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의 세 번째 만남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마지막 날 극장을 찾은 손님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었다. 지난 2월 21일(화), 기요시 감독은 <크리피>를 관객들과 함께 본 후 시네토크 시간을 가졌다. 기요시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건 이번이 세 번째이다. 지난 소격동 시절에도, 낙원동 시절에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던 기요시 감독은 빠른 시간 내에 서울아트시네마의 새로운 전용관에서 ‘네 번째 만남’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구로사와 기요시(감독) <크리피>를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하다. <크리피>는 정말 꺼림칙한 영화다. 원작 소설이 있는 이야기인데, ‘이사를 온 전직 형사가 찾던 범인이 옆집 남자다’라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서 만들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든 사이코 스릴러 드라마라서 찍으면서도 매우 즐거웠다.

정지연(평론가) 감독님도 말씀하셨듯이, 이전에는 주로 창작 시나리오로 작업을 하셨는데 <크리피>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본 후에 원작을 찾아봤더니 원작의 내용이 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원작을 각색하면서 어떠한 기준으로 스토리와 캐릭터를 정리, 재창조하셨는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원작 소설의 이야기는 굉장히 복잡하다. 영화로 구현한 부분은 원작 소설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원작의 후반부에는 형사와 범인 이외에도 굉장히 많은 인물이 나온다. 그러면서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을 과감히 생략했다. 과거를 그리면 분량이 배 이상 늘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 자체도 힘들다. 글로 쓴다면 간단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 원작 소설에서는 범인 니시노와 형사 다카쿠라의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배우들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배우도 찾아야 한다. 초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라면 적당히 아역배우를 쓰면 되지만, 고등학생 시절을 연기할 닮은 배우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생략했다.

정지연 영화 만들기의 경제학이 중요하게 작동한 것 같다. <크리피>를 보면서 <큐어>가 떠올랐다. 특히 주인공의 캐릭터나 이야기의 구조가 그러하다. <큐어>의 형사는 아내 때문에 상처가 많았다. <크리피>의 주인공 역시 겉으로는 아내와 다정해 보이지만 실상은 거의 깊은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

통상적인 범죄 스릴러라면 범인을 잡아 불안감을 없애고 정상성을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할 테지만 감독님의 영화는 정상성을 복구하는 것보다 추격자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더 집중한다. 원작에 전혀 없는 내용 중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오프닝에서 다카쿠라가 오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실패하는 부분이다. 그 마음의 상처 때문에 주인공의 자존감이 추락한다. 원작에는 전혀 없는 이 성격을 추가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내 영화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것 같다. 나는 이제까지 무서운 영화를 여러 편 찍었다. 그 대부분은 유령이 나오는 영화였다. 이렇게 순수한 사이코 스릴러를 찍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 <큐어> 이후 거의 20년 만의 일이다. 너무 오래간만에 찍는 사이코 스릴러이기 때문에 <큐어>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사이코 스릴러 장르를 찍을 수 있어 가슴이 벅찬 상태였고, 때문에 <큐어>와 다르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프로듀서가 먼저 읽고 추천한 것이다. 찾아 헤매던 범인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장소가 옆집이기 때문에 영화 자체가 조밀해진다. 출연하는 배우도 적어지고, 따라서 예산도 줄일 수 있게 된다. 이런 컴팩트한 상황에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후반부를 대부분 생략하긴 했지만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원작의 그대로다.

원작과 내용이 달라진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미 영화를 보면서 눈치 채신 분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다카쿠라 형사 자체가 마음에 빈틈이 있는 사람이다. 그 빈틈이 어쩌면 악인인 니시노보다 다카쿠라에게 더 큰 결함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니시노는 악랄한 괴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악인 니시노에게 대항해야 할 형사가 점차 악으로 변해가는 이야기에 서스펜스가 가득하다고 느껴졌다. 이 부분을 영화로 형상화해보고 싶었다.

정지연 <큐어>에서 야쿠쇼 고지가 마미야와 닮아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로사와 기요시 사실 형사가 범인을 잡는 이야기는 매우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 형사라는 ‘직업’ 자체의 결함 때문에 범인의 체포가 늦춰지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원래 수사는 제대로 진행하면 범인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니시노라는 범인은 좀처럼 체포되지 않고 범행의 진상도 밝혀지지 않는다. 왜 그런지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 도달한 결론 중 하나가 형사라는 직업 이전에 인간 자체가 가진 약점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범인이 그 약점을 능숙하게 잘 파고들기 때문에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을 종합해서 만든 영화가 <크리피>다.

정지연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유령영화와 범죄영화를 막론하고 감독님만의 인장이 있다. 가령 흔들리는 커텐, 실내에 쳐진 비닐 등의 이미지들이 그렇다. <크리피>에도 니시노의 집에 비닐이 많이 붙어 있다. 특히나 감독님의 기운을 느낀 순간 중 하나가 오프닝 신이다. 취조를 끝낸 다카쿠라가 후배와 이야기를 나눌 때 후경에서 문이 저절로 열린다. 사실 문이 저렇게 열릴 이유가 없다. 이건 감독님 특유의 유령적인 장면이다. 이 밖에도 영화를 잘 떠올려보면 문이 유령처럼 열리는 순간이 몇 번 반복된다. 주인공이 6년 전 사건이 벌어졌던 집에 도달했을 때도 문이 저절로 열리고, 아내가 니시노의 집에 갔을 때도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니시노가 등장한다. 물론 다른 영화에서도 유령 같은 문이 있지만 감독님의 영화에서 문이 열린다는 건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보통의 영화에서 문이 열리는 건 ‘환영(歡迎)’의 순간이라면, 감독님의 영화에서 문이 열리는 순간은 불온한 순간이다. 이 역시 원작에도 없는 내용인데 어떻게 구상하신 것인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너무 여러 번 그런 장면을 찍어서 부끄럽다(웃음). 나도 문이 저절로 열리는 장면을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문이 열린다는 것, 그러면서 이전까지 안보이던 광경이 스크린에 보인다는 것은 중요하다. 영화는 사각으로 구획된 세계만 볼 수 있지만 관객은 그 세계 저편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으면서 영화를 본다. 그렇다면 스크린에 비치지 않은 세계는 사실 카메라가 살짝만 움직여도 보이게 된다. 문이 열리는 것 역시, 문이 열림으로써 우리가 그전에는 보지 못한 다른 세계가 보인다. 이런 것들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문이 저절로 열리는 장면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찍을 때는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태프가 숨어 문을 밀거나, 실 같은 것으로 당겨야 한다. 실제로 찍으려고 하면 굉장히 거추장스럽다. 스태프들도 문이 제대로 열리길 바라면서 긴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이 저절로 열리는 장면은 현장에서 스탭들의 마음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장면이기도 하다(웃음).

