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칫하는 순간들


이번 “한국다큐멘터리 신작전 : 가족의 뒷모습”에서 상영하는 네 편의 다큐멘터리들은 전부 가족을 소재로 다룬다는 점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는 점이다. 이때 ‘거리’는 카메라와 대상 간의 물리적인 거리, 즉 대상을 롱숏에 담을지 클로즈업에 담을지 고민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심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다큐멘터리가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네 편의 영화는 ‘가족’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런 고민이 특히 도드라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때는 자신의 가족이기 때문에, 남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 때는 남의 가족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들에는 대상에게 다가가다 멈칫하는 순간들이 있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이때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네 편의 영화들에서는 그 멈춤의 순간이 영화와 그들의 삶에 대한 더 깊은 생각을 끌어낸다. 물론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를테면 몸이 불편한 아버지 때문에 아들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것인지(<강선장>), 자식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아버지의 이메일>), 피고석에 선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잔인한 나의, 홈>), 중요한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학교 가는 길>) 등. 우리는 여기에 어떤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즉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극영화라면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며 더 나은 결론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매 순간 그 자리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결과가 켜켜이 쌓이면 하나의 일관된 태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태도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려 한다.

 

 

<강선장> - 일상의 반복


먼저 원호연 감독의 <강선장>을 보자. 어부인 ‘강선장’은 과거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잃었다. 하지만 강선장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바다로 나가 더 열심히 매일 고기를 잡아온다. 그런데 강선장의 사고 이후 원래 야구선수를 지망했던 아들이 진로를 바꿔 아버지를 돕기로 한다. 어쩌면 사고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인물은 강선장이 아니라 그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의 배가 들어오면 잡아온 생선을 나르고,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야구 중계를 본다. 그리고 종종 야구 연습장에 나가 기계가 던지는 공을 친다. 감독과 강선장은 KBS의 <인간극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누구나 <강선장>의 문법과 <인간극장>의 문법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엔 나레이션이 없고 인터뷰도 별로 없다. 웃음이나 눈물 등 감정의 표현도 거의 없다. 단지 이들이 일하는 모습과 일상적인 대사들을 롱숏으로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의 섣부른 개입으로 이들의 삶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보인다. ‘강선장’의 사고나 야구선수를 꿈꿨던 아들의 과거에 대한 정보는 아주 조금만 주어진다. 그때 남는 건 이들의 삶에 접근하는 영화의 조심스러움이다. 강선장이 두 팔로 배와 배 사이를 건너는 것을 처음 보는 관객은 이 풍경이 ‘위태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카메라는 이를 하나의 평범한 일상으로 그리며 필요 이상의 감정 이입을 배제한다. 몇몇 장면에 사용한 음악의 도드라진 사용만이 고개를 잠깐 갸웃거리게 하지만 <강선장>은 타인의 삶을 그리는 다큐멘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의 좋은 예 중 하나를 보여준다.

 

<강선장>


<학교 가는 길> - 담담한 태도


그런 맥락에서 <강선장>과 함께 보면 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는 또 하나의 다큐멘터리는 김민지 감독의 <학교 가는 길>이다. 이 영화는 몽골에서 건너와 한국에 정착한 가족들의 삶을 기록한 영화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장성한 딸들은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아직 어린 아들들은 서툰 한국말을 배우며 학교를 다닌다. 영화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한국에 적응하는지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불법체류자’인 어머니가 갑자기 출입국사무소에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아이들과 인사 나눌 시간도 없이 곧바로 강제 출국을 당하고 만다. 하루아침에 어머니와 아내가 사라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촬영 도중 갑자기 발생한 이 사건 앞에서 영화가 지금까지 지켜온 리듬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아니 처음에 등장했던 운동회 에피소드나 합기도 대회 에피소드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한 걸음 더 물러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촬영 자체를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편집에서 들어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사건 이후 일정 시간을 생략하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가족에게 일어난 극적인 변화를 정면으로 통과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한 방울의 눈물도 담아내지 않는다. 다만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계속 보여줄 뿐이다. 잠에서 막 깬 아이들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담을 정도로 이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던 카메라가 이 사건 이후에도 처음 설정한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태도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감독은 사건 당시 그들을 인터뷰할 수도 있었을 테고, 좀 더 자세한 앞뒤 사정을 기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감독이 방점을 찍는 부분은 극적인 사건을 극적으로 그리는게 아니라 매일 학교로 향하는 아이의 변함없는 뒷모습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강선장>과 함께 다큐멘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는 다큐멘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학교 가는 길>

