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죽을 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

-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세이사쿠의 아내>가 처음부터 세이사쿠의 아내였던 것은 아니다. 첫 장면, 언덕 위에서 전쟁 직전의 해군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오카네는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여자다. 그녀를 돈 주고 산 늙은 홀아비도, 그녀를 어쩔 수 없이 돈 받고 판 병든 아버지도, 그녀의 들끓는 충동을 묶어두기엔 역부족인 듯 보인다. 이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고 누군가의 ‘아내’의 자리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과정이, 마스무라 야스조와 팜므 파탈의 일인자 와카오 아야코 짝패를 필두로 한 이 멜로드라마의 중심축이다.
사랑영화가 이토록 무서울 수 있을까. 마스무라 야스조는 다이에이 스튜디오에서 미조구치 겐지와 이치가와 곤의 조감독을 거치며 성장했으나 선배 세대의 ‘일본영화’가 지닌 유장함, 서정성을 거부했던 누벨바그 세대의 대표 감독이다.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도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대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듯한 여자의 욕망의 깊이에 대한 엄혹한 관찰이 있다. 부모를 모두 잃고 고향에서 외톨이가 된 오카네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전역 군인 세이사쿠를 유혹한다. 그녀는 곧 그와 한 지붕 아래 살을 섞으며 지독한 외로움을 씻어낼 수 있게 되지만, 곧 전쟁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세이사쿠의 육체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은 전쟁마저 자신 앞에 무릎 꿀릴 만큼 무시무시하다.
여자의 욕망. 그것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종종 치명적인 것이 된다. 죽음과의 인접성 때문이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그녀들의 성애는 자주 자살 혹은 살해의 충동과 맞닿아있다. 오카네도 계속해서 죽음을 입에 올린다. “다시 혼자가 되느니 죽겠어요.” “오늘 밤 같이 죽어버리는 편이 더 행복할 것 같아요.” “후회는 없으니 날 죽여주세요.” 혹은 그녀는 자신을 창녀 취급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낫을 들기도 하고, 자신을 쫓아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며 발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뜻 그런 죽음에의 충동은 삶에의 의지를 가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실로 그녀가 구걸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해적 퍼포먼스가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끔찍한 몸부림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죽음을 삶의 우위에 두는 행위에는, 절정의 순간에 대한 맹신과 지속성에 대해 거대한 불신이 함께 자리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반대로 순간에 대한 천착을 버리고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오카네는 세이사쿠의 신체를 훼손한 뒤 자기징벌을 껴안음으로써 겨우 그 상태에 도달한다. 마지막 장면, 그녀를 앉혀놓고 밭을 갈던 세이사쿠 대신 그를 앉혀놓고 밭을 가는 오카네가 보인다. 온갖 ‘지랄’ 끝에 그녀는 비로소 세이사쿠의 아내의 자리에서 안정을 찾은 듯하다. 하지만 그 안정이 무엇을 도려낸 대가인지, 우리는 안다. ‘여자’라는 주어와 ‘살다’라는 동사의 만남이 이 영화에서 유독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후경 /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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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멜로물이 지닌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만을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영화 같다”

- 김태용 감독이 말하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지난 1월 26일,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김태용 감독이 추천한 <세이사쿠의 아내> 상영 후 시네토크가 열렸다. 김태용 감독은 필름으로 영화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보다는 영화가 자신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관객으로서의 재미라고 말했다. 이 영화가 준 강렬함에 탄력을 받은 듯 영화와 사랑, 삶의 태도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오고 간 시네토크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김태용 감독이 친구들 영화제 때 처음으로 추천한 영화가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지난번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이번에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추천하고, <만추>도 만들었는데, 무언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에 대한 정념이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영화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김태용(영화감독):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이 영화를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영웅 이야기를 보고 싶었나 보다. 나이가 들면서 영웅 신화가 다 깨져가고, 멜로적인 감수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도 여전히 마스무라 야스조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에게 ‘영웅’들이다. 멜로영화 안에서는 두 세계가 부딪친다. 사실은 살면서 약간 비겁하게 부딪칠 때가 많은데, 영웅들의 신화를 보다보면 얼마나 용기 있게 두 세계가 정면 돌파 하는가에 대해서 느끼지 않나. 그런데 사실 사랑은 두 세계가 맞부딪치는 그 용기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 두 세계를 하나처럼 만들어지게 하는 다른 외부의 부딪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속성 자체가 두 사람 자체도 부딪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외부의 힘 때문에 하나처럼 되는 느낌이 있어야 ‘우리’가 유지된다고 본다. 사랑은 상대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도 유지가 안 되고, 다른 세계의 공격이 없어도 유지가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비극처럼, 멜로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을 액기스로 뽑아서 이 영화에서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만큼 얼마나 자기를 감정에 내던지고 우리 둘이 만들어낸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맞부딪칠 때도 얼마나 용기 있게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영화다. 그런 생각에서 이 아름다운 멜로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김성욱: 이 영화에는 노출신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물리적인 특성이랄까, 정신적이거나 감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몸이 갖고 있는 물리성의 느낌이 굉장히 많이 느껴졌다. 인물에 대한 것과 사랑에 대한 감정을 물성으로 표현해내는 영화의 방식들이 와 닿았다.

