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8일, 프랑수아 트뤼포의 <사랑의 도피> 상영 후 “앙투안 드와넬의 모험”이란 주제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번 시네토크는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사랑의 도피>로 마무리되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전반적인 이야기와 트뤼포의 영화세계에 대한 것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함께 보며 진행됐다. 여기에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이 영화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부부의 거처>로 트뤼포는 드와넬 시리즈를 마감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동료 감독 한 명이 코펜하겐의 한 극장에서 2시에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8시에 <부부의 거처>로 끝나는 '드와넬 시리즈'를 연속 상영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트뤼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시리즈를 한 편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편 더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부부의 거처>의 말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행복하게 결말을 맺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거의 10분 이상 과거 드와넬 시리즈의 영화 클립을 사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400번의 구타>로 시작한 트뤼포의 영화적 특징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트뤼포의 영화를 드와넬 시리즈를 이야기하려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아침을 맞은 두 연인의 아침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뤼포 영화가 그러하듯 성애의 장면은 없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처음의 장면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두 연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중간에 에펠 탑이 보인다는 것이다. <400번의 구타>의 첫 시작이 에펠 탑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왜 에펠탑인가? 트뤼포는 유년기에 거리를 방황하고 돌아다닐 때 에펠 탑을 중심 기점에 두고 길을 찾았다고 한다. 트뤼포의 영화 대부분에는 그런 기억 때문인지 언제나 에펠 탑이 나온다. 이 영화는 외부 풍경으로 에펠 탑이 보이지 않고, 내부의 공간에 자리잡혀 있다. 굳이 말하자면 <400번의 구타>가 바깥으로 떠도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안으로 들어오는 영화, 내향적인 영화, 내부로 향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완결편이기에 영화 곳곳에 과거의 장면을 활용하고 있다. 몇 가지 플래시백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 플래시백은 앙투완과 부인이 이혼을 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줌인하면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드와넬 시리즈는 드와넬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 오면 드와넬 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플래시백이 사용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앙투안 드와넬의 삶을 복수적인 시점으로 보고 있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주인공이 닮았다. 베르트랑은 돈 주앙 같은 인물이지만 여자를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사랑한 남자로, 두 사람의 캐릭터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대신 차이는 있다. 베르트랑이 외향적이라면 앙투안은 트뤼포와 비슷하게 내향적인 인물이다.
 
플래시백이 활용되는 것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플래시백은 기차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기차의 움직임과 더불어 과거로의 시간이 흘러간다. 기계의 운동은 앞으로 향하고 그 가운데 앉혀진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을 상기한다. 운동과 시간이 결합되어 있다. 운동성은 기제들, 즉 기차나 자동차가 있고 필름의 움직임이 과거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과거의 플래시백을 실제로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과거에 출연했던 영화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사실은 기록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플래시백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 안에서 있었던 어떤 심상이 펼쳐져 나가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과거에 촬영된 필름의 릴이 다시 펼쳐져 나가는 플래시백이다. 절차적으로는 같지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질료가 트뤼포가 이미 십여년 전에 촬영한 필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라는 시간이 철저하게 물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물질적인 사물,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을 통해서 과거라는 시간이 환기되어 간다.

 

 

 

 

영화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소설로서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했던 드와넬의 이야기다. 과거에 영화로 봤던 그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픽션(소설)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소설에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의 맥락 안에서만 보자면, 앙투안 드와넬에게 있어 소설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회고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소설이라는 것을 통해서 변경해가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근거로 해서 작품을 만들어나가기에 자기의 삶을 조금 윤색하거나 각색해나가는 것이 가진 창작성의 문제도 담겨져 있다. 동시에 그것은 드와넬 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트뤼포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자전적 성격의 한계성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삶과 영화를 결합하는가의 문제, 이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고다르와 트퓌로를 비교하자면, 고다르가 삶과 영화를 원 플러스 원처럼 플러스 결합했다면, 트뤼포는 마이너스로 했던 것 같다. 즉, 삶에서 빠진 부분을 영화로 메꾸려 했던 것 같다. 삶에서의 부족분을 삶에서 회복시킬 수 없었기에 영화라는 것으로 대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에게 삶과 영화가 대등했다면, 트뤼포는 영화가 삶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이 소설을 쓰는 창작 행위의 동기가 트뤼포의 그것처럼 삶의 부족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와넬이 어째서 소설가가 됐는가, 혹은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이 왜 소설가가 됐는가를 생각한다면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관인 여자를 쳐다보는 장면의 플래시백이 있다. 여자의 안경을 쳐다보는 순간, 클로즈업이 되면서 <부부의 거처>에서 크리스틴의 모습을 회상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회상이라는 것을 특정한 사물, 사진, 필름 등을 경유해서 진행되는, 회상의 물리성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400번의 구타> 이후의 드와넬 시리즈 전체를 봤을 때, 드와넬의 직업이 어떤 변천을 거쳤는지를 유심히 보면 드와넬이란 인물과 직업이라는 게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드와넬이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그러면서 소설가가 된다. 예술적인 표현들과 표현의 매질, 즉 물질적인 질료성의 프로세스들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트뤼포가 매진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콜레트가 기차 안에서 소설을 읽어나갈 때 책과 과거의 회상 장면이 오버랩되어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 충. 과거에 필름으로 찍혀진 것, 즉 이미지와 활자화된 문자와의 충돌이 있다. 자전적이 소설과 자기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이다. 이 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되어 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는 오버랩, 디졸브, 아이리스 등의 장면들이 많다.

