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시네바캉스 서울 - 작가를 만나다]



“영화관 밖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 <려행> 상영 후 임흥순 감독과의 대화

이승민(평론가) <려행>은 하나의 결로 포착할 수 없는 영화다. 이번 작품은 탈북 여성을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 기존의 영화보다 더 무대화된 방식을 취한다. 탈북 여성들과 <려행>을 만든 계기를 먼저 듣고 싶다. 그리고 이런 형식을 선택한 이유도 듣고 싶다.

임흥순(감독) APAP(Anyang Public Art Project) 라는 이름의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가 있다. <려행>은 APAP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안양시의 지원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삼성산과 안양천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한 분들이 모두 바쁜 분들이라서 여러 장소를 섭외하기 힘든 점도 있었다. 그렇게 삼성산에 출연자들을 모신 다음 산의 풍경, 나무, 바위가 주는 느낌을 담고 싶었다.

이승민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는 삼성산을 무대로 해서 탈북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작품이다. 감독님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비념>을 보면 제주를 4.3 항쟁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공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고 <위로공단>에서는 구로공단이라는 공간을 다루면서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일정 정도 분리시키려 했다. 그런데 이번 <려행>의 주인공인 탈북 여성들은 삼성산이라는 장소와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렇게 그 공간에 주인공들이 있을 때 충돌이 발생하고, 그 충돌의 감각이 긴장을 준다.

임흥순 분단은 이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뉜 것이다. 이렇게 나뉜 걸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일단 ‘자연’이 먼저 떠올랐다.

이승민 첫 장면에서부터 드러나듯이, 많은 영화들이 스스로를 마치 ‘실제’인 것처럼 보여주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려행>은 ‘이건 무대다’라고 처음부터 이야기한다. 출연자들의 발언 역시 무대화된 발언이다. 다시 말해 무대임을 숨기지 않는다. 발언의 수행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색달랐다. 그리고 임흥순 감독의 작품에는 이미지와 말이 맺는 충돌적인 관계가 있다. 출연자의 말과 카메라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갭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관객 1 영화에 출연한 분들의 섭외 과정이 궁금하다.

임흥순 ‘선정’은 아니었고, 만난 분들 중 출연하고 싶다는 분들을 중심으로 촬영했다. 카메라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준비 과정에서 만난 분들은 더 있었지만 영화에 출연하기 어렵다고 하신 분들이 있었다.

관객 2 영화의 제목이 ‘려행’이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는데,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의도가 궁금하다.

임흥순 출연자분들의 삶이 아름다운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도가 물론 있었다. 하지만 북한과 탈북자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어두운 부분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영화를 만들면서 북한을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알다시피 현재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북한을 여행할 수 없다. 이런 현실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밝은 미래를 여행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었다.


관객 3 영화가 정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영화의 한 장면에 노란 풍선이 나오면서 세월호를 떠올렸다는 출연자들의 대사가 나온다. 이 장면을 집어넣은 의미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고향을 그리워할 때 ‘어머니’를 부른다. 그런데 <려행>에 나온 분들은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그 장면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임흥순 대부분의 내 작업은 전문 배우와 함께하지 않고 ‘보통 사람’이 갖고 있는 면을 드러내려 한다. 나의 일은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즉 내가 미리 만들어놓은 자리에 배우들이 들어와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주제를 놓고 출연자들과 함께 커뮤니케이션하며 구체적인 부분을 만들어 간다. 그러다 보니 우연적인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럴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 앞으로도 그런 작업을 계속하려 한다.

노란 풍선 장면도 마찬가지다. 촬영을 준비하며 등산길 초입에 있는데 무슨 일인지 어르신들이 여러 색깔의 풍선을 불고 있었다. 그중에 노란색 풍선이 있었고, 그 풍선을 보니 저절로 세월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세월호에 대해서는 항상 얘기하고 싶지만 지금의 현실을 직접 이야기하는 건 나에겐 아직 좀 어려운 문제다. 그러다 보니 먼 과거나 역사적으로 지난 이야기를 작업해 왔었다. 그런데 그날 그렇게 노란색 풍선을 본 다음 이걸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으니 출연자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풍선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더라.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미 읽으신 거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눈 뒤 그 장면의 연기는 모두 그분들에게 맡겼다. 내가 나의 부족한 부분 때문에 주춤할 때마다 그분들이 내 생각을 다 읽어내시기 때문에 이런 식의 작업 방법이 개인적으로는 편하다.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하자면, 그분과는 예전에도 짧은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을 많이 갖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산에 가면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께 제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바로 과일 등 제사상을 준비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관객 4 산에 올라가는 장면에서 개미가 다른 커다란 곤충을 끌고 가는 장면 등 곤충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임흥순 어려운 의미는 없다. 내가 곤충이나 동물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끌렸다. 물론 출연자 분들이 짐을 지고 장사를 하러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은유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 의미를 지시하기보다는 지금 질문하신 것처럼 ‘저걸 왜 넣었지?’라고 다양하게 질문할 여지를 주고 싶다. 세상을 남과 북, 남자와 여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건 무리가 있다고 평소 생각하기 때문에 내 작품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인식을 마련하고 싶다.

이승민 임흥순 감독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직접적으로, 직선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암시하는 어법을 자주 취한다.



임흥순 이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터뷰이들의 말이다. 내가 어떤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처음부터 정한 건 없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생긴다. 그때마다 장면들을 스케치해 놓고 그걸 나중에 영화로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장면들을 연결하는 건 편집실에서 한다. 처음부터 그 장면들을 미리 연결할 방법을 정해놓지 않는다. 파편적인 느낌을 주려고 했다. 기존의 서사 방식이나 앞에 나온 이야기와 맞지 않더라도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객 5 영화 중간에 촬영 중인 스탭과 출연자들을 함께 찍은 롱 숏이 등장한다.

임흥순 산에 직접 가서 찍었지만 영화를 촬영한 곳은 이미 세트라고 생각했다. 영화 현장과 현장이 아닌 것의 경계를 드러내고 싶었다.

관객 6 영화가 나에게는 좀 어렵게 느껴졌다. 특히 첫 장면의 음악이 매우 불길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임흥순 우리 삶 자체에 공포의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탈북자들이 탈북할 때 느낀 공포도 있지만 지금의 한국 현실에도 공포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불안정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영화 음악은 영화를 끌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나는 관객이 영화에 잘 몰입하게 하는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잔잔하고 슬픈 분위기를 만드는 음악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음악을 쓰는 영화는 영화가 끝나면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관을 나와서도 계속 영화와 현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음악을 썼다.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유랑극단>을 봤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한 장면 안에서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미지는 비극적인데 음악은 희극적으로 쓰는 연출도 있는데, 그런 느낌이 풍성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실제 삶도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고 있는데, 소위 ‘상업 영화’는 특정 부분만 강조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실제와 동떨어진 것으로 그린다. 그런 연출을 피하고 싶었다.