김태용: 어떤 영화를 볼 때 첫 컷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 민감하게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얼굴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이 여배우는 일단은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 위태로움이 약함이 아니라 어떤 공격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기를 내던질 줄 아는 느낌도 있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여배우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구조적으로 영화에 접근했기 때문에 인물이 와 닿지는 않았는데, 다시 봤을 때 여배우의 힘이 많이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영화가 에로틱하다고 하는데, 마스무라 야스조의 다른 영화들, <문신>이라던가 <붉은 천사> 등을 보면 훨씬 더 노출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도 이 영화가 가장 야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웃음)

 

 

김성욱: 이 영화에서 사람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갖는 사랑의 정념의 표현과 전쟁에서 죽은 자에 대한 칭송, 이 두 가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찌른 것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표현 자체가 사랑의 행위에서 나온 결과인데, 전쟁이라는 것은 의미 없이 사람들을 죽여 버리고 그에 대해서 칭찬을 한다. 오늘 다시 보니 전쟁에서 돌아오는 장면과 환영하는 의식을 치르는 장면들이 굉장히 길게 느껴지더라.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장면들과 남편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연결되고 대비되면서 (여배우의) 고립된 느낌이 많이 부각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김태용: 오늘 영화를 보면서 유난히 재미있게 봤던 지점들이 마을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치 무성영화 변사처럼 계속 설명을 해준다. 그 지점이 '눈'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라, 남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등의 대사에서 ‘시선’이라는 표현으로 타자라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다. 드라마 내적으로 본다면, 이 남자가 명예를 잃은 뒤에 여자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굉장히 감정적인 비약이 있다. 이 감정적인 비약을 이야기적으로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해지는데, 영화 안에서는 ‘눈’이라고 하는 매개 자체가 이 남자를 비약적으로 확 발전시키는 계기를 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눈과 관계 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짐승>이 촉각적인 사랑과 정념, 욕망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욕망의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욕망을 둘러싼 편견과의 싸움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욕망을 직접적으로 본다면 에로틱하지 않은데,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정서와 부딪칠 때 에로틱한 느낌이 더 드는 것 같다. 여배우가 더 많이 노출하고, 성적학대를 당해도 에로틱한 느낌이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여자의 정서와 의지가 맞닿아서, 더 에로틱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1: 영화 속에서 세이사쿠는 전적인 피해자이다. 부인은 세이사쿠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다시 혼자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일을 저질렀는데, 거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세이사쿠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도하고 백안시한다. 그런 소름끼치는 집단성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김태용: 말씀하신 대로 (집단의) 잔혹함이라고 하는 게 영화의 기본 베이스인데, 세이사쿠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의지와 이성적인 결정에 대해 여자는 조롱을 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에 위협을 느끼는 불편한 순간들이 있을 때 개인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들이 생기는데, 이 영화는 정확하게 그 폭력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하나의) 세상이다. 개인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 다루는 영화는 재미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을 세상으로 보고 난 후에 개인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폭력의 무자비함, 무지몽매한 것으로 보이는 세상 앞에서 외롭게 서 있는 두 개인에 대한 사랑 이야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폭력에 대해서 훨씬 윤리적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관객2: 영화를 보는 도중 헤이스케(오카네의 사촌)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맨스 중간에 껴 있는 제 3자의 역할, 즉 관객의 눈이 되어주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이 감독의 다른 영화에 관객의 눈과 일치하는 변두리의 인물이 더 나타나는지 아니면 그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김태용: 굉장히 기능적인 인물이다. 그의 기능에 대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회적인 약자나 사랑을 지켜봐주는 친구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약속과 관계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동체나 국가와의 이념과는 상관없이 개인과 개인이 맺는 약속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영화 내에서 밀도 높은 약속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한 국가 혹은 어떤 가치에 이르려는 개인의 약속에 대해서는 조롱하지만, 각각의 개인들이 해왔던 약속에 대해서는 지켜야하는 주인공들 같은 느낌이다. 어떤 가치와 개인 간 약속과의 대립 혹은 차이. 어떤 인간이 더 솔직한가, 더 용감한가, 어떤 것이 더 재미있는가. 이런 의문을 던져주게 했던 기능적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관객3: 작년에 <부운>을 추천하신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계속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영화들을 추천하셨다. 감독님도 사랑을 하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실 텐데, 이와 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개인적인 영감을 많이 얻으시는지.