 

소설 그 자체와 나중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 여자가 떠올렸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이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필름으로 찍힌 것과 회상, 이미지라는 것과 활자화된 문자가 같이 충돌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을 쓴 것인데 자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이미지로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된다. 트뤼포 영화를 보면 디졸브, 오버랩, 아이리스 같은 방식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표현적 방식 안에서 영화적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나간다. 이런 특징들은 누벨바그 작가군 중에서도 트뤼포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런 방식을 자주 사용했던 이유는 장 콕도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기차의 플래시백 장면에 이어 앙투안이 자신이 신작소설의 구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특별하다. 그 전까지 소설은 자신이 겪어왔던 것에 근거해서 구성한 픽션이라면, 여기서의 신작은 자기가 떠올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중에 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자신이 경험한 것이냐 아니냐라는 (진위성) 문제보다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사진이 꽤나 흥미롭다. 한 남자가 사진을 찢어버려서 찢어진 사진을 앙트완이 줍게 되고, 조각난 것을 붙여서 그가 여자를 찾아다닌다는 설정인데, 이것이 영화에서 크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에서 얼굴은 모른 채 단지 다리만 보고 빠져서 그 여자를 쫒아 다니게 되는,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베르트랑의 추적의 삶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찢어진 사진을 포토몽타주 하듯이 붙여서 완성된 형태로 사진 속 여자를 찾는 행위의 여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트뤼포 영화에서 사진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만났던 모든 여자들과 그 여자들이 보낸 편지를 보면서 그것을 근거로 소설을 쓰게 된다. 과거의 기억을 사진에 의지해 떠올리면서 추억을 완성해나가는 행위로 소설을 쓴다. 말하자면 사진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흔적이고, 무언가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물리적인 근거점이 된다. 다른 한편, 사진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것을 일종의 포즈이다. 그래서 달리 말하자면 트뤼포의 영화가 (영화라는) 운동성과 (사진이라는) 정지성, 이 둘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충돌은 앙투안의 연애적 삶에도 관통한다. (사진으로 표현된) 정지성이라는 것이 영원하고 불변적인 사랑을 말한다면, 움직이는 (영화의) 끊임없이 가변적인 연애가 있다. 끊임없이 여자를 바꿔가는 앙트완의 연애는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는 삶이고, 앙투안은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내내 열심히 뛰어다닌다.

 

 

 

 

