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평론가의 선택 - 리바이어던 Leviathan

2012│87min│프랑스, 영국, 미국│Color│DCP│15세 관람가

연출│루시엔 카스탱-테일러, 베레나 파라벨 Lucien Castain-Taylor, Verena Paravel

“이 영화를 보며 영화가 세상의 이미지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영화를 경유하여 세상의 표면, 세상의 이미지, 세상의 시간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뤼미에르의 순간



먼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친구들 영화제에서 영화 상영작을 위임받을 때는 언제나 ‘백지수표’였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 혹은 이미 보았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때로는 그 감흥을 함께 나누고 싶은 영화를 선택하였다. 그런데 올해에는 조건이 있었다. 나는 ‘크리틱스 초이스’에 추천을 요청받았는데 (다른 어떤 섹션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거기 이런 단서가 달렸다. “지난 10년간의 세계 영화 중에서 한국에 배급되지 않은, 하지만 현재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생각을 비평가로서 불러온 영화를 선정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초이스를 함께하는 동료들의 명단을 나는 알지 못한다.)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의 명단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생각에 21세기 영화의 한 가지 경향은 다큐멘터리에 대한/의한 새로운 질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예민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3D 혹은 IMAX 화면, ATMOS 사운드. 좀 더 확장해서 영화와 디지털 미디어 사이의 경계로 밀고 나아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당신 손바닥 위의 영화관, 스마트폰. 약간 방향을 선회한 다음 인스톨레이션의 자리에서 영화를 바라볼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영화의 경계가 확장되는 것인지, 아니면 희미해지는 것인지 아직 단언하지 못하겠다. 다만 무언가 이 상황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불만족스럽다고? 그렇다. 영화가 자기의 존재론을 미디어에 기대기 시작할 때 거기 머물던 (고다르가 말하던) 어떤 신비로운 순간이 증발되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인상이라고 말했다. 인상주의로부터 일백 년이 되어가는 지금, 영화는 지금 그 자신의 인상주의 시대를 통과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때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았다. 나의 기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영화는 이제까지 내가 본 영화들과 달랐다. 마치 거기서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영화를 만들던 것만 같은 순간을 느껴 보았다. 카메라를 들고 거기에 가서 기다린 다음 그것을 찍는 가장 단순한 행위. 하지만 가장 신비로운 순간. 잠시 동안 파리에 머물렀을 때 우연찮게도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소장하고 있는 뤼미에르 영화 전작을 상영하고 있었다. 물론 그 영화들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하루 종일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행사 마지막 날 알았다) 나는 이 영화들이 걸작들의 목록이라고 믿는다. 거기에는 내가 영화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가장 신비한 비밀이 머물고 있었다. 그런 다음 영화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내가 영화에 대해서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가 항상 뤼미에르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저 멈춰 서 있는 카메라 안에서 활동하는 세계의 일부. 아녜스 바르다는 갑자기 뤼미에르 형제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하나의 태도를 영화 안으로 다시 끌고 들어왔다. 그건 시작이었다. 차례로 그 뒤를 잇는 영화들이 나타났다.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 카스탱-테일러가 카메라를 거대한 배에 설치한 <리바이어던>은 그중에서 오랫동안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주의 깊게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 두 사람이 연출했다는 표현 대신 설치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어획을 하기 위해 바다로 나간 배에 그들의 카메라를 여러 대 설치했다. 고프로GoPro 카메라는 즉시 내 관심을 끌었다. 단 하나의 렌즈만을 허락하는 이 카메라는 마치 물고기들이 보는 것처럼 초광각 와이드 렌즈의 시선으로 배의 구석 구석을 들여다 보았다. 흔히 어안魚眼 렌즈라고 불리는 시선. 이 카메라는 간단한 하우징만으로 방수 효과가 있으며 때로 물속에 들어가도 견뎌냈다. 이 배의 어부들은 수없이 물고기를 포획한 다음 아무 감정도 없이 무표정하게 그들의 뼈와 살을 발라내고 그런 다음 피비린내가 느껴질 만큼 많은 양을 바다에 버렸다. 그러면 수백 마리의 갈매기 떼들이 몰려와 그것을 먹는다. 카메라는 그것을 지켜본다. 거기에는 어떤 감정도, 판단도, 설명도 없다. 그저 이미지가 거기에 머물고 우리는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이것은 시네마인가? 물론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영화보다도 맹렬하게 내게 영화의 원래의 존재론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어떤 의도도 없이, 정말 뤼미에르 형제들처럼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거기에 세우고, 그 앞에 놓여진 세상을 찍고, 그런 다음 집에 돌아오고 싶다. 거기 세상이 있을 것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