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대>는 존 포드 감독이 유일하게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당연히 인디언을 몰살하는 야만적인 백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미국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남북으로 갈린 미국인들끼리의 살육의 순간을 전후한 사연만이 존재한다. 필모그래피의 후기로 갈수록 수정주의 서부극을 선보였던 존 포드의 작품 성향을 감안하면 변화의 시점에 놓인 영화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기병대>는 ‘말을 탄 병사 The Horse Soldiers'라는 영문제목처럼 서부극의 컨벤션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쟁물에 가깝다.


주요 배경으로 설정된 빅스버그는 남북전쟁 당시 가장 긴박했던 전투 장소로 손꼽힌다. 그 중 마지막 기습을 다루는 <기병대>는 실제인물 벤저민 그리어슨 대령을 모델로 한 존 말로위 대령(존 웨인)을 중심에 놓고 적진 후방으로 접근해 남쪽으로 향하는 북부군의 행보를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말로위 대령은 전투에 부정적인 캔들 소령(윌리엄 홀든)과 충돌하고 남부군을 지지하는 여인 한나(콘스탄스 타워스)와 이념의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문제의 전투가 터지면서 캔들, 한나와 대립각을 세우던 말로위 대령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남북의 대결인 것처럼 존 포드는 <기병대>를 온갖 것의 충돌로 가져간다. 미국의 실제 역사가 충돌로 이뤄진 것처럼 전투 개시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말로위와 캔들의 충돌, 말로위와 한나 사이에 벌어지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맞섬, 그리고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 북부의 군인과 남부 소년병의 격돌까지, (타란티노는 군인이 소년병의 볼기짝을 때리는 장면을 <킬빌>에서 인용했다!) 심지어 존 포드는 서부극의 도상(Icon)이라고 할 만한 존 웨인과 장르를 가리지 않는 윌리엄 홀든의 동반 캐스팅을 통해 이 영화가 가진 의도를 노골화한다.


이는 백인의 역사를 옹호하기 위해 가져갔던 존 포드의 초기 서부극과는 현저하게 변모한 것이었다. 나와 너의 이분법을 벗어나 우리라고 여겼던 백인들끼리의 대립을 다루는 <기병대>는 존 포드의 초기영화에 거부감을 느꼈던 이들이라면 그의 작품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기 충분하다. 물론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처럼 백인의 야만적인 침탈을 반성하고 더 나아가 백인 서부극의 신화를 해체하는 형태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역사 제대로 바라보기라는 측면에서 혼돈의 전쟁물로 변모한 수정주의로 보기에 충분한 것이다.

영화 외적으로 볼 때도 <기병대>는 감독의 비전과 대중의 취향 사이에서 충돌한 경우다. 영화의 제작사는 존 포드의 예술적 비전을 존중하며 존 웨인과 윌리엄 홀든에게 각각의 출연료 외에도 입장 수익의 20%를 별도 지불하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제작사는 윌리엄 홀든 대신 클라크 게이블을 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흥행에 참패하며 재앙을 맞았다. 보수적이기로 악명 높은 미국 관객에게 미국 역사의 그림자를 정면에서 응시하는 <기병대>는 불편했던 것이다.