김태용: 내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좋아하는 건 어떤 장르영화든, 어떤 멜로영화를 통해서든 어릴 때 영화를 보고 나오면 달라진 나를 느끼는 게 좋았다. 왜소한 나에서 변화하는 느낌. 최초의 영화는 <킹콩>이었다. 홍콩 영화나 어떤 멜로 영화도 그렇고, <랜드 앤 프리덤> 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래,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해"라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을 개인적으로 관객으로서 좋아했다. 지금은 공교롭게도 멜로 영화들이 삶에 용기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준다.

 

관객4: 이 영화가 멜로라고 하기에는 두 남녀 간의 감정이 비약적으로 넘어간 부분이 있고, 기대했던 감정적인 수위보다 묘사가 덜 된 것 같다. 또, 두 세계의 충돌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어떤 아름다운 충돌의 경험이 있으신지. 예를 들면 다른 직업이라던가, 다른 나라라던가. (웃음)

김태용: 멜로의 영역을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둘러싼 또다른 사람과 우리는 얼마나 닮아있는가 우리 둘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에 집중하는 게 멜로영화라고 크게 개념을 정한다면 이 영화만큼 그걸 정면 돌파하고 있는 영화는 없다. 그래서 가장 강한 멜로 영화이다. 멜로적인 로맨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보면 아닐 수 있다. 두 세계의 충돌의 경험은 많이 가지고 있다. (웃음)

 

정리: 지유진(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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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새로운 윤리를 예고하는 육체적 열망

-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마스무라 야스조는 살아있는 동안 ‘작가’라는 직함을 얻지 못했다. 동시대 작가이던 오시마 나기사, 스승이던 이치가와 곤마저 스튜디오를 떠나던 때에 마스무라 야스조는 영화사 다이에이가 1971년에 도산하기 직전까지 스튜디오 제도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바뀌어 그의 영화들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시점부터이다.

 

생전에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마스무라 야스조는 평생 동안 비교적 일관된 주제들을 다루어 왔다. 스크린 속에서 구현되는 육체, 그 육체를 감싸고도는 (지나친) 욕망, 공동체의 속박적인 윤리를 뚫고 나가려는 개인들의 공모 등이 이에 해당한다. 1965년 작 <세이사쿠의 아내>에서도 특유의 주제의식이 뚜렷하다. 오카네가 늙은 갑부의 정부였던 사연을 속전속결로 보여주는 도입부와 함께 오프닝 시퀀스가 맞물려 끝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쟁에서 돌아온 세이사쿠는 자진하여 아침마다 새벽종을 치는 마을의 ‘모범인’이 된다. 오카네만이 이 종소리에 따라 일과를 시작하지 않는 왕따가 되지만, 홀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오카네와 세이사쿠는 격렬한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볏짚 위에서, 숲 속에서 일찌감치 육체의 합일을 이룬 둘의 관계는 서로의 몸을 파고들면서 점점 더 깊어진다. 이들에게 있어 사랑은 상대의 육체에 대한 욕망과 등가이다. 오카네의 “내가 유일하게 욕망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다… 당신의 몸은 내 것이다”라는 대사는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를 관통한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인장은 ‘육체’라는 소재뿐 아니라 그것을 극한의 지점으로 끌고 가는 방식에 새겨져 있다. 그 방식이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는 생사를 건 이중택일의 문제로, <만지>에서는 세 남녀의 집단자살로서 나타났다면, <세이사쿠의 아내>에서는 직접적인 육체의 훼손으로 드러난다. 오카네가 세이사쿠를 또다시 전장에 보내지 않기 위해 못으로 눈을 찌르는 지점에서부터 애정의 대상이던 육체는 훼손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마을 남자들은 도망가는 오카네를 붙잡아 사지를 붙들고 구타한다. 이에 마찬가지로 사지를 붙들린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세이사쿠의 모습이 연결된다. 세이사쿠는 눈을 잃음으로써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자신을 옥죄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명예도, 신념도, 사랑하는 이를 보는 쾌락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오카네는 여전히 관음적인 시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버둥거리는 오카네의 하얀 맨 다리로 옮겨갈 때, 그 프레임 안에는 (마을 남자들의) 폭력으로 인한 쾌락과 성적인 쾌락이 동시에 점유하고 있다.

