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은 계약결혼을 통해 미국 시민권을 얻고자 하는 남자 호빈(안성기)과, 그런 남자들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돈을 챙기는 닳고 닳은 여자 제인(장미희)의 욕망이 상호 배치되면서 만들어지는 권력게임의 과정을 좇아간다. 영화의 첫 시작에서부터 우리는 두 인물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에피소드들과 만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더없이 비열하고 사악한 남자와 더없이 냉소적이고 차가운 여자의 쓸쓸하고 황량한 내면을 상대 캐릭터의 눈을 통해 엿보며 연민을 갖게 된다. 이후 제인은 호빈과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호빈이 욕망하는 미래는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함께 하는 미국시민으로서의 삶이다. 애초 돈과 시민권의 교환이라는, 상호 윈윈 게임에서 시작된 이들의 욕망은 공존할 수 없는 충돌로 나아가며 결국 거대한 파멸을 맞는다.


'미국 올 로케'로 이루어진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1983), 그리고 뒤에 만들어진 <젊은 남자>(1994)와 함께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영화들이 대체로 착하고 순수한 성품을 지닌 인물들을 낙천적이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면서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적도의 꽃>에서도 장미희가 연기했던 선영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순수한 면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깊고 푸른 밤>의 제인은, <적도의 꽃>의 선영이 살아 계속된 배신과 상처를 겪으며 인간과 사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린 채 냉소와 이해타산을 철갑처럼 몸에 두르게 된 인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깊고 푸른 밤>에서의 안성기의 모습은 이후 <젊은 남자>에서의 이한(이정재)을 예고한다.

무수한 감독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좌절을 대체로 누아르와 갱스터 장르를 통해 그려왔고, 특히 ‘그린카드’를 둘러싼 갈등들은 대체로 로맨틱코미디를 통해 순화해 표현해왔다. 그러나 배창호 감독이 선택한 장르는 치정극이다. 남녀 간 끈적한 욕망과 배신, 그리고 비루한 삶과 그로 인한 파멸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죽음’은, 한미 FTA 비준이 통과된 현재 또 다른 의미를 곰씹게 한다. 이 ‘치정’을 더없이 설득력 있게 받쳐주고 있는 것이 바로 안성기의 존재다. 차이나타운을 걷는 영화 속 안성기의 이미지는 <택시 드라이버>(1976)의 오리지널 포스터에서 로버트 드니로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젠틀하고 부드러우며 다소 수줍고, 언제나 타에 모범이 되는 안성기가 통상적인 이미지라면, 이 영화에서는 젊고 치명적이며 위험한 안성기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안성기는 놀랍도록 섹시하다.

(by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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