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본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

지난 13일 비스콘티 독일3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저주받은 자들> 상영 후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흔히 많이 거론되는 데카당스적 미학보다는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았다. 흥미진진했던 그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은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미학적 성격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통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비스콘티의 데카당스적 미학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강렬함 때문인지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문맥들이 덜 얘기되는 것 같다. <저주받은 자들>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크게 보자면 마틴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더 넓게는 마틴이 에센벡 가문 전체를 궤멸시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개인적 살해와 대학살의 범죄가 면책되었던 시기가 나치즘의 태동기로,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가계 살해와 나치의 대량 학살은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1933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종결되고, 비스콘티의 표현을 빌자면 살인국가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중산층이 몰락하고 귀족과 자본가들이 나치에 협력하기 시작하고, 영화에서 보자면 도착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크게 4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막에서는 에센벡 가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당시 독일의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막에 해당하는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는 1933년에 있었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언급되며, 3막에서는 나치 친위대원들이 돌격대원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인 '장검의 밤'이 묘사되고 있다. 4막에서는 다시 돌아온 헤르베르트의 이야기에서 다카우 수용소가 환기되는데, 이는 히틀러 집권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수용소로, 처음에는 반나치 정치인들을 수감하는 곳이었다가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수감하는 수용소로 변했다. 결국 이 영화는 2년 정도의 시기에 걸쳐 나치즘의 발현과 가계 내의 권력적 이동의 여러 양상들을 같은 맥락으로 다루고 있다.

4막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보게 되는 곳이 1막과 4막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저택에서의 저녁식사라는 가족의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가족의례는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동시에 1막은 장례식으로, 4막은 결혼식으로 끝나고 있다. 하지만 소피와 프레드리히의 결혼식 역시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에서 둘 모두 죽음의 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스콘티는 귀족들의 양식화되고 의례적인, 제의적인 행사들을 영화에 담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레오파드>가 그러한데, 그런 장면들이 비스콘티 영화를 보는 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저주받은 자들>에서의 의식은 여전히 우아하고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그 안의 부패나 죽음, 타락이라는 면이 훨씬 더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스콘티의 다른 작품들에서 그런 의례들이 이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일종의 향취를 의미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의례 자체가 내부에서 부패하고 썩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귀족사회의 몰락과 죽음으로 연결되는데, 어떤 점에서 이런 몰락이 재촉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첫 번째로 보자면 외부적인 침입이 있다. 1막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 프레드리히와 아센바흐는 차를 타고 저택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데, 그들이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둘의 결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후에 벌어지는 '장검의 밤' 시퀀스에서도 둘은 함께 등장한다. 즉, 이들은 에센벡 가와 구 돌격대(SA)를 궤멸시키는 사건에 동시에 연루되어있다. 결국 둘의 연대가 외부적 침입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 침입보다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내부적인 부패와 궤멸의 지점이다. 침입이 진행되기 이전부터 이미 내부에서는 타락과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계나 귀족 계급의 몰락은 구시대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시간성이 내부적 부식과 부패로 이어지기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의 필연적인 부패는 그 집단이 밀실처럼 폐쇄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부패나 쇠락은 비스콘티 영화의 내적 공간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간의 밀폐가 시간의 부패를 초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스콘티 영화의 대부분은 밀실적인 폐쇄적 공간이 주를 이룬다. 후기 작품들로 가면 갈수록 내부 공간과 바깥을 연결하는 통로가 없어진다. 밀실의 공간, 완전히 닫힌 세계에서 시간은 부패하고 쇠락한다. 이런 점이 관객들에게 강한 매혹을 주고 있다. 인물들은 결국 쇠락의 길로 빠져들겠지만, 폐쇄된 공간 안에서 과거의 추억과 이미지와 기억들이 인물의 몸에 거주하고, 이를 통해 그 인물의 고고함과 귀족성이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들>에서 그것은 굉장히 비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틴이라는 인물의 행태를 주목하게 된다.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 어린 아이들은 시를 낭송하고 귄터는 바흐의 사라방드를 연주하는 가운데 마틴은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 내는 드랙쇼를 벌인다. 이 공연 장면은 몇 가지 층위로 읽어낼 수 있다. 첫 번째는 마틴이 에센벡가 안에서 굉장히 반항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성적 도착을 보여주는데, 이는 1930년대 독일 사회의 변화라는 맥락내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공연은 애매한 구석들을 갖고 있다. 마틴이 가게 되는 경로와 귀결점을 보았을 때 비스콘티는 마틴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마틴의 모습이 주는 관능성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종종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처하는 자가당착적 문제가 있는데, 어떤 인물의 폭력이나 도착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이 지닌 폭력과 도착에의 관능성을 함께 담아낸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관능성을 가진 헬무트 베르거 같은 인물이 아니라, 조금 더 거리두기가 가능한 배우를 설정했다면 손쉽게 비판적 층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대체로 그가 지닌 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자가당착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후에 만들어진 밥 포시의 <캬바레>를 들 수 있다.