정지연 예전에 감독님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인터뷰 주제는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의 존재론이었다. 왜 자꾸 유령의 세계를 묘사하냐고 물었더니, 영화 자체가 픽션과 리얼리티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문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설명한 것처럼, ‘열린다’는 것이 감독님의 영화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문이 열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 중 하나는 접촉의 순간이다. <크리피> 역시 이상하면서도 에로틱한 장면이 하나 있다. 터널에서 니시노가 야스코에게 악수를 청하는 장면이다. 니시노가 야스코의 손을 잡고 “우리 집에 꼭 오세요”라고 말하는데 이 장면이 굉장히 이상하다. 비단 이 영화뿐 아니라 감독님의 영화에서 접촉의 순간은 좋은 느낌은 아니다. <밝은 미래>에서는 오다기리 조가 해파리를 만지려고 하는 순간에 아사노 타다노부가 “만지지 마”라고 하고, <카리스마>에서도 나무에 다가가는 주인공에게 환청처럼 만지지 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에게 접촉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크리피>에서 다카쿠라의 뒤편으로 아내가 손을 잡는 순간도 애정의 순간이 아닌 주사를 놓는 장면이다. 감독님의 영화에서 만진다는 것이 왜 이렇게 위험한 순간으로 그려지는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내 영화를 상세히 보신 것 같다. 내 영화 속 만진다는 행위에는 특별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느낌 없이 내 영화에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건 아마 내가 일본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양의 경우는 인사의 표시로 악수를 하고, 프랑스에서는 뺨에 키스를 하는데 이것은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일상생활에서 일본인이 서로 접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연스레 내 영화에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 이런 이유도 있다. 손의 연기라고 할 수 있는데, 서양인의 경우에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손의 제스처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하지만 일본인은 일상생활에서 손짓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찍을 때도 손을 화면에 넣을 필요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일본의 경우는 다들 얼굴만 거의 화면에 넣고 그 밖의 것은 넣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얼굴 표정만으로 오케이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카메라를 뒤로 빼는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만약 손까지 넣으면 손을 비추기 위해 카메라도 빼야 하고, 배경도 신경 써야 하는 등 화면에 여러 가지가 담기게 된다. 손짓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지연 감독님 영화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하다. 이 영화에는 집과 취조실, 강의실 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물리적 공간을 배치하는 것에 대한 선택의 원칙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영화를 빨리 찍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콘티를 미리 정해놓는지, 아니면 현장에서 직관적인 판단으로 숏을 설정하는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이 질문들은 내 영화를 관통하는 본질에 걸쳐 있기 때문에 대답이 길어질 것 같다. 가능한 간단히 대답하자면, 내 영화에서 공간의 선택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렇지만 실제로 각본을 쓰는 단계에서는 공간을 거의 설정하지 않는다. 간략하게 마을, 방, 실내 정도로 쓸 뿐 구체적으로 어떤 마을이며 어떤 실내인지는 쓰지 않는다. 하지만 로케이션 헌팅을 나가면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딱 이곳이다’라는 느낌이 오는 장소가 있다. 아마 여기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 것 같다. 거의 직감적으로 장소를 고른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카메라를 어디에 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위치에 카메라를 놓았을 때 각본 그대로의 무대가 될 것 같은 장소가 있다. 분위기나 화각이 적합할 때가 그렇다. 그러나 이때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조금만 움직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보이지 않던 통로가 보이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플러스 알파’가 있는 장소가 내가 생각하는 최적의 장소다. 이 플러스 알파의 유무로 장소를 정하고 카메라의 위치를 선택하면 배우가 그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생각이 대략적으로 잡힌다. 배우의 위치나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배우가 이동하는 동선 등이 점차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카메라의 위치와 배우의 포지션이 결정되는 것에 따라서 작업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콘티를 만들거나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쓰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스태프에게 카메라의 위치를 설명하고 배우에게 동선을 설명하는 등의 주문만 한다.

영화를 찍을 때 실제로 배우를 그 장소에 넣어보면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경우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 카메라와 배우를 배치해서 더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도 있다. 이것이 영화 현장에서의 스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계획을 세웠다가 그것이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 굉장히 빈번하다. 이런 의미에서 현장에서의 자유로움만큼은 언제나 유지하고 싶다.

정지연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물리적으로 설정된 세트 공간 외에도 화면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흥미롭게 사용한다. 가령 <크리피>의 오프닝이 그러하다. 다카쿠라가 취조를 할 때 범인이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경사에게 가서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범인의 그 행위를 보여줄 것 같은데 카메라는 계속해서 다카쿠라를 찍는다. 다카쿠라는 이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행위는 화면 바깥에서 벌어진다.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원칙이 있는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다. 실제로 내 영화에는 범행 현장의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나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기계음 등이 많이 들린다. 현장에서도 스태프들에게 현장의 독특한 소리들을 녹음해 달라고 부탁한다. 당장 그 영화에서 쓰지는 않더라도 언젠가 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내는 소리도 좋아한다. 가령 카메라 뒤에서 숨을 참고 있던 스태프가 본인도 모르게 내는 기침소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 혹은 이동차가 움직이다 덜컹하는 소리 등이 그렇다. 이런 소리들은 일반적인 현장에서는 삭제되지만 나는 이런 소리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영화 대부분에서 그런 소리들을 사용한다.



관객 1 <도쿄 소나타>를 보고 감독님이 만든 <우주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전철이 지나갈 때 집 내부에서 번쩍이는 빛들이 그러하다. <도쿄 소나타>와 <우주 전쟁>이 감독님께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도쿄 소나타>는 <우주 전쟁>과 <폭력의 역사>(데이빗 크로넨버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도쿄 소나타>에는 장남이 갑자기 미군에 입대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설정은 <우주 전쟁>에서 오빠 역을 맡은 인물이 갑자기 입대를 하는 장면에 영향을 받았다. <폭력의 역사>에서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아버지가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면 표면적으로 가족의 질서가 회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가족이 정말 제대로 회복이 되었나 하는 의문이 있었다. <우주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혼을 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보스턴에서 기적적으로 재결합하지만 앞으로 이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도쿄 소나타>도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관객 2 오프닝 크레딧이 인상 깊었다. 배우들의 이름은 철창 사이로 정확히 들어가지만 감독님의 이름은 창살을 가로질러 나온다. 본인이 이 세계의 창조자로서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느껴졌다.

구로사와 기요시 오프닝 크레딧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인은 대부분 이름이 네 글자인데, 내 이름은 세 글자라서 그런 것 같다. 주연 배우들의 이름은 네 글자로 그 공간에 예쁘게 들어간 반면 내 이름은 세 글자라서 그렇게 들어갔다(웃음).

관객 3 니시노가 자유의지를 말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분명 주사를 투여해서 피해자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상황인데 그는 계속해서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원작 이전에 일본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기타큐슈 일가족 감금 살인사건’이다. 실제로 일곱 명이나 되는 가족들끼리 서로 죽인 사건으로, 그 사건에서도 범인이 일종의 약물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의 자유를 빼앗고 스스로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서 희생자들에게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서 희생자들이 서로 죽이게 조종하는 것이다. 아직도 재판 중이고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다. 실제로 범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지인이 공판을 직접 보고 와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범인이 실제로 굉장히 웃긴 사람이었다고 한다. 니시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재판장에서 범인이 말을 할 때마다 방청객들이 폭소했다는 것이다. 이 범인에게 니시노라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도움을 받았다.

관객 4 감독님의 영화에는 일본의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캐스팅의 기준이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사실 내게 배우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은 없다. 게다가 인기 배우는 개런티도 비싸고 스케줄도 바쁘기 때문에 내가 부탁을 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는 다행스럽게도 좋은 배우들이 각본을 읽고 출연에 응해주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실제 인기가 있고 다작을 하는 배우는 배우로서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인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지연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

구로사와 기요시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관객분들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항상 세밀하게 보신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이다. 이처럼 관객들의 수준이 높으니 한국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일본은 여전히 좋은 영화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관객의 수준은 떨어진다(웃음). 매번 실감하는 바이고, 또 많은 자극을 받는다.

정지연 이미 <크리피> 이후 <은판 위의 여인>을 만드셨고, 이 영화는 곧 한국에서 개봉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영화를 또 만드셨다. 그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될 때 또 한국에 초대하고 싶다. 무엇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이전하면 그때 그 극장에서도 꼭 관객 분들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정리 l 김창섭 관객에디터

사진 l 주민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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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마이크 리의 인물들은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같다”

- <커다란 희망> 상영 후 윤여정 배우, 이재용 감독 시네토크




정지연(평론가) - 한국 영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두 분을 모셨다. 윤여정 배우와 이재용 감독이다.


윤여정(배우) - 안녕하세요, 윤여정입니다. 


