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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과거와의 작별 : 시네마 노보를 넘어서 - <바이 바이 브라질>

[리뷰]과거와의 작별 : 시네마 노보를 넘어서

- 카를로스 디에게스의 <바이 바이 브라질>




카를로스 디에게스는 브라질의 신新영화를 의미하는 60년대 '시네마 노보'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가장 대중적인 감독이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제대로 소개될 기회가 없었다. 2006-2007년에 브라질 영화의 최근작들과 과거의 작품을 소개하는 ‘브라질 영화제’를 개최하긴 했지만, 그때에 이 작가를 소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단 작품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때의 특별전은 주로 60년대 브라질 영화를 대표했던 ‘시네마 노보’를 소개하는 행사로, 안셀무 두아르테의 <산타 바바라의 맹세>(1962), 넬슨 뻬레이라 도스 산토스의 <황폐한 삶>(1963)과 <사랑의 갈구>(1968), 글라우버 로샤의 <검은 신, 하얀 약마>(1964)와 <고뇌하는 땅>(1967), 로게리오 칸젤라의 <레드 라이트 밴디트>, 조아킹 페드로 데 안드라데의 <마꾸나이마>(1969) 등의 작품을 상영했다. 그러니 이번 특별전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과 만날 기회다. 원래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오르페>(1999) 또한 상영할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기회가 보장되지 못했다.


아직 우리들에게 낯선 디에게스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브라질 영화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브라질 영화는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이미 1930년대 이래로 ‘베라 크루즈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양산되고 있었고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서구 영화계에 강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물론, 브라질 영화가 하나의 국민적 영화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50년대 쿠바 혁명의 성공은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탈식민을 부르짖는 민족주의, 민중주의 문화운동을 불러와 브라질에서도 새로운 영화를 주창하는 ‘시네마 노보’의 흐름을 낳게 되었다. 당시 글라우버 로샤는 이 새로운 브라질 영화를 ‘빈곤의 미학’이라 말했다. 굶주리는 자들에게 폭력은 일상적이며, 폭력의 순간은 식민지 개척자들이 식민지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을 드러낸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시네마 노보’ 운동은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솔라나스 등이 주창한 ‘제3영화’론과 더불어 제3세계 민족해방 문화운동은 물론이고 당시 자본주의적 영화를 돌파하는 새로운 시도를 벌였던 장 뤽 고다르를 비롯해 혁명적 영화와 영화의 혁명을 창작으로 실천하려던 서구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새로운 브라질 영화의 선구자는 단연 도스 산토스 감독이었다. 그는 1955년에 만든 <리오 40도>와 1963년작 <황폐한 삶>으로 브라질 영화의 신경향을 주도했다. <리오 40도>에서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는데, 즉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해 그들이 리오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모자이크처럼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작법의 시도는 그가 파리 유학 중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동시대 새로운 영화들과 접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시네마테크에서 많은 영화들을 보았는데, 특히 비스콘티와 로셀리니 등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 깊은 감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전 뮤지컬 영화들에서의 조감독 경험이 그의 영화에 브라질만의 독특한 카니발을 가미한 다양한 요소가 혼재된 영화를 낳게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작품이 시네마 노보의 젊은 주역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리오 40도>는 공개 당시 브라질에서 상영이 금지되어 브라질 전역의 시네클럽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운동이 발생했는데, 그때 시네클럽에는 글라우버 로샤, 카를로스 디에게스 등, 후일 시네마 노보의 주역이 되는 젊은이들이 참여했다. 도스 산토스 감독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러한 관계가 시네마 노보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저예산 제작과 기술적 수준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시네마 노보는 창조의 자유로움과 연결된 젊음의 영화로 참여적인 영화이자 비평적인 영화였다. 글라우버 로샤와 카를로스 디에게스 같은 젊은 감독들은 당시 서유럽의 작가주의를 받아들여 상업적인 영화와의 차별을 시도했다. 글라우버 로샤는 대중영화가 집단적인 담론을 선호한다면, 시네마 노보는 더 개인적인 표현의 형식을 갖고 있으며, 상업영화가 관습적이라면 작가영화는 혁명적이라 말했다. 카를로스 디에게스 또한 시네마 노보가 브라질에서 새로운 영화를 창조한 동일한 세대의 집단으로 시작했다며, 이 집단의 통일성이 “브라질에서 브라질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 비평적 비전을 지닌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중요한 것은 브라질의 현실을 사회적 형식만이 아닌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형식으로 이해하는 시도였다. 1964년에 군부 쿠테타가 돌발하면서 이후 군사정권의 통치와 검열에 맞서 브라질 고유의 민중문화를 강조하는 시네마 노보의 변형이 발생하는데, 이는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에 대항하면서 영화적으로는 픽션, 다큐멘터리에 상관없이 할리우드 영화의 완성적인 ‘웰메이드’를 거부하며 한계적인 상황에서 ‘열대주의’나 ‘카니발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열대주의, 혹은 카니발리즘은 지식인 중심의 영화에서 진정으로 문화적으로, 대중적으로 영화를 제작하려는 기획에서 나왔다. 군사정권의 견고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정치적인 문제를 간접적으로, 종종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해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한편 정치적 억압에 대한 예술적 반응으로서 카니발리즘은 그로테스크, 악취미, 키치 등을 강조하면서 부르주아 사회의 위계와 계급, 성차를 과격하게 전복하고 공식적인 문화적 삶의 규칙과 제한에서 탈피하는 신선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가령, 조아킹 페드로 데 안드라데의 <마꾸나이마>(1969)는 열대림과 도시의 대조로 현대화된 브라질 경제, 브라질의 전통과 식민화의 대립과 긴장을 표현한다. 이는 브라질 경제가 1964년 이후에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통합되는 시기를 표현하고 있다. 감독은 브라질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빈곤과 저발전을 통해 그들의 국민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카니발리즘을 통해 표현한다. 이는 국제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의해 저발전의 브라질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뉴시네마 운동들이 그러하듯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 또한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제작의 변형을 거치게 되는데, 그중 카를로스 디에게스의 영화는 ‘빈곤의 미학’을 넘어서 보다 대중적인 영화를 만드는 새로운 경향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바이 바이 브라질>(1979)은 그런 변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로, ‘카라바나 홀리데이Caravana Rolidei’(발음상 영어인 휴일holiday과 유사하다)라는 유랑극단이 브라질 전역을 돌아다니는 이야기다. 엉터리 마술사, 펠리니의 <길>의 잠파노를 연상케 하는 차력사, 매혹적인 룸바의 여인,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아코디언 연주자 젊은 부부가 있다. 이들은 불모의 북동부 지역에서(피라냐, 마세이오) 아마존의 숲을 가로질러(알타미라, 아마존 고속도로), 그리고 브라질고원 중앙부(브라질리아, 론도니아) 등의 브라질 전역을 돌아다닌다. 로드무비란 일종의 흔적 탐사의 장르이다. 이 영화 역시 유랑을 통해 브라질의 현대화, 식민화, 미국화의 경향의 흔적을 탐사한다(그 과정에서 젊은 부부와 유랑극단의 여인과의 복잡한 연애 사건이 전개된다).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브라질이 다국적화의 여파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이다. 브라질의 밀림지역 또한 개발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동물들의 살육, 원주민들의 물리적 절멸과 문화적 붕괴들과 마주한다. 원주민들의 공동체는 파괴되었고 그들은 이제 라디오를 듣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이중적인 의미에서 브라질과 작별한다(영화의 제목에 있는 ‘bye bye’가 함의하는 바이다). 유랑극단은 오래된 브라질의 전통문화와 연결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60년대 저발전의 시기에 시네마 노보가 추구한 민중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한다. 유랑극단의 마술사는 가령 꿈은 단지 꿈을 꾸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거스르는 것이라며 자신이 모든 브라질 사람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거짓)말한다. 그런데 이 꿈은 이제 변형 중에 있다. 그는 마을에 눈을 내리게 할 수 있다면서 실제로는 버젓이 코코넛 가루를 사람들에게 뿌린다. 그러면서 그는 스위스나 독일, 프랑스 같은 문명화된 전 세계 나라들의 사람들처럼 브라질 사람들도 눈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너스레를 떤다. 가장 미국적이라 할 수 있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와 함께. 마법은 그러므로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글로벌한 미국화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물론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다. 유랑극단의 단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플래시로 불을 비추면서 자신이 텔레파시로 죽은 자들을 볼 수 있다고 (거짓)말한다. 텔레파시라는 특권화된 정신의 소통방식을 그가 거론할 때 민중들은 그 불빛 아래서 하나 둘씩 자신의 사연을 내비친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벌써 2년간 수확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기도도 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기도 했다. 비가 내려달라고 기도도 했다.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치기도 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신은 그럼 어디에 있나?” 그들은 자신이 처한 비극을 토로한다. 다른 이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수 있냐고 묻는다. 이 장면이 마음에 남는 것은 그들이 털어놓는 사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을 비추고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어둠에서 명멸하는 불빛 때문이다. 이 장면은 특별히 시네마라는 장치를 떠올리게 한다.



