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5. 16:32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영화읽기] 프리츠 랑의 <이유없는 의심>
소설을 쓰는 톰 캐럿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오스틴 스펜서의 딸 수전과 약혼한 사이다. 사형 집행에 톰과 함께 입회한 어느 날, 오스틴 스펜서는 언론의 영향력을 업고 사형 제도의 잔인함을 고발하려는 극단적인 구상을 떠올린다. 무고한 죄수가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 직전에 밝혀진다면 사형찬성론자와 사법당국도 개심하리라는 것.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과연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무고한 죄수 역할을 할 것인가이다. 오스틴은 미래의 사위 톰 개럿에게 증거를 위조하여 패티 그레이의 살인범으로 잡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결백함을 밝히라고 권유한다. 톰 개럿은 처음엔 내켜하지 않지만 종국에는 수전과의 결혼을 미루면서까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실행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획은 그들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고, 오스틴 스펜서의 의도 ‘너머’에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유없는 의심>의 프랑스 개봉 제목이다)’이 존재한다.
<이유없는 의심>은 살인과 범죄를 소구하는 언론을 소재로 하여 <도시가 잠든 사이에>, <블루 가디니아>와 함께 프리츠 랑의 ‘언론 누아르 3부작’으로도 불린다. 프리츠 랑이 미국에 건너와 처음 만든 작품 <분노>처럼, 영화는 필부가 억울한 혐의를 쓴 채 부조리한 거대 제도와 싸우는 이야기의 변주처럼 시작한다. 프리츠 랑이 이러한 소재를 계속 변주하는 것의 심인을 그의 사생활에서 찾은 호사가들도 많았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인이 ‘자살’이었던 첫 아내의 살인범으로 그가 여러 해 동안 수사선상에 올랐던 사실, 그녀가 욕실에서 자살하는 동안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될 작가 테아 폰 하르보우와 살롱에 있었다는 그의 알리바이 등. 반세기도 넘은 거장의 과거사는 선정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보다는 그 사건들을 겪은 프리츠 랑이 바라본 세계가 띄는 혹독한 차가움을 이해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장 뤽 고다르 등 50년 대 말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진으로 활약했던 누벨바그 감독들이 재발견하기까지 이 작품은 대중의 냉대와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이유없는 의심>은 미국에 도착한 직후, 아마도 일말의 희망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었을 랑이 두 번째로 만들었던 <한번뿐인 삶>과 같은 형태를 지녔으나 다른 색조를 지닌 짝패와도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비관적인 정조 속에서도 죄 없이 아름다운 연인들을 그리던 <한번뿐인 삶>과 관객들을 배심원 취급하며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살인과 계략, 그 너머의 소름끼치는 진실을 재현하는 이 영화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심연이 흐르는지. (신은실_시네마디지털서울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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