보시는 것처럼 콜레트와 관련한 장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증거사진이 되는 범인의 프로필 사진이다. 이것은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투안이 타자기를 훔쳐서 도주하다가 경찰서에서 수감되면서 사진을 찍을 때와 유사한 종류의 사진이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트뤼포의 영화 그리고 드와넬 시리즈 영화에서 사진은 체포, 구금, 포획, 정지와 연결된다. 정지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라면, 이는 트뤼포의 삶에서 구속과 관련되는데 이는 감옥이나 군대, 학교와도 같은 공간과 연결된다. 트뤼포의 삶 자체가 구속과 탈주를 계속 반복해왔다. 사실 20대까지 트뤼포의 삶이라는 것은 구속된 상태에서 탈주의 욕망을 끊임없이 반복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벨바그의 시절을 거치면서 구속에서의 탈주 욕망이 한편으로는 내부화되는 운동으로의 변화가 있다. 즉, 가정을 꾸리는 것, 트뤼포에게는 두 번째 가정을 꾸리는 것, 아이를 만드는 것, 혹은 앙투안에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부로 움직이는 운동으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운동과 충돌한다. 콜레트가 사건 파일을 뒤적거리다 발견하는 두 종류의 사진, 즉 살인 사건의 사진과 드와넬이 흘린 여자의 사진은 모두 사진의 본성, 즉 무언가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은 구속과 체포, 탈주를 반복한 트뤼포를 구제한 앙드레 바쟁의 영화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는 글에서 바쟁은 무언가의 흔적, 성화성과도 같은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포토몽타주와도 같은 여인의 사진은 그런 트뤼포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모든 작가들은 영화적 역량을 무엇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세계가 달라진다. 즉, 영화적 파워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트뤼포에게 영화의 강력한 힘이란 구속과 탈주를 반복한 그가 영화관에서 경험한 것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아이가 영화관의 어둠에서 무언가를 지켜봄으로 해서 자기를 투사할 수 있었고, 그 영화관의 낯선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응시,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낯선 사람들과의 감정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두번째 측면이 트뤼포의 영화를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갔다. 트뤼포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고려한 영화다. 그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해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면 다른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전제해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트뤼포는 후자의 감독이 되려 했다. 동시에 트뤼포의 인정욕구가 있다. 이는 영화의 투사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인정해가는 것, 자신을 이해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트뤼포의 영화는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영화에 기입된다. 내가 영화를 본다는 조건이 영화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한 사람은 히치콕이었다. 특히 <이창>에서 그러하다. 트뤼포가 히치콕을 끌어오는 것은 그가 히치콕의 형식을 빌어온 것도 있지만 트뤼포 자신의 영화적 경험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트퓌로의 영화에서는 그래서 본다는 것과 관련한 문제, 특히 시점의 문제가 언제나 특이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시점의 문제가 운동성을 갖게 되면 추적이 된다. 그것이 연애 영화에서는 한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이런 형식이 만개된 작품이 <도둑맞은 키스>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영화 관람의 경험이 영화 안에 녹아들어갔을 때 표현되는 두 번째 방식은 그의 영화 안에 언제나 그림자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를 닮은 분신적 존재가 영화 안에 이중으로 등장한다. 그 존재들은 언제나 익명적이거나 대단히 낯선 사람들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언제나 앙투안과 짝패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도둑맞은 키스>에서 크리스틴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남자가 있다. 그런 인물들과 앙트완이 공유하는 감정이 있다. 이 부분이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행위 자체를 영화 안에 기입시켜 버리는 트뤼포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트뤼포 영화는 물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라는 것은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필름이 돌아간다, 프로젝션에 의해 스크린에 이미지가 투영된다는 식의 기계적 매커니즘과 기계적 매커니즘의 작동, 프로세스에 따라서 감정이라는 것들이 전개되어 간다. 트뤼포는 이런 전제를 망각하지 않고 언제나 감정의 전달보다 중요하게 보고, 기계적 프로세스와 감정의 프로세스가 언밸런스하게 되는 것이 이들의 낭만적 연애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의 피아노 건반의 기계적 움직임과 연주자의 감정의 언밸런스가 있다. <도둑맞은 키스>에서의 파리의 속달체계에 의해 편지가 전달되는 것과 낭만적인 편지도 그러하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앙트완이 무언으로 편지를 직접 전하는 것은 감정의 표현과 감정을 담는 표현의 매체가 같은 속도로 진행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도 마지막에 그런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샤를르 드네는 한 여자에서 다른 여자로 매번 갈아타는 남자의 실제 이유가 너무 근접해지는 것에의 두려움, 상처받는 것에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트뤼포의 친밀함의 다른 측면이다. 즉, 트뤼포적인 인물들은 상황을 (연애적 사건을) 컨트롤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친밀함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400번의 구타>에서 극장의 사진을 훔쳐갔던 앙트완은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인 <사랑의 도피>에서는 남이 버린 사진을 붙여서 그 사진의 여자를 찾아가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의 도피>의 마지막은 <400번의 구타>의 놀이공원에서의 장면과 앙트완이 현재의 여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병치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트뤼포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앙트완은 놀이 기계의 움직임의 가속화로 벽면에 정지된 것처럼 붙어버린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회전차의 구조는 영화의 전사인 조에트로프zoetrope와 대단히 비슷하다. 정지된 사진, 움직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구조, 이러한 (영화적)기제를 동원해서 삶을 반추해가는 것이 드와넬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 김고운(관객에디터) |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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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지난 7월 1일, <부드러운 살결> 상영 후 유운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이어졌다.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트뤼포의 초기작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비록 개봉 당시엔 냉대를 받았지만, 이후에 재평가 받으며 트뤼포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트뤼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기도 한 <부드러운 살결>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트뤼포 영화 세계 전반의 특징적인 면들을 짚어나간 이 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작년 미국의 필름포럼에서 <부드러운 살결>이 상영되었을 때, 짐 호버만은 이 영화를 두고 재평가되어야 할 영화라고 쓰면서, ‘가정domestic 서스펜스 영화’라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는 ‘친밀함intimacy의 서스펜스’라고 부르고 싶다. intimacy는 친밀함의 의미도 있지만 성적 의미도 갖고 있다. 이 ‘친밀함intimacy'를 가지고 트뤼포의 영화 세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친밀함의 서스펜스

‘친밀함’이라는 말을 정의한다면, 오직 둘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관계라고 말하고 싶다. 둘 이외의 다른 어떤 관계가 끼어들거나, 보아서도 안 되고, 시각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둘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되어서도, 알려져서도 안 되는 관계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두 가지 충동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내부적으로는 이 관계를 감춤과 동시에 알리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고, 외부적으로는 그런 관계의 낌새가 있을 때 바깥의 사람들이 그 관계를 알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다. 친밀함의 관계가 성립이 될 때, 그것은 굉장히 흥미진진한 영화적 소재가 되는데, 문제는 영화는 이 친밀함’ 담아내기에 굉장히 불편한 매체라는 점이다. 관계 외부의 듣는 사람, 듣는 기계 같은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아야하는데, 이미 카메라가 관계를 포착하는 순간 친밀함은 파괴된다. 영화는 친밀함에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다루기 불편한 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함의 관계를 맺고 있는 당사자들이 이걸 파괴하는 가장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은 자신들의 성적인 관계를 직접 카메라로 담아내는 셀프포르노 형식이 될 것이다.