(by 허남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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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한창인 지난 2월 3일, 존 포드의 <기병대> 상영 후에 오승욱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있었다. 오승욱 감독은 <기병대>는 불균질함에서 오는 매력이 있는 영화이며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영화라고 생각해서 추천했다고 밝혔다. 오승욱 감독과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흥미로운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오승욱(영화감독) : 여기 오신 분들 모두 추운 날씨에 이런 이상한 영화를 봤다니 황당하셨을 것이다. 저는 <기병대>가 존 포드 영화중에서 매우 이상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느낌은 별로 못 받았고, 존 포드 영화중에서 많이 불균질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초등학교 때 TV에서 봤는데 존 웨인이 윌리엄 홀덴과 두어 번 결투 비슷한 걸 하다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끝나버려서 재미없게 봤다(웃음). 그 땐 사사건건 간섭하는 윌리엄 홀덴도 너무 싫었고, 존 웨인도 싫었다. 이 둘이 싸우는데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몰랐다. 존 포드랑 존 웨인을 싫어하게 된 계기가 <기병대>랑 <아파치 요새>다. <아파치 요새>는 인디언을 학살하는 영화라고 생각했고, <기병대>는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되게 재미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할리우드 웨스턴은 절대 안 본다는 결심을 하게 된 영화들이 <기병대>랑 <아파치 요새>다. 그런데 5, 6년 전에 <기병대>를 DVD로 다시 봤다. 그때 이 영화가 굉장히 이상하면서도 매력적인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불균질함이 있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는 소년병들과 존 웨인의 기병대가 싸우려는 장면이다. 어떤 병사가 늙은 교장부터 쏴 버리겠다고 총을 들이댔을 때, 존 웨인이 그 총을 치면서 ‘도망갈 수밖에 없지’ 하면서 도망가는 그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기병대>를 존 포드가 만든 영화중에서 잘 만든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에피소드가 쭉 나열되어 있는데 너무 감상적이기도 하고, 자기가 얘기하는 걸 교훈처럼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인간이 전쟁을 한다는 건 일종의 광기인데 이 광기에서도 인간들에게 그래도 지켜야 될 예의가 있지 않느냐, 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오늘 큰 화면으로 보니까 클라이맥스 장면이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소년병 육군 사관학교에서 교장이 소년들을 데리고 있고, 소년들이 떠난 다음에 기도하는 모습과 그 다음에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서, 존 포드가 했던 이야기가 ‘상식’ 이거라는 생각을 했다. 상식이 안 통하는 곳에서 상식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 그건 아마도 존 포드가 50년대 초 매카시즘을 겪고 나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어둠과 밀접하게 관계있지 않을까. 존 포드는 아일랜드 사람이고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멋진 정신과 가치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프런티어 정신과 청교도적인 정신들에 대한 자부심과 명예가 대단했다. 존 웨인을 통해 그 정신들을 보여주다가, 한국전쟁과 매카시즘을 겪으면서 존 포드는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 같다. 아까 <기병대>에 불균질함이 있다고 했는데, 영화를 못 만들어서 생기는 불균질함은 매혹적이지 않다. 내가 매혹적이라고 생각하는 불균질함은 균형이 맞지 않지만 감독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집어넣다보니까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감독이 이 시대 얘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뭔가가 좀 균질하지 않게 되는 영화들이 매혹적이다. 모든 감독들은 영화를 균질하게 만들고 싶겠지만, 자신이 얘기하고자 싶은 것들이 많아서 불균질함이 나오는 게 매력적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저도 비슷하게 이 영화를 어릴 때 TV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다시 보면서는, 이 영화가 남북전쟁을 다룬 영화임에도 인상적인 순간들이 전쟁을 회피하려고 할 때 나온다고 생각했다. 존 웨인이 보여준 행동들이 특별하다. 울퉁불퉁하고 불균질하다고 말했을 때, 그것들 대부분은 존 웨인의 행동들에서 나온다. 발로 걷어차고, 때리고, 집어던지는 신경질적인 행동들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는 음악 또한 인상적이다. 그 음악은 알다시피 <수색자>의 테마 음악이다. 라스트 신의 구도가 <수색자>의 시작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존 웨인과 제임스 스튜어트가 한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설정이 이 영화의 존 웨인과 윌리엄 홀덴과 겹쳐지는 면이 있어, <기병대>가 <수색자>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중간에 위치한 것 같은 인상이다. 존 포드의 다른 영화와 비교할 때, <기병대>는 약간 심심한 것 같지만 기저에 깔려 있는 이상한 장면들이나 느낌들을 얘기해본다면 그 점이 독특하게 와 닿는다.


오승욱 :
얼마나 많은 관객이 들었건 간에 마초들을 다루는 영화들의 시효는 5~10년이라고 생각한다. 5~10년이 지나면 그 마초들의 행동은 다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마초영화는 잘못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더티 해리>에서 이스트우드의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 패러디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존 포드 영화에서 남성들에 대해 영웅시되는 것들이 있다. 존 포드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많지 않은데, <기병대>에서 매우 인상적인 클로즈업이 있다. 흑인들 사이로 북군이 지나갈 때 남군이 총으로 쏘는 게 북군이 아니라, 북군 속에 있는 한나 헌터의 흑인 하녀를 죽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여자가 죽어갈 때 존 웨인의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이건 진짜 클로즈업인데 존 웨인이 한나 헌터에게 ‘나 때문에 죽은 것 같다’면서 사과를 한다. 이때 <기병대>는 존 웨인이라는 인간의 성장영화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봤다.