이와 비슷한 순간들이 영화에 몇 번 보인다. 가령, 유랑극단이 한 마을에 들려 공연을 선전할 때 사람들은 그들의 공연에는 관심이 없고 모두들 시청 앞 광장에 앉아 텔레비전 공연물을 쳐다보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물론이고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미국적인 드라마라는 점에서 문화적 식민주의의 폐해를 보여준다. 리오와 상파울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지방의 다양한 오락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작고 허름한 영화관을 운영하는 한 노인이 영화관의 사라짐에 대해 근심하는 다음 장면에서 보다 분명하게 표현된다. 그는 16미리 필름으로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거의 없고, 어린아이들만이 들어와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그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던 좋은 시절을 떠올린다. 시네마 노보의 좋은 시절(실제로는 군사독재의 억압의 시절이었지만)을 살았던 작가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제목처럼 이 영화는 브라질과 작별을 고하는 영화다. 앞서 말했듯 이는 이중적이다. 디에게스는 자본주의적인 발전의 꿈, 혹은 민중적인 저항의 꿈 둘 다와 작별을 시도한다. 시네마 노보의 카니발리즘의 시기에 아마존의 원주민들은 브라질의 정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반식민적 저항의 대표자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브라질의 상황은 어떠한가? 민중의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적 식민주의란 무엇인가? 예술과 대중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문제는 여전하다. 하지만 무언가 변화해야만 한다.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면서도 미래로의 낙관적인 여행을 시도하는 것. 그리하여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게 된다. “21세기의 브라질 민중들에게.”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