마틴의 쇼에는 다른 뉘앙스도 있다. 고전적인 귀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첼로의 고귀한 선율에 비해 바로 이어지는 마틴의 쇼는 굉장히 쾌락적이고 쇼비즈니스적이다. 그것이 가문에서 거부당할 때, 그가 취하는 또 다른 방식이 나치즘과의 결탁이며 그것은 결국 가계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모호한 것은 그래서 비스콘티가 정치적 변절과 성적 변화를 이상한 방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공연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성적 변화는 나중에 발생하게 될 그의 정치적 변질의 징조와 의미로 표현된다. 처음에는 여장을 하고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내는 드랙쇼를 벌이지만, 나중에는 나치즘의 제복을 입고 또 다른 의미의 쇼를 벌인다. 이 둘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정치사회적 부분과 성적 도착을 연결시키는 맥락에서 이 영화는 기묘한 역설을 보여준다. 병적이라 할 만한 정치적인 힘 아래서 인간성의 영역이 도리어 성적인 변질을 겪는 인물들에 의해서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3막에서 벌어지는 '장검의 밤'에 등장하는 돌격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마틴과 이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에 비해 아센바흐라는 인물은 한 치의 변형성도 없는 냉철한 인물로 묘사되며 나치의 악과 미,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굳건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마틴의 성적 도착이라기보다는 굳건하게 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아센바흐의 존재감일 것이다. 이 인물은 사실상 프레드리히가 요아힘을 죽이게 만들고, 이어 마틴이 프레드리히를 죽이게 만든다. 두 아버지의 살해에 이어,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또 다른 아버지의 초상, 즉 히틀러가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루드비히>와 <순수한 사람들>로 이어지는 독일 3부작의 시작을 이루고 있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필연적으로 상실된 것, 그리고 상실 이후에 이해될 수 있는 과거의 시간, 그 과거의 시간을 되찾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보다 부각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애매한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동시에 1970년대에 등장하는 유럽의 역사 영화들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치 정권의 도래와 나치즘, 그것의 가장 극악한 표현으로서의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이후의 역사 영화들이 고민했던 근본적인 문제들에 화두를 던졌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나치 집권 사회 안에서의 인간, 다시 말해서 인간 내부의 문제 등이 간과되는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정신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는 병리학적 부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동시에 독일 파시즘이 갖고 있었던 매혹을 어떻게 내부의 시선에서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회피하지 않고 그것과 마주할 수 있는지의 고민이 이 영화에서부터 촉발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이후에 만들어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 같은 영화는 매혹이나 섹스, 죽음, 폭력, 멜로드라마와 같은 소재로 파시즘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적, 위장된 형태로서의 자아의 병리적인 현상에 근거해 파시즘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파시즘이 갖고 있는 내부적 매혹이라는 문제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본격화되는데,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나 파스빈더의 <릴리 마를린>, <절망> 등의 영화들이 그 계보를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주받은 자들>은 새로운 방식의 역사영화, 새로운 방식의 파시즘에 대한 미학적 표상을 이루어낸 선구적인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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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데카당스라는 비스콘티의 낙인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이 한창이던 지난 12일, 그동안 여러 차례 비스콘티의 영화세계에 들려줬던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다시 한 번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했다. 그는 비스콘티의 유작 <순수한 사람들> 상영 후 이어진 강연에서, 비스콘티의 미학적 유산에 대해 풍부한 그림 자료들을 곁들이며 들려주었다.


한창호(영화평론가):
<순수한 사람들>이 비스콘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마지막 미학적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맡게 됐다. 먼저 <순수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나중에 그림 자료들을 보면서 데카당스라는 비스콘티의 낙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이 영화는 비스콘티가 만 70세가 좀 안 됐을 때 발표된 작품이다. 영화를 찍을 때 몸이 굉장히 안 좋았다. 결국 3월 정도에 세상을 뜨고 말았고, 5월에 칸에서 최초로 소개가 됐다. 칸이 많이 사랑했던 감독이었고 유럽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받던 감독이었으니, 많은 대접을 받는 분위기였다. 영화가 비관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흥행 8위를 했다. 죽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들고 어느 정도 흥행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책을 넘기는 손은 비스콘티의 오른손이다. 이때 왼쪽 반신은 마비된 상태였다. 3년 전에 <루드비히>를 찍다가 무리해서 쓰려졌고 반신이 마비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후에 재활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하여 <가족의 초상>을 만든 후, 불행하게도 다시 쓰러져서 이 영화는 휠체어에서 연출을 했다. 비스콘티는 1차 편집본을 보고 대단히 실망하여 대대적으로 수정을 하겠다고 말한 후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 각본과 촬영감독이 합심하여 수정해서 만든 작품이 지금의 버전이다. 원작 소설의 작가 가브리엘 단누치오는 이탈리아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기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초인에 대한 세속적 욕망이 컸다. 보편적인 평범함에 대해 경멸이 있었고, 여성편력이 대단했다. 소설의 주제는 주로 쾌락과 죽음에 집중되어 있었다. 죄의식을 자극하거나 자기 파멸적인 쾌락과 자기 자신을 스스로 몰락시켜가는 죽음 등 금지의 선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범죄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 당시 세기말적 유럽의 정후와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비스콘티 본인이 갖고 있는 데카당스, 부패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끌림 같은 게 단누치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게 된 것이다.

