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두고 '말의 영화'라 말한다면 이 영화는 그런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물들의 말의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말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방데에 있는 작은 마을의 젊은 사회주의 시장은 공유 녹초지에 거대한 스포츠 문화센터를 만들기 위해 정부의 승인을 얻으려 한다. 환경주의자인 문법 선생은 이 계획을 반대한다. 파리의 저널리스트는 마을에 내려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다. 시장의 딸과 선생의 딸이 친구가 되면서 이야기는 예견치 않은 결말로 향한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7개의 우연에 관한 영화로 '만약... 하지 않는다면'으로 시작한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메르적인 우연이 영화의 전체를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모두에 학교의 교사는 프랑스어 문법에서 상황을 나타낸 조건법의 용도를 가르치는데, 이런 내용에 입각해 르누아르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콩트가 전개된다. 우연을 동반한 조건법은 '만약 사회당의 지지율이 내리지 않는다면', '만약 초원의 버드나무가 긴 세월을 넘기지 못했다면'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우연이란 설정은 영화의 맥락에서 정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로메르의 우연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결정적인 사건처럼 기능하는 것도, 우연히 발생한 과실로 어떤 중요한 미래가 좌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우연은 인과관계의 환상에서 풀어헤쳐진 현재를 제시하는 것에 가깝다. 과거에의 감상이나 미래에의 기대에 종속되기 쉬운 현재를 그 자체로 제시하는 것이 그의 우연인 것이다. 일상을 순수하게 기록하고, 자연의 순수한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우연에 관한 이야기. 로메르는 이러한 현전성의 영화를 멜로드라마적으로 <겨울 이야기>에서 다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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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영화평론가 정성일 감독이 추천한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어느덧 2주차에 접어들었다. 지난 25일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 세 편을 상영했던, 일명 '로메르 데이'였다. 마지막 회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가 상영 후에는 이 영화를 추천했던 정성일 영화평론가 겸 감독과 함께하는 시네토크도 이어졌다. 정성일 감독은 로메르의 영화세계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매우 긴 시간동안 열성적이고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객석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끝까지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정성일(영화감독/영화평론가): 올해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6년째 개근이다. 올해에도 백지수표가 도착해서 매우 기뻤고 어떤 영화를 써 넣을까 생각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편 중 하나이며, 이 영화가 로메르 영화의 정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로메르 영화세계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고, 더불어 이 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을 말씀드리려 한다.

로메르는 1920년 4월 4일 생이다. 영화가 아직 무성영화에 머물러 있던 시절, 장편영화가 막 시작했던 시절에 태어났단 뜻이다.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은 모두 토키영화가 시작된 후에 시작했다. 로메르 영화를 보면서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의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로메르가 그들과 아주 다른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영화를 경유하여 세상의 리듬을 느끼는 방식에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로메르는 2차 대전 당시, 다른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처럼 어린 아이로서 보낸 게 아니다. 10대에서 20대를 통과하는 나이에 전쟁을 겪었고, 자의식을 갖고 고스란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20살에 게슈타포에게 잡혀가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형을 고발하라는 위협을 받기도 했다. 로메르는 이때,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의 변화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로메르는 1948년에 '영화, 공간의 예술'이라는 글을 썼다. 이처럼 로메르는 공간을 통해 영화에 다가갔던 사람이다. 여기서 로메르는 영화 공간에 두 개의 가능성이 앞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오슨 웰즈의 딥 포커스의 공간, 또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갔던 로셀리니의 공간이다. 로메르는 두 개의 공간을 다 활용하고 싶어 했다. 도덕이야기, 희극과 격언, 사계절 이야기 같은 영화들은 로셀리니의 길을 따르며, 70년대 만들어진 시대극들은 웰스의 전통을 따른다. 또한 그는 파울로 우첼로나 엘 그레코 등, 화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1960년대 후반에 네스토르 알멘드로스라는 촬영기사를 만나면서 그와 함께 인상주의 화가들이 해냈었던 것과 같이 영화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로메르를 이끌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독일적인 문화였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은 영화에서 스타일의 혁신을 이야기했다. 로메르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메르는 영화는 스타일이 아니라 테마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고전주의자였던 셈이다. 로메르는 사물을 거기에 배치했을 때, 그것이 주는 가짜스러움을 끔찍하게 혐오했다. 일례로 트뤼포의 영화에서 나오는 눈은 다 가짜 눈이었던데 반해,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가짜 눈이 내린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 로메르는 그 지역을 찍기 3년 전부터 일기예보를 계속 체크했다고 한다. 로메르는 좋은 영화는 어떻게 스타일을 혁신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테마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나온다고 말했다.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테마와 주제를 연결시킬 때, 그에게 핵심은 도덕이라는 문제였다. 자기 영화에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도덕이었다. 반대로 고다르에게 영화는 스타일이고, 스타일이 모든 것이었다. 고다르가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유다. 모든 것에 대한 와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의 세계관과 영화를 분리했을 때, 대부분 그 영화는 사기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직 영화를 만들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밀어붙였을 때, 로메르에게는 결국 도덕이라는 문제로 귀결된 것처럼, 또한 고다르가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감독이라면 자기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원칙이 되는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로메르의 영화를 물으면, 목록이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신기한 것은 로메르의 경우, 상대방이 어떤 영화를 이야기했을 때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으며, 그 사람이 어떤 영화의 취향과 미감을 가진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상 로메르 영화의 테마는 간단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 두 가지의 끝없는 변주이고 반복이다. 차이는 단지 영화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계절에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만나느냐의 문제다. 이 말의 방점은 '만남'에 있다. 이 만남을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느냐에 따라 많은 변주가 발생한다.

