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작품으로서의 완결이나 가치를 논하기도 전에 그들이 야기한 스캔들로 인해 영화사에 오명을 남기기도 한다. <천국의 문>은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불운의 전범으로 곧잘 거론된다. 720만 달러 정도의 규모로 제작되기로 한 영화가 4400만 달러를 쏟아 부어 가까스로 완성된 뒤, 고작 2백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스코어를 기록함으로써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치명적 손실을 끼쳤다는 것이 이 영화에 쏟아진 저주에 가까운 혹평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장장 세 시간 삼십 분에 달하는, 미국의 탄생과 역사에 대한 이 기념비적인 메타포는 미국영화사의 문제적 감독 중 하나인 마이클 치미노의 웅혼이 하나하나의 쇼트 마다 서려 있는 역작이다.

장대한 규모와 서사시적 작풍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1976)이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1985)에 견줄만하며, 하늘과 산, 대평원을 훑어가는 장쾌한 파노라마 쇼트는 조금 먼저 나온 테렌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에 필적한다. 맬릭이나 코폴라, 베르톨루치를 의식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치미노의 야망만큼은 저들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이야기는 19세기 말 와이오밍 주 존슨 카운티를 물들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존슨 카운티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법원 수사관 제임스(크리스 크리스토퍼슨)는 패악의 온상이 된 그곳의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된다. 부유한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의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 청소 작업이 모의되면서 프랭크 칸톤(샘 워터스톤)이 이끄는 지주들은 강도 혐의를 씌워 존슨 카운티의 이주민들에 대한 합법적인 살생부를 만든다. 살생부에는 제임스와 그의 친구 네이트(크리스토퍼 월큰) 사이에서 삼각관계에 놓인 창녀 엘라(이자벨 위페르)도 끼어 있다. 20년 전 대학 졸업식에서 자유와 이상을 꿈꾸었던 동무들은 찌들은 모습이 되어 재회한다. 희망과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온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돈만 밝히고, 뿔뿔이 패거리로 나뉘어 서로 으르렁거린다. 한때 평화와 생기가 넘쳤던 이 공동체는 점점 위험해지더니 천국의 향기가 사라진 학살과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 버렸다.


<디어 헌터>와 같이 <천국의 문>은 미국의 다원주의가 어떻게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몇몇 평자들은 영화 안에서 서사시적 엄숙주의와 웅장한 세계관이 정교한 서사로 응결되지 못했음을 지적했지만 치미노는 그 자체로 미국의 뿌리와 동일시되는 서부의 역사를 탈신화화하여 그 본질을 들추어낸다. 특별히 여러 번 등장하는 춤 시퀀스와 풍경의 시각화 방식이 눈길을 끈다. 도입부 대학 졸업식 장면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청년들의 집단 군무, 이민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롤러스케이트 댄스와 이어지는 제임스와 엘라의 아름다운 춤 장면은 영화적 음율과 미감이 한 경지를 보여준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춤은 공동체적인 가치가 충만하게 넘치고, 변질되고, 마침내 파괴되어 버리는 과정을 은유하는 장치로 쓰인다.

<천국의 문>은 백인 신교도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어 온 미국의 탄생을 타자에 대한 정복과 학살의 역사로 규정한다. 반골 감독 치미노는 여러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생각대로 영화를 찍었고, 결국 사상 최악의 재앙이자 할리우드에서 가장 체제 전복적인 문제작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세계의 상징과 알레고리로 점철된 다분히 문학적인 각본을 보완하는 것은 <서바이벌 게임>(1972), <옵세션>(1976), <디어 헌터>를 찍은 명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몬트의 유려한 카메라워킹이다. 회화적인 구도와 색감,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이동 촬영 쇼트는 장면마다의 품격을 한 뼘쯤 높여 놓는다. 풍부한 정서와 뉘앙스를 전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으로도 <천국의 문>을 필름으로 확인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글/장병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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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치미노, 할리우드의 저주받은 감독

지난 5일 저녁,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의 부대행사로 마련된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현대성’에 대한 영화사 강좌의 첫 번째 시간으로 아메리카 뉴시네마에 종지부를 찍은 전설적 작품,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 상영 후 김영진 평론가의 강좌가 있었다. 너무 빨리 성공과 실패를 맛 본 ‘저주 받은 감독’ 치미노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할리우드가 혁신의 에너지로 넘치던 예외적인 시대에 대해 돌아보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그 일부를 지면으로 옮겨본다.