이재용(감독) - 안녕하세요. 이재용 감독입니다. 오늘 윤여정 선생님이 이 영화를 추천했다. 나는 오늘 같이 자리에 앉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러 왔다. 


정지연 - 평소 두 분이 서울아트시네마에 종종 같이 오신다고 얘기를 들었다.


윤여정 - 이재용 감독이 자주 오고 나는 가끔 본다. 여기서 봤던 제일 지루했던 영화가 생각이 나는데 바로 <자객 섭은낭>이었다(웃음).


정지연 – 오늘 본 <커다란 희망>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처음 상영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추천한 분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윤여정 선생님이더라. 어떻게 마이크 리의 작품 중에서도 초기작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하다. 


윤여정 - 내가 마이크 리 감독을 좋아하는데 이재용 감독이 이 영화를 안 봤더라. 그래서 나 대신 이재용 감독이 추천하고 자기가 영화를 보러왔다. 내 이름을 도용한 셈이다(웃음). 

마이크 리는 느닷없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늘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그려서 좋아한다. 단적으로 말해 재벌 이야기가 아니다. 재벌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마이크 리의 인물들은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같다. 


이재용 -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봤고, 또 좋아한다. 1989년쯤에 외국에서 영화 공부할 때 우연히 그냥 봤다. 그런데 자막 없이 그냥 봤더니 노동 계급 사람들의 영국 악센트가 너무 심해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영화를 제대로 봤던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웃음).


정지연 - 마이크 리는 노동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감독을 언급할 때 켄 로치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신 소감이 궁금하다. 


이재용 - 나도 궁금하다. (윤여정 배우에게) 안 조셨어요?



윤여정 - 안 졸았다. 나는 영화 보면서 졸지 않는다, 누구처럼(웃음).


이재용 - 다시 보니까 두 가지 장면이 생각났다. 할머니가 문이 잠겨서 옆집에 갔을 때 ‘변소를 써도 될까요’라고 했더니 ‘아 화장실 말이죠?’라고 받아치는 대화가 재밌었다. 계급이 다른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뉘앙스로 농담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도 정말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희망>이 굉장히 유머러스한 영화란 걸 새삼스레 느꼈다.


정지연 – 감독, 촬영감독, 배우 등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하는 일에 따라 보는 부분이 다른 경우가 많다. 오늘 윤여정 선생님은 연기의 측면에서 특별하게 느끼신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윤여정 - 나는 늙었으니까 늙은 할머니 역을 잘 본다. 확실히 마이크 리가 젊었을 때 만든 영화 같다. 마이크 리가 아마 나와 비슷한 세대일거다. 그런데 지금 여기 나온 할머니가 극중에서 70세인데, 저렇게 분장하고 정말 늙은 사람처럼 연기한다. 그런 걸 보니 마이크 리가 너무 젊었을 때 만든 영화가 아닌가 생각했다. 마이크 리 감독도 지금 70인데 영화 속 저런 모습은 아닐 거다. 노인을 그릴 때 많이 과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용 – 나도 영화 보는 걸 좋아했지만 옛날에는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주로 할리우드 영화였고 가끔 유럽 영화를 봤다. 우연히 “High Hopes”란 제목의 영화를 간판에서 보고 극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평소 보던 영화와는 결이 달랐다. 

최근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었는데 <커다란 희망>과 비슷한 요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노인 문제 등. <죽여주는 여자>가 내 필모그래피 중에서 의외의 영화처럼 받아들여지는데, 사실 내가 써놓은 시나리오 중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더 있다. 내가 오랜 시간 관심을 두고 있는 요소들이 다 <커다란 희망> 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보통 사람들, 옆집 중산층의 허위적인 모습들 같은 요소. 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 같기도 하다.


정지연 - 1988년은 대처 시대의 후기였고, 이전에 세워놓았던 사회당의 공공정책들이 많이 붕괴됐었다. 그때 노동 계급이 느낀 위기감이나 정서를 잘 보여준다. 특히 마이크 리는 데뷔작을 찍은 뒤 약 10년이 지나서야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제작비 조달도 쉽지 않았고 ‘좌파 예술가’들에 대한 검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커다란 희망>에는 계급 문제에 대한 묘사가 까칠하고 직설적으로 들어있다.

마이크 리가 배우와 어떤 식으로 작업하는 지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있다. 마이크 리는 캐릭터를 설정하기 전에 배우와 계속 얘기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다고 하더라. 배우의 평소 모습과 원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이크 리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도 많이 받았다. 이재용 감독님은 윤여정 배우와 작업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 지 궁금하다.



이재용 – 윤여정 선생님과 처음 찍은 영화는 <여배우들>이다. <여배우들>은 특별히 별도의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캐릭터를 이용하는 리얼리티 쇼 같은 영화였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했다. <죽여주는 여자> 때도 미리 글을 써놓고 맞춰가는 게 아니라 내가 몇 년간 옆에서 보고 느꼈던 윤여정 배우의 말투를 담았다. 내가 하는 이야기나 농담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도 윤여정 선생님은 다 아실 것 같아서 배우를 따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윤여정 배우를 놓고 영화를 계획한 셈이다. 따로 설명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이 없어서 더 수월했다고 할 수 있다. 


정지연 – 윤여정이란 배우의 연기를 볼 때 개인적으로 느낀 건 ‘스타’의 존재감이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의 요소 중 하나로 ‘배우 자체가 녹아들지 않는 기호’를 꼽았다.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아서 연기를 할 때 배우 원래의 스타일, 그 사람 본연의 어떤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가 모랭은 그게 스타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윤여정 선생님의 연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연기를 해도 ‘윤여정’의 몫은 분명히 캐릭터에 살아 있기 때문에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국 영화 산업이 워낙 젊은 스타 중심이라서 중년의 여성 배우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기 쉽지 않은 데 윤여정 선생님은 화면을 장악하는 힘을 갖고 있다. 


윤여정 - 나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작품이 들어오는 게 많지도 않고 선택의 폭도 넓지 않다. 하지만 변한 건 있다. 지금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제안을 하느냐가 먼저다. 그 사람이 감독일 때도 있고 작가일 때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내가 만약 지금 40대 배우면 따질게 많을 것 같다. 후배들을 보면 따지는 게 많다. 자기 역할에 포커스가 맞춰져야 하고, 돈도 많이 받아야 된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게 없어졌기 때문에 여러 겹의 옷을 벗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다. 이 나이에 따져서 어떡하겠나. 따지면 누가 날 써줄까.


정지연 - 혹시 마이크 리의 영화 중 무얼 제일 좋아하는가.



윤여정 – 모르고 무심히 본 영화인데도 ‘어머, 이 영화 괜찮다’하면 거의 마이크 리 영화였다.  <베라 드레이크>도 마이크 리의 영화인 줄 모르고 봤는데 굉장히 잘 봤다. <비밀과 거짓말>도 좋았고 정말 다 좋았다. 이 사람 영화를 보면서 ‘이거 뭐지?’ 싶은 영화는 없었고, 아, <미스터 터너>는 ‘아유 이분이 이런 영화는 왜 하셨을까’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임에는 틀림없다. 


이재용 – 나는 잡식성이어서 한두 명을 꼽기는 어렵다. 실망하지 않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감독 중에는... 마이크 리도 ‘성공률’이 높고 에릭 로메르도 그렇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다른 사람들이 흉보는 영화들도 나는 좋아한다. 결과적으로 블랙 유머나 시니컬한 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관객 1 – 최근 예술과 윤리를 함께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배우로서, 영화 안에서 어떤 것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내용이 너무 끔찍하면 그걸 실제 삶과 분리시켜서 생각한다. 그런데 직접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다. 


