라는 회의적인 질문을 불안하게 던지는데, 시간이 지나 그 의미는 없어지고 이미지만 남게 된 지금의 순간이 묘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김성욱: 90년대 초반에는 영화를 전복적인 예술로 봤던 것 같다. 상업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대중적 동원의 측면에서 영화를 하나의 스펙타클의 장으로도 봤던 것 같다. 자주제작의 영화들이 대학에서 상영될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가 굉장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멀티플렉스에서 <레미제라블>(2012)을 보면서 혁명에 대한 찬가를 듣게 되는데 그 느낌이 묘했다. 이런 영화들을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보고 있는 경험적인 측면에서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규동: 어떤 박제를 바라보는 느낌이지 바리케이드에 서있는 그 절절함의 의미를 이해하는 느낌은 아닐 것 같다. 예전에 <닥터 지바고>를 보면서 주인공이 빨치산에 끌려가 의도치 않게 혁명에 종사하다가 탈출하고 죽어갈 때 당시에는 정말 그 인물과 함께 행군하는 느낌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환희 같은 것이 절절하게 다가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모두 다 이미지화된 것 같다. 


관객1: 정지영 감독님의 영화들에 대해 너무 감정 묘사가 직접적이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반응이 있지만, 그럼에도 항상 어떤 진정성이 느껴진다. 정말 뭔가 말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이다. 

민규동: 이야기의 선택에 있어서 남다른 지점이 있으신 것 같다.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이야기를 선택했을 때는 그 방향이 명백한 것 같고, 그런 감독님의 역사적, 철학적 입장을 반영하는 가장 적합한 얼굴이 안성기 씨라는 생각이 든다. 안성기 씨의 얼굴은 잘생겼고, 지식인 얼굴이기도 하고, 휴머니즘을 담고 있고, 연륜도 있고, 그런데 뭔가 성욕은 제거되어 있다. 더 자신을 학대하는데 익숙하고,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데 서툰 지점들이 비슷하게 영화에 결기가 이어지고 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가 사람을 끌어가려는 어떤 결기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정지영 감독님의 영화가 선택을 강요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모호한 입장을 취할 수 없게 하고, 지지하거나 반대하거나 이다. 감독님의 행동가로서의 어떤 확고한 지점들이 계속 있는 것 같다. 


관객2: <남부군>과 비교해서 <태백산맥>(1994)과 <하얀 전쟁>(1992)은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태백산맥』은 긴 서사시이고, 어떤 한 인물도 평면적이지 않게 입체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태백산맥>은 소설이 갖고 있는 진지함이나 무서울 정도로 깊이 바라보던 시선이 많이 희석되고 결국은 별로 모난 것 없이 안성기 씨가 바라보던 시선처럼 상식적인 메시지밖에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한계를 많이 노출했었다. <하얀 전쟁>도 비슷하게, 전쟁의 무의미함과 남겨진 트라우마에 대한 메시지 자체는 굉장히 상식적이라고 생각을 했었고, 특별한 자극을 받지는 못했다. 한국군의 모호한 입장에 대해 좀 더 문제제기하고 깊이 있게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정지영 감독님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긴 하지만 열렬히 지지하기는 어려운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김성욱: 이런 영화들을 선택한 데에는 차기작에 대한 생각들도 있으셨던 것 같은데.

민규동: 차기작이 뭐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남녀 간의 멜로드라마를 써놓은 것이 있고, 40년대 해방공간의 느와르, 전쟁직후의 첩보멜로를 써놓고 구상 중이다. 좀 더 열어놓고 스스로도 궁금해 하고 있다.