김영진(명지대학교 교수, 영화평론가): 재밌게 보셨는지? 영화가 좀 우울하다. 하여튼 몇 번을 봐도 지독한 엔딩이다. 모델이 되는 실존 인물이 있는데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고 한다. 왜 꼭 죽여야 했을까? (웃음) 이 영화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상업적 재앙으로 기록된다. 1100만 달러의 예산으로 기획됐다가 총 3500만 달러가 들고 흥행수익은 100만 달러 좀 넘었다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작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영화 한 편 때문에 부도가 났다. 아시다시피 치미노의 두 번째 영화인 <디어 헌터>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굉장한 예술적 권력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디어 헌터>의 결혼식 장면이 굉장히 긴데, 그 삽입 과정에서 트러블이 있었다더라. 헌데 치미노가 우겨서 그 장면을 넣었고 결과적으로 그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성공했다. 이러한 전례 때문에 이 영화는 제어가 안 된 거다. 비사에 의하면 편집할 때 치미노가 사설 경호를 붙여서 편집실 앞에 세워놨다고 한다. 그렇게 최종 편집으로 내놓은 것이 5시간 20분이었다. 이 3시간 40분 버전은 타협 끝에 간신히 나왔다. 3500만 달러는 지금으로 치면 3억 5천만 달러나 같다. 따라서 엄청난 광고에, 관객이 들 때까지 무제한 상영이라는 파격적인 계약을 하고 뉴욕에서 프리미어를 했다. 그런데 인터미션 때 치미노가 리셉션을 꾸려놓은 2층에 올라와보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디 갔냐’ 물으니 홍보하는 사람 말이 ‘다 집에 갔습니다.’ 그렇게 된 거다.
미국 평론가들도 한 명의 예외조차 없이 경쟁하듯 이 영화를 씹어댔다. 마치 예술적 방종의 사례인 것처럼. 사상이 불순하다 해서 공격받고, 자본주의의 최악의 사례로서 공격받고. 치미노는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다. 게다가 1985년인가에 ‘파이널 컷’이라고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쓴 책이 있는데 그걸로 두 번 죽었다. 치미노는 광적인 완벽주의자여서 일주일에 한명씩 자르고 계속 시나리오를 고치고 있었더라는 에피소드들이 적혀있다. 농담 반으로 사실 약간 술 먹으면서 찍은 느낌도 있다. 도저히 미국 영화에 나올 수 있는 샷들, 엄청나게 광포한 에너지가 있잖나. ‘파이널 컷’에 그 비슷한 증언도 있다. 치미노는 ‘그 책은 전부 픽션’이라고 하며 그 책의 저자를 아직도 증오한다고 한다. 또 이 영화에 대해 한줌의 후회도 없다고 하고 5시간 20분짜리 원판을 자기 집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쨌든 이 영화의 실패로 말미암아 치미노의 경력은 곤두박질 쳤다. 그는 미국 영화의 이단아 같은 존재이다. 아메리카 뉴시네마 마지막에 나타났다가 반딧불처럼 짧게 빛나고 사라졌다. 비슷한 시대에 등장한 위즈 키드라고 불렸던 영화 신동들, 코폴라, 스콜세지, 스필버그, 루카스 그룹과도 다르고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고전영화에 대한 자의식으로 장르를 일신하거나 수정했던 아메리칸 뉴시네마와도 다르다. 그는 건축과 연극을 전공했고, 연기도 좀 해보려고 기웃거렸다. 글재주가 이스트우드의 눈에 들어서 영화계에 들어왔고 그렇게 찍은 게 이스트우드와 제프 브리지스 나오는 <대도적>이다. 그런데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장렬한 엔딩을 찍은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이상하다. <택시 드라이버>가 나온 1976년만 해도 스콜세지와, 폴 슈레이더가 마약하면서 굉장히 폭력적이고 어두운 영화를 찍어서 성공했다. <할리우드 르네상스>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폴 슈레이더가 극장에 가보니 어떤 영화의 줄이 엄청나게 서있었다더라. 어떤 놈인지 좋겠다하고 가서 봤더니 자기가 썼던 <택시 드라이버>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두운 영화가 흥행할 줄 몰랐던 것이다. 불과 3,4년 차이인데 <천국의 문>은 대중들이 바라지 않는 영화가 돼버렸다. 시대는 레이건 시대로 넘어가고. 그 직전에 몇 개의 사례가 있었다. 스필버그는 <1942>라고 진주만 전투를 크레이지 코미디로 찍었고, 마틴 스콜세지가 찍은 <뉴욕뉴욕>도 있다. 재즈시대에 대한 엘레지를 갖고 있는. 역시 언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루카스가 그 영화를 보고 ‘형 결말만 해피엔딩으로 바꾸면 2000만 달러는 더 벌 수 있어’라고 말해서 한동안 절교했었다고 한다. 코폴라는 <지옥의 묵시록>으로 정말 지옥에 갈 뻔 했다가 깐느에서 상을 타면서 간신히 본전을 했다. 그 뒤 <원 프롬 더 하트>란 영화를 찍고 스튜디오를 무시한 채 자체배급하려다가 빚더미에 앉았다. 개 중 가장 야망이 컸던 영화는 <천국의 문>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웨스턴에 수정주의적으로 접근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존 포드 같은 경우 미국의 신화가 이룩되는 모습을 묘사하잖나. 치미노의 관심은 그것이 파괴되는 과정이었다. <천국의 문>은 서부의 역사를 먼저 온 지주들과 이민자들 간의 계급투쟁의 역사로 그려내고 있다. 공권력은 무력하다. 미국인들에게는 엄청난 치부를 건드린 것이다.
본인은 ‘차마노’라고 발음한다는데 마이클 치미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부 쪽 피고, 아마 필생의 꿈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듣다가 언젠가 찍어야지 생각했는데, <디어 헌터>로 인해 기회가 너무 일찍 찾아왔고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삼십대 후반에 찍을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여한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3억 5천만 달러의 돈을 핸들링해서 바라던 대로 찍고. 망하면 어떤가. 몇 십 년 지나 여기 한국에서도 보고 있는데. (웃음) 형식적으로도 굉장히 특이하다. 그에게는 미국 영화에 대한 존경이 없는 것 같다. 베르톨루치가 80년대 말에 한 인터뷰를 보면, 자신은 자타공인 시네필이었고 오슨 웰스 같은 감독의 미국 영화를 보고 나름대로 카메라 워킹을 배웠는데, 요즘엔 거꾸로 미국영화 감독들이 자기 카메라 워킹을 의식하는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게 치미노라는 얘기를 한다. 기본적으로 달리나 트랙을 깔아놓지 않으면 안심 못하는 스타일 있잖나. 아니면 줌으로 밀고 들어가거나. 미국 영화엔 잘 없는 부분이다. 또 굉장히 음영이 짙은 조명을 쓴다.