영화는 바라보는 것, 응시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가 아무리 친밀함의 공간에 호기심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하면, 결국은 관음증적인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트뤼포가 가장 좋아하는 히치콕 영화 중 하나인 <이창>의 두드러진 테마이기도 하다. 트뤼포는 영화가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려고 하면 관음증적인 것이 되거나 그 관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굉장히 잘 알았던 감독이었다. <이창>같은 영화는 이런 공간에 다가가면서 사실은 그것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의식,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영화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변명이 필요해진다. 가령 <이창>의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는 설정은, 실체적 결함 자체가 그런 죄책감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말부에 가서 주인공이 나머지 다리까지 깁스를 한 것은 죄책감을 갖고 기어이 모험을 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트뤼포는 이런 식의 역설적인 구조를 꽤나 두려워했던 감독처럼 보인다. 트뤼포는 영화에서 베드씬 찍는 것을 꺼려했던 감독이었다. 친밀한 관계에 대해 호기심은 있는데, 패러독스도, 죄책감도 싫어했던 점들이 트뤼포 영화의 모순적인 태도들과 다양한 면모들을 만들어낸다. 트뤼포는 동료 누벨바그 감독들 중 어떤 이보다도 친밀함이라는 관계, 그 관계가 이뤄지고 있는 영화적 공간에 대해 깊이 관심 갖고 있던 감독이었다. 트뤼포의 연애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면서 그것의 직접적인 재현을 피하려는 일련의 시도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장르로 가거나 영화 스타일 자체를 전시하는 식으로 눈가림을 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뭔가 보고 싶고, 관찰하고 싶은 건 있는데, 여기에 결부되는 죄책감은 피하고 싶다는 데에 트뤼포 특유의 유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음증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 어떻게 친밀함의 공간으로 다가갈 것인가.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죄책감만이라도 피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나오는 트뤼포의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트뤼포의 세 가지 도피법

첫 번째는 죄책감을 덜 가지는 상태에서 다가가기이다. 이 방식은 친밀함의 공간에 개입하거나 들어가려는 사람을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부의 침실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아이처럼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트뤼포는 자신의 남자주인공을 그런 식으로 가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인물이 어쨌든 영화에서는 성인으로 나타나니까 사회적으로는 무능하고, 성인의 특성 가운데 일부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은, 다리에 깁스를 한 주인공이라는 히치콕의 물리적인 처리방식이 심리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처리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이런 점에서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장 피에르 레오가 굉장히 트뤼포적인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해결책은 친밀함이 두 사람 사이에서 성리보디는 것이라는 전제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이다. 친밀함과 유사한 감정으로 유지되는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쥴 앤 짐>같은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구조로,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같은 영화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시도가 그렇다는 것이지 성공하진 못한다. 결국은 두 명의 시선으로 지탱되는 친밀함의 공간과 그걸 바라보는 카메라에 대한 메타포로 삼각관계가 등장하는데, 친밀함의 원래의 전제를 억지로 감추려고 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에서 결국은 친밀함의 공간은 사실 두 사람의 것임이 확인되고 밝혀진다. <쥴 앤 짐>은 계속해서 쥴과 카트린, 짐과 카트린으로 오가고 결국 마지막엔 동반자살이라는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친밀함이란 둘 사이에서밖에 성립될 수 없다는 전제를 확증하고 끝난다.

세 번째 방식은 친밀함의 순간이나 관계들을 장르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영화 장르라는 것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기계장치라는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런저런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죽음을 기록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때로는 외설스러운 일일수도 있는데, 이런 죽음이 장르, 이를테면 범죄영화나 전쟁영화, 액션영화에서는 죄책감 없이 카메라가 죽음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애의 과정을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히 민망한 일이지만, 이런 민망함을 덜어줄 수 있는 장르가 스크루볼 코미디나 뮤지컬이 될 수 있다. 멜로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섹스와 그것의 실패를 낭만화하는 작업이다. 트뤼포가 어떤 식으로든 차용하고 있는 이 장르들은 친밀함의 공간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뤼포는 친밀함의 공간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호기심을 갖고서, 죄책감을 덜고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탓에 말씀드린 이 세 가지 도피법을 오가며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트뤼포의 필모그래피를 얼핏 보면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과 비교했을 때, 예술적인 연속성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비평가 시절에 이른바 작가정책의 주창자였던 트뤼포는, 자신이 감독이 되자 작가정책의 구원비평의 수혜를 가장 필요로 하는 감독이 되었다. 그 결과 샤브롤과 함께 가장 누벨바그적인 작가가 되었다. 고다르와 리베트는 아주 명료하게 극단적인 아방가르드 실험으로 갔고, 이른 태도는 사실 5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 시절에 내세웠던 ‘작가’라기 보다는 ‘예술가’의 형상이었다.