로메르의 많은 영화는 현대를 무대로 해서, 모던한 세계에서의 일상생활을 담는다. 모던한 소도구들, 건축물들, 모던한 구조 안에 둘러싸인 세계. 로메르는 실내에 들어가서조차도 망원렌즈를 쓰면서 인물과 배경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밀어붙여 공간의 깊이를 없애고 몽드리앙의 그림처럼 선으로 이뤄진 세계로 화면을 쪼개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인물을 쪼개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가상선을 그어 인물의 이쪽과 저쪽을 자르고 붙이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그 때 로메르는 창문을 걸어 찍으며,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킨다. 로메르가 일상생활을 찍어나가는 방법에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핸드 헬드 카메라에 대한 여타 누벨바그 감독들과 다른 방식의 활용이다. 이는 인류학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장 루슈의 '시네마 베리떼'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루슈가 다큐멘터리에서 한 방법을 로메르는 극영화에서 한 것이다. 로메르가 확보하려 한 것은 카메라의 존재론적인 객관적 인칭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상에 대해 탐구하는 방식으로서의 카메라를 취하는 것이었다.

로메르 영화의 이야기가 고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문제가 발생할 때, 기적이라는 것이 슬쩍 개입되면서 문제가 갑자기 해결된다. 로메르의 영화에는 기적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에서도 '~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문제는 늘 갑자기 해결된다. 이 기적을 즐기면서 세상이란 얼마나 신비로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의 기적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배움은 아마도 칼 드레이어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데트>에서. 또한 로메르에게는 파스칼 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학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내기를 해야 하는가?" 로메르는 그 내기에 영화가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인간학, 그리고 탐구로부터, 기적 같은 내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로메르가 그것을 유머로 긍정으로 비전으로 열어놓는 방식을 택했다면, 반대로 염세와 추락의 방식을 택했던 내기꾼이 있으니 이는 키에슬로프스키다. 의외로 이 두 사람이 편집하는 방법에 있어 상당 부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로메르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마치 그 수많은 영화들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처럼 시기와 순서를 무시하곤 한다. 이는 로메르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스타일을 발전시키거나 형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결정의 선택권을 누구에게 주느냐를 놓고 영화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다. 관객은 게임의 규칙을 아는 순간 이야기가 아닌 프로세스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해 흥미를 잃게 만들어야만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교란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밀고나간다. 로메르 영화에서 깜짝 놀라는 순간은, 이야기를 좇아가면서 이 이야기의 구조로는 절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갑자기 가능해지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게 기적 같은 것이다.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네트워크를,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가능한 현실로 변경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19세기 탐정소설에서 가져온 서사문제의 해결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중 가장 단순한 영화다. 그리고 말이 많다. 이 영화를 이야기 할 때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라는 질문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영화가 시작하면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게 조건법과 종속절을 설명하고, 그 이후의 영화는 모두 조건법, 종속절로 진행이 된다. 사실상 이 영화는 '말'을 찍었다. 존재하는 나무와 존재하지 않는 메디아테크.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나무와 현재에서 미래로 만들어질 준비를 했던 미디어테크 사이의 대립이, 말을 사이에 놓고 진행되고 있다. 즉 진행 중에 놓인 시제에 대해, 말을 가지고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 영화가 공간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시제를 담기 위해 택한 것은 결국 '말'이다. 영화에서 대사가 미장센의 경지에 오르며 시네마틱한 것으로 활용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말의 미장센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만든 것은 스트라브와 위예의 방식이다. 로메르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의 미장센'을 보여주었다. 가장 아름답게. 나는 이 영화가 로메르의 이례적인 영화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 미학의 어떤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화라고 믿는다.