그런데 치미노는 감정이 과잉이긴 과잉인데, 좀 다른 것 같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이, 아무래도 삼각관계 같은 것 좋아하니까 (웃음) 주인공이 처음에 엘라(이자벨 위페르)를 만나는 장면이다. 굉장히 독특하다. 엘라는 기존 서부극에선 절대 주연이 될 수 없는 여자다. 학교 선생이나 클레멘타인 같은 여자가 주연이 되어야지. 이 여자는 포주다. 그러면서 숙녀의 품위도 가지고 있고, 또 자수성가한 비즈니스맨이기도 하다. 아르빌(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 어찌 보면 좀 부적절한 래링 관계인데 둘이 만나서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카메라가 움직이거나 인물이 움직이거나 둘 중 하나다. 파이가 왔다 갔다 하고 그 와중에 벗을 건 다 벗고 침대에 들어갔다가 선물을 사왔다니까 바로 뛰어나가고. 그냥 야생이다 야생. 그 사람들은 문명인이지만 그 살고 있는 곳과 행동하는 리듬 자체가 야생이다. 지금으로 치면 선물로 벤츠 뭐를 사준 건데 그걸 보란 듯이 몰고 가는 것 아닌가. 세레모니 중인 교회 앞을 확 지나가고, 분란이 일어나고. 엄청나게 불경한 묘사인데 그것 자체로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이는 어떤 미국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정적이 흐르면서 엘라가 강에서 나체로 목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여성, 자연, 어머니라는 시각적 메타포는 뭐 클리셰일 수도 있고 존 포드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것이지만. 그러고 나서 엘라가 아르빌과 걷다가 하늘을 딱 보면, 맑은 줄 알았던 하늘이 흐려진다. 이런 식의 묘사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DVD같은 걸로 보면 그런가 보다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중고등학교 때 중앙극장에서 봤는데 그 큰 스크린으로 봤을 때 이런 감정의 스케일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평단과 관객을 화나게 한 건 고전적인 내러티브의 무시였다.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없고 덩어리져있다. 지금은 절판 된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의 할리우드>라는 책에서 로빈 우드는 제일 마지막 장에서 치미노가 그러한 구성을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라고 한다. 치미노는 건축가다. 캐릭터와 개연성을 촘촘히 설명하지 않고 공간 그 자체에서 벌어진 일을 계속 블록 식으로 쌓으면서 보여주는 형식적 혁신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무례한 영화가 없다. 주인공들이 삼각관계인 것을 한 참 지나서 알게 되지 않는가. 미국 영화 보통의 화술이라고 하면, 그리피스가 <국가의 탄생>을 찍으며 남북 전쟁을 남 출신 북 출신의 연애담으로 보여주니까 사람들이 집중하더라 이거다. 개인의 로맨스가 전면에 서고 역사는 배경이 되는 게 가장 효과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연애담이 주가 아니다. 영화 첫 부분에 하버드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미국이 전통 없는 나라인데 굉장히 전통 있는 척 하지 않나. 총장의 연설도 공허하지만 사회적 의무들을 강조하고. 허례허식처럼 보이는데 엄정한 의식이 있다. 이 틀을 깨는 게 아르빌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 다음 단락으로 건너뛴다. 그 다음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하버드 때와는 너무 다른 얘기다. 거기서 맹세했던 것들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 세계다. 고로 치미노는 로맨스 부분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만큼의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홀하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롤러 스케이트 신고 댄스하는 게 어딨나. 지금 보기엔 굉장히 멋진 스펙터클인데, 현장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당시에는 스텝들이 치미노가 드디어 돌았다고 했다더라. 저게 예정으로 5일인데, 실제로 한 3주 찍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작비가 안 늘어나겠는가. 그리고 엘라는 언제 저렇게 저 커뮤니티에 자연스레 들어와 있나 싶다. 심지어 그 댄스 시퀀스의 대미를 장식한다. 전통적인 이야기이라면 뭔가가 있었을 텐데 치미노의 관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게 이어지는 게 또 왜, 쳐들어온다고 할 때 격론이 벌어지잖나. 제가 볼 땐 댄스 시퀀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카오스의 에너지. 보통 영화였다면 선악의 대립으로 묘사했을텐데 완전히 카오스다. 이런 식의 형식이 통할 수 있다고 했던 게 <디어 헌터>였고, 아 좀 아니구나 했던 게 이 <천국의 문>인데.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게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약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전통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이 붕괴되었을 때. 엄청난 세대 교체가 일어난 것 아닌가. 코폴라가 서른두살에 대부를 찍었는데, 이건 신의 은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약관 32세의 감독이 세상 다 산 듯한 영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코폴라는 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 뒤로 더 나은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스필버그는 심지어 20대에 <죠스>를 찍었다. 영화들이 펑펑 터지니까 경영자들도 잠깐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게 <디어 헌터>까지 이어지고, <천국의 문>까지 간 거다. 뭐 웨스턴? 존슨 주의 전쟁? 마지막에 장렬한 전투씬이 있겠네. 투자한다. 뭐 이렇게 된 건데(웃음) 끝내는 실패한 거다. 공교롭게도 바톤을 터치한 사람들이 스필버그와 루카스이고.
어쨌든 치미노는 끝내 재기하지 못했다. 또 하나의 필생의 프로젝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이나 <죄와 벌>을 영화화하는 거였다고 하는데 누가 투자하겠는가 (웃음) 또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진을 이미 너무 빼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어 오브 드래곤>도 흥미롭고 엄청 격렬한 피로가 있다. 미키 루크하고 존 론인가가 사무실에서 말싸움하는 샷 보면 진짜 미국영화 같지 않게 잘 찍었다. 지금이야 홍콩영화가 한 때 무조건 360도 돌리고 해서 그저 그렇지만, 당시에는 진짜 놀라운 스타일이었다. 그 뒤로 잘 안돼서 유감이지만, 네 편까지는 상당히 흥미롭다. <천국의 문>도 시대적 상황과 잘 만났으면 성공했을 지도 모를 영화다. 저는 TV에서 많이 축약된 버전으로 처음 봤는데 굉장히 근사했고 좋아하는 영화다. 오늘 긴 영화 보시느라 여러분이 수고하셨다. (웃음) 이 여름바캉스 동안 계속 즐거운 영화 감상하시라.