존 웨인은 떠나기 전에 부상병이 생기면 놓고 갈 거라고 했던 사람인데 마지막엔 그가 부상병이 된다. 영화 초반부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많이 바뀌어가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신념이 침해를 받으니까 신경질을 부린다. 존 웨인의 히스테리가 최고조에 달하는 건 남군이 기차에서 내리는데, 정규군이 아니라서 일방적인 학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다. 윌리엄 홀덴과 마지막에 악수하는 것도 이들의 우정이 쌓여서가 아닌 것 같다. 부대 지휘관으로서 처음 등장했을 때는 용맹했었는데, 이제는 다른 지휘관이 되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존 포드가 미국에 대한 환희의 송가를 떠들었던 감독에서 50년대를 거치고 난 후 어두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감독으로 변한 것이 존 웨인을 통해 보이는 것 같다.



김성욱: <기병대>가 이전의 존 포드 영화와 다른 것은 풍경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작부를 장식하는 모뉴먼트 밸리나 대자연의 풍경이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고, 타이틀 시퀀스 이후 곧바로 실내로 들어가 버린다. 마지막은 집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통념적인 방식의 존 포드 세계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완전 실내극에 가까운 서부극인 걸 보면, <기병대>는 그 중간정도에 위치한 것 같다. 대자연이 갖고 있는 미국적 서부에 있어서의 포용적 세계들이 사라지고, 그걸 대체하는 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조기이다. 자연의 포괄적인 세계를 대신하는 것이 규범, 법, 국가로서의 깃발들이다. 남북전쟁과 관련해 노예 해방이라든지 주제적인 면이 부각되는 것도 없다. 흑인이 묘사되는 장면은 크게 두 번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말씀하신 하녀의 죽음의 순간이다. 그 장면은 아무런 부연설명도 없이 갑자기 전개된다. 또 하나가 영화 초반에 기병대가 진군해가는 과정에서 흑인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분노의 포도>에서 빈민촌을 방문하는 순간의 장면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존 포드의 세계를 이루던 것들이 사라지고, 그것을 대체해나가는 국가적 규범, 혹은 가정이라는 두 세계가 구축되고 거기서 존 웨인은 최종적으로 도피하는 듯하다. 그런 식의 설정이 이 영화를 독특하게 보이게 만든다.


오승욱 :
<아파치 요새>도 기병대들이 임무 수행을 다루는데, 거기에서의 클로즈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중 하나는 존 웨인이 헨리 폰다의 죽음에 경외심을 보내고 우리도 죽을 차례라고 말할 때의 클로즈업이다. 반면 <기병대>에서는 남성의 의지를 표상할 때 클로즈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과하는 장면에서 클로즈업이 나온다는 게 특별하다. 기존의 존 포드 영화에서 많이 생각이 바뀐 영화다. 마초 남성들의 굳건한 남성성이 계속 영화 속에서 조롱당하고 있다. 존 웨인을 통해서 히스테리를 표출하는데 히스테리라는 게 여성들의 행동에서 나온 것 아닌가. 또한 남성성을 표방한다는 것은 남성성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서 치장한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치장들이 조금씩 조롱되고 있다. 마초 영화들은 그들 행동의 많은 부분이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초적인 것을 표방하는 소설도 항상 여성성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만들어야 하니까 할 수밖에 없었던 타협들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존 포드는 전쟁은 이래야만 하는가, 라고 질문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바로 그게 존 포드의 위대한 점 아닐까. 어떤 상황이 되었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상식을 놓지 않으려 존 웨인은 안간힘을 쓰는데, 이 영화의 감동적인 부분이 그런 것에서 나온다.


정리: 송은경(에디터)
사진: 임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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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의 영화에서 남북전쟁은 자주 다루어진 주제는 아니었다. <수색자>가 이산 에드워드(존 웨인)가 남북전쟁에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듯, 존 포드에게 남북전쟁은 배경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기병대>에서 상황은 다르다. 이 영화는 벤자민 그리어슨이라는 실존 인물이 이끈 북부 기병대의 기습 공격을 실화로 해 미국의 남북전쟁을 전면적으로 다룬다. 북부의 기병대는 남부의 물자 공급을 담당하고 있는 뉴튼 역을 파괴하러 적진을 향해 떠난다. 존 웨인은 기병대를 이끄는 말로우 대령을, 윌리엄 홀든은 군의관 켄들 소령을 연기한다.