비스콘티는 툴리오라는 캐릭터에 매혹을 느꼈다. 대표적인 상층 부르주아 계급인데, 이 남자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이다.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있고, 누구도 자기를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기적인 존재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부분에 대해 견뎌내지 못하고 광기에 빠져서 아이를 죽이게 된다. 그 남자에 대해 비스콘티가 동병상련이나 자기 연민을 느낀 것 같다. 비스콘티 전공자들은, 이 작품 또한 상층 부르주아 남자를 통해 그 당시 이탈리아 상층부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반사회성이나 윤리적인 부분을 데카당스라는 방법을 통해 표현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에는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의 작품에 그런 사회적인 부분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코뮤니스트였던 비스콘티가 <센소>를 내놨을 때 사람들이 많이 실망했는데, 공격한 것도 옹호한 것도 좌파 비평가였다. 비스콘티를 옹호한 사람들은 루카치의 리얼리즘에 대한 옹호자들이었다. 루카치의 리얼리즘은 외관과는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진실을 담고 있다면 오히려 더 리얼리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례로 든 것이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다. <센소>가 루카치적인 리얼리즘의 영화적인 모범이며, 제대로 된 리얼리즘의 사례를 보여준 것이 비스콘티라는 주장이다.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의 영화들에는 패배주의와 개인주의자들이 체념 등이 드러나 있으며 필멸의 존재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대한 성찰이 있다. 데카당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리얼리즘이나 사회적인 맥락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순수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인형의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장식된 공간과 의상, 마리오네트처럼 의례화 된 행동만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반쯤 죽은 존재들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준다. 활기가 없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인다. 데카당스의 멜로드라마 표현법이 더 멜랑콜리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프린트 상태가 좀 안 좋고 컬러가 탈색돼 있어서 좀 아쉬웠다. 덧붙이자면 툴리오를 연기한 남자배우 지안카를로 지안니니는 당시에 코미디 배우였다. 능청스럽고 여성스럽게 빈대 붙는 남자 역할을 굉장히 잘했다. 여기에서 단누치오와 병든 비스콘티의 분신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줄리아나를 연기한 여자배우 로라 안토넬리는 70년대에 주로 벗는 역할을 했었다. 비스콘티는 육체적 외양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스콘티가 데카당스 멜로드라마를 표현하는 방식은 대단히 회화적이다. 그림자료를 보면서 비스콘티의 회화적으로 표현된 데카당스의 멜로드라마 미학에 대해 알아보자. 비스콘티는 데카당스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죽음을 회화적인 도상을 통해 표현한다. <강박관념>의 남자주인공 지노는 대단히 어두운 집 내부에서 살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유령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히스테릭하게 나온다. 어둠이라는 자극을 도상적으로 잘 보여줬다. 남자가 불안감에 빠져있으니 여자주인공 죠반나가 남자를 달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파티를 한다. 파티 준비를 할 때, 멕베스와 멕베스 부인이 살인을 공모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사자를 상징하는 여자가 낫을 가지고 등장한다. 데카당스 시절의 독일권 화가인 뵈클린의 <페스트>(1898)의 그림과 유사하다.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죽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데카당스라는 테마가 미술을 통해 표현됐다. 또한 죠반나가 영화의 도입부에서 지노를 만나자마자 사랑을 나눈 후 돈만 많은 남자랑 사는 것에 대해 의자에 앉에 몸을 비비 꼬면서 한탄하는 장면은 모딜리아니의 <장 에뷔테른>(1918)을 참조했다. 눈동자가 없는, 데스마스크. 체념,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를 표현했다.