관객 7 나는 탈북민인데, 다른 감독님들은 돈벌이가 되는 걸 만들다 보니 탈북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많이 안 나온다. 그런데 돈도 잘 못 벌 것 같은 이런 영화를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웃음).

임흥순 예술에는 여러 역할이 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에 더 마음이 가고 눈이 간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삶이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아니다 보니 우연적인 요소를 영화에 많이 반영하려 한다. 이 영화를 찍은 것도, 탈북민에 관심을 가진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 김근태재단이 주최하는 전시가 있는데 거기에서 ‘평화’를 주제로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탈북민들과 만났고 이 영화에도 출연한 김복주 씨를 만났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떤 뭉클함을 느꼈다. 그렇게 <려행>을 시작했다.

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냐는 질문도 받는다. 일단 내가 살아오면서 가족들, 어머니, 여동생, 형수님에게 받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이 많다. 그리고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성들과 더 잘 맞는다. 여성들이 더 현명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여성의 넓은 시선을 작품 안에 더 반영하고 싶어졌다.

관객 8 나도 탈북민이고, 오늘은 탈북민합창단 단원들과 같이 이 영화를 보러 왔다. 보통 다른 영화나 TV 프로그램은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겪은 고통 같은 것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감독님은 우리의 삶을 담담하게 그린 점이 좋았다. 바람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열심히 서로 이해하며 살아가는 과정도 그려주면 좋겠다. 작게는 말투에서부터 시작해 우리가 어떻게 서로 오해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는지 다뤄주면 좋겠다.

이승민 임흥순 감독은 가려진 것에 주목하고, 무엇보다 잘 듣는 감독이다. 항상 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관객인 우리도 출연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여기에 임흥순 감독 영화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려행> 이후의 계획을 듣고 싶다.

임흥순 일단 <려행>의 정식 개봉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편집이 거의 끝난 작품이 하나 있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한 작품이 또 하나 있다.



일시 8월 12일(토) 오후 4시 <려행>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주민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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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2017 시네바캉스 서울 - 작가를 만나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좌절하게 만들고 싶었다.”

- <꼬마돼지 베이브 2>, <옥자> 상영 후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


정지연(평론가) 오늘 동시 상영으로 <꼬마돼지 베이브 2>를 추천한 이유가 궁금하다.

봉준호(감독) 김성욱 프로그래머랑 ‘돼지 영화제’를 해보자고 얘기를 했다. 돼지에 관한 영화의 리스트를 쭉 늘어놓고 고민했다. 동시 상영을 염두에 두고 세 편의 영화(<P짱은 내 친구>, <레저백(Razorback)>)를 추천했고, 그중 이 영화를 틀게 됐다. <옥자>가 지난 시드니영화제 폐막작이었는데 조지 밀러 감독이 보러 오기도 했다. 식사도 함께 했었다. 오늘 이 영화 상영한다고 얘기도 드렸는데 답장은 아직 없다(웃음).

정지연 <꼬마돼지 베이브 2> 역시 도시로 간 돼지 얘기다. <옥자>를 준비할 때 영감을 준 측면이 있나?

봉준호 오늘 아주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봤다. 처음 본 건 2000년 중반이었다. 1편도 크게 히트했지만 2편을 더 좋아한다.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옥자>에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처연하고 어두운 정서가 깔려 있는데 <꼬마돼지 베이브 2>의 전체적인 느낌이 <옥자>에 영향을 준 것 같다.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옥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옥자도 말을 할 수 있으면 어땠을까.

정지연 옥자가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봉준호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미자만 알아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정지연 아이디어의 단계에서 <옥자>는 처음에 어떻게 구체화됐는지 듣고 싶다.

봉준호 2001년도에 <플란다스의 개>가 완전히 실패하고 절망의 늪을 헤매던 시절에 ‘둔자’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산골에서 살던 애가 집 뒤에서 엄청난 산삼을 발견해서 그걸 팔러 도시에 가는 이야기였다. 산골에서만 평생 자란 애가 거래를 하러 가면 도시의 이상한 애들이 막 사기치려고 들러붙지 않겠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상한 모험극 구조의 시놉시스를 썼었다. 하지만 너무 재미없어 보여서 컴퓨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2010년에 <설국열차>를 준비할 때 ‘옥자’라는 동물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엄청 큰데 억울하게 생긴 동물. ‘슈퍼 토마토’나 ‘슈퍼 연어’처럼 품종을 개량한 생물에는 큰 게 많다. ‘벨지안 블루’라는 거대 소도 있다. 크다는 것에서 시작해 점점 식품 산업 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갔다. 거기에 동물을 파트너로서 둔 둔자라는 산골 소녀가 더해졌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옛날에 어느 산골 소녀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와 둘이 산에 살던 분인데 지상파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고, 그걸 계기로 이동통신사 CF를 찍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러다 어떤 강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지금 그분은 비구승이 된 걸로 안다. 그 사건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정지연 <설국열차> 다음 바로 <옥자>를 구상한 건가.

봉준호 2010년에 서우식, 김태환 프로듀서와 스토리라인을 고려하고 써 놓은 시놉시스가 있었다. <설국열차>를 찍으러 체코에 가야 했으니 그분들이 자료조사를 시작했고 예비 작가가 시나리오도 쓰고 그랬다.

정지연 <옥자>는 <괴물>의 연장선에서 보이는 측면이 있다. 다만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로 호명되고, 옥자는 일종의 식구처럼 느껴지면서 제품으로 호명된다. 감독님이 <괴물>을 염두하고 발전시킨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괴물> 때에는 한국 CG 기술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진 건가.



봉준호 이번에는 한국과 미국 팀이 섞여 있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10년 사이에 엄청 달라졌다. 가격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소프트웨어는 많이 개발되면서 상향 평준화됐다. <꼬마돼지 베이브 2>를 마침 봤는데, 거기서 리드 애니메이터였던 에릭 드 보아(Erik-Jan de Boer)가 여러 경력을 쌓다가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를 구현한다. 그분이 오스카를 받을 때 나는 <옥자>의 CG를 누가 해야 할까 고민하던 상태였다. 조금만 허술해도 스토리가 성립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10분 이내로 이 캐릭터가 CG라는 걸 잊어야 했다. 그래서 드 보어를 만났다.

옥자 말고도 이 영화에는 고난이도의 그래픽을 사용해야 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뉴욕 퍼레이드 장면. 실제 뉴욕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화면 속의 모든 것이 CG였다. 옥자 외의 다른 CG는 모두 한국 팀과 함께했다.

정지연 소녀와 슈퍼 돼지의 아이디어가 반복된다는 느낌이 있다. 미자는 <괴물>의 현서를 닮아 보였다.

봉준호 모든 배우들은 다 고유한 세계가 있다. 둘 다 연기를 잘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다. 안서현 양은 굉장히 어른스럽고 강인한 면이 있다. 어느 집안이나 만만하지 않고 말을 신중히 걸어야 할 것 같은 애들이 있지 않나. 안서현 양에게도 의도하지 않아도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다.