<기병대>는 정통 서부 영화는 아니지만, 잠재되어 있던 웨스턴의 요소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대립과 충돌의 구조는 더 흥미로워진다. 고전적 웨스턴이 동부 대 서부의 대립이었다면, <기병대>는 북부와 남부의 충돌을 그린다. 그리고 북부 내에서는 말로우 대령과 켄들 소령 사이에서 기병대의 환자를 두고 갈등이 발생한다. 기병대에 뒤늦게 합류하는 켄들 소령은 서부에 도착한 동부의 사나이처럼 보인다. 여기에다 북부 군인들이 뉴튼 역을 향하다 들리는 해나 헌터의 집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 대립이 그려진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군인을 맞이하는 여성과 짙은 파란색 군복을 입은 북부군 사이에서는 짙은 성적인 긴장감이 떠돈다. 또한 남부의 소년 생도들과 성인 남자들로 이루어진 북부의 기병대, 흑인과 백인, 국회의원 출신 군인과 철도 노동자 출신 군인 등, <기병대>에는 실로 다양한 대립이 등장한다.


이 모든 갈등은 실타래처럼 꼬이고 얽혀있다. 가령 북부 군인들이 남부의 탈영병들을 만났을 때 말로우 대령과 켄들 소령의 태도는 흑인 꼬마를 만난 이전과는 반대로 뒤집어진다. 말로우와 켄들의 갈등이 정점에 달하여 난투극을 벌일 때 남부의 소년병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차마 소년들에게 총을 겨눌 수 없어 도주한다. 또한 북부의 기병대가 길을 잃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은 남부의 목사인데, 그는 이전에 늪지를 통해 노예들을 탈출시킨 이력이 있다. 켄들 소령은 남부 군인과 함께 과거 인디언을 사냥했던 이력이 있고, 인디언들이 치료하던 방식으로 북부 군인들을 치료한다. 영화 내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도 선과 악의 단순한 대립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기병대>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는 영화는 아니다.


그런 점으로 태그 갤러거는 존 포드에 관한 그의 책에서 <기병대>의 마지막 장면을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엔딩이라고 표현한다. 이전까지 기병대가 북부의 기병대를 보여준 것이었다면 마지막은 남부 기병대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제목처럼 정신없이 달려온 <기병대>는 정적인 오두막에서 끝을 맺는다. 이제까지 고정적으로 유지해 온 것들을 마지막에서도 전복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야말로 포드의 웨스턴처럼 <기병대>가 갖춘 미덕일 것이다. (송은경 | 에디터)

1.14(토) 17:00
2.3 (금)  18:30 상영 후 오승욱 감독의 시네토크 
2.15(수)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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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이 한창인 지난 8월 7일 오후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피닉스>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두 번째 시간이 이어졌다. ‘로버트 알드리치, 남성적 허세와 유희’를 주제로 열린 이 날 강좌에 강사는 오승욱 감독이 자리하였고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함께 진행하며 흥미로운 대담을 펼쳤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진행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맡았다. 남성 영화에 대한 애호와 <피닉스>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앞 다투어 이야기하며 열띤 대화의 장을 펼친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올해 초에도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 <북극의 제왕>을 추천해서 상영했고 <피닉스>도 함께 추천해주셨지만 당시에는 상영하지 못했다. 대신 여름에 <피닉스>가 걸맞을 것 같아 이번에 틀게 되었다. 오승욱 감독을 소개한다. 말씀하신 대로 정말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보셨는지?
오승욱(영화감독): AFKN에서 봤고, 김산이라는 만화가가 있는데 이걸 ‘불사조 날아오르다’라는 제목으로 만화화하기도 했다. 주인공 소년이 헹글라이더를 만들어서 탈출하는 것으로 나온다.