(정리: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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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에릭 로메르의 부음을 접하면서 과거의 추억이 떠올랐다. 2001년 7월 29일. ‘문화학교 서울’ 주최로 아트선재센터 지하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에릭 로메르의 17편의 작품을 상영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했었다. 당시 문화학교서울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기획한 두 번째 회고전이었다. 지금에야 에릭 로메르는 시네마테크에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 작가이지만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여름이야기>가 개봉당시 천명의 관객을 넘기지 못했을 정도로 그는 소수의 시네필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2001년의 회고전은 로메르를 국내에 처음 온전하게 알리는 행사였다.


회고전에 즈음해 로메르의 영화사인 ‘로장주 필름’(로메르는 누벨바그 작가 중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영화사를 설립해 40년 동안 거의 전작을 그곳에서 독립 제작했다)을 통해 그가 직접 서신을 보내왔다. 친필로 쓴 팩스에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저희 모든 작품에 대한 당신들의 오마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 모든 감사와 따뜻한 우정의 표현을 받아주시길’이라는 짤막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당시 17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그의 ‘연작들’을 소개하는 것과 두 편의 시대극인 <O후작 부인>(76)과 <갈로아인 페르스발>(78), 그리고 여전히 미지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93)를 상영하는 것이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적인 우연이 전체에 일관되게 작동하는 영화로 거의 책 한권 분량의 대사가 담긴 가장 ‘수다스런’ 영화다. 이 영화는 지금도 프랑스를 제외하자면 로메르의 영화들 중 전 세계적으로 많이 상영되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로메르의 팬이라면 이 영화를 꼭 봐야만 한다!






그 때의 회고전 이래로 한국에서 로메르의 영화를 필름으로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는 덜 소개되어 있고, 덜 평가되어 있다. 그가 평생을 연애 이야기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연애박사’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특히나 그가 70년대에 만들었던 도시와 건축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80년대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무대가 되어있는 장소들은 사실 70년대에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를테면, <비행사의 아내>의 인조공원이나 <내 친구의 남자친구>의 파리외곽의 도시건축물들이 그러하다. 로메르는 영화가 ‘공간의 예술’이라 여긴 작가였다. 공간이 인물과 맺는 극적관계는 그의 영화에서 풍경과 자연이 그러하듯 언제나 중요하다.


로메르는 대단한 절약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영화가 선택의 예술이자 거절의 예술이라 여긴 사람이다. 영화는 불필요한 것을 없애는 것, 버려야할 부분을 버리는 것이기에 기술적 결함을 제외하자면 그는 놀랍게도 언제나 한 번의 촬영만을 했다고 한다. 그는 배우를 선택할 때 리허설을 하지 않았고, 연기지도를 절대 하지 않았다. 연기는 배우의 몫이라 여겼던 탓이다. 데뷔작을 제외하자면 그는 조감독을 평생 두지 않았고 단지 5-6명의 스태프로 영화를 만들었다. 시네마테크에서 무성영화로 영화를 배웠던 그는 영화가 문학이나 회화처럼 그 역사의 초기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변용해 뛰어난 영화가 나온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가장 근대적인 화가가 결국은 가장 잘 과거의 화가를 이용한 사람인 것처럼, 그는 영화에서도 자연을 앞에 둔 인간의 감동을 가장 웅변적으로 표현한 거장들의 작품을 계승하고자 했다.