<센소>는 그림자, 육신이 없는 것, 유령에 대한 영화다. 오페라 시퀀스가 지나고 나서 베니스의 밤에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 "나를 당신의 그림자로 받아주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남자의 대사가 나온다. 농담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여자는 발이 안 보이고, 남자는 흰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유령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다가가 있는 모습을 밤에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대한 무덤 속을 걷고 있는 두 그림자처럼 영화가 시작된다. 이 때부터 데카당스라는 테마가 비스콘티의 영화에 들어온 것이라고 본다. <레오파드>는 죽음과 소녀의 테마를 다룬다. 영화 마지막의 가장 아름다운 춤 장면에서, 비스콘티는 죽음과 소녀라는 서양 미술사의 오래된 테마를 변주한다. 검은 옷을 입은 버트 랭커스터가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이고,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순결한 소녀를 상징하는 것처럼 대조시켜놨다. 한스 발둥의 <죽음과 소녀>(1517)의 메멘토 모리, 비어츠의 <죽음과 소녀>(1848)를 참조했다. 낭만주의 시기에는 죽음이 센슈얼하게 그려진다. 뭉크의 <죽음과 소녀>(1893)에서는 소녀가 죽음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표현한다. 죽음을 사랑의 대상으로, 죽음에 더 방점이 찍힌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레오파드>에서는 랭커스터에 방점이 있으며, 죽음을 상징하는 그 남자가 더 아름답게 나온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질병의 멜랑콜리와 염을 다룬다. 마지막 시퀀스 바로 전에 아센바흐가 이발소에서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음날 그 복장 그대로 해변에 나갔다가 타치오를 보며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화장은 자신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죽은 자가 하는 의례로서의 염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또한 이 장면에서는 말러의 교양곡 5번 2악장 아다지에토 장송곡이 나온다. <루드비히>는 밤의 찬가다. 푸른색의 영화다. 비스콘티는 컬러에 대한 해석이 참 섬세한 사람이다. 루드비히라는 달의 왕에 관련된 이야기다. 비스콘티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루드비히는 예술가로 태어나야할 사람이 왕으로 태어난 것이다. 첫사랑에의 실패를 위무하기 위해 바그너의 음악에 빠지며, 중간에 동성애자로 변하는 상황을 운명의 저주처럼 받아들인다. 그런 부분에 비스콘티의 삶이 들어가 있다. 병든 사람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루드비히가 자기 왕궁 안에 인조 호수를 만들어 놓고 백조의 왕자처럼 거기에서 놀고 있는 장면이 있다. 건물 내부의 컴컴한 물이 있는 공간은 일종의 자궁이다. 차라리 엄마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본능적으로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심경이 드러난다. 비통함과 우울함을 증폭시키는 장면이다. <센소>를 만들 때 주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스스로 알았을 텐데, 그런 점을 이겨낸 것은 멋진 행동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천성과, 그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천성을 계속해서 표현해 낸 것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만주의 시기의 예술가의 초상에 맞도록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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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노 비스콘티는 네오리얼리즘으로 시작했지만 뒤로 갈수록 극단적인 탐미주의 경향을 보여준 이탈리아영화사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그런 비스콘티의 영화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에 네오이마주의 백건영 편집장이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중심에 놓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세계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저주받은 자들>(1969), <루드비히>(1972)와 더불어 비스콘티의 탐미주의 3부작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은 관능적 사랑에 관한 낭만적 서사이자 노예술가의 처연함이 동시에 배어나는 작품이다. 비스콘티는 <저주받은 자들>에서 파시즘이 가한 육체적 폭력에 주목하는 한편 <맥베스>의 구조 위에 도스토엡스키에서 영감 받아 처음으로 색채와 분장, 인물들의 모습을 표현주의로 처리하는데, 이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미 현란한 의상과 무대장치와 엄청난 엑스트라를 동원한 스펙터클 대작 <센소>(1954)에서 오스트리아 점령하의 베니스를 묘사한 바 있는 비스콘티는 이 작품에서 오페라 연출을 흠모했음에도 결국 영화작가로 살아가야 했던 그의 모순된 인생역정의 총체화를 시도한다. 또한 이 작품은 예술창작과 쾌락적인 삶 간의 관계에 대한 명상록이기도 하다.
비스콘티는 이 영화로 토마스 만의 동명소설을 섬세하고 우아한 시각적 이미지로 풍부하게 해석해 놓았다. 게다가 음악의 탁월한 선택과 엑스트라 하나하나에게까지 정성을 다해 만들었음직한 당대 최고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피에로 토시의 의상이 어우러지면서, 영화의 어떤 장면도 놓치거나 버릴 것이 없도록 만들고 있다. 특히 영화 전체를 뒤덮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은 훌륭한 영화음악이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닌 '보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한다. 비스콘티 영화세계의 변화만큼이나 그가 선택하는 영화음악의 변화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그는 초창기 베르디와 벨리니의 오페라를 선호하더니 이후 부르크너와 바그너를 거친 후 말러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모든 심미안적인 감각과 기교가 비스콘티라는 거장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했겠는가.
사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만들어지던 1971년을 전후한 시기는 이탈리아 영화인들 스스로 ‘파탄의 시대’라 부를 만큼 영화산업이 쇄락의 길을 걷던 시절이었다. 시대적 사명감에 불탄 젊은 영화인들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현실의 벽을 넘으려 했지만 한 시대를 표현하기에 그들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가운데 비스콘티와 펠리니가 선배로서의 역할을 주도했고, 파솔리니와 베르톨루치, 타비아니 형제들이 가세함으로써 이탈리아 영화는 역사와 영상 사이, 국가와 민중 사이에서 벌어진 간극을 메우게 된다. 비스콘티는 이러한 시기에 ‘탐미주의 3부작’을 내놓지만, 현실에서 비켜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서사로 인해 ‘역사 밖으로의 탈주’라는 의심과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가들의 영화는 과거나 미래에 기울지 않고 한 시대에만 집중하지 않는 법’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비스콘티에 대한 비난은 무력화 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영화는 그 사실, 모든 예술의 예술성은 그 표현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에 있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베니스의 황혼과 말러 5번 교향곡