정리: 백희원(관객에디터) 사진: 조유성(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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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치미노는 바로크적 스타일과 거침없는 직관에서 나온 솔직한 화술로 할리우드영화의 지평을 넓힌 감독이었다. 그의 대담한 표현은 현대의 할리우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너무 일찍 주류에서 추방당했다. 그의 성공과 좌절은 현대 할리우드의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1980년에 개봉한 마이클 치미노의 대작 서부극 <천국의 문>은 촬영 도중에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올랐다. 애초에 1천1백만 달러의 예산이 책정된 이 영화는 촬영 기간 동안 위대한 스펙터클을 만들려는 치미노의 과욕 때문에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최종 제작비는 3천5백만 달러였고 당시 제작비 최고 기록이었다. 게다가 치미노가 마침내 내놓은 완성판의 길이는 자그마치 5시간 25분이었다.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대경실색해서 수정판 편집을 요구했고 치미노는 영화를 3시간 45분 분량으로 줄였다. 그러나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대한 모든 평론가들은 누가 더 잘 빈정거리나 경쟁하듯이 <천국의 문>을 공격했다. 그들은 <디어 헌터>(1978)로 벼락출세한 풋내기 감독 치미노의 과욕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태도였다. 그들의 눈에 <천국의 문>은 뉴할리우드 시대의 자랑할 만한 성과였던 ‘리틀 필름’, 곧 적은 자본으로 작가의 예술적 비전을 담는 영화의 흐름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보였다. <천국의 문>이 미국 서부 신화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자 해체라는 것보다는 <죠스>(1975)와 <스타워즈>(1977) 등의 팝콘 블록버스터에 무의미하게 맞서는 대작 콤플렉스의 산물로 비쳤던 것이다. 평론가 폴린 카엘은 <천국의 문>이 ‘멍하게 만들 만큼 갈지자걸음을 걷는 영화’라고 냉소했다. <천국의 문>은 명쾌한 이야기와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예술적 과대망상으로 가득 찬 쓰레기처럼 보였다. 예매제를 실시하고 무제한 상영하기로 계약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뉴욕을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개봉하자마자 곧 바로 간판을 내렸다. 첫 개봉 후 일곱 달 만에 제작자의 지시를 받은 치미노가 2시간 29분으로 길이를 줄여 재개봉했지만 또다시 2주 만에 간판을 내렸다.

