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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1세기 작가열전

[비평좌담] 게린의 영화에는 평면성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비평좌담]



“게린의 영화에는 평면성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 21세기 작가열전 Ⅴ : 호세 루이스 게린

유운성, 김성욱 비평대담



“21세기 작가열전”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게린 감독이었다. 9월 15일에는 그의 대표작 <실비아의 도시에서>를 함께 본 후 유운성 영화평론가와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가 게린의 작품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면성은 게린의 영화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는지 둘의 대화를 통해 확인해보자.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호세 루이스 게린은 1960년생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감독들이 몇 명 있다. 한국에는 홍상수, 김기덕 감독이 1960년생이고 페드로 코스타 감독은 59년생,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60년생이다. 그렇게 보면 게린을 신인 감독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10대 때부터 영화를 찍었고 80년대에 공식적으로 데뷔를 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늦게 조명을 받았다.


오늘 함께 본 <실비아의 도시에서>는 <공사 중> 다음에 만들어진 작품인데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림자 열차> 같은 영화도 아니다. <실비아의 도시에서> 전에 만든 에세이풍의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이란 영화가 있다. 포토몽타주처럼 사진들로만 구성한 작품인데 <실비아의 도시에서>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은 이미 그 작품 안에 많이 들어 있다. 특히 카페에서 여러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들이 그렇다.


유운성(영화평론가)│영화를 보러 들어오면서 놀랐는데 2008년과 2009년 전주영화제에서 게린의 영화를 보았던 관객의 숫자를 합한 것보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의 수가 더 많다(웃음). 2000년의 <공사 중> 이후 공식적으로 발표한 영화가 한동안 없다가 2007년에 발표한 영화가 <실비아의 도시에서>이다. 방금 이야기한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이라는 영화는 크리스 마르케의 <라 제떼> 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감독이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찍은 여자와 풍경의 사진들을 몽타주하고 그 사이에 유럽 문학의 텍스트들을 자막으로 넣은 영화다. 짧은 동영상이 하나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 영화 전체가 스틸 사진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가 방금 본 <실비아의 도시에서>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아주 예전에 알던 여인을 찾아 한 남자가 과거의 장소로 온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으니 그때 그 여자는 나이가 들었을 텐데 남자는 계속해서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여자를 찾는다. 정신이 나갔다고 할 수도 있고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성욱│게린의 영화를 보며 심플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자 열차>는 화면만으로도 대단히 아름답게 느껴지는데 <실비아의 도시에서>는 더 심플하게 만들었다. 감독들 중 카페에 앉아 밖을 쳐다보면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가만히 앉아서 바깥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들이 있다. 장 르누아르는 영화감독을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일을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길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뭔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다. 그리고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종일 여자를 쫓아다니고 카페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게린 감독은 무르나우의 영화, 특히 <선라이즈>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그 영화에도 전차가 나오지만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이루는 곳에 전차가 계속 등장한다. 이때 그 전차의 창에 비추어지는 상들이 우리가 영화를 보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게린의 영화가 주는 영화적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다큐와 픽션이 섞인 상태에서 매우 심플한 방식으로 픽션을 진행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것이 영화가 얻고자 하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유운성│게린은 그런 미적인 부분에 대한 감각이 좋은 사람이다. 영화에서 화면을 구성할 때도 정말 많은 신경을 쓴다.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게린의 영화 중 실제로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든 영화가 있다. <어느 아침의 기억>은 게린 감독이 자신의 집 창문 너머에 살았던 한 남자의 삶을 재구성한 영화이다. 어떻게 보면 히치콕의 <이창>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감성은 매우 다르다. 게린은 ‘본다’라는 것에 매혹당한 사람이고, 그것도 직접적으로 보는 것보다 어떤 매개체를 통해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방금 말한 전차의 창문이라든가 벽에 반사되는 그림자, 빛들처럼 반사를 잘 활용한다.


여행영화를 찍을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내가 못 본 풍경, 만나고 싶은 사람, 장소를 찍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게린처럼 나에게 익숙한 것들을 다른 낯선 공간에 갖다놓고 보려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그가 초기에 만든 영화 <이니스프리>는 존 포드의  <아일랜드의 연풍 The Quiet Man>의 실제 배경인 동네를 찾아가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그 동네 사람들 중에 당시 영화를 찍던 때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도 있다. 사적인 영화광으로서의 추억과 공동체에 대한 기록이 결합된 에세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니스프리>는 말이 많은 영화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치 무성영화를 본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을 준다.


