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시네바캉스 서울]


어느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 대한 매혹

- <페노메나>

 

여기 눈을 뗄 수 없는 고혹적인 소녀 한 명이 있다. 길고 검은 머리칼과 살짝 홍조를 띤 하얀 피부가 대조를 이루는 그녀의 얼굴에는 또래보다 조숙한 분위기를 넘어선 초월적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기품 있는 미소녀 제니퍼(제니퍼 코넬리)는 <페노메나>의 도입부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의 머리가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전시된 다음 등장한다. 이후 차 안에 날아다니는 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제니퍼의 얼굴은 어느새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제니퍼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잦은 횟수로 등장하는 제니퍼의 바스트 숏이 갖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빼어난 외모의 주인공을 탐미하는 과정에서 바스트 숏이 자주 노출되는 건 납득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페노메나>의 경우, 부패한 얼굴이나 벌레 떼의 공격, 날카로운 흉기에 찢겨나가는 얼굴들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번갈아 등장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발견한 시점부터 극 중 제니퍼의 얼굴(혹은 상반신)이 여러 상황과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된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제니퍼가 처한 수난이 극한에 도달할 때 그녀를 성녀의 형상에 가깝게 연출하는 화면이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곤충과 교감할 수 있다고 말한 제니퍼를 학생들이 조롱할 때는 카메라가 트랙인(track-in)으로 들어가고 환한 조명은 그녀의 상반신을 비춘다. 이때 창밖으로 벌레 떼가 몰려들지만 그 기세가 맹렬해질수록 후광과 함께 빛나는 소녀의 미소는 자신감 이상의 힘을 얻는다. 또한 밤에 학교를 나갔다는 이유로 뇌파 검사를 받는 제니퍼의 얼굴 역시 가시 화관을 쓴 성녀를 연상시킨다.

연쇄 살인범은 소녀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시체를 보관한다. 제니퍼를 동경하고 질시하는 범인은 제니퍼의 육체 역시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베어내는 데는 실패한다. 한편, 공포에 질린 소녀들의 뒤를 쫓던 카메라 역시 다른 방식으로 제니퍼를 탐미하고 소유하려 한다. 제니퍼를 성녀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장면뿐 아니라, 그녀가 변호사에게 전화하거나 버스를 타고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제니퍼의 바스트 숏은 가장 먼저 대두하며, 결코 빠지는 경우가 없다. 이로 인해 관객은 그녀의 장밋빛 볼과 단정한 이목구비, 커다랗고 깊은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

다만 제니퍼의 전신이 부각되는 예외적인 시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그녀가 학교를 탈출해 하얀 원피스를 입고 브루크너 선생의 집으로 향할 때다(이는 <킬, 베이비... 킬!>(마리오 바바, 1966)에 등장하는 하얀 옷의 소녀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지알로’의 선구자 마리오 바바를 계승하는 아르젠토는 지알로 영화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자신의 세계 안에 위치시키는 방식에 있어 차이를 드러낸다. 바바가 <사탄의 가면>(1960)에서 바바라 스틸의 얼굴에 쇠못을 박으며, 즉 그녀의 신체를 파괴하며 자신만의 괴기의 미학을 추구하는 데 주저가 없었다면, 아르젠토는 제니퍼 코넬리의 얼굴에 흠 하나 내지 않는다. 또한 극 중 연쇄 살인범이 머리를 잘라내는 것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 쾌감을 느꼈다면, <페노메나>의 카메라는 프레임을 제니퍼의 얼굴에 고정하면서 매혹된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아르젠토의 세계에 초대된 제니퍼는 아름다움과 괴기라는 양극단에서 아름다움의 축을 이끌면서도, 결과적으로 괴기라는 반대항이 보다 강하게 들끓도록 자극하는 존재이다.