 

<아버지의 이메일> - 극영화적 연출의 흥미로운 사용


<강선장>과 <학교 가는 길>이 ‘남의 가족’을 영상에 담았다면 <아버지의 이메일>은 감독 자신의 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돌린다.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 딸에게 마흔 세 통의 이메일을 보낸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딸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 이메일엔 뜻밖에도 아버지의 자서전에 가까운 내용이 담겨있다. 십대 시절 가족들을 북쪽에 남겨 두고 남한으로 피난을 온 이야기부터 베트남, 중동 지역을 오고 가며 돈을 벌었던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들. 이 이메일을 기초로 아버지의 삶을 다시 짚어보는 감독의 감정은 혼란에 가깝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감독을 비롯한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크고 작은 원망의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특히 감독의 언니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할 정도이다. 남편을 떠나보낸 어머니나 감독에게서도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영화는 ‘아버지’란 존재를 완전한 타인을 대하듯, 그렇다고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 사이 어디쯤을 애매하게 오고 간다. 감독이 느끼는 혼란과 함께 나 역시 복잡한 생각에 빠질 때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몇 개의 연출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아버지의 이메일>에는 극영화적 연출 장면이 들어있는데, 이를테면 십대 시절 강을 건너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 모습이나 방에서 혼자 술을 먹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이 장면들이 연출의 일관성과 감정의 흐름을 깨는 이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 장면이 어떻게든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기 위한 영화적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즉 아버지와의 심리적, 정서적 거리를 재설정하기 위한 필연적인 장면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복원한 아버지의 인생은 물론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고,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점도 있지만 다큐멘터리의 원칙을 깨면서까지 만든 이 장면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영화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과 감정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이메일>

 


<잔인한 나의, 홈> -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


한편 아오리 감독의 <잔인한 나의, 홈>은 앞의 세 편과 크게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앞의 세 편이 출연자들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면, 또는 가깝게 다가가는 걸 조심스러워 한다면 이 영화의 감독은 아예 처음부터 영화 속에 들어간 채 시작한다. 단적으로 말해 감독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영화가 <잔인한 나의, 홈>이다. 감독은 가족성폭력 피해자인 ‘돌고래’가 재판을 하는 과정을 꼼꼼히 기록할 뿐 아니라 그 재판을 돕는다. 서류 제출 등 이런저런 준비를 도와주며, 증인을 직접 찾아가고, 증언을 꺼리는 친구가 재판에 나올 수 있게 설득까지 한다. 이런 과정은 고스란히 영화에 담겨 중요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잔인한 나의, 홈>은 다큐멘터리가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때 어떤 순간이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영화이다. 이 맥락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감독이 촬영과 돌고래의 행동을 갑자기 중지시키는 순간이다. 하루는 돌고래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으려 하고, 감독은 그 순간 촬영 자체를 멈출 뿐 아니라 돌고래가 더 이상 이야기를 못 하게 한다. 결국 카메라는 어정쩡하게 바닥만 찍고 있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심각해지는 순간 숏은 끊긴다. 그리고 나중에 녹음한 나레이션이 뒤늦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때 돌고래와 아오리가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는 영화에 담기지 않았으니 관객은 그 사정을 알 수 없다. 다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돌고래의 행동을 감독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촬영을 멈추고 돌고래의 행동까지 중지시켰다(또는 돌고래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촬영을 멈추었다). 이 장면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단순히 대상을 ‘기록’하는 차원을 넘어 영화에 기록될 사건 자체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 행동은 옳지 않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찍을 수도 없다는 감독의 판단 하에 ‘연출된’ 이 장면은 카메라와 대상과의 거리를 제로로 만들어 버린다. 멈칫한 후 물러서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안으로 뛰어들어버리기. 다큐멘터리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생각의 틀을 넓혀주는 장면이다. 단지 관찰과 기록만으로는 부족한 순간도 있는 것이다.

 

<잔인한 나의, 홈>

 

 

 

이번에 상영하는 네 편의 영화들은 가족의 뒷모습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는 동시에 어떻게든 나름의 태도를 지키려 할 때 만들어진 그 섬세한 결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가까이 다가가든, 멀리서 바라보든 그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에 카메라가 멈칫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접근 방식, 또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는 그 장면들은 작은 감동을 안겨준다. 이번에 만난 네 명의 감독의 더 많은 고민과 주저의 흔적을 다음 영화에서도 볼 수 있으면 한다.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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