정리: 장지혜(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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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민규동 감독이 추천한 영화 <토토의 천국> 상영에 이어 시네토크가 진행되었다. 민규동 감독은 내내 차분하고 조근조근한 어투로 이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전했고, 이야기는 영화작업에 대한 현재의 고민과 생각들로 이어졌다. 독특한 퍼즐 같은 영화지만, 그러한 면모 자체 보다는 영화가 담고 있는 선택의 문제와 어떤 위안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컸던 시간이었다. 그 날의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 영화를 오래전, 지금은 없어진 뤼미에르 극장에서 봤었다. <시네마 천국>이 개봉했을 무렵이어서 아마 이 영화도 <토토의 천국>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를 추천해주신 민규동 감독님은 사전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데뷔작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만들 때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와 본인의 작업 간에 어떤 유사성이 있었을지도 궁금하다.
민규동(영화감독): 이 영화를 극장에서는 못 봤었고, 비디오테이프에 복사해서 아주 여러 번 닳도록 봤었다. 첫 번째 영화를 만든 건 그로부터 4년 정도 뒤인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라는 제목만 가지고 이야기를 구상할 때 <토토의 천국>을 다시 꺼내들었었다. 당시 두 편의 영화가 큰 영향을 줬었는데, 하나는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루>라는 영화였다. <블루>에서 주인공이 남편과 아이의 죽음을 놓고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갈지의 느낌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좋아했던 여자친구를 잃은 한 고등학생의 감정적인 지점을 같이 놓고 많이 얘기했었다. 또 하나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드라마나 문학적인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인 것, 영화 고유의 이미지를 찾다가 <토토의 천국>을 다시 떠올렸던 것 같다. 글로 이 영화를 다시 정리하면 이 영화를 이해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외의 다른 텍스트로는 전달이 굉장히 어려운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영화적 화법과 언어를 갖고 있다고 느껴졌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부분도 좀 있다. 이를테면 둘이 침대에 누워서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나, 과거나 현실을 오가는 방식, 설명적이지 않고 퍼즐처럼 흩뜨려놓은 수수께끼들이 나중에 조합되는 방식과 같은 것들을 많이 영향 받았었던 것 같다.

김성욱: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최근작인 <미스터 노바디>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미스터 노바디>는 근본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퍼스펙티브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생각과 노인이 거꾸로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것이 동일 인물이라면 중복되거나 플러스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동시에 <토토의 천국>의 토마라는 인물이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미스터 노바디’와 같이 아이덴티티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규동: <미스터 노바디>는 다 보진 못하고 어느 순간 멈췄던 것 같다. 절반정도 봤을 때까지의 느낌만 기억하고 있는데, 그 때의 인상은 감독이 어떤 긴 방황 끝에 첫 작품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이었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성장하지 못한 어떤 순간들을 계속 포착하는 방식에서 첫 작품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성욱: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가고, 특히 유년기 시절의 상처가 중년, 노년이 되어서까지 진행되어가는 것은 영화적으로 보면 <현기증>같은 영화의 느낌도 들기도 한다. 왜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동시에 어린 시절의 상처에 연연하게 되는가 하는 점들이 문득 생각이 들었다.
민규동: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에 대해 불만족스러울 때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을 찾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어떤 트라우마나 상처, 기억 같은 것인 것 같다. 사실은 내가 훨씬 더 좋은, 강한 운명에 서있었는데 타인의 방해로 그것이 엇갈려버렸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렸다고 여기는 자기 열등감에 빠져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지워지지 않는 열등감이나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는 상태에서 그를 버티게 할 수 있었던 아주 강한 최면 중의 하나가 알 수 없는 다른 힘으로 인해 내 운명이 바뀌었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명백히 의미에서 결코 성장하지 않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듯하다가, 마지막엔 모든 걸 놓고 이상하게 성장하고, 그리고 죽음을 통해 다시 성장을 멈추는 아이러니컬한 면이 있다.