게린이 사람의 얼굴을 관찰하는 데 얼마나 능한 감독인지는 아마 <실비아의 도시에서> 같은 영화에서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공사 중> 같은 영화를 보아도 그는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아예 방을 하나 얻어 살면서 그 지역의 사람들을 기록해 간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피하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그런 상황에 놓이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게린은 후자에 가깝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관찰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다. 이런 게 없었다면 <실비아의 도시에서>, <게스트> 같은 작품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성욱│그의 영화를 보며 아름답게 느낀 것 중 하나는 영화에 ‘깊이’의 측면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아까 말했던 반사의 맥락에서 이미지에 표피적인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 그래서 풍경들이 평면적인 느낌이 든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 사람들의 성격이나 개인적 정보 같은 부분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때 낯선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표면적인 모습이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그런 면에서 게린은 기록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여전히 간직한 감독인 것 같다.


유운성│지금 이야기한 ‘평면성’이 게린 영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게린 영화에 그런 순간이 많이 나온다. 여기에 앉아 있는 남자와 저쪽에 앉아 있는 여자가 있을 때 이걸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는 이 사람을 찍고 저 사람을 찍는 것이다. 또는 카메라가 멀리 떨어져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게린은 남자와 유리에 비친 여자의 상을 같이 찍는다. 굳이 특수효과 없이도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평평하게 뒤섞어 버리는 것이다. 영화 속 장면에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찍은 장면도 있다. 거리감을 지우고 전경, 중경, 원경이 하나의 평면 안에 쭉 늘어서 있는 미장센을 만든다.

이러한 평면성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처음에 잠깐 언급했듯이 한 남자가 과거에 만났던 여인을, 그것도 그때 그 모습의 여인을 지금 이곳에서 찾는다. 이것은 이 남자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을 보는, 혹은 영화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게린 영화의 인물들이 상상하는 시간성은 무언가를 한 평면에 늘어놓고 함께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영화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일종의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가 다루는 것은 필름 위에 놓인 사물이며 ‘깊이’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때 역사적인 것이든 공간적인 것이든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은 결국 표면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자 열차>도 필름이라고 하는 더할 나위 없이 유약한 표면을 다루는, 영화에 대한 영화다. 필름 표면의 무언가가 손상되었을 때 그 잔여물을 가지고 어떻게 기억을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영화. 이러한 표피성, 평면성이 게린의 영화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김성욱│취약함에 대한 느낌이 있다. <그림자 열차> 같은 경우 필름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 또는 훼손성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의 디지털 이미지는 지워질 수는 있어도 시간에 따른 훼손성은 없다. 하지만 필름으로 찍은 <실비아의 도시에서> 같은 영화에는 여전히 이런 취약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요나스 메카스와의 <서신교환>을 보며 느낀 것은 게린 감독이 여전히 프레임이나 화면의 구도를 엄격하게 유지하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 엄격함 속에서 장면들을 구성하는 것에 매력이 있다.


유운성│게린의 공식 데뷔작인 <베르타의 동기>에 그런 엄격함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 영화는 게린의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전통적인 의미의 극영화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통제 바깥에서 들어오는 우연들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둔 영화를 만들었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인 <이니스프리>나 우연히 발견한 필름에서 픽션을 구성해 간 <그림자 열차>도 그렇고, <공사 중>은 물론이다. <실비아의 도시에서> 역시 픽션의 인물을 실제 공간으로 데려가 다큐멘터리적 느낌을 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장면은 영화 초반부에 동네의 풍경을 찍으며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사운드를 어우러지게 한 장면이다. 일단 사운드싱크가 좋고, 분명 무성영화 같은 장면인데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 낯설기도 하다.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은 사운드만 뽑아 들으면 실험적인 음악을 듣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영화를 눈을 감고 보고 싶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처럼 사운드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것은 페드로 코스타와 비슷한 점이기도 하다.


김성욱│종업원이 뭔가를 떨어뜨리거나 커피잔이 넘어지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때 이 편집은 시각적인 연결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르게 보면 청각적인 연결이기도 하다. 소리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이야기한 골목길 장면 같은 경우도 자동차가 지나갈 때 차에서 들리는 음악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도 있다. 특정한 인물의 형상을 음향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게린처럼 그가 처한 조건 속에서 영화를 찍는 감독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필립 가렐도 <평범한 연인들>의 경우 자신의 연기과 학생들을 엑스트라로 동원했고, 이 영화의 카페 손님들은 거의 연극학과 학생들이다. <공사 중>도 학생들이 스태프로 3년간 함께 참여했다.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냐에 따라 영화의 형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실비아의 도시에서> 같은 영화는 마티아스 피녜이로처럼 함께할 수 있는 스태프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유운성│감독도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데 <공사 중>은 학생들과 장기간 워크샵을 하듯이 찍은 작품이다. 그 긴 기간 동안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전문적인 스탭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공사 중>은 학생들과만 찍을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그렇게도 할 수 없을 때는 아예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로 돌아간다. <게스트> 같은 경우는 거의 원맨 시네마이다. 해외 영화제에 갈 때마다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을 한 뒤 스페인에 돌아와 자기 방에서 편집을 하는 것이다. 게린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용한 장소와 인력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의 규모를 먼저 생각하고 작업하는 사람이다.



정리│김보희 자원활동가 

사진│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