권세미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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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시네바캉스 서울]


무자비한 매혹 - <뮤직 룸>


사트야지트 레이의 <뮤직 룸>(1958)은 음악에 사로잡힌 한 늙은 사내의 몰락을 그린 서사시이다. 이 영화를 서사시라고 칭한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다 무너져가는 성과 음악회가 이뤄지는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사시는 이 영화의 규모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에 남는 심상을 설명하는 말에 가까운데, 그 작은 사적 공간 속에 역사와 민족, 문명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근거가 아니라 빈약한 심상에 의존하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필연적인 방식처럼 여겨진다. 영화의 시작은 서사 이전, 아직 준비되지 않은 관객을 사로잡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공중에 매달린 채 천천히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여주는 간소한 이미지가 영화의 출발점이다. 까만 배경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샹들리에를 향해 카메라가 서서히 줌인하면서 샹들리에는 점점 화면에 가까워진다. 이때 시퀀스를 흐르는 음악은 이 숏에 무성영화에 가까운 흥취를 불어 넣는다. 무성영화에서 후시 녹음된 소리가 화면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라 착각하게 마련이듯, 움직이는 샹들리에는 마치 지금 들려오는 음악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악기 혹은 음악-기억을 담은 신묘한 물체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착각하는 순간 샹들리에는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 카메라가 샹들리에를 향해 줌인한다는 기술적인 설명은 이 시퀀스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카메라는 샹들리에에 붙들린 채 끌려갈 뿐이다. 카메라 뒤에서 샹들리에를 마주하게 된 관객은 마치 우주 한가운데서 서서히 다가오는 미지의 물체를 마주했을 때만큼이나 무력하게 샹들리에 이미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이미지와 맞붙는 숏은 성의 꼭대기 테라스에 임시로 마련된 의자 위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늙은 남자 로이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그의 얼굴은 살아 움직이며 관객을 희롱하는 샹들리에와는 대조적으로 무료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샹들리에만큼이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불가해한 얼굴로 거기 있다. 샹들리에와 로이의 얼굴은 영화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두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샹들리에가 기억하고 예언하는 힘이라면, 사내의 얼굴은 망각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흥 부호 마힘의 아들 입회식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다시금 그를 사로잡고 잊힌 기억과 대면하게 만든다.

이후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로이의 과거는 우아하고도 처절한 몰락의 서사다. 로이의 뮤직 룸에서 열린 음악회는 그의 재산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들을 죽게 만든다. 그런데도 음악은 지칠 줄 모르는 포식자처럼 그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죽음으로 내달리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음악은 남자의 삶을 서서히 좀먹는 악령인가. 하지만 관객은 음악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결코 설 수 없다. 음악은 서사를 넘어 관객을 매혹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제외하고 극 중 로이가 반응하는 유일한 소리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마힘의 집에서 들려오는 개발의 소리다. 그런데 로이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마지막 음악회 도중 무희의 몰아치는 움직임에서 촉발된(혹은 움직임과 꼭 맞춰 들리는) 악기의 반복된 소리는 어쩐지 개발의 소리와 겹친다. 이는 마지막까지 음악이 로이의 편이 아님을 씁쓸히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로이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채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음악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의 무지함은 결코 그를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로이의 몰락은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루키노 비스콘티, 1963)에서 버트 랭커스터의 육신 위에 새겨진 애잔하면서도 매혹적인 쇠락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런데 <레오파드>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편에서 몰락의 정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용됐다면, <뮤직 룸>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몰락과는 관계없이 그를 비웃으면서 샹들리에와 함께 다음 삶을 영위한다. 이는 선악과는 무관한 음악의 본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무심함인데 다름 아닌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관한 무심함이다. 이 영화가 무시무시하도록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 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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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시네바캉스 서울 ]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세계

-역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남겨진 기억들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평생 동안 일관된 주제의식과 영화적 스타일을 통해 영화작가로서 분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서는 20세기 그리스와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격동적인 정치적 · 역사적 상황들이 펼쳐지며, 인물들은 그로부터 소외되고 길을 잃어 정처 없이 방황한다. 길을 잃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한 까닭에 그의 영화에서 역사란 무질서하고 혼탁하며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역사는 부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는데, 이는 다층적인 것들의 결합에 의해 복잡하게 변동하는 세계를 담아내면서 그 부재를 채워나가는 일종의 열린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는 인물들의 삶을 억압하거나 혹은 그들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둔다. 그로 인한 상처는 집단 혹은 개인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계에 무언가 공백이 있음을 느낀다. 무언가 부재한다는 것, 채워지기 힘든 ‘무’의 감각을 느낀다. 이런 감각은 그들의 정신에 실존적 위기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돌아보고 직시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이러한 여정을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인물들의 물리적인 이동의 감각(로드무비)과 함께 인간 내면의 심층으로 향하는 정신적인 여정이라는 속성이 함께 요구된다. 물리적 이동과 정신적 여정은 빈번히 뒤섞이고 혼재되며, 이를 표현하는 영화 스타일은 대개 시간을 다루는 방식─특히 시간의 지속에 대한 사유─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는 롱테이크 촬영이 많아서 각 숏의 평균적인 지속 시간이 길고, 때로는 하나의 숏이 시퀀스에 이를 정도(시퀀스 숏 혹은 플랑-세캉스)인데, 이때 시간의 지속을 머금은 숏들은 단순히 외적인 길이가 긴 것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고 있다. 지속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질적으로 변화하는 전체의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 현실과 추상, 현존과 부재의 혼재와 그것들 간의 이행을 내포한다. 이런 측면에서 앙겔로풀로스의 롱테이크 숏들은 외적인 측면에서나 그 내적 속성에 있어서나 질 들뢰즈가 말했던 ‘시간-이미지’의 사례에 추가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그 시간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시간의 지속과 역사의 변화