정지연 촬영을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과 했다. 해외 거장들과 많이 작업했던 분이다.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봉준호 다시 <설국열차>로 되돌아간다. 영화 편집이 다 끝나고 나면 영화의 색을 만져주는 굉장히 중요한 스탭이 있다. <설국열차>의 컬러리스트가 이반 루카스(Yvan Lucas)라는 분이었다. 프랑스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분이었는데 그분이 한번 만나보라고 소개해줬다.

정지연 <설국열차>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필름 영화이고,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디지털 작업이다. 다리우스도 필름 작업을 많이 했던 걸로 안다. 필름이 아닌 디지털로 작업하면서 어떤 매혹이나 한계를 느꼈나?

봉준호 처음에는 35mm 필름으로 하려고 했다. 나도 촬영감독도 필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미국에는 아직 필름 현상소가 남아 있다. 타란티노와 J.J. 에이브람스, 크리스토퍼 놀란을 비롯한 감독들이 코닥이랑 거래를 했다고 한다. 1년에 일정량의 필름을 생산해 주면 그걸 책임지고 소비하겠다는 계약. 나는 뭐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디지털로 해보니까 의외로 좋더라(웃음). 선과 악을 나누듯 ‘필름은 선, 디지털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어떤 새로운 미학을 발견하느냐의 문제다.

어쨌든 필름으로 촬영하기로 했는데 영화가 투자에 난항을 겪다 결국 투자자가 넷플릭스로 결정됐다. 감독의 최종 편집권을 보장하고 모든 걸 지원해 준다더라. 그런데 회사 원칙이 디지털 4K로 찍어야 한다고 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이 모두 지키는 원칙 같은 거다.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협상도 하려 했는데,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안 되는지 10페이지짜리 서류를 보내주더라. 그래서 그냥 디지털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필름이 안 된다고 하니 다리우스가 ‘알렉사 65’라는 카메라 기종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그 카메라는 해상도가 6.5K다. 학교에서 선생이 머리가 왜 이렇게 기냐고 하면 그 다음 날 삭발하고 오는 애들 있잖나. 다리우스가 약간 그런 기질을 갖고 있다. 그걸로 뉴욕의 어떤 실험영화 감독과 작업해 봤다고 했다. 나도 호기심이 났고, 테스트 촬영을 했다. 시네마틱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카메라로 하게 됐다. 강원도의 자연을 찍을 때 그 위력이 잘 살아난다.

정지연 예전에 김우영 촬영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카메라를 다룰 줄 아는 누구를 붙여도 잘 찍을 거라고 말하더라. 감독의 머리 안에 저런 이미지들이 있지 않으면 그런 화면이 잘 안 나온다고 말했었다.



봉준호 콘티나 프레이밍, 이동은 직접 설계하긴 하는데, 빛, 색깔, 질감 같은 건 촬영감독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살인의 추억>도 김형구 촬영감독의 해석이 많이 들어가 있다. 송강호 씨가 논으로 돌아왔을 때, 콘티에는 없었는데, 김형구 감독이 제안했던 하이앵글이 있다. 그런 상호작용이 많이 있다.

영화에서 옥자가 300숏 정도 나오는데, VFX가 연관되는 장면은 정말 미리 설계한 대로 가야 한다. 전체 예산에서 CG 장면이 몇 컷이 나올 수 있는지 미리 계산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싼 출연료를 가져간 건 옥자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옥자가 나오는 장면은 계획한 대로 갈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못 바꾼다. 다른 드라마의 숏들은 다리우스와도 함께 많이 얘기했고, 그때그때 변동시킬 수 있었다.

정지연 넷플릭스가 1차 윈도우이다 보니 개인 미디어의 스몰 스크린으로 상영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미장센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봉준호 사실 우리는 일부러 무시했다. 물론 이렇게 큰 예산의 영화를 감독 마음대로 찍게 해준 넷플릭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웃음).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걸로 보는 관객들을 좌절하게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익스트림 롱 숏으로 찍은 것들, 가령 무덤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미자는 거의 점처럼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보면 미자가 안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보다 포기하게 만드는 거다(웃음). 극장에서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여기저기서 GV를 하고 있다. 편하게 집에서 볼 수 있는데 극장까지 찾아와 준 관객들에게 감사하다. <옥자>의 30만 관객들은 나에게 거의 3000만의 느낌이다.

정지연 본의 아니게 감독님이 한국의 넷플릭스 전도사가 됐다. 개인적으로 디지털 이론에 관심이 많은데, 스몰 스크린의 확산과 함께 영화의 서사 구성이나 미장센이 달라질 거라는 논의를 많이 한다. 롱 숏, 롱 테이크는 극장의 미학이라서 <옥자>에서 많이 쓰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강원도의 풍광이 바로 나오더라.


봉준호 극장 하는 분들이 위협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되더라. 가정용 4K 프로젝터가 나오기 시작했고, 가격대도 점점 내려가는 중이다. 먼 미래를 보면 분명 극장에 위협이 된다. 그렇지만 이건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느꼈던 것이다. 극장은 나름대로 다른 카드를 내놓을 것 같다. 결국 극장과 스몰 스크린이 공존할 거라고 보는데 경쟁의 양상은 훨씬 복잡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를 극장에서만 상영하는 특정 기간은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넷플릭스에 감사하면서 이야기하자면(웃음), 일정한 기간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개인이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집에서 보면 전화를 받느라 멈출 수 있고, 배고프면 멈출 수 있다. 감독이 상영 시간 동안 장악하려고 했던 리듬을 끊기 쉽다. 감독 입장에서는 극장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정지연 영화에서 조금 의아했던 건 미자 캐릭터다. 감독님 영화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장르적인 이야기 속에 탈장르적인 캐릭터들이 있었다. 한국적인 경험에서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파워가 있었다. 근데 미자는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



봉준호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뻔뻔해지는지, 나는 그게 너무 사실적으로 보였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는 아이인데 마음이 급하면 트럭에도 올라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관객들이 마음의 준비는 해야겠다 싶어서 미자가 산을 막 내려오다가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여줬다. 이런 시퀀스에서 관객들에게 일단 학습을 시킨 다음, 유리창을 부수고 트럭 위로 점프를 한다(웃음). 통유리를 부수는 장면 같은 건 만화적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사실적으로 보았다. 안서현 양에게도 “너 이게 이상하니?”라고 물어보면 “아뇨”라고 대답했다. “부수는 거죠 뭐” 이런 식으로 반응해서 좋았다.

정지연 지하상가 장면에서 가장 큰 활력을 느꼈다. 감독님 영화에서 지하공간, 폐쇄공간은 상징도 많고 중요한 공간인 것 같다. 인터뷰를 보니 그중 상당수가 세트 촬영이라고 하더라. 그게 세트일 거라고 생각은 못했다..