현대판 블랙리스트에 오른 감독

<천국의 문>은 할리우드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이후로 누구도 예술적 비전으로 가득 찬, 감독의 이름값에 기댄 영화에 투자하지 않게 됐다. <천국의 문>의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하고도 고작 15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둠으로써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로 영화 한 편 때문에 파산하고 MGM에 매각당하는 망신을 당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한때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버라이어티’의 충고를 받아들여 액션을 살리고 원판의 불행한 결말과는 달리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재편집할 것을 고민했다. <천국의 문>이 <존슨 주의 전쟁>이란 제목을 다시 달고 재개봉할 것이라는 소문도 떠돌았으나 <존슨 주의 전쟁>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마이클 치미노의 신작도 그 이후로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천국의 문> 이후 치미노는 고작 네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을 뿐이다. 치미노는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천국의 문> 제작자였던 스티븐 바흐는 <천국의 문>의 제작 후일담인 <파이널 커트>를 출판하면서 치미노를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불렀다. 치미노는 자아 도취병 중증 환자에다 통제 불능의 말썽꾸러기였다. 그러나 바흐는 <파이널 커트>의 개정판에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치미노도 벌써 50대에 접어들었다. 그는 시스템에 짓눌린 불운한 천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한 비극의 주인공 역할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이제 치미노도 말년의 반전을 꾀할 시점에 왔다.'
바흐의 예언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치미노는 시대를 거역하는 위대한 걸물의 풍모를 갖고 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평론가 로빈 우드에 따르면, 치미노는 "미국영화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가장 멋진 형식의 혁신자다. 치미노가 만들어낸 구조를 비평가들이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도 바로 이 혁신성 때문'이라고 평했다. 이를테면 치미노의 대표작인 <디어 헌터>의 초반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철강 도시 클레어튼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젊은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락은 치미노식 화술의 결정판이다. 베트남에 파병되기에 앞서 마이크, 닉, 스티븐을 축으로 한 젊은이들은 사슴 사냥을 가고 스티븐의 결혼식에서 한바탕 떠들썩한 잔치를 벌인다. <디어 헌터>의 시사회에서 관계자들은 스티븐의 결혼식 장면이 너무 길다고 줄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 장면을 영화에서 많이 쳐내자 이상하게 영화의 힘이 떨어져버렸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보여도 이 장면은 러시아계 미국인들의 삶과 정서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 내러티브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이야기체 영화의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의 초기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1915)은 남북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그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로 치환함으로써 개인적 내러티브가 관객의 흥미를 붙잡아둘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발견했다. 하지만 치미노는 이 장구한 이야기체 영화의 전통에 관심이 없다. <천국의 문>에서 두 남자 주인공과 한 명의 여자 주인공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치미노는 영화의 반이 지날 때까지 그 삼각관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중반이 넘어서야 관객은 그들이 삼각관계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야기 전개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세부 묘사들을 마구잡이로 우겨넣고 역동적인 카메라 연출로 박력 있게 끌고 간다. 인물간의 관계, 상황의 소개, 갈등의 전개와 해결이라는 고전적 드라마의 정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부들을 모아놓고 되풀이해 보여주면서 질서 정연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많은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우리의 삶을 영화 속에 재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미국 신화에 비치는 도발적 만가