영화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일몰 직전의 뱃길을 가르는 여객선과 단단히 차려 입은 노신사 구스타프 아센바흐(더크 보가드)의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그림같이 매혹적인 첫 번째 시퀀스에서 금빛 물결을 수놓는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인데, 지독한 염세주의자인 말러는 자신의 음악에서 늘 죽음을 노래했고 5번 교향곡의 1악장에도 ‘죽음의 행진- 신중한 속도로, 엄격하게 장례행렬처럼’이라는 부제를 붙여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영화에 흐르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4악장 ‘아디지에토’다. 이 악장은 말러가 연인인 ‘알마’에게 보내는 연서와도 같은 곡이지만 그 선율 뒤에는 음울한 죽음의 그림자가 담겨있다. 이렇듯 애잔하면서도 치명적인 음악은 죽음을 맞게 될 아센바흐의 비극적 사랑을 예시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또한 비스콘티는 영화의 시작부터 죽음에 대한 명상코드를 가득 채워놓고 있는데, 다른 이들의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갑판 의자에 앉아 무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하는 아센바흐에게서 삶의 활력과 재충전을 위한 휴양지가 아닌 죽음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자의 모습이 발견되는 것도 이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산마르코로 가서 증기선을 타려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심술궂은 곤돌라 사공에 의해 리도 섬으로 가는 것은 저승세계로의 여행을 연상케 한다. 이렇듯 잔잔함 속에 담겨진 격정적 선율의 말러 5번 교향곡이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의 틈새를 메워보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치명적 사랑이 몰고 올 노예술가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일 따름이다. 

심장발작으로 인해 요양 차 베니스로 온 아센바흐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열풍이 시작된 바닷가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위해 로비에 들어서면서부터 그가 지켜온 도덕적 가치는 한 순간에 무너진다. 롱테이크로 로비에 앉은 인물들을 훑어가며 한 바퀴 돌던 카메라가 멈춘 지점에 타지오(비요른 안드레센)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순수하면서도 신비로운 외모를 지닌 타지오는 항상 이성과 합리성을 덕목으로 살아오던 아센바흐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그는 내면에 숨겨져 있는 동성애 본능을 끄집어내면서 이전에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디오니소스적 관능의 세계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영화는 죽음을 앞둔 노작곡가의 시선과 행적을 통해 예술의 창작과 타락한 쾌락, 삶과 죽음, 이성과 감성, 디오니소스적 감성과 아폴론적 이성 사이를 넘나들면서 대극적 서사를 펼쳐내기에 이른다. 

소격화되고 중복된 재현

비스콘티의 영상미학의 중심은 소격화와 중복된 재현방식이다. 세밀하게 말하면, 비스콘티는 카메라를 편집도구화 시키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서사의 단절과 분리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시각, 청각적 재료를 가지고 특별한 방식으로 극단적이리만치 정확하게 조율해온 그가 이 영화에서는 과도하리만큼 줌을 사용한다. 즉, 비스콘티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인 클로즈업을 배제한 거리감두기가 이 영화에서는 줌-인-아웃의 극단적 활용을 통해 시각적 거리감을 유지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심리적 거리감이 아니라 시각적 거리감이라는 것이다. 줌을 사용한 장면들의 대부분은 아센바흐의 시점이거나 그의 심리상태를 설명하는 것에 할애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줌이 그 대상을 타지오로 선택할 때는 그의 얼굴과 동선까지 포착하며 빠르게 코앞까지 당겨버리는데 반해, 아센바흐의 경우는 그의 감정변화를 감추기라도 하듯 애써 일정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과도한 클로즈업이 사용된 예는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근접촬영 정도에 머물곤 했을 따름이다. 가령 아센바흐와 타지오가 처음 대면하는 로비 장면을 보면, 관객은 타지오에게 매료된 아센바흐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다만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심적 동요가 일고 있음을 간파할 뿐이다. 이러한 장면은 둘이 마주치는 호텔에서, 해변에서, 시내 골목길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카메라는 냉정하고 또 차갑게 둘 간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대신해 말러의 선율과 매혹적 미장센이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센바흐는 타지오에게 한마디의 말도 걸지 못하면서 그를 따라 해변을 산책하며 끊임없이 주시한다. 또한 타지오가 자기 또래의 동료들과 지나치게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질투로 온몸이 타들어 간다. 비스콘티가 유럽 전역을 돌면서 겨우 찾아낼 정도로 가장 공들여 캐스팅한 비요른 안데르센이 연기한 타지오라는 캐릭터는 대사는 거의 없지만, 과연 그 외모 자체가 엄청난 신비로움과 모호함을 뿜어낸다. 그는 아센바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어느 순간 그에게 강렬한 시선을 되돌려주다가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은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탐미주의의 최고봉으로 이 작품을 거론하게 만드는 다른 이유이기도 한데 즉, 실제적인 연애양식과 무관하고 에로티시즘의 서사를 뒤집으면서 오로지 시각효과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센바흐에게 있어 동성애란 실제 충족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시각적' 만족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이다. 덧붙이면 타지오와 아센바흐의 관계는 시각적 만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타지오를 사랑하게 됨에 따라 아센바흐는 ‘주시하는 자’이면서 ‘바라보는 자’가 되며, 아센바흐와 타지오의 감정교류는 오로지 시선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센바흐가 죽기 직전, 콜레라로 인해 철 이르게 텅 비어버린 해변에 홀로 서 있는, ‘주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는 아센바흐의 동성애적 정열의 ‘시각적’ 성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영화에 거듭 등장하는 유사한 장면과 인물들의 설정으로 인해 불러오는 기시감(旣視感)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아센바흐가 탄 여객선의 이름인 에스메랄다는, 아센바흐가 베니스로 오기 전 찾아간 매음굴 창녀의 이름과 동일하며, 식당에서 타지오가 치던 곡과 에스메랄다가 자기 방에서 치던 피아노곡 모두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점도 일치한다. 회상 신에서 아센바흐는 에스메랄다와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이는 에스메랄다라는 과거를 돌려보내는 대신 타지오를 선택하는 치환과정을 통해 아센바흐의 성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반복재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는 세 명의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선상에서 만난 화장한 노인과 곤돌라의 무허가 뱃사공, 그리고 호텔에 들어와 노래를 부르던 밴드가 그들이다. 불균질적으로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마치 죽음을 예비하고 인도하는 저승사자의 예고 없는 방문처럼 느껴진다.

