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4. 17:00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영화읽기]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얻는다.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감동에 젖기도 하며,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삶의 가치관이나 기억을 환기시키는 영화는 더욱 특별한 작품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존 포드의 가장 빼어난 드라마중 하나인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는 거기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보편적이고 진실해서, 누구에게라도 그러한 특별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고전적 형식미의 완결성과 전형적인 가족멜로드라마적인 이야기만으로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그려낸다.
영화는 웨일즈의 한 탄광촌에서 살아가는 모건 가족의 이야기다. 막내인 휴는 자신 인생의 정점에서 유년기의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나의 계곡은 얼마나 푸르렀던가!”라는 회상. 집안에 위치하던 카메라는 유연하게 창밖으로 이동하며 그 회상을 표현한다. 그곳은 계곡의 정점에 탄광이 있고, 거기서부터 내려오는 길가를 따라 집들이 정렬해 있는 작고 소박한 마을이다. 모건 가족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모두 탄광에 다닌다. 일이 끝나면 일당을 받고, 다 같이 집에 와 몸을 씻으며 저녁식사를 한다.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평범한 가정이다. 휴는 “아버지는 우리들의 머리였고, 어머니는 심장이었다”라고 회상한다.
그런데 이 가족의 조화로운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몇몇 갈등이 발생한다. 탄광회사 측의 횡포(임금 삭감)로 인한 파업을 바라보는 견해차로 가족의 분열이 일고, 어머니와 휴에게 닥친 사고로 한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는 일도 생긴다. 마을의 목사와 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문제도 있다. 두 아들이 탄광에서 해고되어 미국으로 떠나면서 가족의 분열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건 가족의 친구이지만, 쉽사리 소문에 휩쓸리며 때로는 적대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갈등들은 오래지 않아 무마된다. 휴가 한동안 걷지 못하다가 푸른 꽃밭에서 목사의 도움으로 다시 걷기 시작할 때가 그 시작이다. 롱쇼트로 찍힌 이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연의 아름다움, 이에 더해 인간성의 따스한 품속에서 모든 갈등은 치유된다. 휴가 유년시절의 회상을 끝내는 결정적 사건도 회한과 고통보다는 애상감이 더 크다. 가족은 언제나 거기에 굳건하게 자리한다. 휴의 기억 속에서는 가족들과 아버지에게서 배운 삶의 가치들이 평생 뿌리처럼 자라왔던 것이다. 그 계곡의 푸름과 함께.
이 영화에 담긴 ‘가족과 집의 소중함’이라는 가치는 쉽사리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또한 영화 속 따스한 감정들은 현실성 없는 낭만주의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실제로 고용자와 노동조합의 문제, 계급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같은 갈등의 틈들은 크게 부각되지 않은 채 너무 쉽게 봉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모든 현실성의 문제를 넘어서는 숭고한 지점에 있다. 삶의 순수한 진실이 담겼기 때문이다. 포드는 삶의 가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지극히 영화적인 직관만으로, 이 영화를 진실함의 심원한 영역에 올려놓는다. 어떠한 표현적인 혹은 스타일적인 기교도 필요치 않다. 그의 영화는 그 자체로 살아 숨쉰다.
영화는 애상에 젖어 말한다.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도 삶은 그 자체로 흘러왔으며, 인생의 정점에서 돌이켜 볼 때 그 시절은 더없이 아름다웠다고. 이는 아일랜드 이민 2세대인 포드가 가진 ‘아일랜드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린 시절에 보았다면 평생 어떠한 유년의 기억처럼 그리움으로 남을 수 있고, 나이가 지긋이 든 후에 본다면 삶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영화를 ‘고전’이라고 부른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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