 

불편함의 정면 응시

<부드러운 살결> 같은 영화는 트뤼포 영화 경력에서 불편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아주 드물고 희귀한 시도로 보인다. 불편함이라고 하는 것이 이 작품에 서스펜스를 낳는다. 이 영화 이전에 트뤼포가 만든 세 편의 영화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쥴 앤 짐>은 앞서 말씀드린 트뤼포의 세 가지 해결책을 차례로 제시한 영화들이었다. <부드러운 살결>은 세 가지 시도를 다 거친 다음 그것을 파기하고, 친밀함의 공간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트뤼포는 이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은 불편함을 감당하기에는 여린 구석이 있었던 감독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 이후에 적어도 관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일한 <부부의 거처>를 찍는데, 설령 부부관계와 연애관계에서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부드러운 살결>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살결>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털어내면서, 불륜 혹은 간통이 유머와 코미디를 통해 죄책감을 경감시키는 아주 잘 알려진 트뤼포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부부의 거처>는 황당한 조합을 띈다. 르누아르의 <랑주씨의 범죄>에서의 공간의 구조 안에서 자크 따띠의 영화를 연상케한다. <부드러운 살결>에서와 같은 트뤼포의 모험 또는 시도는 불행히도 한 번에 그쳤고, 프랑스 영화 안에서 이런 식의 대담한 방식으로 극도의 친밀함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계승이 되었다면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부드러운 살결>은 친밀함의 관계, 특히 불륜을 소재로 삼아서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데 따르는 서스펜스를 담아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영화에서 두 연인들이 친밀함의 공간을 성립시킬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아 헤매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선 결국은 호텔방이거나 둘의 일체의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낯선 시골의 모텔 정도 밖에 없다. 트뤼포는 만들면서도 이 영화가 히치콕적인 서스펜스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트뤼포가 왜 히치콕이라는 감독을 그렇게 좋아했을까를 생각해보면, 히치콕의 영화가 궁극적으로는 섹스로 향하는 연애의 도정을 서스펜스 모험의 형식으로 가장 탁월하게 담아내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히치콕의 영화는 모험의 과정은 보여주지만 항상 성관계 직전에 끝나버린다. <부드러운 살결>의 초반에 리스본 호텔의 엘리베이터 장면을 보면, 굉장히 히치콕적인 방식으로 찍혀졌다. 주인공 라쉬네와 스튜어디스인 니콜, 니콜이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에서 긴장감을 포착해내는데, 서스펜스를 담아내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보다 훨씬 길게 잡는다. 히치콕적인 서스펜스에서의 시간의 왜곡을 잘 활용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리스본 호텔의 엘리베이터에서 과거의 연인이었던 두 남녀의 공간에 침입해서 관찰을 했더 라쉬네는 영화가 진행되면 자신과 니콜과의 친밀함을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애쓰게 있다. 이 영화는 <신나는 일요일>처럼 노골적인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히치콕의 <이창>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라쉬네에게는 <이창>의 제프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깁스가 스토리와 스타일상 무려 두 개가 있다. 트뤼포가 이런 식의 직접적인 방식으로 친밀함 공간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죄책감을 경감시키기 위한 , 혹은 죄책감을 안고 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메타포적인 깁스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깁스는 주인공 라쉬네가 갖고 있는 작가로서의 명성이 있다. 명성이라는 것은 <이창>의 깁스보다 훨씬 더 고약해서 자꾸만 타인의 시선을 끌어들여 친밀함을 방해한다. 두 번재 깁스는 스타일상의 선택으로 보이는데, 라쉬네 역할의 배우 장 드사이의 연기에서 표현적인 요소를 거의 박탈해버린다. 트뤼포 영화 중에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의 주인공과 더불어 유독 가장 매력 없는 남자주인공이다. 이처럼 무색무취하고 매력 없는 인물이 있었나 싶다. 스타일상의 면에 있어서 이 인물에게 깁스를 해버리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마 이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역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고 실제로 트뤼포도 이 배우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좀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라쉬네라는 인물이 굉장히 친밀한 관계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바라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 점은 이 영화가 뒤틀리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로 보면 라쉬네라는 인물은 셀프 카메라 형식으로 자신들의 연애를 간직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라면 트뤼포 감독 자신의 꽤 정확한 반영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 라쉬네가 우연히 불륜의 관계에 빠져들었다기보다, 사실은 극단적으로 서스펜스를 유발할 수 있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관찰하기 위해 여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야외에서 카메라로 여자의 모습을 열정적으로 기록하다가 자동으로 놓고 자신도 함께 사진을 찍는다. 스스로 아내와의 불화를 만들어낼 증거를 기록하는 셈이다. 사실 이처럼 사진이라고 하는 것, 혹은 사진을 수집한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트뤼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트뤼포 영화 안에서 그것은 꽤 중요한 계기가 될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사진을 찍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이창>의 주인공과 연결된다.