비밀의 매커니즘 - 동성애와 콜레라

독일작가 토마스 만의 작품에는 ‘에로틱한 우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에로틱한 우정’이 동성에 향해지면 동성애적 경향을 띠게 되는데, <부덴부로크가의 사람들>에서 한노가 같은 남자에게 쏟는 감정, <토니오와 크뢰거>에서 토니오가 한스에게 보내는 동경심, 영화로도 만들어진 <마(魔)의 산>에서 카스토르프가 동급생 히페에게 보내는 연정, <파우스트 박사>에서 아드리안이 천재적인 어린 조카에게 보내는 감정이 그러한 것이며, 토마스 만 역시 부인과 결혼하기 전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할 때, 한때 동성애적인 갈등을 겪었다는 것이 최근에 공개된 그의 일기에서 드러났다.
타지오를 향한 아센바흐의 열망은 차치하더라도, 영화 초반 심장에 이상이 생긴 아센바흐를 바라보며 손을 잡고 안도의 한숨을 짓는 알프레드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두 사람 사이도 의심의 여지가 충분할 정도지만,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동성애는 과격한 성애표현은 고사하고 사소한 신체접촉조차 나오지 않는다. 비스콘티는 왜 육체적 관계를 배제하고 오로지 시선의 충족으로만 치명적인 사랑을 표현했을까? 그것은 베니스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비밀’의 기능성을 모두 충족시킴으로써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더하려는 수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중요한 장치인 동성애는 ‘비밀’과 ‘은밀함’ 아래서 기능할 때야 비로소 격정성이 커진다는 것이고, 베니스가 한 때 동성애자들의 천국이었다는 공공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오히려 그 장소를 배경으로 삼되, 정상적인 관광객들 사이에 두 남자를 배치시킴으로써 사적 비밀 유지를 통한 욕망의 극대화를 노렸다는 것이다.
과연 “욕망은 비밀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란다”는 말과 이렇듯 완벽하게 접점을 이루는 영화가 또 있을까? 영화 속 베니스는 콜레라가 창궐하여 사람이 죽어 나가고 시내의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거리에서는 방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리도 섬 베인즈 호텔에 투숙중인 관광객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관광수입으로 먹고 사는 도시에서의 전염병 발병이 불러올 결과 때문에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이다. 결국 시내와 호텔 사이에 비밀과 생존이라는 벽이 가로놓인 셈이다. 또한 아센바흐가 타지오를 사랑하는 것 역시 비밀이다. 물론 이것은 사적인 비밀이기에, 그는 혼자 생각하고 상상하며 오로지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드러내고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절절한 심정을 대변해주는 장면이 영화에도 나오는데, 환전소 직원으로부터 “콜레라가 발생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내일 당장 이곳을 떠나라”는 말을 듣는 순간, 타지오의 가족에게 알림과 동시에 타지오의 머리를 쓰다듬는 꿈같은 상상을 잠시나마 해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결국 그는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한 채 “절대로 그렇게 미소 짓지 마. 누구한테도 그렇게 미소 짓지 마. 널 사랑한다”라는 독백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공표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영화는 공적 비밀과 사적 비밀을 병치시켜놓음으로써 아센바흐의 열망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숨통을 조여 오는 공간 속에서 사적 비밀을 유지하고 이어가고자 애쓰는 노신사의 몸부림이 추하거나 부도덕하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공감가능 한 것 역시 비밀의 메커니즘이 지닌 속성들 때문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결국 아센바흐는 청교도적인 그의 도덕적인 관념과 이상이 타락되는 것이 두려워 타지오로부터 도망치고자 기차역으로 달려가 뮌헨 행 열차를 타려고 한다. 하지만, 역무원들의 사소한 실수는 오히려 그에게 타지오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빌미거리와 희망을 선사해준다. 다시 리도 섬 호텔로 가는 배 위에서 미소 짓는 아센바흐, 그리고 타지오를 보려고 다시 찾은 해변 가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인 타지오를 보며 짓던 흐뭇한 그의 미소. 이때 그의 삶은 처음으로 활기를 띠며 배경음악은 연신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대신 생명력 넘치는 3번으로 바뀐다. 타지오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예술혼으로 승화라도 시키려는 걸까? “감각적인 것을 통하지 않은 예술은 거짓“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독백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이르고, 해변에서 타지오를 바라보던 그는 악상이 떠오른 듯 처음으로 작곡에 몰두하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콜레라를 피해 떠나려는 타지오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해변을 찾은 아센바흐. 그리고 베니스에서 잠든다.