봉준호 세트와 실제 공간이 섞여 있다. 처음 흑인 미군 병사가 놀라는 장면의 계단은 대전이다. 그 다음 상가에 들어온 뒤부터는 회현 지하상가다. 상인협회의 협조를 받아서 새벽에 이틀 밤 동안 어렵게 촬영했다. 회현 지하상가에서 옥자가 코너를 딱 돌면 배우 이정은 씨가 있다. 거기부터는 남양주 세트장이다. 회현 지하상가를 복제하다시피 만든 다음 다 때려 부쉈다. 실제 상가에서는 그렇게 파괴적인 장면을 찍을 수 없다.

정지연 후반부의 무수한 돼지들은 마치 수용소처럼 보인다. <설국열차>에서 하층 계급의 이미지도 그렇고, 수용소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봉준호 축산업이 실제로 그렇다. 한 마리의 소는 ‘동료’들이 도살장에서 계속 죽어나가는 동안 비육장에서 유전자 조작 옥수수로 만든 사료를 먹으며 6개월간 살을 찌운다. 그리고 결국 도살장으로 들어간다. 콜로라도에 있는 대형 도살장에 견학을 가서 봤는데, 차로 20분을 달려도 계속 소들이 나온다. 점점 살을 찌우면서 건물 가까이로 가는 거다. <옥자>의 그 장면도 이런 현실을 리얼하게 묘사한 거다. 대신 철조망에는 약간 아우슈비츠의 느낌을 넣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식량 생산인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홀로코스트다. 동물의 입장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묘사했다. 참고로 <설국열차>의 꼬리칸은 2차 대전 당시 가장 시설이 안 좋은 포로수용소나 난민 캠프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정지연 그동안 감독님 작품의 엔딩에는 윤리적 불안의 이미지가 보였다. 불안의 순간에서 영화가 종결되는 느낌이 강했다. 이번 영화는 롱 숏으로 밥을 먹는 장면으로 끝난다.

봉준호 항상 끝이 찜찜하다고 싫어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비난은 평생 짊어져야 할 것 같다. 옥자도 무사히 돌아오긴 했는데 영웅의 귀환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자가 완전히 파괴가 되어서 돌아온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애매하고 찜찜한 부분을 느끼면서 찍었다. 다시 찾은 평화인데, 불안한 평화 같다. 새끼돼지는 나중에 추가한 거다. 원래는 마당에서만 보여주려고 했는데 에릭 드 보아가 그렇게 제안했다. 옥자와 미자는 수만 마리의 다른 옥자들을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고 왔다. 거기서 겨우 한 마리를 데려온 건데 화면에 같이 잡히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CG팀 입장에서는 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건데 적극적으로 제안해 주니 정말 고마웠다.



관객 1 폴 다노와 제이크 질렌할을 활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간 이 배우들이 보여주지 않은 모습들이라고 생각한다. 또 서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괴물>과 달리 좀 비약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봉준호 폴 다노를 10여 년 전쯤 처음 만났다. <설국열차>에서 바퀴벌레 제조하시던 폴 라저(Paul Lazar)가 소개시켜 줬다. 그때 폴 다노는 무슨 이상한 인디밴드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더라. 처음 만났을 때 한국 감독들 이름을 줄줄이 댔다. 아시아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영화광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많이 맞는 역이 많다. 멍청이, 괴짜, 이상한 놈, 실패한 덕후의 느낌. 그런데 눈빛이 깊고 예쁜 느낌이 있다. 그런 게 영화에서 잘 살아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묘한 아름다움을 찍고 싶었다.

서사 전개의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했으면 더 재밌었을 수도 있는데, 결말 템포에 급급하다 보니(웃음). 어릴 때 좋아하던 영화 중 나사의 달 착륙 음모론을 다룬 <카프리콘 원>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데 마지막에 테리 사발라스(Telly Savalas)라는 개성파 배우가 다 해결해 버리는 영화다. 그런 걸 어릴 때부터 보면서 쾌감을 느꼈다. 게다가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사람이 엄청 지쳐서 쉬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런 것에 감상을 방해받을 수도 있다.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관객 2 뉴욕 회의실 장면에서 배경으로 쓰는 소음들이 인상적이었다.

봉준호 최태영 엔지니어가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미자를 초청하기로 하고 틸다 스윈튼이 좋아할 때 엘리베이터 소리가 ‘띵동’하고 난다. 처음에는 뭔가 너무 만화 같고 노골적인 것 같아 싫었는데, 점점 너그러워지면서 받아들였다. 과하다고 생각해서 빼달라고 한 것도 있긴 한데 나머지는 좋은 아이디어들이라서 받아들였다. 그 장면은 공간도 미니멀하고 여백이 많다. 사운드의 디테일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상황이라 판단했다.

관객 3 인물들의 묘사나 관계가 일반적인 선악 대립 구도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스티븐 연은 거짓 통역을 하기도 하고, ALF는 옥자의 구조를 도와주지만 옥자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봉준호 워싱턴에서 실제 ALF 멤버들을 만났다. 이들의 기본 취지는 나도 이해하지만 방법적으로 과격한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타인의 사유재산을 파괴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취지를 지지하지만 당신들을 슈퍼히어로처럼 그릴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들을 희화화하거나 ‘괴짜’로 묘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폴 다노가 폭력을 싫어한다면서 스티븐 연을 패는 건 모순적이지만 나름 이유는 있다. 미자가 바라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사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미자가 옥자에게 팔이 물려 있을 때 폴 다노가 옥자를 때리려고 한다. 실제 멤버와 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도 그럴 것 같다고 얘기를 하더라. ALF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만 결국 상식의 연장선상에서 그 지점에 도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에서는 동물운동이나 채식주의를 유난 떤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인간도 살기 힘들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동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인간도 사랑할 수 있는 거라 본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여러 관점이 있는데 아직은 각 문화권마다 차이가 크다. ALF의 멤버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싶었다. 실버가 토마토를 안 먹겠다고 하니까 같은 멤버들도 그를 약간 이상하게 바라본다.

실제 유전자 관련 식품업자들도 만났었다. 그분들은 인류의 식량 위기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영화에서 틸다가 소시지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괜찮은 식품이지만 대중들이 하도 유전자 조작 식품에 공포가 크기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녀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나의 입장은 옥자, 미자와 ALF의 편이지만 이 대사를 통해 미란도 쪽에도 최소한의 변명의 여지를 주려고 했다.

관객 4 엔딩크레딧에 ‘옥자 목소리’가 따로 있더라. 녹음 과정이 궁금하다.

봉준호 세 명의 이름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녹음실에서 후시 녹음한 이정은 배우, 뉴질랜드에만 있는 돼지의 소리를 보내준 사운드 디자이너인 데이브 화이트헤드. 그리고 연기와 실제 돼지 소리의 소스를 가지고 디지털적으로 최종 변경한 최태형 감독. 60%는 실제 돼지의 소리가 들어갔고, 감정이 담긴 장면은 이정은 배우가 한 게 많다.