트뤼포는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왜 이런 식의 영화 찍기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을까. 영화적 친밀함이라는 것이 항상 외설적인 것의 경계에 있는데 그 것이 경계에 머물기 위해선 친밀함 자체를 시각화하지 않는 한에서만 외설의 바깥에 머물 수 있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그런 친밀함을 담아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다가가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그건 영화 자체의 딜레마이기도 하면서 트뤼포의 다양한 연애영화들을 생성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부드러운 살결>은 트뤼포 이후의 다양한 도피의 방식들로 다시 가기 전에 있었던 좀 특이한 사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트뤼포가 연애, 영화, 관계에 대해서 접근하는 모든 강박관념, 불안, 죄책감, 서스펜스와 같은 것이 모두 담겨져 있는 영화로 보인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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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4일, <아메리카의 밤> 상영 후 지난 달에 이어 두 번째 “오픈 토크”행사가 마련되었다. 영화에 대한 공감,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감독으로서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영화의 힘에 이르기까지, 네 감독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일부 옮긴다.

 

 

변영주(영화감독): 오늘은 김종관 감독, 이혁상 감독을 모시고,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오늘 영화를 보면서 가장 와 닿았던 장면은 어떤 장면이었나?

김종관(영화감독): 공감도 있지만, 어쨌든 트뤼포 감독님은 저랑 사정이 많이 다르다보니 동경의 대목도 있다. 대부분은 영화를 찍는 시간이 아니라 영화를 찍기 위해서 기다리는 시간에 대한 고민이 많고, 영화를 찍을 때는 항상 찍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다. 영화에서 감독이 배우를 달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영화는 야간 기차 같다. 네가 살아서 숨 쉴 수 있는 장소는 여기니까 도망치지 말고 여기서 어떻게든 해봐라”는 말이 와 닿았다. 영화를 찍어야한다는 강박에도 공감이 간다.

이혁상(영화감독): 계속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작업해왔기 때문에, 극영화 현장 분위기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극영화감독들은 참 난잡하다는 느낌이었다.(웃음) 영화판에 여러 가지 일들이 많지만, 그중에도 서로 정분나는 일들이 참 많다.

이해영(영화감독): 영화를 만들 때 감독들의 악몽과 무의식, 현실적인 부분 같은 것들이 잘 표현된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트뤼포니까, 프랑스에서 인정받으며 좋은 시스템에서 영화를 찍던 감독이니까, 사실은 영화 속의 고민이나 갈등이 굉장히 우아하다. 여기에 냄새로 따진다면 땀 냄새, 토한 냄새, 발 냄새 같은 걸 섞어 놓으면 충무로랑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웃음)

 

변영주: 재밌게도 하필 오늘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트윗으로 메시지가 왔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고등학생인데, 영화감독이 되려면 19살에는 영화의 어떤 걸 공부해야 하냐고 질문을 보내왔다. 그래서 “19살에는 영화를 공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라고 답했다.(웃음) 오늘 이 자리에도 어쩌면 앞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다. 김종관 감독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김종관: 어렸을 때 영화를 보고나면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면서 공상하곤 했다. <그렘린>을 보면 <그렘린2>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혼자 만들 거보고, <슈퍼맨>의 속편을 만들어본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이해영: 그렇게 블록버스터를 상상하고서 인디영화를 만드셨다.(웃음)

김종관: 영화를 재밌게 보는 것에서 어느 순간 영화를 만들기에 대한 욕구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필름 워크샵을 한번 했었다. 한 달 동안 워크샵에 참여하면서 어깨너머로 영화를 배웠다. 그 때 재밌게 했던 기억에서 어떻게 넘어오게 되면서, 20대 후반부터는 나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이해영: 영화과에 비교적 늦게 들어간 편이다.

김종관: 그 전에는 장사도 하고 이것저것 다른 일을 했었다. 그런 일들이 다 잘 안되고, 뭔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다.

 

변영주: 이혁상 감독은 ‘연분홍치마’라는 다큐멘터리 만드는 독립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연분홍치마’의 첫 작품인 <마마상> 때부터 함께 했었나?

이혁상: 그렇다. 사실 애초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 다들 제작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고, 이론과에서 비평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세미나 팀을 시작하면서 여성주의와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세미나만 하다보니까 뭔가 실천적인 것도 해봐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연분홍치마’를 만들게 되었다. 처음엔 카메라를 든다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현장에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실태보고서 나 자료집 같은 걸 만들게 되는데, 이걸 꼭 글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카메라로 다큐멘터리를 찍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만든 작품이 <마마상>이었다.

 

변영주: 이해영 감독은 배우랑 결혼하고 싶어서 영화감독이 됐다는 게 사실인가.(웃음)

이해영: 특별하게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막연하게 나에게 있는 잡다한 재능들을 모아보면 그나마 영화판에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감독이 돼서 유명해지면 좋은 여배우와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웃음) 변영주 감독은 ‘연분홍치마’와 비슷하게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극영화로 전환하셨는데..