윤여정 - 나는 메소드 액팅을 잘못하는 배우일 수 있다. 막 몰입해서 그 사람이 되는 그런 걸 못한다. 내가 영화나 대본을 해석하는 방법은 ‘내가 저 사람이 되면’, 또는 ‘이 여자가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이라고 가정을 하는 것이다. 막 몰입해서 그 사람이 된 다음 신들린 연기를 하는 건 잘 못하는 것 같다. 


관객 2 -  제목이 ‘커다란 희망’인데 극 중 할머니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윤여정 - ‘high hopes'라는 것 자체가 약간 시니컬한 제목이 아닐까. 정말로 커다란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나름 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생은 우스운 거고 사실은 희망이 없다는 식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할머니한테는 희망이 없다. 그냥 거기까지 올라가는 게 희망이 아니었을까.


정지연 – 나도 윤여정 선생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대화를 한다. 모든 사람이 먹을 게 충분하면 좋겠고, 집이 있으면 좋겠고,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 기본적인 건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이 그런 세상이 오면 아이를 낳자고 말하니까 여자 친구가 완벽한 세상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느낌을 제목으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윤여정 - 그 얘기할 때 존 레논의 『Imagine』 가사가 생각나더라.


이재용 – 중산층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고 루저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저런 작은 소망들조차 커다란 희망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상 텃밭을 가꾸며 꿈을 꾸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은 계속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리 l 김혜령 관객에디터

사진 l 장혜진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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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인물과 시대에 대한 고민이 영화의 스타일로 이어진다”

- <산쇼다유> 상영 후 임흥순 감독 시네토크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임흥순 감독을 초대했을 때, 임흥순 감독은 가장 먼저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다유>에 대해 언급했다.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뭔가?


임흥순(감독) -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2014년도다. <위로공단>을 만들던 때였고, 여성들의 고통과 상처를 어떻게 영화 안에서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시기다. 그런 와중에 조감독이 이 영화를 추천했다. 그때 미조구치 겐지라는 감독을 처음 알았다. <산쇼다유>를 보고 나서야 감독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게 됐다. <산쇼다유>를 보면서 당시에 내가 고민하던 것들과 비슷한 지점을 풀어내는 것에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책이든 영화든 작품을 볼 때 줄거리보다는 분위기, 하나의 장면 등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영화를 볼 때 하나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서 다시금 공부하고 싶어 선정했다.


김성욱 - <위로공단>을 만들 때 고민했던 부분이 뭔가?


임흥순 -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 감정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비념>의 경우에는 할머니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갔었다. 워낙 오래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그런데 <위로공단>에서 다루는 여성의 고통은 현재도 진행되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괴롭다. 그런 고통의 끝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을 보여주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산쇼다유>는 비슷한 문제를 분위기나 감정으로 전달하는 면이 있어 흥미롭게 봤다.


김성욱 - <산쇼다유>를 보고 하나의 이미지가 기억에 남았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어떤 이미지인지?




임흥순 -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놀란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위로공단>을 제작하던 당시에 내가 고민하던 부분을 이미지로 만들고, 그걸 전달하는 게 가능하구나 싶었던 장면이 있어 놀랐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 초청을 받고 지난 1월에 다시 한 번 <산쇼다유>를 봤다. 그런데 처음 봤을 때 기억했던 그 이미지가 다시 보니까 없더라. 생각해보면 영화의 시간을 압축해서 기억하고 있던 것 같다. 세 번째로 봤을 때는 다시 그 이미지가 보였다. 중반부에 엄마가 등에 업혀 올라가고, 언덕에서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왜 그 장면이 가장 인상이 남았을까 생각해봤다. 앞뒤의 이야기, 음악들, 그리고 비참한 상황들이 뭉쳐 하나로 몰려왔던 거 같다. 이 영화에서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김성욱 - 영화를 보면 말한대로 특정한 이미지에 대한 느낌이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임흥순 감독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 분위기 등을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임흥순 -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좀 찾아보고, 감독이 살아온 배경을 보면서 많이 공감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5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과 정서를 잘 담아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여성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을 비슷하게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죄책감 같은 정서에 많이 공감했다. 또 현재의 우리 사회와 많이 연결된다고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 있어 흥미로웠다.


김성욱 - <산쇼다유>를 봤을 때 내가 가장 큰 충격적인 느낌을 받은 건 바닷가에서 어머니와 이별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가족, 사람들과 분리되어지는 순간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서두에서 아버지와의 이별과 이어 어머니와의 이별이 나오고, 영화의 주인공인 두 사람도 결국 이별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어머니와 아들이 재회하긴 하지만 영화의 모든 부분이 결별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분리와 폐쇄, 탈출할 수 없음, 재회라는 것이 강한 느낌을 줬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특히 소리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러 소리가 혼재되어 날카롭게 들려오고, 영화 전반에 어머니의 노래가 인상적으로 들려오기도 하다. 연출을 하는 입장에서 이 영화의 소리, 음향, 노래에 대해선 어떻게 보셨는지.


임흥순 - 아무래도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음향에 많이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면서 음악 작업을 하게 되다보니 좀 더 듣게 되는 부분도 있다. 최근에 진행한 작품은 탈북여성들과 함께하는 영화였는데, 음악감독에게 미조구치 겐지의 음악을 참조해달라고 말씀드리곤 했다. 일본 영화의 오묘한 느낌들이 많이 전달됐던 거 같다.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가진 문서, 책과 대비해서 활자로 이루어지지 않은 민중들의 목소리, 이야기, 노래가 이렇게 이어져서 내려오는구나 싶었다. 노동요 같은 노래 속에 이전 사람들의 생각, 행동들이 함께 이어져 내려온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부분에 흥미가 있다.


김성욱 -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은 안쥬가 자살하는 순간이다. 죽음의 순간과 사라짐의 순간이 동시에 찾아오는 잔혹한 순간이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굉장히 시적이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잔혹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녹아 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아름다움과 잔혹함이 하나의 영화에서 구현된다. 동시에 이 장면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물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도 다른 결로 가는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셨는지




임흥순 - 너무 예상치 못한 장면이라 놀라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여성들은 이 사회에서 죽어야만 다시 사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여성 노동자들 같은 경우도 오빠,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면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다음 생을 기약하는 희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뿐 아니라 미조구치 겐지의 <양귀비>(1955)도 그랬고, <우게츠 이야기>(1953)에서도 그랬다. 죽음 이후에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들을 들으면서 ‘여성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나’ 그런 생각들을 했다.


김성욱 - 영화를 보면 안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이끌리고, 즈시오는 반대로 아버지의 목소리에 이끌리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해방, 평등사상 같은 정책이나 이념의 말이다. 두 명의 주인공이 부모와의 결별을 체험하면서 한쪽은 어머니의 노래로, 한쪽은 아버지의 말을 따라서 움직여간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내용적 주제를 생각해보면 노예제 안에서의 잔혹함, 사회적 평등성이 부각된다. 그러면서도 주제와는 별도로 한편으로 어머니의 노래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들은 전반적으로 남성에 대한 반감이 느껴진다. 대개 아버지로 묘사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아버지의 묘사는 조금 달라 보인다. 오가이 모리의 원작은 산쇼대부라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개과천선해 노예제를 없애는 내용인데, 영화에서 산쇼대부의 비중은 거의 없다. 아버지의 잔혹한 모습이 산쇼대부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임흥순 - 그런 점에서 미조구치 겐지의 삶이나 배경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누구나 이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아버지의 폭력적인 면모에 반감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는 반면에 어머니에 대한 정서는 좀 달랐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군대가 큰 역할을 하는데, 남성성을 더 만들어야 하고, 아닌데도 맞는 척 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작업 세계나 직장에서도 구조 자체가 위계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이야기, 여성들의 고통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김성욱 - 산쇼라는 공간은 말하자면 수용소 같은 곳이다. 사람에게 비인간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이 허용되는 장소면서, 결코 살아서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장소다. 그런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게 노래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어떤 여성이 가사일을 하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안쥬와 즈시오에 관한 어머니의 노래였고, 그 노래를 듣고 주인공은 어머니가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즈시오와 달리 안쥬는 끊임없이 탈출하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보면 노래는 폐쇄성의 경계를 넘어서게 하는 존재다. 시각적인 것은 폐쇄되어 버리니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여전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건 소리, 노래, 음향이라고 생각한다. 안쥬가 물로 들어가게 되는 순간에 어머니의 노래가 나오기도 한다. 

