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인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
2011. 2. 7. 14:08ㆍ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 talk
[시네토크] 시네마테크의 선택작 에릭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지난 6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의 옥상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개막식 이후로 꾸준한 입소문을 탄 에릭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행렬이었다. 매진을 기록한 화제작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진득한 발걸음으로 로메르라는 작가와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영화의 자장을 짚어보는 뜻 깊은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런 영화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이 영화에 갖게 되는 의문이고, 동시에 에릭 로메르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이런 영화를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과 거기에 내포된,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일까’라는 존재론적인 의문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어쨌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은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다. 로메르는 <녹색광선>을 만든 이후에 즉흥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자체도 뭔가 일관된 것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전체적인 구성이 굉장히 느슨하다. 제목 또한 수수께끼다. 이 영화에서 모험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의문과 마찬가지로 이런 영화 안에서 영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로메르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은 그리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에릭 로메르 영화의 본성적인 측면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는 영화다.
로메르는 타고난 이야기꾼인데, 그 이야기들이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지 언제나 의문을 갖게 된다.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서 역시, 이 네 가지 에피소드 안에서 사건과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로메르적 사건은 우연에서 발생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무 이유나 설명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미라벨과 역시 그저 시골길을 걸어가던 레네트는 우연히 만나 미라벨의 자전거 바퀴를 함께 고치게 된다.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우연성에 근거하고 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보이는, 소소한 사건들이지만 동시에 이 우연은 부조리할 정도다. 너무도 우연적인 일들이 너무도 쉽게,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은 이런 우연적인 사건에 연결점들을 만들고, 인물들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데 사용된다. 로메르적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드라마틱한 일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물들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그들이 느끼는 바에 대해서, 그들의 관계들에 대해서 토로하는 순간 진정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들이 거의 대부분 지나간 행위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메르적 담화의 핵심은 진행 중인 일에 대한 담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담화는 현재진행 중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 혹은, 앞으로 올 것들의 사건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로메르의 담화는 가장 연애론적인 사건이다. 이미 헤어진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녹색광선>의 전체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메르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갖고 있는 위험성이 있다. 마치 이 영화의 화상이 레네트의 그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며 ‘내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수긍해야 한다’는 듯한 기세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입장을 갖게 될 것 같은 우려가 있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갖고 그것을 견지하는 가운데 편안하게, 끊임없이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것 같다. 각자의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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