김성욱: 영화는 남성의 몰락을 얘기하고 있다.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하는 것과 사막이라는 공간이 흥미로웠는데 어떠셨는지?
오승욱: ‘남성의 허세와 유희’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60년대 중반 이후 알드리치의 영화는 50년대 영화와 다르게 ‘남성들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남성을 얘기하는 미국 영화감독이 둘 있다. 물론 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남성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감독들도 있다. 하워드 혹스와 존 포드가 대표적인데 존 포드는 남성들의 얘기를 할 때 그들의 존엄성을 얘기한다. 그는 결정적인 클로즈업을 한두 번 밖에 안 쓴다. 남성이 윤리적 결단을 내렸을 때 그 존엄성에 대한 존경을 담으려 한다. 한편 하워드 혹스는 주인공들의 관계 속에서 남성의 섬세한 면을 다룬다.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담아낸다. 50년대까지 미국영화의 이러한 남성상을 샘 페킨파와 로버트 알드리치가 바꿔놓는다.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클로즈업은 부조종사인 리처드 아덴보로가 기장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싸우면서 무식함을 지적할 때 쓰인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알드리치의 남성상에 방점을 찍는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알드리치는 남성으로서 버텨왔던 세계가 무너질 때 그 남성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 것 같다. 페킨파의 경우 남자를 아름답게 보여줄 때는 남성들이 제정신이라면 도망가야 하는데 무언가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 죽으러 갈 때다. 용기 있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는 게 아니라 바보짓하는 남성들에게 만가를 바친다고 해야 할까. 알드리치와 페킨파는 그 이전과 다르게 남성들의 비애를 담았던 것 같다.

김성욱:
이 남성들만이 등장하는 영화에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후반부에 신기루처럼 여자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다리를 부상당했던 친구가 부인 사진 한 장을 떨어뜨리고 죽는 장면과 더불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부인 사진 가졌던 사람이 죽고 중사는 여자의 신기루에 사로잡히고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던 사람과 기타 치던 사람은 초반에 죽어버린다. 이런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승욱: 남성 얘기를 하다보면 여성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남성 영화들에는 남성이 여성을 학대한 것에 대한 죄의식과 그 여성이 언제든지 자신을 박살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그것이 남성의 동력이 되고 폭발한다. 레오네와 페킨파, 마틴 스콜세지의 70~90년대 영화가 그렇다. 여성에 대한 죄의식과 두려움을 다룬 이들 작품들에서 여성이 부재하더라도 그 여성의 귀기라는 것이 남성들을 계속 괴롭힌다.

김성욱:
몇몇 배우들은 그들의 내력과 영화가 연동되는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어릴 때 히틀러 소년단이었고 2차 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영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2차 대전 때 비행기 조종사로 활약했고 초반에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 나오다가 나중에 안소니 만이나 히치콕의 영화에서 굉장히 히스테릭한 인물로 등장한다. 또 젊은 세대인 크루거를 보면서 “앞일을 이끌어가겠지만 미래를 못 볼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중사는 이런 식의 재난 영화에선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캐릭터다. 내러티브의 도덕적 논리로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중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지만 대위를 아버지로서 바라봤다는 느낌이 든다. 어머니가 생일에 팬케이크을 만들어줄 때 아버지는 자기를 군대에 보냈다. 그래서 중사가 대위 앞에서 가부장성에 대한 반항을 표출한다고 보았다. 군인으로서는 비겁하지만, 아버지에 반항하는 아들의 입장에선 강한 모습이다. 속 내용은 결국 자기 죽기 싫다는 건데, 다른 한편으론 ‘그 때는 반항 못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오승욱:
50년대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남성을 얘기할 때 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얘기한다. 60년대 들어서 알드리치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없다. 아들도 없다. 알드리치도 자기 아들을 플레이보이 보는 배우로 출연시켜서 곧바로 죽이지 않나. (웃음) 아버지 아들 손자 이 얘기는 60년대 남성을 다룬 영화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알드리치나 페킨파에서 남성들의 관계는 일 때문에 혹은 싸움 때문에 전장에서 맺는 관계이다. 횡적인 관계다. 70년대에 보수로 돌아선 영화가 <대부>이다. 코폴라는 아버지 세대를 복원한다. 관계 속에서 남자를 다루는 것이 진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아버지 없고 아들한테 물려주는 것 없고 자기들끼리 놀다가 자기들끼리 폭사하는 것이 <대부>나 폰다 가족들이 찍은 <황금 연못>보다 인상적이다. 알드리치의 이 영화도 그런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이다. 허세라고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온갖 허세가 총출동한다. 대표적인 것이 ‘괜찮아 잘 될 거야’ 식이다. (웃음) 위기를 위트 있게 표현한다. 리처드 아덴보로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싸우는 장면이 있다. 서로 삐지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아 루... 루... 미안해’ 하면서 후회하고, 루는 축 처진 어깨로 가고 있고, 그 다음 혼자 있는 아덴보로한테 스튜어트가 가서 아무도 안 웃을 농담 하면 서로 용서하는. 이 영화는 그런 것의 총집합이다. 지금 봐서는 비웃음 밖에 안 된다. 싸우면 그 다음날 안 보지 않나. 상처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진 않지 않나. 알드리치 영화에선 둘이 힘을 합쳐서 가야하니까 그렇게 한 거고 또 그런 식의 화해 직후에 안 좋은 일들이 터진다. 서푼짜리 위안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없는 것을 곳곳에 배치한 게 좋았다. 특히 영화 다 끝날 때 와서야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을 하디 크루거가 모형 비행기 만들던 사람이라는 말로 다 무너뜨려버린다. 노동자들도 비웃음거리로 그려지는데, 남성이 노동으로 존재한다는 가치가 일차 대전 후부터 서서히 없어져버렸다. 남성 노동의 가치가 당대 미국에서 의심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이천 년대 들어서 계속 해서 의심받고 있지 않나. 자본가와 서비스하는 사람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흙을 파내고 엎는 것과 무엇을 만드는 것에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당시 미국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린 그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다. 다들 구조되고 나서도 특별히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중사는 구속될 것이고 하디 크루거는 앞으로 모형 비행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고 여태 그나마 가치 있었던 노동 역시 우스갯거리가 되어버렸다. 영화 마지막에 그들은 살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운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물을 향해 찾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놈들 술 처먹었냐’고 한다. 알드리치가 생각하는 갱생을 해봤자 술주정뱅이로 살거나 요행히도 육백 미터 가서 살고, 그러고 나서도 물 먹는 것 말고 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 드러난다. 동시에 감동적이기도 하고.