관객 5 후반에 미자가 금돼지를 주고 옥자를 사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이 장면을 구상하게 된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다.

봉준호 그 신은 2015년에 완성한 초고부터 있었다. 금돼지의 출발은 할아버지인데, 할아버지는 옥자와 미자를 떼어놓고 싶어한다. 변희봉 배우 세대의 어르신들은 동물에게 정도 주지만 그 정을 끊을 때는 되게 단호하다. 이름 부르면서 키우던 개를 복날에 잡아먹기도 한다. 영화에도 할아버지가 미자 앞에서 돼지 그림을 그리고 안심, 등심, 이런 얘기를 해버리지 않나. 그리고 미자에게 옥자 대신 금돼지를 준다. 처음부터 미자는 그게 탐탁지 않아 금돼지를 던져 버린다. 하지만 이걸 언젠가 쓸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서는 나중에 따로 금돼지를 챙긴다.

관객분이 이야기한 그 거래 장면에서는 미자가 낸시의 수준에 맞춰준 것처럼 보인다. 낸시라는 인간은 대화나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 자본주의의 가장 천박한 형태가 의인화된 사람이다. 미자는 그런 사람을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었을 거다. 자존심이 있는 아이로서 미자가 낸시 수준에 맞춰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자는 비록 거래를 했지만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것처럼 행동했다. 왠지 그렇게 말을 하니까 덜 찝찝하더라. 그게 미자의 이상한 성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지연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봉준호 오늘도 시나리오를 쓰다 왔다. 기생충은 안 나오고, 인간의 감정에만 충실한 영화다.


일시 8월 5일(토) 오후 3시 10분 <옥자> 상영 후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장혜진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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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시네바캉스 서울]


어느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 대한 매혹

- <페노메나>

 

여기 눈을 뗄 수 없는 고혹적인 소녀 한 명이 있다. 길고 검은 머리칼과 살짝 홍조를 띤 하얀 피부가 대조를 이루는 그녀의 얼굴에는 또래보다 조숙한 분위기를 넘어선 초월적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기품 있는 미소녀 제니퍼(제니퍼 코넬리)는 <페노메나>의 도입부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의 머리가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전시된 다음 등장한다. 이후 차 안에 날아다니는 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제니퍼의 얼굴은 어느새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제니퍼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잦은 횟수로 등장하는 제니퍼의 바스트 숏이 갖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빼어난 외모의 주인공을 탐미하는 과정에서 바스트 숏이 자주 노출되는 건 납득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페노메나>의 경우, 부패한 얼굴이나 벌레 떼의 공격, 날카로운 흉기에 찢겨나가는 얼굴들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번갈아 등장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발견한 시점부터 극 중 제니퍼의 얼굴(혹은 상반신)이 여러 상황과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된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제니퍼가 처한 수난이 극한에 도달할 때 그녀를 성녀의 형상에 가깝게 연출하는 화면이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곤충과 교감할 수 있다고 말한 제니퍼를 학생들이 조롱할 때는 카메라가 트랙인(track-in)으로 들어가고 환한 조명은 그녀의 상반신을 비춘다. 이때 창밖으로 벌레 떼가 몰려들지만 그 기세가 맹렬해질수록 후광과 함께 빛나는 소녀의 미소는 자신감 이상의 힘을 얻는다. 또한 밤에 학교를 나갔다는 이유로 뇌파 검사를 받는 제니퍼의 얼굴 역시 가시 화관을 쓴 성녀를 연상시킨다.

연쇄 살인범은 소녀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시체를 보관한다. 제니퍼를 동경하고 질시하는 범인은 제니퍼의 육체 역시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베어내는 데는 실패한다. 한편, 공포에 질린 소녀들의 뒤를 쫓던 카메라 역시 다른 방식으로 제니퍼를 탐미하고 소유하려 한다. 제니퍼를 성녀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장면뿐 아니라, 그녀가 변호사에게 전화하거나 버스를 타고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제니퍼의 바스트 숏은 가장 먼저 대두하며, 결코 빠지는 경우가 없다. 이로 인해 관객은 그녀의 장밋빛 볼과 단정한 이목구비, 커다랗고 깊은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

다만 제니퍼의 전신이 부각되는 예외적인 시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그녀가 학교를 탈출해 하얀 원피스를 입고 브루크너 선생의 집으로 향할 때다(이는 <킬, 베이비... 킬!>(마리오 바바, 1966)에 등장하는 하얀 옷의 소녀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지알로’의 선구자 마리오 바바를 계승하는 아르젠토는 지알로 영화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자신의 세계 안에 위치시키는 방식에 있어 차이를 드러낸다. 바바가 <사탄의 가면>(1960)에서 바바라 스틸의 얼굴에 쇠못을 박으며, 즉 그녀의 신체를 파괴하며 자신만의 괴기의 미학을 추구하는 데 주저가 없었다면, 아르젠토는 제니퍼 코넬리의 얼굴에 흠 하나 내지 않는다. 또한 극 중 연쇄 살인범이 머리를 잘라내는 것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 쾌감을 느꼈다면, <페노메나>의 카메라는 프레임을 제니퍼의 얼굴에 고정하면서 매혹된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아르젠토의 세계에 초대된 제니퍼는 아름다움과 괴기라는 양극단에서 아름다움의 축을 이끌면서도, 결과적으로 괴기라는 반대항이 보다 강하게 들끓도록 자극하는 존재이다.


권세미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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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시네바캉스 서울]


무자비한 매혹 - <뮤직 룸>


사트야지트 레이의 <뮤직 룸>(1958)은 음악에 사로잡힌 한 늙은 사내의 몰락을 그린 서사시이다. 이 영화를 서사시라고 칭한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다 무너져가는 성과 음악회가 이뤄지는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사시는 이 영화의 규모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에 남는 심상을 설명하는 말에 가까운데, 그 작은 사적 공간 속에 역사와 민족, 문명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근거가 아니라 빈약한 심상에 의존하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필연적인 방식처럼 여겨진다. 영화의 시작은 서사 이전, 아직 준비되지 않은 관객을 사로잡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공중에 매달린 채 천천히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여주는 간소한 이미지가 영화의 출발점이다. 까만 배경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샹들리에를 향해 카메라가 서서히 줌인하면서 샹들리에는 점점 화면에 가까워진다. 이때 시퀀스를 흐르는 음악은 이 숏에 무성영화에 가까운 흥취를 불어 넣는다. 무성영화에서 후시 녹음된 소리가 화면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라 착각하게 마련이듯, 움직이는 샹들리에는 마치 지금 들려오는 음악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악기 혹은 음악-기억을 담은 신묘한 물체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착각하는 순간 샹들리에는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 카메라가 샹들리에를 향해 줌인한다는 기술적인 설명은 이 시퀀스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카메라는 샹들리에에 붙들린 채 끌려갈 뿐이다. 카메라 뒤에서 샹들리에를 마주하게 된 관객은 마치 우주 한가운데서 서서히 다가오는 미지의 물체를 마주했을 때만큼이나 무력하게 샹들리에 이미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이미지와 맞붙는 숏은 성의 꼭대기 테라스에 임시로 마련된 의자 위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늙은 남자 로이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그의 얼굴은 살아 움직이며 관객을 희롱하는 샹들리에와는 대조적으로 무료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샹들리에만큼이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불가해한 얼굴로 거기 있다. 샹들리에와 로이의 얼굴은 영화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두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샹들리에가 기억하고 예언하는 힘이라면, 사내의 얼굴은 망각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흥 부호 마힘의 아들 입회식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다시금 그를 사로잡고 잊힌 기억과 대면하게 만든다.