변영주: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장산곶매’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현재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님과 함께 사무직 여성노동자에 관한 중편극영화의 시나리오와 촬영을 했었다. 그러니까 다큐로 시작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김동원 감독을 만나 다큐멘터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만든 첫 작품이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 영화를 만들고 나서야 갑자기 감독이 되고 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이해영: 김종관 감독도 말했지만 사실 영화를 찍는 시간보다는 기다리거나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스스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의식이 별로 없다가, <천하장사 마돈나>가 개봉하고나서 극장의 마지막 상영 때 혼자 영화를 보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더라. 그때부터 ‘나는 감독이다’ , ‘감독이니까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채근한다.

김종관: 처음에 영화를 시작했을 때는 영화가 굉장히 중요했다.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서 시작했기 때문에 스스로 배수진을 치고 뭔가 결과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은 별로 없었다.

 

 

이해영: 이혁상 감독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다.

이혁상: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당장은 <두개의 문> 때문에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한 번 더 게이 영화를 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로 한 편 정도 더 작업하고, 다큐멘터리 뿐 아닌 다른 길도 모색해보려고 한다.

변영주: 영화촬영을 하면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 있나? <아메리카의 밤>에서처럼, 스크립터와 배우가 사랑에 빠져서 감독은 안중에 없게 된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정말 끔찍할 것 같다.

김종관: 영화촬영 현장에선 연애가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웃음) 적은 예산의 영화를 해오다보니까 항상 무슨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처음의 계획대로 촬영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항상 무언가로 떼우게 되고, 그러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허덕허덕 하는 게 제일 스트레스다.

이혁상: 다큐멘터리는 일단 주인공들과의 거리 설정이 중요하다. 특히 <종로의 기적>은 스스로도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주인공들과의 거리 관계가 힘들었다. 촬영 중간에는 주인공 중의 한 명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정말 힘들었다. 2~3개월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악몽을 꾸고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다.

이해영: 뒤늦게 고백하자면 예전에 감독을 해보니까 어떠냐는 질문에, 너무 귀찮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때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웃음) 감독에게 계속 모든 것을 물어오고, 감독은 계속해서 일일이 선택해야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공감했던 것이 악몽장면인데, 촬영을 하면서 실제로 악몽을 정말 많이 꾼다.

변영주: 영화현장에서는 정말 사사로운 것까지 감독에게 물어본다. 감독은 모든 걸 대답을 하면서 가야한다. 그 때 감독이 잘 대답을 못하게 되면 스탭과 감독 사이의 신뢰에 균열이 가게 된다. 언제가 선배감독으로부터 배운 요령은, 감독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럼 너는 어떤 게 더 좋은데?’ 되물어보면 된다.(웃음)

 

관객1: <아메리카의 밤>에서 배우들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감독은 악몽 속에서 힘들어 할 때, 스탭들은 묵묵히 작업을 하고 있던 장면이 인상 깊었다. 영화감독이라면 아마도 ‘영화라는 게 대체 뭐길래’라는 물음을 힘들 때마다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이해영: 그 질문은 때로는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스탭들이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영화가 뭐길래 이들은 청춘을 다 바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찰나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뭐길래 이렇게 터무니없는 낙관을 하게 만들고, 이렇게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치유와 상처가 그 안에 다 있는 것 같다. 영화의 대사 중에 영화가 삶보다 훨씬 조화롭다는 말, 우리는 영화를 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핵심인 것 같다.

 

관객2: 감독님들께서 힘들 때 마다 꼭 찾게 되는 자신만의 영화 목록이 궁금하다.

김종관: 시기마다 좀 바뀌기는 한다. 지금은 예전처럼 반복해서 보는 영화는 없는데 가끔씩 보게 되는 건 영화에서도 나왔던, 장 비고의 <라탈랑트>이다. 관객으로서 깊은 교감을 느끼게 되는 영화다.

이혁상: 새벽에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를 보면서 최면에 걸리듯 잠이 든다.(웃음)

변영주: <스타워즈> 시리즈와 <아라비아 로렌스>, 50~60년대 할리우드에서 대작 붐이 일어났던 시기의 대작 영화들을 찾는다.

관객3: 어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때 갖는 기준이 궁금하다

이해영: 그런 생각이 들기 까지는 123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거 같다. (웃음)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재미라는 점이 크다.

이혁상: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와서 그런지,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시간과 역사를 내가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종로의 기적>도 그런 출발에서 시작했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픽션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역사를 기록하고, 시간을 기록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김종관: 앞의 두 얘기와 다 연결된다. 처음에 단서처럼 오는 건 기록인 거 같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나 계절, 그때의 감정을 편지를 쓰는 느낌으로 담아낸다. 모든 단서들은 차근차근 오는 것 같다.

변영주: 어떤 이야기를 접했을 때 혼잣말처럼 메인플롯을 만들어본다. 만들어보는 순간 어떤 메인플롯이 재밌다, 그리고 그 플롯 안에서 이런 장면을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이런 장면이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최용혁(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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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장례식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자전적 소설인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의 저자이자 유체역학 연구 기술자인 베르트랑 모랑(샤를 드네)이다. 모란의 장례식에는 그의 저작에 걸맞게 여자들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어떻게 보면 해괴하기까지 한 이 촌극의 본질은 그러나 모랑이라는 한 남자의 순수함 자체다. 모랑의 인생은 죽기 전부터 죽은 순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순간까지 매순간 진지하고 철저하게 여자를 향한다.