김성욱: 그 부분을 보고 유희적으로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탈출 후를 과장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들이 큰일이지만 하나의 장난을 치렀던 정도의 수준으로 담백하게 뽑아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생존자들이 특이한 것 같다. 하디 크루거는 새로운 것 창조해낼 수 잇는 사람이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과거의 전투 조종사인데 리처드 아덴보로는 이 둘을 엄마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또 다른 한 명, 회계사는 신실한 종교심이 있는데 자비심이 없다. 두 명의 건달 같은 노동자들은 돈도 제대로 못 받고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대위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탈영병에 가까운 중사가 살아남는다. 거기에다 조그만 하천 같은 것에도 기뻐하는 그 정도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알드리치식의 미국의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다고 본다.
오승욱: 이후의 영화 <더티 더즌(1967)>을 봐도 정상인이 하나도 없다. 미국이라는 가치가 진짜 옳았는지 모르겠지만 원래는 프런티어 정신, 청교도 정신, 남자의 명예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상 깊었던 것이 대위가 죽는 장면이었다. 다른 영화에선 그들의 죽음에 값진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다리를 절어 쓸데없기 때문에 놔둔 낙타만 있고 그것을 향해 제임스 스튜어트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무덤에 묻어주지도 않고. 어네스트 보그나인도 막노동으로 쓰이지만 쓸모없어지자 버려진다. 왜 버려졌는지 이유도 모르고 버려지고, 이 사회에 대해서 뭔가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고장 나서 버려진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다, 남자로 산 것에 프라이드를 가지는 것이 별 가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남성의 명예, 프라이드, 관계 돈독하기 위해 농담 던지고 받아주고 서로 웃고 떠드는 것은 사막의 일이 벌어지고 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자기들의 가치를 다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들의 영화는 많지 않다. 몰락해가는 남성의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소니 만도 보여주고는 있지만 남성들을 아예 집단으로 절망하게 만들고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정리: 최용혁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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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걸작선’ 마지막 날인 지난 12월 5일 <황야의 결투> 상영 후에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이어졌다. ‘존 포드 웨스턴의 풍경’이란 제목으로 펼쳐진 이날 강연은 웨스턴의 원형적인 특징들이 잘 드러난 <황야의 결투>를 중심으로 존 포드 서부극에 대한 전반적인 경향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방금 보신 영화는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웨스턴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고전 웨스턴의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 웨스턴의 원형적인 특징들과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이 가장 적절하게 융합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굉장히 남성적인 웨스턴이긴 하지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가장 적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TV나 비디오로 워낙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영화인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다른 느낌을 얻게 되었던 것은 2000년대 초반 파리에서였다. 그 때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했던 장면은 와이어트 어프가 동생의 묘비에 적힌 글귀를 읽으며 ‘내가 이 마을을 떠날 때쯤이면 너 같은 어린아이도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워낙 어두운 장면이라 비디오 화면으로 봤을 때는 공간과 배경의 느낌이 와 닿지 않았는데 필름으로 보니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여기에는 첫 번째로 무덤과 폐허라는 죽음의 이미지들이 있고, 어두운 저녁이라는 시간적 측면과, 어린 아이가 삶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어갔다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18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가 개봉된 것은 1946년이다. 포드를 포함해 영화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2차 대전 참전 이후에 첫 번째로 찍은 영화이다. 그래서 무덤 장면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다짐은 1946년이라는 특정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와이어트 어프의 동생 같은 어린 아이들이 가장 많이 죽게 되는 건 전쟁 때문이고, 그래서 그 장면에는 전쟁의 느낌이 깊게 배어있다. 전쟁과 가족적 복수가 연결되면서 가족, 공동체, 국가,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툼스톤이라는 대지와 배경까지, 이 네 가지가 결합되는 것이 묘지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한다.