김성욱: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은 작업을 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미스터 노바디>같은 경우는 6년 이상의 시나리오 작업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영화는 어떻게 작업이 될까 궁금하다. 영화의 전체적인 것들을 구상해나갈 때 이미지들을 떠올리고 그 이미지들의 배치에 시간이 소여 됐을지, 각각의 장면들이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사전적으로 결정해 놓게 되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연출자로서 이 영화를 볼 때, 제일 먼저 그 질문이 떠올랐었다. 과연 이 영화를 완벽하게 구상을 다 하고 본인의 방식대로 한 것인지, 아니면 완벽하지 않은 소스들을 가지고 편집하는 과정 중에 발견한 것인지 궁금했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경우엔 세 달 정도 시나리오를 쓰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에, 굉장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간 셈이다. 이미지의 배치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씨를 뿌리고 다시 거두고 배치하는 과정은 그것이 미리 자기 안에서 정의되지 않은 상태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와 달리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들, 반복되는 미장센 같은 것들은 짧은 시간 안에 구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이 영화의 구상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이야기로 정리하지 않고, 이미지로 압축하고 반복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김성욱: 영화에서 하나의 음악이 여러 가지 효과로서 반복적으로 쓰인 것이 인상적이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음악을 쓸 때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과거의 기억과 연관지는 점에서 장점일 수 있지만, 지나치게 구조적이거나 너무 설명적일 수도 있다.
민규동: 이 영화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그런 지적이 맞았을 것 같다. 영화 자체가 구조적으로 반복과 퍼즐링이 쓰여서 그에 따라 효과적으로 음악이 쓰인 게 아닌가 생각한다. 죽은 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서 죽은 자의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방식 역시 이 영화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음악감독이 자크 반 도마엘 감독과 형제인데, 항상 함께 작업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김성욱: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민규동: 이 영화가 단지 대단히 감각적이고 재능이 뛰어난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 이상의 여운을 남기는 것은 엔딩의 묘한 선택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 토마는 평생 자기보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에게 밀려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뺐기고, 마지막에도 복수의 에너지로 겨우 버티면서 끝까지 정말 빼앗긴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에 뭔가를 깨닫는다. 상대방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 내가 되찾을 수 없는 여인이나 죽은 누이, 그 모든 현실을 인정하고 내가 믿었던 그 남자의 삶을 찾는다. 알프레도로서 죽게 되는데, 그 죽음이 어떻게 보면 가장 비극적 죽음이 될 수 있는 순간에 그가 정말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해석하기가 묘하다. 모든 인간에게도 자기 운명을 되찾고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작은 위안이 있는 것 같다. 재가 되어서 날아다니며 노래 부르면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이 작은 위안을 준다. 그 여운이 없었다면 그냥 장난 같은 영화가 됐을 수도 있는데, 영화의 지적인 게임들은 다 증발되고서 남는 엔딩의 느낌이 정말 좋고, 인상적이다. 극중 대사처럼, 우리는 어쨌든 혼돈 속에 있고 불안하게 달리고 있지만, 어쨌든 파란불이라고 위안을 주는, 그런 느낌이 있다.

관객1: 마지막에서 자신과 화해하면서, 자신이 부러워했던 삶이 자신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름대로 자기의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된다. 블랙코미디 같으면서도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와 감독님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이 어떤 연결점을 갖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들 때 성장을 강요하는 그 틀 자체가 공포가 아닐까 라는 생각했기 때문에 주인공이 자살하는 것의 의미를 성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회화를 거부하고 어른이 되기를 멈춘 아이의 메시지를 모티브로 취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토토의 천국>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자기 삶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성장할 기회를 놓치고 퇴행상태에 있는 한 남자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하는지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에 'N세대식 네트워크'라는 표현을 어느 평론가가 썼었는데, 마구 흩어져있는 이미지들이 서로 네트워크 되어서 하나의 의미로 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 이미지의 교차로 의미의 교차를 찾는 것과 같은 방식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소녀의 감성과 귀신이 접합되는 방식을 찾았던 것 같다.

관객2: 마치 자신이 알프레도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토마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토마한테는 마지막 카운터펀치가 필요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해도 알프레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에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원했던 자리가 바로 알프레도로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인생으로 되돌아와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복해 했던 것 같다. 상대가 자신을 부러워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말로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속성이다. 그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이제 무엇을 찾을 것인가. 지금까지 증오로 버텨왔는데, 그리워할 여자도 없고 내 삶의 모티브와 에너지가 없으니 그 순간에 카운터를 날리는 그 선택이 기묘하고 재밌다.