이후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로이의 과거는 우아하고도 처절한 몰락의 서사다. 로이의 뮤직 룸에서 열린 음악회는 그의 재산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들을 죽게 만든다. 그런데도 음악은 지칠 줄 모르는 포식자처럼 그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죽음으로 내달리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음악은 남자의 삶을 서서히 좀먹는 악령인가. 하지만 관객은 음악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결코 설 수 없다. 음악은 서사를 넘어 관객을 매혹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제외하고 극 중 로이가 반응하는 유일한 소리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마힘의 집에서 들려오는 개발의 소리다. 그런데 로이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마지막 음악회 도중 무희의 몰아치는 움직임에서 촉발된(혹은 움직임과 꼭 맞춰 들리는) 악기의 반복된 소리는 어쩐지 개발의 소리와 겹친다. 이는 마지막까지 음악이 로이의 편이 아님을 씁쓸히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로이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채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음악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의 무지함은 결코 그를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로이의 몰락은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루키노 비스콘티, 1963)에서 버트 랭커스터의 육신 위에 새겨진 애잔하면서도 매혹적인 쇠락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런데 <레오파드>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편에서 몰락의 정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용됐다면, <뮤직 룸>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몰락과는 관계없이 그를 비웃으면서 샹들리에와 함께 다음 삶을 영위한다. 이는 선악과는 무관한 음악의 본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무심함인데 다름 아닌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관한 무심함이다. 이 영화가 무시무시하도록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 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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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세계

-역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남겨진 기억들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평생 동안 일관된 주제의식과 영화적 스타일을 통해 영화작가로서 분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서는 20세기 그리스와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격동적인 정치적 · 역사적 상황들이 펼쳐지며, 인물들은 그로부터 소외되고 길을 잃어 정처 없이 방황한다. 길을 잃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한 까닭에 그의 영화에서 역사란 무질서하고 혼탁하며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역사는 부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는데, 이는 다층적인 것들의 결합에 의해 복잡하게 변동하는 세계를 담아내면서 그 부재를 채워나가는 일종의 열린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는 인물들의 삶을 억압하거나 혹은 그들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둔다. 그로 인한 상처는 집단 혹은 개인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계에 무언가 공백이 있음을 느낀다. 무언가 부재한다는 것, 채워지기 힘든 ‘무’의 감각을 느낀다. 이런 감각은 그들의 정신에 실존적 위기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돌아보고 직시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이러한 여정을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인물들의 물리적인 이동의 감각(로드무비)과 함께 인간 내면의 심층으로 향하는 정신적인 여정이라는 속성이 함께 요구된다. 물리적 이동과 정신적 여정은 빈번히 뒤섞이고 혼재되며, 이를 표현하는 영화 스타일은 대개 시간을 다루는 방식─특히 시간의 지속에 대한 사유─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는 롱테이크 촬영이 많아서 각 숏의 평균적인 지속 시간이 길고, 때로는 하나의 숏이 시퀀스에 이를 정도(시퀀스 숏 혹은 플랑-세캉스)인데, 이때 시간의 지속을 머금은 숏들은 단순히 외적인 길이가 긴 것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고 있다. 지속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질적으로 변화하는 전체의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 현실과 추상, 현존과 부재의 혼재와 그것들 간의 이행을 내포한다. 이런 측면에서 앙겔로풀로스의 롱테이크 숏들은 외적인 측면에서나 그 내적 속성에 있어서나 질 들뢰즈가 말했던 ‘시간-이미지’의 사례에 추가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그 시간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시간의 지속과 역사의 변화

앙겔로풀로스는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1970)에서부터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하는 인물을 통해 한 인간의 내면을 시간의 관점에서 탐구했고, <1936년의 나날>(1972)은 그것을 정치와 역사의 문제로 외연적으로 확장했다. 세 번째 영화인 <유랑극단>(1975)은 역사와 관련되는 문제의식과 모더니즘 영화미학을 계승한 시간-이미지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초기 걸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 영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미학, 현대사의 정치적 굴곡에 대한 표상의 조합을 통해 감독의 급진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며, 거의 모든 숏이 롱테이크로 이뤄진 엄격한 형식미를 보여준다.

<유랑극단>의 시간적 배경은 1932년부터 1952년인데, 이때 그리스는 2차 대전 당시의 독일 점령기, 해방 후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지원기와 내전의 시기가 교차되는 격변의 역사를 겪었다. 영화는 1952년에 벌어진 그리스 최초의 민주 선거를 기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진 그리스의 통절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한 유랑극단의 사람들을 따라간다. 이 영화의 시간성은 길을 잃은 역사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혼재되어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혼돈의 감각이야말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앙겔로풀로스 식의 대답일 것이다. 즉 이 혼돈은 이 영화의 인물들이 역사의 변동을 체험하여 느끼는 감각, 아울러 그리스인들이 과거에 겪었던 역사적 감각에 대한 구조적 표현인 것이다.