로메르는 ‘우연성을 믿는 것, 그것이 나의 영화적 방식이다’라 말한다. 이 발언은 그런데 그가 영화의 전권을 통제하는 작가를 옹호하는 ‘작가주의 정책’의 주창자였음을 감안할 때 미학적인 입장에서 무언가 작은 모순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작가주의는 통상적으로 반우연성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영화의 모든 장면들에는 견고한 의미론적 연결이 존재한다. 히치콕, 프리츠 랑, 스탠리 큐브릭 등 그들만의 고유한 영화적 구조를 구축한 작가들의 경우 그러하다. 로메르는 그러나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설사 인과론적인 연결이 존재할지라도 영화적 사건은 결정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령 그의 단편 옴니버스 영화 <파리의 랑데부>의 한 장면에서 우연히 장터에서 만난 낯선 사내는 남자친구의 새로운 애인에 대해 의혹을 갖는 여주인공 에스테에게 접근해 수작을 부린다. 그는 에스테에게 “항상 예외적인 만남은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확신 했었죠. 가령, 여행 중이나, 휴가의 마지막에 혹은 급한 약속이 있을 때요. 이건 내 불행이기도 하고,  또 행운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대담해지거든요”라 말한다. 에스테는 그에게 싫지는 않은 표정을 보이지만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의 표시로 “그래요, 하지만 당신도 알듯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죠”라 응수한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이런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과 예기치 않은 사건의 전개는 흔히 엿보인다. 가령, <봄이야기>에서는 목걸이의 실종과 우연한 목걸이의 발견이 발생하고 <겨울이야기>에서는 서로 헤어진 두 남녀가 우연히 수년이 지난 후에 버스 안에서 재회하는 사건이, 그리고 <여름이야기>에서는 세 명의 여성과 동일한 약속을 해 궁지에 몰린 남자가 우연히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위기를 모면하는 일이 벌어진다.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연출에 있어서 대단히 위험스런 시도다. 스토리의 공백과 결여, 거대한 빈틈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메르의 영화에서 우연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에게 우연은 생생한 현재, 신비로운 현재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어떤 인과율과 결정론에 좌우되지 않는 현실의 불투명성과 애매함, 즉 무언가를 읽어내기 어려운 불분명함으로 가득한 생생한 현실이 신비롭게 드러난다. 여기서 우연은 마치 어떤 패가 보일지 알지 못하는 포커 판의 카드 패와도 같은 것으로 그 패들은 현실의 표면에 다만 덮여 있을 뿐이다. 아직 보이거나 드러나지 않은 불투명한 패의 향방에 따라 로메르적 사건이 발생한다. 그에게 영화는 마치 거친 바다 속을 항해하는 것과 같다. 진행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해도 능숙하게 가지 못해 순풍대로 항해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다른 예술보다 우연에 좌우된다. 많은 영화작가들은 그러나 반대로 말하곤 했다. 사건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조직해 계획을 세워 우연에 맡기는 것을 멈추어버린다. 로메르는 그러나 일견 부조리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우연에 자신을 내어 놓아 자연의 바람과 흐름대로 영화를 이끌려가게 했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우연은 인물들의 실존적 선택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실존의 양식, 선택들, 거짓된 선택들, 그리고 선택에 대한 의식의 전체이야기가 그의 초기 ‘도덕이야기 시리즈’를 지배하고 이는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것이 영화적인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 것일까? <모드 집에서의 하루 밤>, 그리고 <겨울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파스칼의 ‘내기’는 신이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를 내기할 때 분별 있는 도박사라면 신이 존재한다는 데에 배팅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스칼의 논증은 행위자가 행위를 선택할 때 결단의 결과에 따른 효용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로메르의 선택과 관련한 문제는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미학적, 윤리적, 종교적 인간과 관련해 보다 풍요로워진다. 파스칼에서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는 하나의 매혹적인 사상이 말해주는 것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양자택일이 선택하는 사람의 실존 양식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도덕적 필연성에 의해(선, 올바름), 때로는 물리적 필연성에 의해(사물들의 상태, 상황), 때로는 심리적 필연성에 의해(어떤 것에 대해 가지는 욕망),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한다는 조건 위에서만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키에르케고르를 경유한 로메르의 결론은 이러하다. 선택과 비-선택 사이에서 제기되는 선택이란 우리를 내밀한 심리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외부 세계 저 편에 있는 바깥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게 한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세계와 자아를 다시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로메르의 영화가 지닐 수 있는 고귀한 주제이다. 그런데, 이 바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연, 혹은 은총인가? 여기에 우연의 놀이, 그리고 진정한 선택, 이를 통한 은총의 도래가 있다. 로메르의 유작인 <로맨스>는 이러한 것들의 집대성이었다. 몸과 영혼의 문제, 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문제, 남녀의 사랑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거짓말들, 불멸의 문제 등이 망라되어 있다. 최종적 국면에서 인물들이 누리는 은총은 로메르가 평생을 걸쳐 영화에 담아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메르의 명성에 비해 이런 신비로움은 적게 논의되어 있다. 이 작은 추모전이 로메르의 영화를 되돌아보는 기쁜 기회가 되기를 기원한다.(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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