 

비극으로 곤두박질치던 두 사람의 운명은 밑바닥에서 다시 앞으로 기어나간다. 세이사쿠는 ‘시선’을 잃은 자리에 연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는 고독과 타인의 괄시라는 이중구속이 얼마나 오카네를 힘들게 했는지를 깨닫는다. 눈은 세상을 향해 나 있는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많은 타인의 잣대가 기웃거리는 감시창이었던 것이다. 둘은 이 창문을 닫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온전히 ‘몸’으로만 한 사람을 껴안고 살아가기로 한다. 두 개인이 육체의 합일을 넘어 관념의 합일을 이루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예견하는 것은 반복되는 사회적 고독이 아니라, 이전 세계에는 없던 작은 유토피아의 생성이다.

 

지유진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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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중계] 김성욱 프로그래머 '마스무라 야스조의 미학' 강연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이 한창인 21일 오후 <아내는 고백한다> 상영 후,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특별강연이 있었다. <아내는 고백한다>를 중심으로 마스무라 야스조가 일본영화사에서 갖는 의미와 그의 영화세계의 전반적인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 자리였던 그 시간을 일부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전반적인 마스무라 야스조의 이야기와 방금 보신 영화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드리겠다. 오시마 나기사는 마스무라의 영화가 나왔을 때, “이것은 돌파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 시점에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는 것은 전혀 몰랐던 작가와 배우를 만난다는 의미와 함께, 이것이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돌파구로 작용했으며 현 시점에도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한다.

 

일본영화계의 하나의 전통은 욕망의 표출을 억제했던 경향이다. 마스무라는 이와 같은 상황

에서 개인을 그려내면서 일본 누벨바그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 이때의 개인이란,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온 한 개체가 아니라, 조직과 집단과 사회와 구조와 틀, 어떤 관계 안에 있는 개인이었다.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도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가령 로프와 매달린 사람의 수직적 구조가 그것이다. 중간에 매달린 여자를 중심으로, 위에는 기어 올라가서 만나야 할 젊은 남자가 있고, 아래는 남편이 있는 수직적인 선이 되는 로프는 동시에 여자에게는 하나의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로프에 매달린 것은 생명과 연관됨과 동시에 자신을 옭죄는 올가미인 셈이다. 마스무라가 주목한 것은 그 수직의 안에서 무언가를 끊어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외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가령 이 영화의 비에 젖은 머리, 조금 까매진 양말, 진흙을 밟고 걸어온 듯한 여주인공의 모습, 손끝 연기나 얼굴 표정, “내 몸이 얼마나 야위었느냐”라고 말할 때의 반지와 시계의 헐거움. 그런 점에서 <눈먼 짐승>이란 작품은 마스무라의 세계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영화라 하겠다. 촉각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예술가의 눈은 멀게 되고, 이는 맹목적인 여성의 형상과 닮아있다. 눈 멈과 맹목성. 표피적이고 표면적이고 촉각적임, 그것과 눈이 멈의 상태. 눈이 먼 상태에 빠진 인물들의 사랑에의 맹목성.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구조 내에서 형성되는 것만이 아니라 보다 물리적이고 촉각적으로 진행된다.

 

마스무라의 영화는 심플한 점이 매력적이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는 “사랑 한다면 죽일 수도 있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테마가 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인가?” 이 테마 하나에 몰두해 영화 전체가 흘러가는 구조다. 핵심이 무언인지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고, 이 하나를 맹렬한 속도로 파고 들어간다.