치미노는 내러티브보다는 영화의 주제적, 상징적 구조를 세우는 데 능하다. 로빈 우드에 따르면, 그것이 치미노가 영화 형식에서 이룬 혁신이다. <디어 헌터>는 클레어튼-베트남-클레어튼-베트남-클레어튼으로 공간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공간의 교체가 반복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각 이야기 단락의 길이는 점점 줄어든다. 이는 점차 이야기 단락이 점차 줄어드는 형식의 원칙으로 내용을 강조하는 뛰어난 수법이다. 영화 초반부에 그처럼 활기찬 젊은이들이었던 마이크, 닉, 스티븐이 베트남에 간 이후로, 닉은 목숨을 잃고 스티븐은 다리를 잃었으며 마이크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잃었다. 공간을 교차, 감축시키면서 치미노는 이야기보다는 장대한 역사와 인생의 비유를 직조해낸다. 사슴 사냥을 위해 조준하는 총 한 방과 베트콩에게 붙잡혀 러시안 룰렛 게임을 강요당할 때, 총 한 방이라는 모티프를 교차시키면서 치미노는 관례적인 이야기 수법 이상의 것을 보여준 것이다.
<디어 헌터>는 도덕적으로 선량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에 가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이야기를 보여줬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을 정치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아예 포기했다고 좌파 쪽으로부터 비난을 듣기도 했다. 클레어튼 단락이 끝난 후 갑작스럽게 베트남 전쟁 단락으로 넘어가면 방공호에 숨어 있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베트남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보고 격분한 마이크는 화염 방사기로 그 베트남 병사를 죽여 버린다. 많은 관객들이 마이크가 죽인 베트남 병사를 베트콩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병사는 사실 미군과 같이 싸운 베트남군 병사였다. 이는 서구인의 눈으로 동양인을 낯선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전형적 수법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들었던, 베트콩들이 미군 포로를 데리고 러시안 룰렛 게임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허구적 조작이다. 이런 맥락을 따라가면 영화의 말미에 살아남은 주인공들이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고 술집에서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부르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디어 헌터>는 선량한 미국의 젊은이들, 문명화된 백인들이 야만의 땅에서 자신들의 휴머니즘에 상처를 입고 회복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다는 백인 중심적 한계를 드러낸다. 뜻밖에도 평론가 로빈 우드는 다른 좌파 이론가들과는 달리 그런 치미노를 다르게 본다. ‘자기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치미노의 위대함’이고 그런 솔직한 태도 덕분에 치미노는 복합적으로 풍부하게 미국의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드의 고전영화가 이상적인 미국의 개념이 세워지는 순간에 놓인 미국의 신화에 관심을 가졌다면 치미노는 이상적인 미국의 개념이 해체되는 순간에 놓인 미국의 신화에 관심을 모은다. 이 영화에서 공동체의 결속을 보여주는 아름답고 따뜻한 순간들은 존 포드의 서부 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온기를 풍기지 않는다. 초반 결혼식 장면에서 신랑인 스티븐은 신부인 안젤라가 대변하는 가정의 세계와 사슴 사냥이 대변하는 남성 친구들과의 우정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 심지어 그는 안젤라와 한 번도 동침하지 않았는데 안젤라는 임신한 상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불길한 전조처럼 신랑 신부가 잔을 나눌 때 포도주가 한 방울 흘러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붉은빛으로 적신다. 결혼식의 춤 파티 장면도 존 포드의 영화에서처럼 고도로 조직되고 정해진 패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불확실한 질서로 넘쳐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주인공 마이크는 그 거대한 붕괴의 순간을 목격하는 영웅이다. 마이크는 카리스마가 강하고 다른 사람에 비해 우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본질적으로는 고독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문명에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만 결국에는 미국 문명의 가치를 보호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한다. 영화 말미에 마이크는 러시안 룰렛 게임에 중독돼 함락 직전의 사이공에서 돈을 걸고 룰렛 게임을 하고 있는 닉을 구하려 사이공에 가지만 닉은 허망하게 죽는다. 마이크는 삶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친구들은 고인이 되거나 폐인이 됐고 고향은 풍비박산 났다. 귀향한 마이크는 다시 사슴 사냥을 나가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사슴의 맑은 눈을 보고 총구를 내리는 이 장면을 두고 뻔한 휴머니즘의 감상으로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맥락에서 보면 마이크는 이미 인생에서 방아쇠를 당길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단 한번 승부하는 것이 인생이다.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디어 헌터>는 미국 신화의 만가이자 청춘의 만가이기도 하다.

<천국의 문>, 거장이 될 뻔한 감독의 원죄

마이클 치미노가 데뷔 당시부터 꿈꾼 프로젝트였던 <천국의 문>은 미국 서부극 신화의 장대한 붕괴라는 치미노 특유의 비전을 만천하에 보여줄 만한 위대한 업적일 수도 있었다. ‘존슨 주의 전쟁’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천국의 문>은 일찍이 미국에 도착해 기득권을 가진 농장주들과 뒤에 도착한 이민 농부들 사이에서 일어난 백인들끼리의 학살을 다루면서 아메리칸드림의 원죄 의식을 장쾌하게 묘사했다. 유럽의 평단은 절찬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악의적 비난을 산 이 영화는 그대로 치미노의 원죄가 돼버렸다. 치미노는 5시간 25분 분량의 감독 편집판을 자신의 집에 소중히 보관해두었으며 그 오리지널 영화는 칸에서 상영돼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비슷한 수모와 복권 절차를 밟았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와는 달리 <천국의 문>은 아직까지 미국에서 명예 복권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인들에게 서부 시대의 역사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처절한 유혈극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치욕의 얼굴인 것이다.
<천국의 문> 이후 치미노는 계속 비틀거렸다. 1985년 올리버 스톤의 각본으로 만든 <이어 오브 드래곤>(1985)은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주의라는 비난을 또 들으면서 극장 흥행에서 참패했다. 미키 루크가 주연한 이 영화는 <프렌치 커넥션>(1971)이 그랬던 것처럼, 이념적 지평과 상관없이,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현장과 그에 맞서는 백인 우월주의자 형사의 모습을 가감 없이 제시한다. 유럽에선 절찬했지만 미국에선 냉대 받은 이 영화 이후로 미국에 발붙이기 어렵게 된 치미노는 유럽 시장을 노리고 디노 드 로렌티스의 제작으로 1987년 <시실리안>(1987)을 찍었다. 그러나 1백46분 분량의 감독판 편집본 대신 다시 1백 15분 분량의 축약판으로 공개된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도적 살바토르 줄리아노의 성격을 밋밋한 포커페이스로 연기한 주연 크리스토퍼 램버트의 우스꽝스런 연기만큼이나 작품성이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이클 콜린스>를 연출하겠다는 일련의 기획이 계속 거절당하면서 치미노가 마지못해 만든 1991년 작품 <광란의 시간>(1990)은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었으나 원작과 비교당하면서 조소만 샀다. 199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선체이서>가 공개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치미노의 신작을 기대하지 않게 됐다. 실제로 <디어 헌터>와 <천국의 문>을 그토록 그럴듯하게 만들어줬던 혼란스럽고 풍부한 이미지가 <선체이서>에는 보이지 않았다.