묘지 장면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다짐은 몇 가지의 상황들을 떠올리게 하며, 이 영화의 의문은 거기에 있다. 은퇴한 보안관이었던 와이어트 어프가 다시 보안관이 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두 번째로는 그 복수를 좀 더 공적인 차원해서 진행하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서부개척기의 낭만적인 이야기로 해석하지만, 전후라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보안관이 다시 총을 든다는 설정이 중요하다. 이 영화 이후에 굉장히 많은 영화들 안에서 은퇴한 보안관, 군인, 형사가 다시 총을 들게 된다는 설정이 있었다. 최근의 예로 <그랜 토리노>, 조금 되돌아가자면 <더티 해리> 같은 영화들이 있다. 50년대에도 이런 영화들이 많다. <하이 눈>이나 <리오 브라보> 등이 그렇다. 떠났던 보안관이 다시 돌아와서 악당과 결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등장한다. 이처럼 전후 웨스턴에서는 총을 다시 든다는 설정이 갖는 중요성이 있다. 1946년이라는 상황에서 보자면,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왜 다시 총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툼스톤이 처음 소개되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와이어트 어프는 ‘뭐 이런 마을이 다 있냐’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이곳은 한마디로 질서가 없는 마을이다. 이 무질서함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것이 술에 취해 횡포를 부리는 인디언이다. 실제로 와이어트 어프에 대한 여러 가지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이 인디언 일화라고 한다. 와이어트 어프를 다룬 이전의 영화들에서는 대부분 실질적인 총격전으로 이 부분을 설정했으나, 포드는 와이어트 어프가 인디언을 끌고 나오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첫 번째로 와이어트 어프가 갖고 있는 굉장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표현하고 있는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서부극과는 달리 인디언과의 격돌을 다루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마을 공동체가 혼란에 빠져있는 것은 내부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며, 영화에서도 인디언과의 격돌이나 그 위협에 의한 마을의 공포가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디언을 추방하는 것은 내부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조치이다. 이 영화는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언제나 충돌적인 이중성을 갖고 있는데, 문명과 야만, 남성과 여성, 외부와 내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부적인 이중성을 갖고 있다. 더 이상 내부와 외부 간의 충돌이라는 이중화가 아니라 내부에서의 이중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총격전이나 결투도 두 번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가장 먼저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클랜튼 일가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반부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와이어트 어프와 닥 할리데이의 격돌이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포드가 중점을 둔 것은 클랜튼이 아니다. 포드가 그려내는 무질서함과 법적인 안정성의 부재는 사실 모두 닥 할리데이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영화의 초반에서도 와이어트 어프와 닥 할리데이의 격돌은 이중권력적 양상을 취하게 된다. 툼스톤의 정의를 위해 와이어트 어프가 보안관 뱃지를 달고 나타났지만, 닥 할리데이는 마을의 어두운 부분에 자신이 행사하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와이어트 어프를 견제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헨리 폰다가 맡은 와이어트 어프의 캐릭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분노의 포도>나 <청년 링컨>에서의 캐릭터를 떠올리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에 나오는 폰다의 이미지다. 이 영화에서 와이어트 어프는 클랜튼과 싸우기 위해 내부적인 연합전선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45년부터 50년대에 이르는 미국 영화들이 가장 중요하게 설정했던 것은 내부의 충돌적인 적들을 어떻게 배제 혹은 통합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보자면 냉전 구도 안에서 발생한 질문이었고, 영화적으로 보자면 더 이상 국가적인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가족과 같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충돌들을 어떻게 포섭해나가느냐 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전형적인 웨스턴은 외부의 적들과 격돌해가면서 내부의 공동체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보자면 교회 건립식의 무도회 장면이 그런 면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동부에서 온 클레멘타인과 서부를 떠돌아다니던 와이어트 어프, 이 두 이방인을 춤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다음 장면에서 닥 할리데이가 클레멘타인에게 화를 내는 것은 클레멘타인이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가 클레멘타인과 와이어트 어프를 환영하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더 이상 툼스톤이라는 마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할리데이와 와이어트 어프는 더블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나는 여전히 서부적인 가치와 윤리와 양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고, 또 하나는 동부에서 문명화된 가치를 갖고 서부에 들어왔지만, 서부라는 세계 안에서 이미 퇴락해버린 인물이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 클레멘타인이다. 그녀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연결된 인물이다. 할리데이가 과거에 버리고 떠난 여자이고, 와이어트 어프가 미래에 다시 만날 여자이다. 그래서 그녀는 중심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My darling Clementine>이라는 이 영화의 원제를 눈여겨 볼 수 있다.