김성욱: 작가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느꼈던 민감한 부분들을 자신의 작품 안에 계속 반복해서 표현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잘 모르다가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걸 알면서 계속 변주해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이 작가를 봤을 때도 그런 민감한 느낌이 있을 것 같다.
민규동: 이 감독이 많은 작품을 만든 편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작업도 하고 워낙 재능이 다양한 사람이어서, 극영화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새로운 작품을 들고 나타나서 아주 오랫동안 준비했다고 하니까, 이 감독이 좀 더 쉬운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 그 소용돌이 안에서 무언가 다시 찾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작업에서의 괴로움과 고통이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 어떻게 풀어야할까를 오늘 영화를 다시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나의 궤도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다. 분명 다른 가능성이 있을 텐데, 내가 노력으로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운명적으로 정해져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최근에 친구에게서 위로의 문자를 받았다. ‘네가 하는 일에 대한 불만족을 멈추지는 말되,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고 하더라. 마음엔 들지 않지만, 계속 사랑해야만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더 뜨겁게 안아야하지 않을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사진: 최용혁(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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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총알이 관통해 유리창이 파열하는 파격적인 첫 장면만큼 <토토의 천국>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영화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세자르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칸영화제에서는 신인감독 대상의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토토의 천국>은 영화연출에 관심이 많았던 자코 반 도마엘이 극작가로 활동하며 틈틈이 준비한 영화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제작자들로부터 함량 미달 판정을 받으며 수정과 보완을 위해 3년여의 시간을 더 공들인 것을 감안해도 이 영화의 화려한 수상은 놀라운 결과다.


<토토의 천국>은 토토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영화다. 그의 인생이 유별나 보이는 것은 스스로 운명이 꼬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생아실의 화재로 이웃집 알프레드와 부모가 뒤바뀌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것. 토토는 자신이 응당 누려야 할 행복을 알프레드에게 빼앗겼다는 패배감에 평생을 괴롭게 보낸다. 나이를 먹을수록 분노로 삶의 지속 이유가 변질된 토토는 알프레드를 향한 복수를 다짐하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야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이 영화의 놀라움은 장르와 장르, 꿈과 현실, 그리고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능수능란한 연출에 존재한다. 첫 장면만 해도 시커먼 범죄영화를 선보이지만 토토의 유년기로 넘어가면 울긋불긋 미장센이 돋보이는 성장영화로 돌변한다. 장르에서 장르로 건너뛰기. 토토의 성장에서 친(?)누나 앨리스와의 비밀스러운 사랑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은 토토가 닮은 이미지의 여인에게 집착토록 만든다. 꿈과 현실의 혼동. 다만 그 여인마저 알프레드에게 빼앗긴 토토는 TV영화를 통해 살해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던 중 어느 샌가 화면 속 주인공으로 변모해있다. 픽션과 논픽션의 교차.


이처럼 모든 종류의 경계를 무시하는 자코 반 도마엘은 토토의 인생에 대한 만화경으로써 <토토의 천국>을 구성했다. 언급한 예 외에도, 홀로된 노년의 토토가 만들어낸 상상이 TV화면으로 재생되는 이야기일수도 있고, 토토와 알프레드가 평생을 두고 벌이는 일종의 역할극일수도 있다는 단서가 영화 곳곳에 퍼즐놀이처럼 흩어져있는 것이다. 한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의 영화는 전혀 새롭다고 할 수 없지만 <토토의 천국>이 참신한 이유는 토토에 대한 다각도의 시점이 여러 사람의 것이 아닌 토토 본인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주의!) 사실 이 영화는 <선셋대로>나 <아메리칸 뷰티>처럼 죽은 자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까, <토토의 천국>은 살아생전 불행했던 (것처럼 보이는) 삶을 죽은 뒤에 여러 각도로 조망하며 비로소 긍정하는 관조의 영화라 할만하다. 연출의 기교뿐 아니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 영화초짜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화려한 수상 경력보다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by 허남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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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민규동 감독이 추천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지난 30일 저녁,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상영 후 이 영화를 추천한 민규동 감독과 함께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필름이 변색되었다는 공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극장을 찾아주었다. 다양한 측면에서 함의를 품고 있는 논쟁적인 영화였던 만큼 짧은 시간에도 깊이 있는 대화와 질문이 오고간 자리였다. 이 지면을 통해 그 일부를 옮겨본다.


