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없이 건조한 레지스탕스 필름누아르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

 

 

장 피에르 멜빌은 프랑스 영화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볼 때 비평가들이 정의하기 어려운 감독 중 하나이다. 그럴만한 사정은 있다. 미국영화를 추앙했던 누벨바그리언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영화들에 미국의 양식을 이식하는 것을 회피했던 것에 비해 멜빌은 미국식 장르를 프랑스 영화계에 전용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이었다. 멜빌의 노작들은 장르(필름 누아르나 하드보일드 범죄영화)에 대한 페티시즘이 미학의 경지로 승화된 사례를 제공한다. 차갑고 건조한 그의 범죄영화는 냉소주의와 비관주의, 어둠과 연결되는 장르의 특성을 양식화된 표현을 통해 제공(<바다의 침묵> <도박꾼 밥> <사무라이>)했다. 

 

<그림자 군단>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조셉 케셀의 1943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2차 대전 말기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필립 제르비에(리노 벤츄라)가 이끄는 조직의 요원들이 체포와 구금, 고문, 탈출을 반복하는 과정이 별 다른 사건없이 건조하게 묘사된다. 케셀의 소설이 레지스탕스에 대한 것이었다면 멜빌의 영화는 저항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다. 정치적 행위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실존적 양식으로서 저항 행위를 다룸으로써 그는 텍스트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삭제한다.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깔았지만 영화는 범죄 누아르와 스파이 영화를 교배한 형태를 띠고 있다. 게슈타포를 경찰, 레지스탕스들을 범죄조직이나 첩보원으로 바꾼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멜빌은 레지스탕스 스토리(멜빌 자신이 점령기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를 범죄 누아르의 자장 안으로 밀어 넣는다.
 

어떤 장면들은 흡사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스타일에 대한 접근방식, 사운드, 특히 과묵한 인물들의 내면을 진술하는 나레이션은 노골적으로 브레송 풍이다. 극적이나 심리적이기를 거절하고 철저하게 현상적인 기술에 그치는 나레이션을 암송하는 인물들은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삶을 견디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림자 군단>에 만연한 것은 심리적 동기화나 감정을 배제한 냉혹한 묘사, 침묵, 생략이다. 이를테면 펠렉스나 장 프랑소와에게 행해지는 고문의 과정은 생략된다. 필립의 조직원들은 미래가 없을뿐더러 과거도 없다. 필립은 자신이 엔지니어라고 말하지만 직업은 그의 임무와 어떤 연관성도 맺지 않는다. 장르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따라 멜빌은 특정한 방식으로 입고, 말하고, 행동하고, 죽음을 맞는 인간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한다. 따라서 그들이 입는 옷과 중절모, 자동차, 총, 시가, 어둡고 한적한 거리에서의 달리기 따위가 더 중요하다. 

‘저항’이라는 세상의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묘사하는 이 영화가 유일하게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있다는 그것은 ‘죽음’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조직원 마틸드(시몬느 시뇨레)의 처형 장면에서 이런 사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장은 타살도 자살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으로 마틸드의 운명을 단정하고 그를 암살하지만 죽음의 순간 마틸드의 눈빛은 이와 같은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 그녀는 정말 조직이 자신의 명줄을 끊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이 순간 <그림자 군단>은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짊어진 실존의 부조리함을 다룬 영화가 된다.

장병원 /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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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시모닌의 원작소설이 처음 나온 것이 1953년의 일이니, 자크 베케르가 <현금에 손대지 마라>를 영화화한 것은 꽤 재빠른 시도였다. 갈리마르의 ‘세리 누아르’에 실렸던 이 소설은 초판 20만부가 팔리는 인기를 얻었고 유명한 문학상인 되 마고 상(Prix des Deux Magots)을 수상했다. 은퇴를 앞둔 노년의 갱스터가 주인공들이다. 오랜 친구인 막스와 리톤은 마지막 노후를 편하게 보내려 공항에서 금괴를 강탈하는데, 계획과는 달리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정을 너무 과신했던 탓이고, 금괴 강탈에 야심을 보인 눈치 빠른 신흥 갱 안젤로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베케르가 이 소설에 관심을 보였던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두 사내들의 우정과 배신의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 게다가 은퇴를 앞둔 그들의 나이가 중요했다.

트뤼포의 찬사를 빌자면, 이 영화는 쉰을 넘긴 사내들의 우정의 이야기다. 시모닌과 자크 베케르는 쉰을 앞두고 있었고, 주인공인 막스 역의 장 가뱅이나 리톤 역의 르네 다리는 이제 막 쉰을 넘긴 나이였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들 각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사내들의 우정이라 말했지만, 막스와 리톤의 관계는 과장된 정념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과 제스처들의 느슨한 연결로 묘사된다. 금괴의 강탈, 갱들 간에 벌어지는 폭력적 행동과 결과보다는 그들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위험에 처한 리톤이 막스의 아파트에 머무는 장면은 거의 10여 분간 지속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놀라운 순간들이란 고작 그들이 포도주를 따서 잔에 따르고 빵에 치즈를 발라 먹거나 잠에 들기 위해 침대보를 정리하고 양치질을 하고 파자마를 갈아입는 장면들이다. 죽음의 리듬에 가까운 이 순간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할 지경이다. ‘곤충학자’처럼 인물의 행위와 제스처, 디테일에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였던 베케르의 진면모가 이런 느슨한 장면들에서 엿보인다. ‘황혼의 프렌치 누아르’라 부르고 싶은 동시대 장 피에르 멜빌의 <도박꾼 밥>(1956)과 줄스 다신의 <리피피>(1955)와 미적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크 베케르는 전후 프랑스 영화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르였던 프렌치 누아르의 개척자였다. 194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에 명명된 ‘필름 누아르’란 프랑스식 표현은 정작 미국에서는 1950년대를 거치면서 소멸하기 시작하는데, 새롭게 베케르의 손을 거쳐 프랑스에서 생명력을 얻었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는 미국식 필름 누아르를 차용하면서도 프랑스적 기원의 독특성을 체현한 작품이다. 장 가뱅이 연기한 막스는 1950년대 프랑스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는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 전전과 전후 프랑스, 전후 프랑스와 미국의 격돌의 지대에서 고뇌한다. 그가 신흥 갱스터인 안젤로(이후 멜빌의 영화에서 두각을 보인 리노 벤투라가 이 영화로 처음 데뷔했다)와 다툼을 벌이는 것에서 팍스 아메리카로 대변되는 세계질서에의 프랑스식 저항의 흔적이 느껴진다. 장 가뱅은 레지스탕스의 적임자였다. 라스트에서 그가 보여준 몸짓은 친구를 떠나보내고 과거와 작별하는 숭고하고도 엄숙한 의례이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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