사실 내용적으로만 보면 무척 신파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전설의 고향’같은 내용이다. 한국인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것인데, 영화적 스타일을 보면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다. 엔딩에서 카메라가 휙 올라와서 바다를 비추는 장면이 지금 보면 별로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50년대 프랑스 평론가들은 그 장면을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 인간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자연으로 확 움직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놀랐던 것 같다. 신파적인 내용을 현대적인 영화적 스타일로 보여준다는 면이 이 영화에 흥미를 갖게 만든다.


관객 1 - <비념>이나 <위로공단>을 제작하실 때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느낌을 영화에 옮길 때 고민하는 게 있다면 어떤 부분이었는지?


임흥순 - 다른 작품을 참고하기는 하지만 답습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런 스타일이 그냥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 인물에 대한 고민들, 시대상황에 대한 고민이 얼마만큼 깊어지느냐에 따라 형식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인물에 대한 고민, 이해, 공감을 높이려고 하고, 최대한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비념> 같은 경우도 죽은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꿈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보면 그걸 가져오기도 한다. 계속 미술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몸에 체화되거나 기억으로 쌓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사람과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관객 2 - <산쇼다유>를 보면서 신파 같으면서도 다르게 느꼈던 부분이 많았다. 소리가 묘했다. 듣기 좋은 소리와 듣기 불편한 소리가 혼재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소리가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죄의식을 자극한다고 생각했다. 


임흥순 –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는 죄의식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감독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작품으로 계속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그런 부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3 - 대중적으로 성공한 다큐멘터리들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다큐멘터리를 말도 안 되게 적은 사람들만 본다는 사실이 놀랍다.


임흥순 -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흥행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숙명이기도 하다. 일단 첫 번째는 극장에 많이 걸리지 않는다. 돈이 안 되면 관을 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다. 독립영화에서 만 명 넘는 건 상업영화에서 천만 넘는 것과 비슷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김성욱 - 최근에 제작 환경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작품수가 많이 늘어난 게 사실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 사람이 정해진 시간에 볼 영화들은 한정되어 있는데, 볼 영화는 많다. 게다가 독립적인 환경에서 제작한 영화는 유통 시장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배급에 의해서 희생되는 영화들도 나온다.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얘기를 하자면, 민간 극장의 수가 너무 적다. 대기업 멀티플렉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극장의 90% 이상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서 멀티플렉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50% 정도다. 나머지는 기업이 아닌 민간 극장이다. 그러니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극장의 자율성이 큰 편이다. 민간 극장의 몰락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의 이후 작업이 궁금하다. 


임흥순 - 작년에 안양시의 공공예술 프로젝트(APAP)를 통해 탈북 여성들과 함께 <려행> 이라는 장편 하나를 만들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전의 작품들은 3년 정도 시간을 들였는데 이번에는 6개월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만들었다. 또 하나의 작품은 <환생>이라는 작품을 편집중이다. 촬영은 90% 이상 마쳤다. 베트남과 이란에서 촬영했고, 전쟁 피해 여성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진행했다. 올해 안에 보여드리기 위해서 노력하겠다.



정리 l 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l 주민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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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이야기는 뿔난 암소를 보여주는 일”

-<케이프 피어> 상영 후 김의성 배우 & 최동훈 감독 시네토크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 오늘 김의성 배우와 최동훈 감독이 추천해준 <케이프 피어>를 보았습니다. 먼저 두 분께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하신 소감을 묻고 싶습니다.


김의성(배우) - 오늘 생각보다 많은 관객 분들이 오셔서 많이 놀랐고요. 사실 저는 이 영화를 오늘 처음 봤습니다(웃음). 제가 영화를 갖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옆에 계신 최동훈 감독님을 살짝 꼬셨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이 추천하고 저는 영화를 봤습니다. 오늘 얘기는 감독님이 많이 해주실 겁니다.


최동훈(감독) - 저는 선배님만 믿고 왔는데요(웃음). 이번에는 <기아해협>도 같이 추천을 했는데 <기아해협>은 이미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오늘 보신 <케이프 피어>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마틴 스콜세지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사실 이 영화를 더 좋아하거든요. 김의성 선배가 이 영화를 좋아하실지 궁금해하면서 봤습니다. 


김의성 - 네, 매우 좋았습니다. 이 영화를 추천하신 이유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최동훈 – 이 영화가 비평적으로 그렇게 좋은 평가를 못 받았더라고요. 막 화가 나더라고요. 이유를 좀 찾아보니까, 표현이 과감하지 못했다,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맥스 케이디가 술집에서 여자를 폭행하는 장면은 분위기만 내고 실제 폭행 장면은 찍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왜냐하면 저때는 아주 강력한 검열의 시대였거든요. 폭력과 섹스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었어요. 이 정도의 묘사만으로도 당시 관객들에게는 <원초적 본능>을 우리가 처음 볼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환경을 이해하고 보면 J. 리 톰슨 감독이 얼마나 훌륭한 연출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어요. 삼류영화도 많이 찍기는 했지만요. 


김의성 - 저는 오히려 그런 면이 이 영화의 굉장히 매력적인 면이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로버트 드니로가 로버트 미첨이 했던 맥스 케이디를 연기했잖아요. 그 영화에서는 뭐랄까, 딱 볼 때부터 맥스는 사이코패스처럼 보여요. 이 사람은 어떤 짓을 저질러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죠. 그런데 로버트 미첨은, 사실 저는 중반부까지는 이 사람에게 약간 감정이입을 할 정도였어요. 내가 악역을 많이 해서 그런가(웃음).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굉장히 절제된 폭력과 성에 대한 표현. 그런 게 상상력을 자극하죠.


최동훈 -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씬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맥스 케이디가 옷을 싹 벗고 누워서 물속으로 딱 들어갈 때 너무 무서운 거예요. 한 마리 악어가 연상되기도 하고. 실제로 싸우는 장면 찍을 때는 악어 두 마리가 싸우는 것 같아요. 퍽퍽 거리면서 싸우죠. 흑백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었고, 아, 로버트 미첨에게 완전히 매료당했어요. 

김의성 - 저도 이 배우를 아주 어렸을 때 본 것 말고는 기억이 거의 없는데, 보고 굉장히 멋있는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상대가 안 되던데요? 하하.


최동훈 - 언제나 그래요. 그레고리 펙은 신인 여배우랑 <로마의 휴일>을 찍었는데 그 신인여배우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받고(웃음).

그런데 로버트 미첨은 저 당대 최고의 섹시스타 중 한 사람이었어요. 성격도 좀 괴팍하고. 어렸을 때 본 사진 중에 로버트 미첨이 마리화나 때문에 경찰에 잡혀가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 사진이 굉장히 유명하죠. 그런데 묘한 게 있어요. 로버트 미첨처럼 감옥을 들락날락 한 사람이 닉 놀테예요. 술 먹고 파파라치 막 때리고. 닉 놀테도 경찰서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케이프 피어”라는 영화에 나오게 됐죠(웃음).

제가 로버트 미첨 걷는 걸 진짜 좋아하거든요, 로버트 미첨이 약간 이렇게, 발가락을 땅에 끌듯이 이상하게 걸어요. 그런데 또 성격이 이상해서 누가 그 걸음걸이에 대해 물었더니 배가 안 나오는 방법이라고 대답을 했어요. 본인이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고 절대 얘기 안 해요. 자기의 연기 방식은 딱 두 가지인데, 말을 탔을 때랑, 안탔을 때. 이렇게 두 가지라고 말했죠(웃음).