민규동(영화감독):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친구들에게 줄거리를 설명하기는 힘들었는데 촬영과 색감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필름 상태 때문에 세피아, 혹은 흑백처럼 보였지만, 사실 촬영감독을 전시회에 데려가서 처음에 나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보여주며 저 그림의 색감을 구현하고 싶다고 얘기했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겨울에 해가 빨리 저물어서 낮에도 등을 켜두는데 이런 1월의 파리, 해질녘의 빛깔 같은 걸 활용해서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를 찍은 것 같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처음 이 영화가 개봉 됐던 때에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도 했었는데 감독님은 어떻게 보셨는지?
민규동: 베르톨루치는 우리에게, 특히 내게 <마지막 황제>로 처음 접해진 감독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상을 9개 받았었는데 중국의 역사를 외국인의 시각으로 다루는 게 독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그를 다시 만난 셈이다. 젊은 시절 8,90년대에 거쳤던 혁명에 대한 낭만적 기대가 있었는데, 베르톨루치도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진보적인 것들, 역사변혁에 관한 것들을 젊은 시절에 몸으로 체감한 사람이어서 남다른 느낌이 있었다. 이와 별개로 이 영화를 선택한건 에로티시즘의 파격적인 지점을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같이 본 친구가 ‘이렇게 야한 영화도 처음이고 이렇게 지루한 영화도 처음이다’라고 했던 감상이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에 봤을 때 왜 이게 그렇게 파격적이며 물의를 일으켜야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었다. 처음엔 이 영화가 하려던 얘기가 뭔지 이해를 잘 못했던 것 같다. 근데 30대에 파리에서 다시 보니까 영화의 줄거리와 사랑 방식이 조금 이해가 갔었다. 40대가 되어서 봤을 때는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고 너무 절박하게 공감이 됐다. 여러 가지 함의가 있는 영화이고 72년작인 만큼 68혁명에 대한 후일담으로써의 정치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보편적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로써 큰 위로가 된다.


김성욱: 이 영화에는 이방인적인 느낌이 많다. 주인공도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면서 또 많은 외국을 거쳐서 온 이국적 인물이기도하고 감독도 파리에서 외국인으로서 영화를 찍었다. 그러다보니 공간이 유독 인상적이다. 아무래도 주된 공간은 아파트다. 정해진 한 공간에서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진다는 설정이 관객에게 납득이 힘들 수 있는데, 이 영화는 잘 맞아떨어지고 또 그 공간 안에서 시간이 파괴되는 느낌도 든다. 베르톨루치가 “이전까지는 과거시점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이 영화에서부터 현재 진행으로 지속되는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던 말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공간이 특별히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
민규동: 베르톨루치가 처음 이야기를 구상한 계기는 밀폐된 공간에서 이름 모를 여자와 알 수 없는 미래를 즐기며 사랑하고 싶다는 성적 환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아주 주관적이고 사적인 남녀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파리와 아파트라는 공간이 적절했던 것 같다. 왜 프랑스를 배경으로 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적인 욕망이 펼쳐지지 않는 공간을 선정한 것 같고, 영화 속에 드러나다시피 교회, 법, 가정 같은 주류 질서에 대한 저항의 욕구가 컸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공간을 찾다 보니 오래 된 큰 아파트가 정해진 것 같다. 그 안에서는 어떤 질서도 존재 않는 원초적인 공간으로 역행하고자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무엇도 나를 억압할 수 없는 공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느낌으로 해석하도록 공간을 배치한 듯했다.