앙겔로풀로스는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1970)에서부터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하는 인물을 통해 한 인간의 내면을 시간의 관점에서 탐구했고, <1936년의 나날>(1972)은 그것을 정치와 역사의 문제로 외연적으로 확장했다. 세 번째 영화인 <유랑극단>(1975)은 역사와 관련되는 문제의식과 모더니즘 영화미학을 계승한 시간-이미지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초기 걸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 영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미학, 현대사의 정치적 굴곡에 대한 표상의 조합을 통해 감독의 급진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며, 거의 모든 숏이 롱테이크로 이뤄진 엄격한 형식미를 보여준다.

<유랑극단>의 시간적 배경은 1932년부터 1952년인데, 이때 그리스는 2차 대전 당시의 독일 점령기, 해방 후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지원기와 내전의 시기가 교차되는 격변의 역사를 겪었다. 영화는 1952년에 벌어진 그리스 최초의 민주 선거를 기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진 그리스의 통절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한 유랑극단의 사람들을 따라간다. 이 영화의 시간성은 길을 잃은 역사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혼재되어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혼돈의 감각이야말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앙겔로풀로스 식의 대답일 것이다. 즉 이 혼돈은 이 영화의 인물들이 역사의 변동을 체험하여 느끼는 감각, 아울러 그리스인들이 과거에 겪었던 역사적 감각에 대한 구조적 표현인 것이다.

이때 미학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각기 다른 시간대의 변화가 주로 시간의 지속 내(하나의 롱테이크 숏 내부)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시간의 지속에서 미장센의 변화를 창출한다거나 트래블링 숏의 순환적 운동에 시간의 질적 변화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구현되며, 여기에 ‘죽은 시간’(어떠한 내러티브적 사건 진행이 멈춰진 시간)과 ‘빈 공간’(어떠한 사건을 통해 특정화되지 않은 공간)의 활용이 효과적으로 결합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이 합당한 이유는 역사의 시간대라는 것이 완전히 통합될 수도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도 없는 모호한 덩어리인 까닭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것을 ‘무리수적 절단’이라고 말했는데, 즉 무언가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 순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하는 숏을 통해 시간의 변화는 질적으로 내면화되고 그 자체로 어떠한 변증법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느리게 진행되는 시간의 지속을 덩어리째 체험하며 프레임 내에서 발생하는 세밀한 변화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특별한 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본다면, 우선 롱 테이크의 숏에서 미장센의 변화와 죽은 시간을 활용하여 역사적 시간의 변화를 표현한 장면이 있다. 이 숏은 해변가에서 투숙 장소로 걸어가는 극단 단원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이때의 단원들의 외모, 그들이 걸어가는 도중에 지나가는 선거유세 차량, 그리고 게시판의 선거 포스터로 미루어 여기가 1952년의 시간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선거유세 차량이 단원들을 지나쳐 철길을 따라 멀어지는데, 카메라는 패닝을 한 후 멈춰 서서 사라져가는 차량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죽은 시간). 오랜 시간이 흐르고 카메라가 왜 이렇게 멈춰서 있는지 의문점을 가질 때쯤, 원경 쪽에서 전경 방향으로 다른 차량이 다가와서 단원들이 지나갔던 쪽으로 건너간다. 선거 유세 포스터가 붙어 있던 게시판에는 ‘정지(HALT)’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옆에는 독일 군인들이 서 있다. 죽은 시간의 지속은 1952년의 시간대를 독일점령기로 되돌린 것이다. 그 덩어리째 존재하는 시간의 지속 내에서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역사의 시간대가 변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로서 영국 지원기였던 1946년을 맞이하는 축제가 열린 술집 앞 시퀀스를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 영국 권력에 아첨하는 무리들은 총의 힘으로 진보주의자들을 압도한 후, 새벽에 술집을 나와 이열종대로 골목길을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며 영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행렬을 카메라는 수평 트래블링을 통해 아주 긴 시간 동안 따라간다. 그 사이에 그들은 길의 좌측 편을 따라 걷다가 우측 편을 따라 걷다가 옮겨 다니는데, 이는 그들이 아첨하는 대상이 바뀌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의 행렬이 더 크게 변하는 것은 외화면에서 선거연설 소리가 들릴 때이다. 그들의 발걸음을 포착한 트래블링 숏의 지속 내에서 1946년에서 52년으로 시간의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그 남자들은 갑자기 환호하며 뛰어가 연설의 지지 세력에 참여하며, 이때 유랑극단은 그 곁을 스쳐 지나간다. 이는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거기에 붙어 아첨하는 무리들의 박쥐 같은 행동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어떤 시기이건 변함없이 역사에서 소외된 자들처럼 부유하는 유랑극단의 처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이다.