이때 미학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각기 다른 시간대의 변화가 주로 시간의 지속 내(하나의 롱테이크 숏 내부)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시간의 지속에서 미장센의 변화를 창출한다거나 트래블링 숏의 순환적 운동에 시간의 질적 변화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구현되며, 여기에 ‘죽은 시간’(어떠한 내러티브적 사건 진행이 멈춰진 시간)과 ‘빈 공간’(어떠한 사건을 통해 특정화되지 않은 공간)의 활용이 효과적으로 결합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이 합당한 이유는 역사의 시간대라는 것이 완전히 통합될 수도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도 없는 모호한 덩어리인 까닭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것을 ‘무리수적 절단’이라고 말했는데, 즉 무언가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 순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하는 숏을 통해 시간의 변화는 질적으로 내면화되고 그 자체로 어떠한 변증법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느리게 진행되는 시간의 지속을 덩어리째 체험하며 프레임 내에서 발생하는 세밀한 변화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특별한 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본다면, 우선 롱 테이크의 숏에서 미장센의 변화와 죽은 시간을 활용하여 역사적 시간의 변화를 표현한 장면이 있다. 이 숏은 해변가에서 투숙 장소로 걸어가는 극단 단원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이때의 단원들의 외모, 그들이 걸어가는 도중에 지나가는 선거유세 차량, 그리고 게시판의 선거 포스터로 미루어 여기가 1952년의 시간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선거유세 차량이 단원들을 지나쳐 철길을 따라 멀어지는데, 카메라는 패닝을 한 후 멈춰 서서 사라져가는 차량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죽은 시간). 오랜 시간이 흐르고 카메라가 왜 이렇게 멈춰서 있는지 의문점을 가질 때쯤, 원경 쪽에서 전경 방향으로 다른 차량이 다가와서 단원들이 지나갔던 쪽으로 건너간다. 선거 유세 포스터가 붙어 있던 게시판에는 ‘정지(HALT)’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옆에는 독일 군인들이 서 있다. 죽은 시간의 지속은 1952년의 시간대를 독일점령기로 되돌린 것이다. 그 덩어리째 존재하는 시간의 지속 내에서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역사의 시간대가 변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로서 영국 지원기였던 1946년을 맞이하는 축제가 열린 술집 앞 시퀀스를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 영국 권력에 아첨하는 무리들은 총의 힘으로 진보주의자들을 압도한 후, 새벽에 술집을 나와 이열종대로 골목길을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며 영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행렬을 카메라는 수평 트래블링을 통해 아주 긴 시간 동안 따라간다. 그 사이에 그들은 길의 좌측 편을 따라 걷다가 우측 편을 따라 걷다가 옮겨 다니는데, 이는 그들이 아첨하는 대상이 바뀌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의 행렬이 더 크게 변하는 것은 외화면에서 선거연설 소리가 들릴 때이다. 그들의 발걸음을 포착한 트래블링 숏의 지속 내에서 1946년에서 52년으로 시간의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그 남자들은 갑자기 환호하며 뛰어가 연설의 지지 세력에 참여하며, 이때 유랑극단은 그 곁을 스쳐 지나간다. 이는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거기에 붙어 아첨하는 무리들의 박쥐 같은 행동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어떤 시기이건 변함없이 역사에서 소외된 자들처럼 부유하는 유랑극단의 처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이다.

세 번째 사례는 독일군이 물러간 직후에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깃발을 들고 자유를 외치는, 하이 앵글의 롱 숏으로 이뤄진 시퀀스 숏이다. 사람들은 미국, 영국, 소련 등 저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강대국들의 깃발을 들고 있다. 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른 나라의 지배력 하에 놓이게 되는 그리스의 운명을 드러낸다. 집회 도중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총을 발사하여 몇몇 사람이 죽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그들의 도피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비춘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파이프 연주자가 지나가고 살아남은 아코디언 연주자 할아버지가 도망친다. 카메라는 또 광장을 한 바퀴 돌고, 이번에는 단 한 종류의 깃발(소련)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광장에 몰려든다. 카메라의 원을 그리는 순회, 그리고 빈 공간과 죽은 시간의 활용으로 역사의 시간대가 변한 것이다. 이 순회하는 움직임은 단순히 역사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것의 영원회귀와도 같은 반복적인 속성까지 드러낸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폭력과 그에 대한 계속되는 망각이 이 순회의 움직임에 담겨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핍박받으며, 이에 계속해서 광장에 모여들어 자유를 외치는 것이다.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자유를 향한 의지는 계속해서 좌절된다. 마찬가지로 연극 공연을 시도하는 유랑극단의 노력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끊임없이 중단된다. 극단의 멤버들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거나 전쟁에 휘말리면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남겨진 자들은 공허의 감각에 빠진다. 그들이 겪는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느끼는 부재의 감각과 ‘무’의 감각은 안개 속에 흐릿하게 잠긴 텅 빈 풍경들과 같은 추상적 이미지들로 표현된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의 조건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유랑극단>이 욕망하는 시간인 1952년 민주선거는 그리스인들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감독의 차기작인 <사냥꾼들>(1977)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영화에서 평생을 투옥과 고문에 시달려 온 한 남자는 빨치산 대원의 시체에 대고 말한다. “혁명은 과연 언제 일어날까?” 자유에의 열망은, 혁명은, 언제나 더 큰 권력에 의해 좌절되어 왔다.

 

개인적이며 역사적인 여정

앙겔로풀로스는 경력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역사의 변화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상흔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즉 역사에 휘말린 인물들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고, 그것을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정신적인 문제, 기억과 망각의 문제, 실존의 위기의 문제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는 까닭에, 후기 영화들에서 주인공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시간이 흘러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기억의 상흔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억을 직시하는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여정의 사례로서 발칸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장대한 지리적 여정을 통해 역사와 기억의 세계에 접속하는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1995)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A’(하비 케이텔)가 고국으로 돌아와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이다. 영화감독A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발걸음은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자기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인하여 말이다. 이제 그는 잃어버린 필름, ‘마나키스 형제’의 (발칸 반도를 기록한) 첫 시선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아테네에서 시작해서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를 지나 사라예보에 이르는 기나긴 지리적 여정이다. 어떤 면에서 이 여정은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발칸 반도를 기록한 최초의 시선을 바라보고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과 조우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한편 이 여정은 지극히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지리적 이동은 발칸 반도의 20세기 역사 전반의 상흔 그리고 동시대적인 역사성의 흔적을 모조리 훑어나가는 것이다. 발칸 반도는 마나키스 형제가 첫 시선을 담아낸 1905년에도, 영화의 배경인 1994년에도 변함없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발칸 반도를 담은 최초의 필름은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일부는 불타 없어졌고 일부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된 그 필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격변과 굴곡 때문에 사라졌던 것이다. 또한 영화감독A의 최종 종착지인 사라예보는 1994년에도 여전히 전쟁의 화염으로 뒤덮여 있다(앙겔로풀로스는 짙은 안개로 그 어두운 현실을 표현한다).

영화감독A는 오랜 여정 끝에 사라예보에 가서 마침내 잃어버린 필름을 찾는다. 그는 필름에 기록된 기억을 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인간들의 기억과 대지의 기억을, 그 고통과 절규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눈으로 보아야 했다. <율리시즈의 시선>은 영화감독A의 시선을 빌어, 발칸 반도의 고통에 찬 역사와 그 역사에 깃든 정신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개인의 실존의 위기는 이 역사를 마주 봄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실존적 위기 자체가 역사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시간과 육신의 시간의 엇갈림

역사에 휘말려 희생된 개인들의 삶을 바라보는 앙겔로풀로스의 시선은 인간의 더 깊은 심연으로 향한다. 그 심연에는 근원적 ‘무’의 감각이 있다.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부재의 감각의 근원으로서의 모호한 실재와 조우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것은 시간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탐방하는 치유의 여정이다. 이때 그들의 삶에 출몰하는 기억의 시간이 과거에 실재했던 시간과 계속해서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환기된 기억의 이미지에는 무언가 시간의 엇갈림이 있다.