김성욱:
영화 촬영 당시 검열문제나 분위기상으로 봤을 때 이 정도의 포르노그래픽한 영화를 찍을 여건이 프랑스 정도나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질문 하나가, 마지막에 말론 브란도가 씹던 껌을 뱉어 붙이는 장면에서 '그 껌을 왜 붙였고 언제부터 씹었는지' 이다. (좌중 웃음) 오늘 유심히 보니 아파트를 뛰어올라간 다음부터 씹고 있더라. 즉흥적인 면도 있는 것 같고, 어쨌든 이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의 연기는 굉장히 특별하다. 그가 연기한 폴이란 인물은 어떻게 봤는가?
민규동: 예전엔 몰랐는데 다시 보니까 많이 섹시한 인물이다. 고독이나 참회 같은 인물의 고행을 누가 이만큼 소화할 수 있었을까 잘 상상이 안 된다. 감독이 밝혔듯이 이 영화는 사실 탄탄한 시나리오를 구축해서 대사를 외우게 하며 찍은 게 아니라, 무척 거칠고 즉흥적으로 많은 걸 열어놓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메소드 연기법을 체계적으로 교육받고, 연기의 기교와 깊이를 알며 독특한 기벽이 있었던 이 훌륭한 배우가 적합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는 모든 이야기와 이미지를 뚫고 자연스레 인물을 만들어낸 것 같다. 후에 브란도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자기 삶을 강탈당하는 느낌에 너무 고통스러웠고 다시는 이런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말했을 만큼, 자신의 실제 삶을 쏟아 부으며 이 인물을 힘겹게 통과한 것 같다. 촬영하며 살이 10키로나 빠졌다고 들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아버지가 술꾼이고 어머니가 알몸으로 감옥에 갇혔던 경험 등이 실제 그의 삶에서 나왔단 점이다. 상대 여배우에게만 질문 대사가 주어졌고 브란도의 독백은 정해진 대사 없이 그가 자기 경험을 말했다고 한다.

김성욱: 이 영화를 볼 때면 늘 대가가 보여주는 카메라 움직임에 감탄하게 된다. 이를 테면 중간에 장모와 폴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가 슬쩍 들어가서 벽을 보여주다가 장모가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든지, 중간 중간 사람들을 세워놓고 카메라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면도 많고, 마지막에 테라스에서 뒤로 빠지는 장면도 굉장히 좋았다. 전작인 <순응자>에서는 카메라가 발레처럼 움직이는데, 이 영화에서는 인물들을 놓고, 공허감을 주는 그 틈들을 잘 찍어냈다. 영화에서 촬영과 전체적인 장면 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봤는가?
민규동: 처음엔 촬영이 전혀 안 보였는데 세 번째 보니 보이더라. 굉장히 유려하며 현장에 가기 전에는 계획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감독 스스로도 <파리의 아메리카인> 같다는 말을 했을 만큼 음악적이며 뮤지컬 영화적인 성향이 있다. 베르톨루치는 카메라가 가만히 있는 걸 견딜 수 없어서 항상 움직이게 된다고 하더라. 그는 자신의 영화 <루나>의 '어머니를 향해 다가가는 아이' 씬을 이야기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는 카메라는 그 대상을 욕망하는 자신의 시선이고 다시 멀어질 때는 그 금기된 욕망에 대한 주저함이라고 했다. 카메라가 크레인 업하는 것은 발기, 성적 욕망의 이미지라고 하더라. 사위와 장모간의 장면들에서는 묘한 성적 관계를 암시하려는 규칙 속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관객1:
저널들에서 이 영화를 성정치학과 관련지으며 훌륭한 영화라고 치켜세우기에 호기심에 비디오로 빌려봤었다. 영화를 보면 가정을 부정하는 폴과 가정을 이루려는 톰이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 표현된 가정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민규동: 폴이 외롭다고 생각하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부인이 죽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고 남겨진 것은 그녀의 정부였던 마르셀 뿐이다. 결국 지난 5년간의 결혼 생활, 가정과 사랑에 대해 짙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낯선 여자와 폭력적인 정사를 가진 것 아닐까. 이 증명도 부질없다고 느낀 순간 아내에게 가서 참회하고, 결국 가족과 관계, 사랑이 유의미한 것이었다 말해달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쟌느가 다시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나. 쟌느와 폴의 관계는 일종의 자해였다고 본다. 이를 통해 과거를 잊으려했고 결국엔 쟌느와의 새로운 관계를 원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성공한 셈이다. 반대로 쟌느는 폴의 대척점에서 평범한 가정과 사랑을 원하는 보통여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둘의 관계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감독은 결국 '가정을 이루려는 쟌느와 톰에게도 희망이나 출구는 없지 않는가' 라고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2: 부인의 시신 앞에서 우는 장면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고 계속 집에 두는 건지 아니면 과거 현재가 뒤섞이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붙여놨던 껌을 다시 씹는 경우가 있는데 껌을 붙이는 장면에서는 폴의 삶에의 의지가 드러난 게 아닐까? (좌중 웃음)
민규동: 사실 이 영화는 한 3일정도 밖에 안 되는 시간을 다루고 있다. 감독이 시적으로 시간을 다루다보니 물리적 시간과는 다른 느낌을 주어서 그런 것 같고, 한편으론 영화 속 두 남녀가 나누는 관계가 너무 깊어서 3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이 점은 우리와 다른 유럽인들의 사랑 방식 땜에 생긴 시차가 아닐까. 껌에 대해서는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만큼 의도적인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감독도 그 아버지도 시인이었던 만큼 어떤 시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붙을 듯 말 듯 붙지 않는 두 남녀의 깨진 세계를 봉합하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근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도 보지 못했다. 베르톨루치는 늘 불가해한 어떤 부분을 열어 놓는 게 영화의 예술적 경지라고 말한다.