세 번째 사례는 독일군이 물러간 직후에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깃발을 들고 자유를 외치는, 하이 앵글의 롱 숏으로 이뤄진 시퀀스 숏이다. 사람들은 미국, 영국, 소련 등 저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강대국들의 깃발을 들고 있다. 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른 나라의 지배력 하에 놓이게 되는 그리스의 운명을 드러낸다. 집회 도중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총을 발사하여 몇몇 사람이 죽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그들의 도피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비춘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파이프 연주자가 지나가고 살아남은 아코디언 연주자 할아버지가 도망친다. 카메라는 또 광장을 한 바퀴 돌고, 이번에는 단 한 종류의 깃발(소련)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광장에 몰려든다. 카메라의 원을 그리는 순회, 그리고 빈 공간과 죽은 시간의 활용으로 역사의 시간대가 변한 것이다. 이 순회하는 움직임은 단순히 역사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것의 영원회귀와도 같은 반복적인 속성까지 드러낸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폭력과 그에 대한 계속되는 망각이 이 순회의 움직임에 담겨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핍박받으며, 이에 계속해서 광장에 모여들어 자유를 외치는 것이다.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자유를 향한 의지는 계속해서 좌절된다. 마찬가지로 연극 공연을 시도하는 유랑극단의 노력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끊임없이 중단된다. 극단의 멤버들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거나 전쟁에 휘말리면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남겨진 자들은 공허의 감각에 빠진다. 그들이 겪는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느끼는 부재의 감각과 ‘무’의 감각은 안개 속에 흐릿하게 잠긴 텅 빈 풍경들과 같은 추상적 이미지들로 표현된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의 조건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유랑극단>이 욕망하는 시간인 1952년 민주선거는 그리스인들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감독의 차기작인 <사냥꾼들>(1977)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영화에서 평생을 투옥과 고문에 시달려 온 한 남자는 빨치산 대원의 시체에 대고 말한다. “혁명은 과연 언제 일어날까?” 자유에의 열망은, 혁명은, 언제나 더 큰 권력에 의해 좌절되어 왔다.

 

개인적이며 역사적인 여정

앙겔로풀로스는 경력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역사의 변화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상흔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즉 역사에 휘말린 인물들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고, 그것을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정신적인 문제, 기억과 망각의 문제, 실존의 위기의 문제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는 까닭에, 후기 영화들에서 주인공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시간이 흘러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기억의 상흔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억을 직시하는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여정의 사례로서 발칸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장대한 지리적 여정을 통해 역사와 기억의 세계에 접속하는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1995)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A’(하비 케이텔)가 고국으로 돌아와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이다. 영화감독A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발걸음은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자기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인하여 말이다. 이제 그는 잃어버린 필름, ‘마나키스 형제’의 (발칸 반도를 기록한) 첫 시선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아테네에서 시작해서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를 지나 사라예보에 이르는 기나긴 지리적 여정이다. 어떤 면에서 이 여정은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발칸 반도를 기록한 최초의 시선을 바라보고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과 조우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한편 이 여정은 지극히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지리적 이동은 발칸 반도의 20세기 역사 전반의 상흔 그리고 동시대적인 역사성의 흔적을 모조리 훑어나가는 것이다. 발칸 반도는 마나키스 형제가 첫 시선을 담아낸 1905년에도, 영화의 배경인 1994년에도 변함없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발칸 반도를 담은 최초의 필름은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일부는 불타 없어졌고 일부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된 그 필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격변과 굴곡 때문에 사라졌던 것이다. 또한 영화감독A의 최종 종착지인 사라예보는 1994년에도 여전히 전쟁의 화염으로 뒤덮여 있다(앙겔로풀로스는 짙은 안개로 그 어두운 현실을 표현한다).