말씀드렸듯 포드가 이 영화에서 그리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내부적 충돌의 문제다. 6,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정치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웨스턴은 정치영화의 한 틀이었다.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라는 영역 내에서 웨스턴은 미국적인 사회 질서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전후 아메리칸 시네마를 분석했던 사람들의 공통적 견해는, 웨스턴을 포함해 4, 50년대 급격하게 변화되는 미국영화들에서 내부적인 충돌을 어떻게 담아내고 극복해 가느냐 하는 문제가 공통적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정치적 질서는 3, 40년대를 거치며 많이 변화했다고 한다. 30년대, 그리고 40년대 초반까지 진보진영의 인사들에게 가장 큰 원칙은 대중주의였으며 그 무렵에는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 개인주의를 주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반전되어 보수진영에서 대중주의를, 진보진영에서 개인주의를 외치게 되었다. 이는 영화에도 똑같이 반영되었다. 그래서 50년대 영화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구분할 때 가장 큰 틀은 개인주의를 강조하느냐, 아니면 공동체를 강조하느냐 하는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굉장히 보수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진보적 부분도 내포하고 있는 애매한 영화다. 툼스톤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아니라 할리데이로부터 비롯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굉장히 보수적인 영화로 보는 사람들은 할리데이를 동부에서 온 진보적인 인물로 해석한다. 그와 대조되는 와이어트 어프는 과거의 가치를 체현하는 보수적인 영웅이다.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극단적인 우파성을 갖고 있는 클랜튼이다. 정치적 노선으로 보자면 진보와 보수와 극우가 툼스톤이라는 마을에 동시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포드는 보수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진보를 포섭해나가는 과정에서 극우와 격돌을 벌이게 된다는 설정을 만들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할리데이와 와이어트 어프 간의 결합은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체현하는 사람들의 연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대를 바라보고 있는 포드의 정치적 시선이 이 영화에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와이어트 어프가 집합적인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의미에서 보자면 와이어트 어프의 행보는 개인적 복수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라스트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왜 서부사나이는 마을을 떠나는가. 이 질문은 모든 웨스턴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질문이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나 <역마차>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특정한 대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모호함의 가치로 끝맺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포드가 다음에 만들었던 <아파치 요새>에서 드러나는 서부세계의 몰락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강조된다. 달리 말하자면 와이어트 어프는 다시 돌아오기에는 너무 많은 트라우마, 즉 동생의 죽음이나 닥 할리데이의 죽음 등을 안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전적 웨스턴의 원형으로 이 영화를 이야기하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오히려 이 영화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은 고전적 웨스턴이 궤멸되고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이 영화 초반의 묘지장면에서 드러나는 어둡고 절망적이고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존 포드의 웨스턴 안에서 하나의 매개적인 영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긍정적이지만, <아파치 요새>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나 <수색자>에서 드러나는 비관적인 느낌 역시 이어지고 있다. 보통 존 포드 영화를 이야기 할 때, 노스텔지어적인 영화라기보다는 프론티어의 개방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 영화로 해석하는데, 이 영화는 훨씬 더 비관적인 것 같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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