또 있어요. 자기 연기 스타일은 딱 세 가지 밖에 없다. 왼쪽을 보거나, 오른쪽을 보거나, 정면을 보거나. 그러니까 굉장히 쿨하게 얘기하는 배우고, 장식 같은 게 없어요. 침묵으로 연기를 표현할 줄 알죠. 저는 이 배우가 굉장히 아티스틱한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또 어떤 입장에서 보자면, 좀, 둔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의 처진 눈도 되게 좋아요. 



김의성 - 비슷한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한편으로는 아, 악역을 연기하는 게 참 훨씬 쉽다는 생각도 했어요. 표현의 방법이 너무 많아요. 첫 장면에서 어떤 여자가 책을 안고 가는데 맥스 케이디가 툭 치고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가잖아요. 그런 거 하나로 이 사람의 성격이 드러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레고리 펙이 연기했던 주인공 샘 보든은 이 사람의 캐릭터를 설명하게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장면이 필요한지. 그리고 끝내 설명도 제대로 되지 않고. 


최동훈 - 그레고리 펙이 연기를 못 한다기보다는, 중산층 가정을 지키려는 선한 백인 남자는 언제나 딱 저거밖에 할 연기가 없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원래는 굉장히 유명한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베라 크루즈>를 썼던 시나리오 작가가 굉장히 시나리오로 잘 옮겼어요. 원작은 아마 군인 출신에 약간 돌아버린 남자가 중산층 가정을 공격하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악당에게 사연을 절대 주지 않아요. 반면에 리메이크 <케이프 피어>는 악당에게 이유가 있죠. 샘 보든이 맥스 케이디를 미워해서 재판 자료를 숨겨버리잖아요. 그럼 맥스 케이디는 이제 복수를 하는 거죠. 

오늘 보신 <케이프 피어>는 오히려 시대 분위기상 악당에게 사연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맥스 케이디를 사이코패스에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단순히’ 묘사를 했죠. 그런데 그걸 로버트 미첨이 정말 잘 해냈죠. 오히려 리메이크의 로버트 드니로보다 훨씬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케이프 피어>를 리메이크 한다고 하니까 당시 할리우드가 완전 난리가 났어요. 굉장한 작품이 나올거라 생각한거죠. 원래는 스필버그가 자기가 하려고 판권을 샀는데, 왠지 잘 안 어울릴 것 같아서 마틴 스콜세지한테 연출을 줬죠. 스콜세지는 3년 동안 24고까지 시나리오를 썼대요. 이런걸 보면 스필버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인지 알 수 있죠. 

딱 찍고 나니까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를 너무 잘 한 거예요. 올해의 아카데미는 맥스 케이디의 로버트 드니로다. 최고의 악당이 나왔다, 이랬는데 그해에 더 위대한 악당이 나왔습니다. 바로 한니발 렉터(웃음).


김의성 - 참 아는 게 많으세요(웃음).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굉장히 재밌게 느꼈고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만약에 지금 이 시나리오를 누가 감독님에게 주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영화가 너무 많이 만들어지고, 관객을 너무 속이려고 하니까 우리가 이제는 잘 안 속게 된 건 아닐까 싶어요. 그런 면에서 지금 시대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관객을 열심히 속여야 한다는 게 좀 고통스럽지 않으세요?

최동훈 – 뭐, 삶과 거의 붙어있습니다. 남을 속이는 게(웃음). 근데 원래 이야기를 만든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뿔난 암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암소는 뿔이 없는데 마치 암소가 뿔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잖아요. 아주 그럴 듯하게 쓰는 거.

제 식으로 해석하면 우연이 남발되는 데 그 우연이 마치 필연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게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요즘 많이 느끼는 건, 이 영화가 굉장히 느려요. 장식도 별로 없어요. 필요한 정보는 다 대사가 전달하고 마지막 20분의 서스펜스를 만드는데 충실해요. 그런데 그 마지막 20분이 정말, 저는 영화를 꽤 많이 봤는데도 손에 땀이 날 정도에요. 정말, 아주 정직하게 만든 영화인데도 그래요.


김의성 -  다리 밑에 있던 보안관의 목을 조를 때, 거기서부터는 진짜 영화가 사람 숨도 못 쉬게 하는 거 같아요.


최동훈 – 이 영화가 영국에서는 검열에 걸려서 4분 잘렸대요. 그래서 도대체 어디를 잘랐는지 진짜 유심히 봤는데 찾아낼 수가 없어요. 아마 맥스 케이디가 엄마와 딸을 위협하는 장면이 아닐까 하는데...

  

김의성 – 엄마의 가슴을 팔로 싹 스치는데 많이 보여주지 않아도 그게 너무 무섭더라고요. 그리고 이 정도만 보여줘도 당시의 관객들은 다 믿어요. 그런 약속이 어쩌면 순진하게 이루어지는 거죠. 지금은 힘들겠지만.



최동훈 - 저는 잘 안 보여줍니다. 아귀가 고광렬의 팔을 이렇게 딱 찍으면 저는 그것도 가까이서 보여주기 싫어서 멀리서 보여주거든요. 저는 <대부>도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액션 영화’가 아니라 폭력을 다룬 영화기 때문이에요. 액션과 폭력은 엄연히 다른 문제거든요. 저는 폭력을 다루는 그 감도랄까, 그걸 고민하고 있어요. 나는 액션을 좋아해서 액션을 찍는데, 조용히 저를 좀 반성해보자면 너무 액션만 찍는 게 아닌가. 너무 깊이가 없는 액션만 찍었는데 이런 은은한 폭력의 세계가 더 리얼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음 작품에서는...(웃음).


김성욱 - 참고로 오늘 최동훈 감독님의 제작사 직원분들도 다들 같이 오셨습니다(웃음).


최동훈 – 끝나고 술 먹으려고 같이 왔어요(웃음). 저번에도 한 번 같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보고 다 같이 술 먹고 영화 얘기 했었는데, 이렇게 고전 영화 보면서 얘기 하는 게 정말 즐거운 것 같아요. 그 영화들은 정말 형식적으로 공들여 찍은 영화들이고, 저도 그렇게 찍으려고 해요. 그렇게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니까 고전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클래식한 방법론을 봐야죠. 저는 이렇게 극장이 도서관처럼 느껴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관객 1 – 그레고리 펙과 로버트 미첨의 연기 스타일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관객이 본 거랑 전문가가 본 부분이 다를 것 같습니다. 


최동훈 - 그레고리 펙은 어쩔 수 없이 저 시대의 최고 젠틀맨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레고리 펙한테는 자유가 없었을 거예요. 악당을 연기했으면 아마 관객에게 외면당했을 거예요. 그런데 로버트 미첨은 선한 사람도 연기하지만 악당 역할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데이비드 린의 <라이언의 딸>을 보면 무력한 남자 연기도 되게 잘해요. 

아까 농담처럼 왼쪽 보고 오른쪽 보는 연기 얘기를 했지만, 저는 정말 그런 배우들이 좋아요. 리 마빈, 스티브 맥퀸 같은 배우들. 연기를 하는 건지 그냥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건지 불분명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이 너무 좋아요. 보통은 ‘열연’하는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막 우는 거. 그런데 저는 그런 연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케이프 피어>를 보면 로버트 미첨의 눈이 뒤로 갈수록 점점 변해요. 마지막에는 막 슬퍼보여요. 그런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 모호함이 저는 좋아요.