관객3: 처음에 나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많은걸 설명하는 것 같다.
민규동: 베르톨루치가 그 그림을 브란도에게 보여주며 이런 고독을 표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표정에서 배우가 이를 의식한 게 느껴지는 듯하다. 또 영화에서 익명성이 무척 중요한데,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뭉개진 초상화, 익명의 얼굴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 얼굴들은 히스테리에 대한 은유이기도하다. 즉, 욕망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부정적 상태가 드러난 이 그림이 인물들의 핵심적인 이미지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 : 백희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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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베르톨루치의 영화 가운데서도 가장 감각적인 영화인 동시에, 말론 브랜도라는 불세출의 배우가 가장 자유롭게 자신의 내면을 표출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거미의 계략>(1970)에서부터 베르톨루치와 함께 작업해온 촬영 감독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거의 회화에 가까운 실험적인 화면이 돋보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말론 브랜도의 즉흥 연기와 스토라로가 그야말로 카메라로 그림을 그리듯 창조해낸 무드로 가득한 파리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경험을 가져다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또한 태어나자마자 온갖 수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탈리아에서 외설죄로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이 법정에 섰을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 약 15년 동안 상영 금지를 당했으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변태적인 포르노 영화라는 악평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외설 시비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당시 베르톨루치 영화 중 최고의 수익을 올렸으며,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와 주인공 말론 브랜도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브랜도는 실제로 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대사를 완전히 뜯어고쳐 즉흥적으로 만들면서 알코올 중독인 부모로 인해 괴로워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반페미니즘 논쟁과 외설 시비에 시달렸던 이 영화는 그러나 저명한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로부터 말론 브랜도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준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아내의 자살로 인해 비탄에 젖은 중년 남자 폴은 우연히 한 임대아파트에서 젊은 아가씨 잔느를 만나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잔느는 영화감독인 약혼자 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폴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든다. 두 사람은 때때로 임대 아파트에서 만나 바깥세상을 잊고 둘 만의 세계에 몰입한다. 그러나 여관을 경영했던 아내가 한 집에 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그녀의 자살의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폴의 상처는 여간해서 치유되지 않는다. 잔느는 서로에 대해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게 하는 폴의 태도에서 심한 소외감을 느끼고 충동적인 관계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지만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성정치학에 몰두했던 베르톨루치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영화인 동시에,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 장 뤽 고다르를 비롯한 누벨바그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주인공 잔느의 약혼자이자 영화감독 톰 역을 맡은 장 피에르 레오는 트뤼포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극 중 역할이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누벨바그 감독들의 이미지를 쉽게 겹쳐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서로 다르지만 베르톨루치는 잔느와 폴의 관계를 종종 잔느와 톰과의 관계와 대비시킨다. 잔느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으려는 톰은 잔느에게 과거에 대한 사실적인 고백을 강요하며, 잔느의 현재 상태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재구성하려 한다. 반면 폴은 잔느에게 어떤 얘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으며, 조작하기 쉬운 현실 대신 완전한 판타지를 택한다. 낯선 남녀의 만남과 도피, 그리고 비극적 결말이라는 점에서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구조와 유사한 면을 보이는 이 영화는, 그러나 말론 브랜도가 보여주는 지극히 감성적인 연기와 영화의 전반을 감싸는 풍부하고 멜랑콜리한 영화음악으로 인해 전혀 다른 감정적 울림을 준다. (최은영_영화평론가)

시네토크
1월 30일 오후 3시30분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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