조숙한 대가, 시대의 희생양


시대를 잘못 타고난 치미노는 불운했다. <천국의 문>은 시대착오적 스펙터클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감성으로 전쟁 영화를 연출해 마치 미치광이가 찍은 것 같은 해방감을 줬던 <1941>(1979)을 만들었고 마틴 스콜세지는 재즈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은 153분짜리 대작 <뉴욕, 뉴욕>(1977)을 만들었다. 코폴라는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조에트로프 스튜디오에서 찍은 초호화 뮤지컬 <원 프럼 더 하트>(1982)는 <천국의 문> 못지않게 흥행에 참패했다.
뉴할리우드 시대의 감독들은 그렇게 몰락했다.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할리우드의 제왕으로 떠오르는 순간에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감독들은, 스콜세지와 드 팔마를 빼면, 대다수가 몰락했다.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종언을 고하는 시점에서 위대한 할리우드의 부활을 꿈꿨던 패기만만한 감독들의 '표현 과잉' 시대는 짧게 끝났다. 그들은 자기 세대의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가 되고자 했으나 그것으로 종말이었다. 특히 마이클 치미노의 몰락은 할리우드 르네상스의 몰락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의 몰락으로 할리우드는 새로운 표현법과 이상주의 정신을 이식받을 뻔한 기회를 놓쳤다. 로빈 우드의 표현대로, “치미노는 좋건 나쁘건 간에 이상주의와 그것을 믿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 치미노의 이상주의는 현대문명이 폐기 처분해 버렸지만 여전히 숭고함과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 대한 탄식을 만들어낸다”.

글/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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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 한 가운데의 교회. 머리를 얌전하게 빗어 넘긴 목사 썬더볼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근엄하게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다 마치 타란티노의 <킬빌2>(2004) 한 장면처럼 중년의 사나이가 교회로 들어와 목사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엉겁결에 달아나던 목사는 라이트풋(제프 브리지스)의 차를 얻어 타게 된다. 썬더볼트는 목사가 아니라 전설의 은행 강도이며, 한국전에서 돌아와 그저 백수로 지내는 말썽장이 라이트풋은 이제 막 그 차를 훔쳐 달아나는 상태였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이상한 여행이 시작되고, 곧 또 다른 두 남자 레드 리어리와 에디 구디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들은 썬더볼트가 돈을 빼돌렸다고 굳게 믿는 남자들이다. 그렇게 사기꾼이 목사로 행세하는 교회는 낯선 사람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훔친 차는 떠돌이 남자들의 발이 된다. 그런 간략한 얼개만으로도 마이클 치미노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황량한 풍경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쓱쓱 써나간다. 영화가 사기꾼이 설치는 교회에서 시작해 돈이 숨겨진 학교에서 끝나는 것도 무척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에디의 말을 빌자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썬더볼트와 라이트풋’은 ‘멍청한 마을의 이상한 녀석들’이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캐릭터는 물론 직전까지 <더티 해리2: 매그넘 포스>(1973)를 성공시키며 ‘더티 해리’ 캐릭터까지 덧씌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역시 <배드 컴패니>(1972)에서 사기꾼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젊은’ 제프 브리지스는 기존 캐릭터 이미지와 맞물려 매력적인 시너지 효과를 낸다. 총이 있음에도 굳이 맨손 대결을 자청하는 레드, 전혀 도움이 안 돼 늘 구박만 당하는 운전수 에디 등도 이상하긴 매한가지라 <대도적>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기이한 강탈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얼떨결에 힘을 합치게 된 네 남자는 금고를 털기 위해 머리를 맞대게 된 것. 사실 별다른 이유 없이 제프 브리지스가 여장을 하면서까지 세밀하게 준비하고, 거대한 박격포가 등장하는 금고 파괴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 범행 과정 역시도 여타의 강탈영화와 비교해도 독특하다.