세탁소에서 오로지 다리만 보고 반해버린 여자를 쫓으면서 모란의 여정은 시작된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는 무척 단조로운데 여자를 너무 좋아하던 남자가 많은 여자들을 만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새로운 여자에게 한눈을 팔다가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본 간호사에게 다가가려다 침대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전부다. 여자를 바라보고 여자에게 접근하고 여자를 취하고 다시 새로운 여자를 찾는 과정이 끝까지 반복된다. 세탁소의 미지의 여성, 백화점에서 본 베이비시터, 렌터카 여직원, 끝까지 목소리만 등장하는 모닝콜 회사의 여직원, 웨이트리스, 영화관의 농아 안내원, 부티크의 중년여성, 유부녀에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의 여성편집자까지 마치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그는 쉼 없이 여자를 관찰하고 만나고 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랑의 모습은 오히려 전형적인 호색한의 모습에서 비껴나 있는데, 아마도 그의 모습이 시종 열정적이면서도 진지하고 불안하기까지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랑은 여자를 탐할 때 나름의 엄격한 규율이 있다. 백인백색이겠지만 특정한 순간 특정한 공간에서 자신의 주의를 끌어야함이 첫째다. 물론 모랑에게 특히 거부할 수 없게 다가오는 일종의 페티시는 나풀거리는 치마와 하이 힐 그리고 스타킹으로 휘감긴 여성의 발목 라인이다. 둘째는 동침 이후의 만남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지속하지 않는 것인데, 이는 계속 새로운 여자를 찾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유가 된다.

 

모랑은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끌리는 여자를 찾고 버리고 찾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할까. 잘 알려진 트뤼포의 모성애에 대한 결핍은 극중 모랑이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집에서는 상반신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거리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척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트뤼포 그리고 모랑의 채울 수 없는 갈증의 근원이 된다. 즉 모랑은 성숙한 남자로서 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아들로서 모성의 흔적을 쫓는 것이다. 결국 그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을 쫓을 운명을 지녔고 그의 사명은 죽을 때까지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와 모랑은 다른 부류인가? 트뤼포의 대답은 단연 ‘아니다’이다.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은 모든 결핍과 욕망을 아름답게 덮어주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타협의 산물이다. 우리는 대부분 적당한 타협을 반복하며 평생을 보낸다. 적당한 선에서의 연애, 결혼 등등. 그러나 누구나 진정으로 바라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그 대상은 자주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모랑처럼 행동으로 옮길 만큼 절박하지 못했을 뿐이다.(김준완|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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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도피>는 <400번의 구타>를 시작으로 <앙투안과 콜레트>, <도둑 맞은 키스>, <부부의 거처>를 지나 근 20년 동안 그려낸 앙트완 드와넬의 마지막 기록이다. 이 연작에는 한 남자의 반생이 담겨 있다. 극 중 인물이 성장하는 배우인 장 피에르 레오 역시 나이를 먹었다. 앙트완 드와넬의 긴 여정을 갈무리하는 영화답게 <사랑의 도피>에는 전작의 요소가 골고루 등장한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인 것이다. 전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크게 불편함은 없으나 가능하면 보는 것이 좋다. 앙투안을 앙투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을 같이 지켜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도피>의 앙투안만 본다면 그는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철없는 남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따라가다 보면 왜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400번의 구타>에서 어린 앙투안은 엄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마음에 영영 채워지지 않을 공허가 생겨버렸다. 모성애의 결핍을 느끼는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그래서 탈이지만) 소중한 것을 지킬 줄 몰라 스스로를 망가뜨린 다음, 이내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의 서투른 소통방식은 <부부의 거처>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내이고 싶었다던 크리스틴에게 ‘넌 나의 누이이자, 딸이자, 엄마’라고 말했던 앙투안. 그런 그에게 우연히 만난 새아버지가 “엄마는 너를 사랑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앙투안이 붙들고 있던 과거를 하나씩 놓아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새로운 삶에 한 발 내딛기 위한 도움닫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해야만 한다. 그래서 위태로운 사빈과의 관계는 고질적인 그의 한계를 넘기 위한 숙제인 셈이다.

<사랑의 도피>는 많은 것을 충실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서로를 오랜 시간 지켜본 후에야 나올 수 있는 함축적인 표현이 이 영화의 힘이다. 대신 여러 사건들이 층층이 쌓인 후, 시간이 흘렀을 때 어떤 미래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우연들이 만들어낸 운명에 관한 영화이다. 흔들리는 앙투안의 삶에 안정이 찾아왔을지 알 수는 없다. 설령 그렇지 않는다 해도 앙투안이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싫어할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예술가의 모습의 그의 매력이었으니까. 트뤼포 역시 앙투안처럼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끝내 친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며, 여성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과거는 트뤼포에게 평생에 사라지지 않은 멍울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의 도피>는 표면적으로나마 그의 유년시절을 정리하고 떠나보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송가이다.(김휴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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