김의성 - 왜 시대마다 말도 계속 바뀌잖아요? 우리나라의 60년대 영화만 봐도 지금 쓰는 말이랑 전혀 다른 말을 쓰죠. 지금의 기준으로 그 연기를 평가하는 건 좀 어렵죠. 한석규씨 이전의 영화 연기까지만 해도 양식적으로 지금과는 좀 달랐어요. 한석규씨, 송강호씨가 연기하면서부터 배우들이 훨씬 자연스러운 우리 생활의 언어들을 쓰기 시작했어요. 지금 <케이프 피어>만 봐도 배우들이 조금은 양식적인 연기를 해요. 정해진 곳을 바라보는 그런 연기.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좀 답답한 느낌이 있죠. 그런데 로버트 미첨의 연기는 지금 봐도 좀 현대적으로 느껴져요. 시대를 타지 않는 그런 연기. 저 당시의 사람들은 오히려 미첨의 연기를 보면서 좀 이상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을 거예요. 지금 영화에 그대로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아요.


관객 2 – 만약 2017년에 최동훈 감독님이 <케이프 피어>를 리메이크 한다면 어떨까요?


최동훈 - 대단한 대답을 할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어요.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건 배우를 캐스팅 하는 거거든요. 저는 그게 70~80%가 넘는다고 생각해요. 그럼 한국에서 맥스 케이디를 누가 해야 할까... 일단 김윤석 선배나 김의성 선배가 떠오르네요.


김의성 - 저는 아직 착해서. 하하(웃음).


관객 3 – 아까 김의성 배우님이 얘기하신 부분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관객들이 저런 연출을 바로 믿어줄 정도로 순수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면 앞으로는 영화적으로 더 화려하고 더 자극적인 것들을 많이 넣게 되는 걸까요. 앞으로 영화 연출이나 연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 생각하는지 두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최동훈 – 저는 데뷔할 때부터 쌈마이라고 소문이 나서... 근데 저는 자극적인 것은 그 자체로는 죄가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대부>에서 사람을 죽일 때 뒤에서 목을 끈으로 조르면 그 남자가 발버둥을 치면서 유리창을 차거든요. 그럼 그 유리창에 금이 가요. 딱 이 정도.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안 찍어요. 막 정말 졸라서 혓바닥이 나오는 걸 보여주고, 이렇게 해야 관객이 믿는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자극적인 걸 좋아하지만 어떤 것을 필요하고 어떤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게 더 중요해요.

지금 질문은 되게 어려워요. 저도 하다보면 너무 자극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도둑들> 때는 액션을 크게 보여주고 싶어서 건물 타는 것만 20일 정도 찍었어요. 그것만 없었으면 훨씬 쉽게 찍었을 거예요. <암살> 때는 백화점을 짓자고 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액션의 규모를 점점 키워가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하기도 했어요. 막 범위를 키우지 않아도 더 미세하고 더 디테일하게 찍는 게 더 재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의성 - 저는 과거가 아무리 좋아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변하는데, 이 발전된 기술로 변화된 사회를 보여주는 방법을 찾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만약 <케이프 피어>의 시나리오를 지금 그대로 들고 와서 영화로 찍으라고 하면 ‘이걸 어떻게 영화로 찍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거든요.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졌어요. 옛날 영화에서 배울 건 배우는 거고, 지금의 ‘화려한’ 영화에 대해서 어떤 걸 기대하는 것도 우리 관객의 권리라고 생각해요. 



김성욱 – 이 영화에서 로버트 미첨이 연기한 캐릭터를 가만히 보면 좀 가련한데, 연기를 하는 배우의 표현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김의성 - 이런 얘기를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요즘 연기에 대해서 고민이 되게 많아요. 큰일났다, 나 너무 못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부산행>의 용석은 그 인물의 행동이 강해서 그렇지 캐릭터 자체는 굉장히 플랫했어요. 얇고, 평평했고 거기에 뭘 더 집어넣을 여지가 없었어요. 그런데 연상호 감독님이 그때 그냥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했어요(웃음). 

얼마 전에 최동훈 감독님이랑 그런 얘기를 했어요.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들어서 물어 봤는데 자신을 천천히 드러내는 연기가 좋은 것 같다고 했어요. 그 말에 약간 힌트를 얻었어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빨리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관객이 궁금해 할 것들을 남겨두는 거예요. 그러려면 겁이 없어야 되거든요. 연기에 겁을 먹으면 빨리 뭘 보여줘야 돼요. 하지만 겁 없이 ‘뭐, 언젠가는 충분히 너희들이 볼 수 있을거야’라는 뱃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하여튼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연기력’, ‘연기 잘 한다’ 이런 말 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 잘 존재하는 것. 그리고 뱃심 좋게 좀 뻔뻔하게 연기하는 것. 특히 영화에서는 이런 게 좋은 연기가 아닐까, 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최동훈 - 저는 ‘연기파’라고 하는 말 자체도 너무 웃겨요. 그런 건 없어져야 되는 건데. 연기는 매력적인 걸 표현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매력을 어떻게 발산하는 가에 대한 게임이에요. 우리가 저 사람이 연기를 잘 한다고 느낀다는 건 그 사람이 매력적이라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케이프 피어>에서 맥스 케이디가 소녀를 향해 걸어오잖아요.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걸어와요. 앞만 보고. 그런데 소녀랑 이렇게 딱 붙었을 때 정말 불안해져요. 이런게 정말 훌륭한 연기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김성욱 시간이 거의 다 갔습니다. 나중에 다시 두 분 초대해서 이번에 못한 우치다 도무의 <기아해협>을 틀고 또 영화 얘기하는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의성, 최동훈 – 감사합니다.




정리 l 한동혁 관객에디터

사진 l 장혜진 포토그래퍼, 주민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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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아직도 정체가 궁금한 작품이다”


<매그놀리아> 상영 후 

윤가은 감독 & 이화정 『씨네21』 기자 시네토크



이화정(『씨네21』 기자) – 오늘은 굉장히 빨리 매진이 됐다. <매그놀리아>는 2000년에 국내에서 개봉했고, 무려 188분짜리 영화다. 당시에는 과잉의 영화라는 평가도 있었다. 수많은 영화 중에 왜 <매그놀리아>를 관객들과 함께 보고 싶어 하셨는지 궁금하다.


윤가은(감독) - 처음 제안해 주셨을 때, 세 작품 정도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좋아하는 영화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나에게는 영화 한 편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꼽은 세 편의 영화는 <안녕하세요>, <엘리펀트>, <매그놀리아>였다. 개봉 당시 <매그놀리아>를 극장에서 못 봤었다. 그때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던 때다. 연습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집에 들어왔는데 TV에서 <매그놀리아>를 우연히 보았다. 굉장히 몰입해서 봤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 이 영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건 어떤 경험일지 궁금했다.


이화정 - 연출 데뷔 전과 후에 이 영화를 본 경험이 다를 것 같다.


윤가은 - 연출 데뷔 이전에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다. 당시에는 영화를 볼 때 이야기가 먼저 들어오는 편이었다. 그런데 <매그놀리아>를 보면서 처음 카메라라는 것을 느꼈다. 카메라가 이야기를 구성하는 도구로서 저렇게 활용이 되는구나 싶었다. <우리들>이 개봉한 다음 다시 <매그놀리아>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이 영화의 조명까지 눈에 들어왔다. 굉장히 정교하게 연출된 것이었구나 싶었다. 데뷔 이후에는 아무래도 작업자로서 고민하는 것 같다. 