순수미와 정신의 힘을 믿었던 인물 아센바흐, 때문에 말년에 찾아온 벼락같은 사랑 앞에서 너무 힘없이 무너지는 그의 모습은 더 없이 가엽고 애처롭기만 하다.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어서도 아니고, 금기된 사랑이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친구인 알프레드와의 논쟁을 통해 “미와 순수는 정신적 행위”라 부르짖으며,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다”던 아센바흐였기에, “천재성은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알프레드의 말을 맞받아치며 “난 예술의 악마적인 힘을 믿지 않”던, 그러나 타지오를 만난 이후 ‘예술의 악마적인 힘은 천재의 양식이자 필수적인 요소’라는 논리와 타협하며 염색과 얼굴의 화장을 하고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했던 아센바흐의 모습에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형상을 찾을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까운 것이리라.
결국 생의 마지막, 아센바흐가 바라본 것은, 살면서 한 순간도 놓지 않았던 그러나 찰나에 잃어버린, 정신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 순수미의 표상 아폴론이었다. 유럽 상류사회를 조롱하던 악사의 웃음소리도 창궐하던 전염병도, 노예술가의 치명적 사랑의 서사도 바닷가에 선 타지오가 몸으로 만들어내는 아폴로의 현현(顯現) 앞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으니 어찌 베니스에서라면 죽음인들 슬프다 하겠는가. 그러니 감성이 이성을 무너뜨리고, 순수미가 퇴폐미 앞에서 허물어지는 순간일지라도 끝없이 자신을 다잡고자 애쓰던 아센바흐의 마지막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며, 동시에 처연하지만 아름답고 몽환적이면서 절절한 비스콘티의 탐미주의에 경의를 표한다. (글/ 백건영_ 영화평론가, 네오이마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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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


최근 이탈리아영화의 약진을 보면 이미지의 힘과 우아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탈리아 특유의 고풍스럽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아름답게 잡아낸 일련의 영화 속 아름다운 화면들은 일정 부분 루키노 비스콘티의 미학적 성취에 빚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루키노 비스콘티는 리얼리스트이다. 단지 그가 네오리얼리즘의 태동을 알린 <강박관념>(1943)의 감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후기 대표작으로 익히 알려진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의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화면들을 떠올려볼 때, 이러한 선언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 리얼리스트인 까닭은 영화에 자신을 온전히 투영해냈기 때문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자에서 출발하여 극단적 탐미주의까지, 작품의 폭넓은 스펙트럼은 스스로의 삶이자 인생 그 자체이다. 낭만과 퇴폐에 익숙한 귀족 가문의 자제로서, 행동하는 공산주의자로서, 그리고 솔직했던 동성애자로서, 타인도 자신도 속이지 않았던 그의 정직함이야말로 그를 모든 리얼리스트들의 위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한다. 오는 3월10일부터 20일까지 열흘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을 통해 이러한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특별전은 지난해 가을 있었던 비스콘티 특별전에서 소개되지 않았던 6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리얼리즘 형식 안에 존재하는 인간적 감성의 실재를 포착한 비스콘티의 진정한 미학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안나 마냐니의 극성스런 모성연기가 돋보이는 <벨리시마>(1951)는 어린 연기자 딸을 둔 엄마 막달레아를 통해 영화산업의 생리를 비판하는 네오리얼리즘 색채의 영화이다. 비교적 단순한 모녀간 멜로드라마를 흥미로운 현실비판으로 이끄는 것은 쇼비즈니스의 추악한 현장의 생생함을 잡아낸 비스콘티의 세밀한 관찰력이다. <흔들리는 대지> <레오파드>와 함께 시칠리아 삼부작 중 하나로 불리는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은 핍박받는 노동자 계급의 악순환을 담담히 포착한 네오리얼리즘의 걸작이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부 시칠리아로 이주한 가족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단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름다울 준비를 마친 화면들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탐미주의로 나아갈 징후들을 드러낸다.