영화감독A는 오랜 여정 끝에 사라예보에 가서 마침내 잃어버린 필름을 찾는다. 그는 필름에 기록된 기억을 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인간들의 기억과 대지의 기억을, 그 고통과 절규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눈으로 보아야 했다. <율리시즈의 시선>은 영화감독A의 시선을 빌어, 발칸 반도의 고통에 찬 역사와 그 역사에 깃든 정신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개인의 실존의 위기는 이 역사를 마주 봄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실존적 위기 자체가 역사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시간과 육신의 시간의 엇갈림

역사에 휘말려 희생된 개인들의 삶을 바라보는 앙겔로풀로스의 시선은 인간의 더 깊은 심연으로 향한다. 그 심연에는 근원적 ‘무’의 감각이 있다.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부재의 감각의 근원으로서의 모호한 실재와 조우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것은 시간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탐방하는 치유의 여정이다. 이때 그들의 삶에 출몰하는 기억의 시간이 과거에 실재했던 시간과 계속해서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환기된 기억의 이미지에는 무언가 시간의 엇갈림이 있다.

<율리시즈의 시선>에는 이러한 엇갈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 개의 시퀀스가 있다. 첫째는 영화감독A가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다가 출입국 관리소에 끌려가서 겪는 몽환적인 시퀀스이다. 그는 자신의 여권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 불려가지만, 사실은 자기자신으로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니다. 관리소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서 그의 몸은 역사의 일부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마나키스가 전쟁 도중에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겪는다. 마나키스의 기억이 영화감독A의 기억 속으로 통째로 수축한 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공간에 배어 있던 기억이 그 기억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육체를 만나 그 내부로 침투한 것이다. 그는 심문을 당하고 반동분자이자 아나키스트로 몰려 급기야는 총살을 당하기 직전까지 가며,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외친다. 마나키스의 기억과 영화감독A가 겪는 환상과 현실의 이행 과정은 트래블링과 패닝으로 이뤄진 롱 테이크 숏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육신과 역사적 기억의 엇갈림이다.

두 번째 사례는 영화감독A가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어머니를 만나며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드는 시퀀스이다. 1945년이 시작점이다. 이 시퀀스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친척들은 그 당시 과거의 모습이며, 영화감독A는 중년의 육신 그대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어린 소년으로 인식된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 후, 10분여에 이르는 롱테이크 숏이 시작된다. 집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가족 파티가 열리고 있다. 이때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다. 아마도 전쟁터 혹은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것이다. 피아노가 연주되고 모든 이들이 기쁨에 들떠 춤을 춘다. 이어 시간의 주기가 바뀌어 1948년 새해 첫날, 한 남자가 잡혀간다. 피아노의 곡조는 슬퍼진다. 또 시간의 주기가 바뀌어 1950년 새해 첫날, 인민군이 들어와 집안의 가구들을 가져간다. 심지어 피아노까지 가져가서 이제 춤조차 출 수 없다. 그들의 새해 파티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역사의 권력이다. 대신에 그들은 가족사진을 찍는다. 유년 시절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을 이 가족사진을 찍을 때, 외화면에서 들어온 영화감독A는 소년의 모습으로 같이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소년의 얼굴로 줌-인을 한다. 시퀀스가 바뀌고 커트가 되면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이 시퀀스에서 영화감독A는 현재의 육신(물질)으로 과거의 기억과 접촉한다. 이때의 엇갈림은 기억의 본질적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앙겔로풀로스의 마지막 장편영화인 <먼지의 시간>(2008)에서 찾을 수 있다. <먼지의 시간>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격정적 사랑에 빠졌던 남녀 스피로(미셸 피콜리)와 엘레니(이렌느 야곱),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던 남자 야곱(브루노 간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피로는 어떠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도피 중인 엘레니를 찾아 소련에 온다. 그들은 단 한 번의 사랑을 나누고, 스피로는 추방되며 엘레니는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그들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이들은 한순간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다. 역사는, 그리고 국가권력은 언제나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영화는 세 명의 희생당한 삶을 현재와 과거의 기억을 자유로이 오가며 보여준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선형성을 벗어나 시적 논리로 계속해서 만나고 교차한다. 이를 일반적인 형식의 플래시백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기억의 이미지에 대한 회상 주체가 명백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추상적 기억의 이미지들이 혼재되며 형성하는 순간적인 생성의 순간, 부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던 역사는 그 일순간에 비로소 섬광과도 같은 상을 갖게 된다.