이화정 - 퀴즈쇼를 중심으로 엮여있긴 하지만 아홉 명의 다른 인생, 다른 삶을 다루고 있다. 관객들이 이 중 누군가에 동화되어서 188분이라는 긴 시간을 따라가게 한다는 것은 연출자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더라도 보통은 주요 인물이 있고, 그 주변 인물들로 구성이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매그놀리아>를 봤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큰 놀라움은 ‘어떻게 이렇게 분배를 잘했을까’였다. 아마 폴 토마스 앤더슨을 알트만과 비교하는 이유도 거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윤가은 -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을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쓴 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인간처럼 느껴졌다. 각각의 이야기보다 주제, 메시지가 더 앞섰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되게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산만할 수도 있는 플롯인데, 이상하게 하나의 플롯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는 짤막한 인터뷰를 봤었는데, 그때 ‘어떤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을 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화정 -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 중에서 이 영화가 가장 순하고 착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은 영화의 엔딩을 보고 단죄라고도 얘기하고, 이 세계가 하나로 뭉치는 것이라고 얘기도 하던데, 개구리가 쏟아지는 장면에서조차도 인물들이 서로를 위해주는 모습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런데 감독의 이후 영화에는 이런 식의 따뜻함 같은 게 없다.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윤가은 - 최근에 다시 볼 때는 이 영화에 플롯이라는 게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처음부터 기승전결의 ‘기’가 아니라 ‘전’에서 시작된다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감정이 들끓다가 개구리비가 내리면서 어떤 해소감이 생긴다.

개구리비가 성경 구절의 차용이라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다. 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게 일종의 단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서로 화해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트라우마를 놓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이 그 순간 기적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화정 - 개구리비를 화면 안에 구현한다는 시도 자체가 맞닥뜨릴 수 있는 비난이 있다. 개구리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실제로 있었다고는 하지만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예전에 인터뷰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이 스필버그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스필버그는 동화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만든다면, 자신은 동화이자 초현실로 이루어진 세계를 만든다고 말하더라. 


윤가은 - 개구리비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무척 놀랐다. 이게 현실에서 빗겨난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것이 과연 우화적인, 상징적인 장면인가 싶었다. 영화 속에서 여러 인물들이 겪는 고통도 그것이 현실일까 믿기 힘든 일들이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개구리비도 삶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처럼 보였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비극적인 사건과 개구리 비가 내리는 것은 크게 다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화정 - 인물들이 모두 각자의 불행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좀더 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영화를 여러 번 볼수록 인물들이 점점 더 구분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 같은 경우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좋은 의지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스탠리의 경우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뚫고 나온다. 아무리 개구리비나 가혹한 운명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인물들의 의지가 그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가은 -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꼼짝도 하지 않고 영화를 끝까지 봤던 이유 중 하나가 스탠리였다. 그 아이는 유일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싫다고 이야기하고 퀴즈쇼 세트장을 빠져 나간다. 마지막에는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나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스탠리의 존재가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이화정 - 사랑받는 많은 배우들이 나오기 때문에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지나가는 영화다. 줄리안 무어는 이 영화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톰 크루즈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이미지 변신은 놀라울 정도다.


윤가은 - 오늘 큰 화면으로 보니까 정말 미치겠더라. 반 묶음 머리에 이상한 가죽옷을 입고(웃음). 정말 재수 없어서 어디까지 하나 계속 보게 되는 캐릭터였다. 톰 크루즈에게 저런 얼굴도 있었나 느꼈다. 

스물아홉의 젊은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노장 배우부터 어린 아이까지 모든 연령층이 영화에 나온다. 이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정말 그 안에 사는 사람들 같다는 느낌을 준다. 아홉 명이 모두 모이는 장면은 없지만 신기하게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합을 맞춰서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놀랍다. 메이킹 영상을 찾아봤는데, 아역배우들과 호흡과 맞추면서 리허설을 하더라. 그만한 계산과 노력이 있었구나 싶었다. 


이화정 - 폴 토마스 앤더슨은 영화 학교를 갔다가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바로 자퇴했다고 하니,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분명했던 것 같다. <부기 나이트>로 이미 명성을 얻었고, <매그놀리아>도 많이 인정받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는 흥행 이상의 것들이 있다. 코폴라 감독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야말로 할리우드 시스템에 반대해서 자신의 색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의 색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이 뚜렷하다. 지금도 계속 명확하게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인 ‘매그놀리아’는 목련을 뜻하기도 하지만 LA에 있는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부기 나이트>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고, 감독 자신이 어릴 적 자란 곳이다. LA의 화려한 곳을 벗어난 평범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보편적인’ 상처를 갖고 있다. 영화는 그것을 극복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하며 사랑을 계속 강조하는 것 같다. 도니가 치아교정을 한 것도 사랑을 위해서다. 상처들을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귀엽게 다가왔다.


윤가은 - 한편으로는 가족이야기인데, 가족한테 입은 상처를 가족 바깥의 사람으로부터 치유 받는다. 가족 공동체 내부에서 해소될 수 없는 아픔을 인정한다. 어떤 상처에 대해 그것을 부정하거나 막연히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화정 -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어떤 게 있을까.



윤가은 – 2분이 넘는 롱테이크 장면도 인상적이지만, 그냥 인물들이 대화하는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예를 들어 린다가 필을 때렸다가 사과하는 장면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남았다. 필이 린다의 뒤늦은 죄책감을 진심으로 슬퍼해 주는 게 느껴졌다. 짐과 클라우디아가 대화를 나누는 귀여운 장면들에서는 언발란스한 사람들 사이의 이상한 케미가 있다.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쇼트가 많은데, 대화하는 장면들에는 컷이 많지 않다. 두 인물 사이의 공기를 잡아내는 묵직한 컷들이 인상적이었다.


관객 1 - <매그놀리아>를 처음으로 극장에서 봤다. 그냥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윤가은 - 연출자는 작품이 극장에서 상영될 때를 생각하며 영화를 만든다. 극장은 일단 영화를 중지할 수 없다. 영화라는 것을 온전히 관람할 수 있게 만드는 환경은 극장 외에는 없는 것 같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온전히 내 체험으로 만드는 건 아무래도 극장이라는 환경인 것 같다.


이화정 - 요즘 “그 영화 봤어?”라고 물어보면 “응. 그런데 1/3 남았어.”라는 식의 대답을 듣곤 한다. 영화를 한 번에 쭉 보는 것과 나눠서 보는 경험은 분명히 다르다. 후자의 관객은 분명 영화 감상에 손실이 있을 것이다.


윤가은 - 영화는 시간예술이라는 점을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알트만의 <숏 컷>이 188분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매그놀리아>를 만들 때 알트만에 대한 오마주로 러닝타임을 일부러 맞췄다고 한다. 그 정도로 감독들은 시간에 신경을 많이 쓴다. 영화는 일정한 시간 안에 관객들에게 어떤 체험을 주려 한다. 그 목적을 지켜주는 곳이 극장이다.


관객 2 -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찍기도 하셨는데, <매그놀리아>의 아역 연기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윤가은 - 캐스팅이 놀라웠다. 스탠리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미 어떤 슬픔 속에 있는 것 같다. 저런 아이를 캐스팅 했다는 점에 존경심이 든다. 아이들만 출연하는 <매그놀리아>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저런 식의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정말 많으니까. 한글 꽃 이름 하나 붙여서, “해바라기” 뭐 그런 걸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웃음).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마지막에 노래 부르고(웃음). 언젠가 찍고 싶은 영화 목록 안에 있다. 


이화정 - 이렇게 극장에서 <매그놀리아>를 볼 수 있도록 해준 윤가은 감독에게 감사하다. 끝까지 함께 해주신 관객들도 감사하다.


윤가은 - 긴 영화를 보고 토크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하다.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영화를 골랐는데, 내가 영화를 분석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 사실 아직도 잘 모르는 지점이 많은 영화다. 그럼에도 내 20대를 흔들었던 영화고, 아직도 정체가 궁금한 작품이다. 오늘 이야기하다보니 새롭게 알게 되는 면도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오늘 다시 들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각각의 감상들을 가지고 가시면 좋겠다.



정리 l 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l 장혜진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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