독일 삼부작으로 불리는 <저주받은 자들>(1969),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루드비히>(1972)는 이번에 모두 상영된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탐미주의로 전환한 비스콘티 극적인 변화의 끝에 있는 이 세 작품은 비스콘티의 인생, 취향, 문화적 자의식을 모두 투영한 비스콘티 미학의 완성을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의 미학적 성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4시간에 걸쳐 바바리아의 왕 루드비히 2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다룬 대작 <루드비히>는 실로 극단적 유미주의의 절정을 이룬다. 실제 그의 마지막 연인이기도 했던 헬무트 그리엠이 출연한 <저주받은 자들>은 1930년대 독일의 재벌 에센벡가의 비극적 사건에 대해 다루는데,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 나치가 배경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순수한 사람들>(1976) 역시 비스콘티 스스로 끝내 공개되는 것을 보지 못했던 유작이라는 주목할 만한 사실 이외에도 최근 이탈리아영화의 화려함과 가장 밀접한 감성을 보여주는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글: 송경원 영화평론가)

* 이 글은 영화전문주간지 씨네21 794호에 실린 기사를 발췌 게재한 것입니다. 원본은 씨네21 794호 96p나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2005&article_id=65127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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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어머니’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탈리아의 남성들은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집안의 시설이 고장 났을 때 어머니의 이름을 팔면 한달 후에 온다던 수리공이 그날 바로 찾아와 고쳐준다는 일화도 어머니의 영향력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비스콘티의 초기작 <벨리시마>는 거칠고 강한 전후의 이탈리아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안냐 마냐니는 <벨리시마>에서 자신의 딸을 소모시키는 억척 같은 어머니상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관객들의 마음 이곳 저곳을 찌르는 호소력은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과장된 연기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이탈리아 영화의 인장으로써 특색 있게 빛난다. 특히 마냐니는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 받고 극단에서 클럽을 전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영화 속 아이에게 자신을 이입시켜 더욱 극성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벨리시마>는 비스콘티의 초기작인 동시에 너무 빠른 대사로 인해 이탈리아 밖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다. 어린 딸을 가진 엄마가 딸을 특별하게 기르기 위해 영화감독의 공개 오디션에 참가시켜 캐스팅이 되도록 온갖 힘을 쓰려는 데서 영화는 시작한다. 문제는 아이가 전혀 연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갈등 속에서 상처받는 순수한 아이를 포인트로 삼고 기관차처럼 달려간다. 아이가 울어도,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 엄마에 눈에 보이는 것은 슬퍼하는 아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혹은 허상에 가까운 아이의 재능과 성공)이다. 아마 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아이에게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연기에 전혀 재능이 없는 아이를 뛰어난 연기자로 포장시키려고 애를 쓰는 어머니의 과한 욕심에서 그 어떤 안타까움이나 연민을 느끼기도 전에 짜증을 느끼게 된다.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오디션 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어른들의 세상에 갇힌다. 그래서 인지 영화는 어두운 프레임에 갇혀있는 아이를 여러 번 보여준다. 사진기 앞의 아이, 자기 전 어둠 속에 갇혀 우는 아이. 사진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진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투영된 상처를 받는 어린이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은 사회의 순수한 단면과도 같다.


<벨리시마>는 이탈리아 영화의 여러 상업적 관습을 따르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삽입과 화려함 그리고 연극적인 연출이 그것이다. 조감독과 막달레나의 러브스토리는 유치하고 큰 영향을 주진 않지만 극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연극적인 연출은 영화 전체에 스며들어있다. 시대의 스타 마냐니, 영화의 큰 부분을 그녀에게 지탱하고 있는 것부터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주 관객과의 소통을 하려는 듯 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 무대와 실내에서의 잦은 촬영은 더욱 연극적인 모습으로 각인된다. 영화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이탈리아의 영화도시 ‘시네시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파시즘 정권에 만들어진 완비된 촬영소는 전후 이탈리아 영화의 부흥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비스콘티는 그 ‘시네시타’에 경의를 표하고자 했던 것일까?

영화의 험난한 여정은 마지막 스크린 테스트에서 종점을 찍는다. 현실을 자각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느끼게 된다. 마치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느꼈던 창피함과 아이를 향한 속죄로 귀결된다. 비스콘티는 이 영화를 만들 때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를 변주하는 느낌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어머니. 그렇게 험난했던 모성애의 변주곡이 끝날 때, 아이(비스콘티)는 우스꽝스러운 사회 속에서 빠져 나와 비로소 단잠을 잘 수 있게 된다. (정태형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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