역사 속에서 길을 잃은 그들의 정신적인 시간은 여전히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떤 다른 차원의 시간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인물의 육신과 정신은 같은 차원의 시간으로 조우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그 엇갈림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를 두고 다른 측면에서 두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그것은 역사 속에서 표류 중인 그들의 시간대가 기억 속에서조차도 결코 온전히 조우하지 못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상은 결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은 이미 어긋난 채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둘째로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상상의 힘에 의한, 하나의 치유의 과정일 수 있다. 가령 영화의 중반부에 노년의 몸으로 조우한 엘레니와 스피로와 야곱이 예전에 함께 갔던 술집에 가는 시퀀스 숏의 예를 들어본다. 술집에서 스피로는 늙은 육신을 지닌 채 갑작스럽게 과거의 기억에 빠져들어 엘레니와 상상의 결혼식을, 혼자만의 결혼식을 올린다(1인극처럼 혼자서 신랑, 신부, 주례의 역할을 한다). 그 결혼식은 실제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부재하는 대상인 엘레니와 그녀와의 결혼이라는 것을, 상상의 힘을 통해 현존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여기에는 실현 불가능성과 더불어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이중의 부정이 있다. 그 쓸쓸한 결혼식 후 문밖으로 나가려던 스피로는 갑자기 엘레니를 만나게 된다. 늙은 육신의 스피로와 젊은 육신의 엘레니는 포옹하고 키스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그 술집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 시퀀스에서 상상 속에서나 이뤄질 수 있는, 혹은 어긋난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한 과거 시간과의 만남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정신적 여정일 수 있다. 영화는 그 이후 그들이 현재 시점에서 행복하게 그 술집을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이 두 번째 해석에 대한 정당성을 보다 강화해 준다. 이와 유사한 엇갈림의 사례가 있는데, 스피로를 찾아 미국에 갔던 엘레니가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 스피로를 보고 좌절감에 빠져 안개 속을 헤맬 때(과거), 엘레니의 아들이 현재 모습인 중년의 육신(윌렘 데포)으로 나타나 그녀를 안아주는 장면이다. 마치 어머니의 기억 속 트라우마를 직접적인 포옹으로 치유하고 구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세 노인들의 현재와 과거를 보여주던 영화의 여정은 기억의 여정이자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는 여정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세 명은 마침내 노년의 몸으로 서로 온전히 조우한다. 때는 20세기 마지막 날이다. 이들의 여정이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의 여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스스로 이야기하듯 그들의 시간대는 이제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야곱과 엘레니가 죽자, 스피로는 당신을 데리러 왔다며 엘레니에게 절망에 찬 손을 내민다. 그때 그의 손에 와 닿는 기적과도 같은 손은, 손녀 엘레니의 손이다. 영화는 눈 내리는 21세기 첫 번째 날의 거리를 스피로와 손녀 엘레니가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뛰어가는 숏으로 끝난다.

일찍이 앙겔로풀로스가 어린아이의 남겨진 삶에, 다음 세대에 대해 이 정도의 희망적 시선을 보내준 적은 없었다. 영화에서 노인들의 열망은 역사로 인해 거듭 좌절되었지만, 아이는 그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와 현재는 온전히 만나지 못하지만, 현재는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다. 영화에서 복잡하게 얽힌 기억의 이미지들이 변주를 이루면서 생성해낸 삶의 열망이 담긴 이미지들은 이러한 미래의 희망과 만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기억의 외재성을 받아들이는 것, 즉 니체적인 의미의 망각을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것을 기억할 세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적 여정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중단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마지막 이미지가 가장 희망에 찬 시선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박영석 중앙대학교 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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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