<율리시즈의 시선>에는 이러한 엇갈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 개의 시퀀스가 있다. 첫째는 영화감독A가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다가 출입국 관리소에 끌려가서 겪는 몽환적인 시퀀스이다. 그는 자신의 여권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 불려가지만, 사실은 자기자신으로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니다. 관리소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서 그의 몸은 역사의 일부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마나키스가 전쟁 도중에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겪는다. 마나키스의 기억이 영화감독A의 기억 속으로 통째로 수축한 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공간에 배어 있던 기억이 그 기억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육체를 만나 그 내부로 침투한 것이다. 그는 심문을 당하고 반동분자이자 아나키스트로 몰려 급기야는 총살을 당하기 직전까지 가며,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외친다. 마나키스의 기억과 영화감독A가 겪는 환상과 현실의 이행 과정은 트래블링과 패닝으로 이뤄진 롱 테이크 숏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육신과 역사적 기억의 엇갈림이다.

두 번째 사례는 영화감독A가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어머니를 만나며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드는 시퀀스이다. 1945년이 시작점이다. 이 시퀀스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친척들은 그 당시 과거의 모습이며, 영화감독A는 중년의 육신 그대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어린 소년으로 인식된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 후, 10분여에 이르는 롱테이크 숏이 시작된다. 집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가족 파티가 열리고 있다. 이때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다. 아마도 전쟁터 혹은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것이다. 피아노가 연주되고 모든 이들이 기쁨에 들떠 춤을 춘다. 이어 시간의 주기가 바뀌어 1948년 새해 첫날, 한 남자가 잡혀간다. 피아노의 곡조는 슬퍼진다. 또 시간의 주기가 바뀌어 1950년 새해 첫날, 인민군이 들어와 집안의 가구들을 가져간다. 심지어 피아노까지 가져가서 이제 춤조차 출 수 없다. 그들의 새해 파티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역사의 권력이다. 대신에 그들은 가족사진을 찍는다. 유년 시절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을 이 가족사진을 찍을 때, 외화면에서 들어온 영화감독A는 소년의 모습으로 같이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소년의 얼굴로 줌-인을 한다. 시퀀스가 바뀌고 커트가 되면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이 시퀀스에서 영화감독A는 현재의 육신(물질)으로 과거의 기억과 접촉한다. 이때의 엇갈림은 기억의 본질적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앙겔로풀로스의 마지막 장편영화인 <먼지의 시간>(2008)에서 찾을 수 있다. <먼지의 시간>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격정적 사랑에 빠졌던 남녀 스피로(미셸 피콜리)와 엘레니(이렌느 야곱),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던 남자 야곱(브루노 간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피로는 어떠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도피 중인 엘레니를 찾아 소련에 온다. 그들은 단 한 번의 사랑을 나누고, 스피로는 추방되며 엘레니는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그들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이들은 한순간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다. 역사는, 그리고 국가권력은 언제나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영화는 세 명의 희생당한 삶을 현재와 과거의 기억을 자유로이 오가며 보여준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선형성을 벗어나 시적 논리로 계속해서 만나고 교차한다. 이를 일반적인 형식의 플래시백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기억의 이미지에 대한 회상 주체가 명백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추상적 기억의 이미지들이 혼재되며 형성하는 순간적인 생성의 순간, 부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던 역사는 그 일순간에 비로소 섬광과도 같은 상을 갖게 된다.

역사 속에서 길을 잃은 그들의 정신적인 시간은 여전히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떤 다른 차원의 시간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인물의 육신과 정신은 같은 차원의 시간으로 조우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그 엇갈림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를 두고 다른 측면에서 두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그것은 역사 속에서 표류 중인 그들의 시간대가 기억 속에서조차도 결코 온전히 조우하지 못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상은 결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은 이미 어긋난 채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둘째로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상상의 힘에 의한, 하나의 치유의 과정일 수 있다. 가령 영화의 중반부에 노년의 몸으로 조우한 엘레니와 스피로와 야곱이 예전에 함께 갔던 술집에 가는 시퀀스 숏의 예를 들어본다. 술집에서 스피로는 늙은 육신을 지닌 채 갑작스럽게 과거의 기억에 빠져들어 엘레니와 상상의 결혼식을, 혼자만의 결혼식을 올린다(1인극처럼 혼자서 신랑, 신부, 주례의 역할을 한다). 그 결혼식은 실제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부재하는 대상인 엘레니와 그녀와의 결혼이라는 것을, 상상의 힘을 통해 현존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여기에는 실현 불가능성과 더불어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이중의 부정이 있다. 그 쓸쓸한 결혼식 후 문밖으로 나가려던 스피로는 갑자기 엘레니를 만나게 된다. 늙은 육신의 스피로와 젊은 육신의 엘레니는 포옹하고 키스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그 술집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 시퀀스에서 상상 속에서나 이뤄질 수 있는, 혹은 어긋난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한 과거 시간과의 만남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정신적 여정일 수 있다. 영화는 그 이후 그들이 현재 시점에서 행복하게 그 술집을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이 두 번째 해석에 대한 정당성을 보다 강화해 준다. 이와 유사한 엇갈림의 사례가 있는데, 스피로를 찾아 미국에 갔던 엘레니가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 스피로를 보고 좌절감에 빠져 안개 속을 헤맬 때(과거), 엘레니의 아들이 현재 모습인 중년의 육신(윌렘 데포)으로 나타나 그녀를 안아주는 장면이다. 마치 어머니의 기억 속 트라우마를 직접적인 포옹으로 치유하고 구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세 노인들의 현재와 과거를 보여주던 영화의 여정은 기억의 여정이자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는 여정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세 명은 마침내 노년의 몸으로 서로 온전히 조우한다. 때는 20세기 마지막 날이다. 이들의 여정이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의 여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스스로 이야기하듯 그들의 시간대는 이제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야곱과 엘레니가 죽자, 스피로는 당신을 데리러 왔다며 엘레니에게 절망에 찬 손을 내민다. 그때 그의 손에 와 닿는 기적과도 같은 손은, 손녀 엘레니의 손이다. 영화는 눈 내리는 21세기 첫 번째 날의 거리를 스피로와 손녀 엘레니가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뛰어가는 숏으로 끝난다.

일찍이 앙겔로풀로스가 어린아이의 남겨진 삶에, 다음 세대에 대해 이 정도의 희망적 시선을 보내준 적은 없었다. 영화에서 노인들의 열망은 역사로 인해 거듭 좌절되었지만, 아이는 그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와 현재는 온전히 만나지 못하지만, 현재는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다. 영화에서 복잡하게 얽힌 기억의 이미지들이 변주를 이루면서 생성해낸 삶의 열망이 담긴 이미지들은 이러한 미래의 희망과 만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기억의 외재성을 받아들이는 것, 즉 니체적인 의미의 망각을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것을 기억할 세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적 여정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중단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마지막 이미지가 가장 희망에 찬 시선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박영석 중앙대학교 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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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