<대도적>은 마이클 치미노가 이후 만든 <디어 헌터>나 <천국의 문>과는 큰 연관관계를 찾아보기 힘든 버디무비다. 어쩌면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의 얘기처럼 “<디어 헌터>나 <천국의 문>을 만들 만한 야심과 대담함을 예상할 수 없었”기에 더 흥미로운 영화가 바로 <대도적>일지도 모른다. 변칙적인 내러티브와 배배 꼬인 장르적 컨벤션,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제프 브리지스가 만들어낸 생생한 캐릭터가 그야말로 톡톡 튄다. 1960년대 말 <이지 라이더>(1969)와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그리고 <내일을 향해 쏴라>(1969)를 통해 결정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남성 버디무비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1973), 로버트 알트먼의 <캘리포니아 스플릿>(1974) 등으로 이어졌는데 로빈 우드는 <대도적>을 위 두 작품과 한데 묶으며 “기존 버디무비들을 통해 확립된 원칙들의 변종으로서 가장 뛰어나고도 특이한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만큼 반가운 얼굴들도 많다.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또 다른 할아버지로 기억되는 조지 케네디를 비롯, 제프 브리지스가 처음으로 유혹하는 여자로는 TV 시리즈 <듀크 오브 해저드>에서 섹시한 데이지 듀크를 연기했던 캐서린 바하, 제프 브리지스와 잠깐 일을 같이 하는 단역으로 게리 부시가 출연한다.

글/주성철(씨네21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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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치미노의 경우, 영화의 본질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외적인 이유로 인해 작품에 대한 평가가 박하게 매겨진 것이 <천국의 문> 만이 아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뉴욕의 다혈질 형사와 악명 높은 차이나타운 갱단의 전쟁을 다룬 <이어 오브 드래곤>은 치미노의 불운을 입증하는 또 다른 예시가 되기에 충분하다. 로버트 달리의 원작소설에 기초해 제작된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영화계를 달군 이슈는 성차별적 폭력에 대한 태연한 재현과 동양인에 대한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태도였다. 베트남전에서의 상한 기억으로 동양 사람들에 대한 적의를 품게 된 주인공 스탠리 화이트(미키 루크)는 그 자체로 왜곡된 시각을 내면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인종적 편견과 영화의 태도는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미노의 진의(眞意)는 이해받지 못했고, 영화는 또 다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마이클 치미노의 단속적인 영화 이력을 놓고 본다면 <이어 오브 드래곤>은 <디어 헌터>와 <천국의 문>의 교묘한 믹스처럼 보이는 영화이다. 이들 영화에서 타자들에 대한 공포와 그로부터 파생된 폭력은 치미노의 일관된 관심사이다. 베트남전의 여파를 1980년대 미국 사회의 심부로 가져와 풀어내는 이 영화는 장르영화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장르의 클리셰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경찰과 마피아의 커넥션이라는 묵계를 깨고 중국인 갱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돈키호테적 히어로의 고독한 투쟁을 다룬 스토리와 시각적인 스타일은 노골적으로 누아르 풍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형사 누아르 장르의 서사와 스타일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베트남전의 망집에 사로잡힌 스탠리를 통해 드러나는 미국 사회의 신경증적 불안이다. 조이 타이(존 론)라는 야비한 악한으로 대표되는 차이나타운 갱 조직과 맞서면서 스탠리가 점차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히며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떠난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거대한 악행의 뿌리를 제거해가는 장르적 영웅의 풍모를 스탠리에게 찾아보기란 어렵다. 분열증적 주인공인 그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복잡다단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핸섬하고 샤프했던 30대의 미키 루크가 역할을 맡아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이어 오브 드래곤>은 한 때 비디오 렌탈 숍의 액션 코너에 놓였지만 ‘액션’장르 안에 이 영화를 가둘 수는 없다. 액션은 있지만 액션영화가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장르영화를 만들 의도가 없었던 치미노는 각색 과정에서 10년 간 <플래툰>의 영화화 작업에 매진해왔던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 감독 올리버 스톤을 공동각본가로 끌어들였다. 스톤과 치미노는 차이나타운 갱단의 범죄 실태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인터뷰를 거쳐 인물과 사건을 창조해낸 것으로 알려졌다. <천국의 문>에서 정점에 달한 치미노의 옹고집과 완벽주의는 이 영화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총상을 입은 사람의 실제 모습을 확인하게 위해 앰뷸런스에 앉아 밤을 새우거나 값비싼 고급 승용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숴버리는 대담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영화 속 폭력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고 생생한데, 액션 시퀀스들은 착 가라앉은 톤이지만 총상으로 벌어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따위를 대담하게 보여준다.


치미노의 완벽주의에 더하여 올리버 스톤의 실체험으로부터 나온 각본, 알렉스 톰슨의 촬영, 데이빗 맨스필드의 아름다운 음악이 더해져 프로덕션의 완성도는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베트남에 대한 기억과 싸우는 한 인물의 강박을 미국 사회의 병리현상으로 치환하는 연출은 아주 파워풀하다. 스탠리는 현재 완악한 범죄자들과 싸우고 있지만 자신의 육체에 침전되어 있는 폭력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자괴와 절망에 무너져 간다. 영웅은 승리할 것이나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는 거대한 피로와 무력감이 끝내 불모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괴작이다.

글/장병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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