 

사랑과 죽음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펼쳐진다. 이는 일종의 질문인데, 이 질문이 제기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그 중요성이 있다. 이 영화에서 자일을 끊게 되는 지점에서 이 여자가 느낀 것은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죽이는 것과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같은 순간에 벌어진다. 뭉개지고 절단 난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 그것과 함께 삶과 생으로 충만한 젊은 남자에의 열망이 대조된다. 시체, 죽음과 마주한 이후에 남아있는 여자의 삶에의 데카당스적 열망. 이는 전후의 영화라는 환경에서, 시체들과 마주한 인간의 에너지에 대한 탐구이다. 그 에너지는 곧 사랑, 욕망과 열망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가장 에로틱한 것이다. 에로틱한 것은 작은 죽음이다. 일종의 오르가즘. 작은 죽음의 경험을 얻는 것은 영화를 볼 때의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영화와 에로티시즘은 떼어낼 수 없다. 그것을 영화적 형식과 본성과 연결시켜나가는 마스무라 영화의 매혹성이 있다. 즉 단순한 센세이션을 넘어선 영화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다.

마스무라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 안에서 충돌되는 힘의 역학관계를 대중영화가 갖고 있는 이항대립의 요소로서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충돌의 에너지는 유동적인 면이 있다. 원래 설정된 캐릭터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캐릭터들이 변이되는 모습에서 발생하는 충돌이기 때문이다. 인물의 변이라고 하는 것. 어떤 지점에서 만들어지고, 변이를 만드는 추동력이 무엇인가? 인물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지점까지 영화가 끌고 가, 어느 순간 내부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나갈 때, 개인성이 탄생한다. 그러한 변이 지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섹스 체크>이다. 힘과 에너지를 갖게 되는 몸, 성차의 문제, 그 변이의 과정들이 하나의 주제나 테마, 혹은 소재처럼 작동하는 영화이다. 마스무라는 그것을 가정 내의 공간까지 끌어온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이런 에너지, 힘들의 격돌을 무엇보다도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마스무라의 역량이다.

 

마스무라의 영화가 현재 어떤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마스무라의 영화가 갖고 있는 현대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성을 잃어가는 영화들, 어떤 관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터무니없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과는 달리, 마스무라의 영화는 사회적 밧줄에 얽혀 있는 자에게서 개인성이 출현하는 지점, 사랑의 탄생이자 열망의 탄생, 그것이 죽음과 쇠락을 경유하는 것을 보여준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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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1967)에는 의학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할 마취약을 개발하는 과정을 다룬 점 외에도, 어머니가 아들의 아내에 대해 질투한다는 점, 그리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보다 마스무라적인 테마가 있다.

 

하나오카 집안의 흥망성쇠를 함께하는 며느리 카에의 삶의 여정을 따르는 이 영화에는 그녀의 삶의 분기점이 되는 만다라게 꽃밭의 장면이 세 번 나온다. 그 처음은 카에가 8살 때로 그녀는 장차 시어머니가 될 여인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우아한 여성성의 절정. 만다라게꽃보다 더 아름다우며, 어린 소녀에게 있어서 만다라게의 독성만큼이나 치명적이었던 매력. 그녀의 삶은 그 이상향을 향한 여정이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결심한다. 그야말로 하나오카 가문에 입적하는 것으로서의 결혼인 셈이다. 하나오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장남 운폐가 의학적 성취를 이뤄내 집안을 부흥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즉 운폐는 집안의 주인이다. 모든 여성들은 그를 위해 봉사하며, 이 때 집안의 안주인은 그 내조를 지휘하는 중심적 역할을 한다. 안주인은 어머니 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며느리 카에를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와 카에는 운폐에게(즉 집안의 부흥에) 더 가치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경쟁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집안의 안주인으로서의 경쟁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경쟁이다. 여성으로서의 욕망에는 그 선을 확정짓기 어려운 미묘한 성적 욕망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아들의 여자를 질투한다는 테마는 <눈먼 짐승>에서도 존재하는데,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 그것은 더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평화로워 보였던 두 여자 사이에 운폐가 끼어들면서, 이제 둘의 관계는 전면적으로 변한다. 가령 운폐가 처음 집에 돌아온 날, 어머니는 아들 부부의 첫날밤의 동침을 막으며, 그동안 카에를 마주 보고 잠들던 그녀는 이제 등을 돌려 돌아눕는다. 이 행동은 분명 어머니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성적 욕망에 의한 질투에 가깝다. 운폐와의 사랑을 나눈 후, 그녀가 스스로의 여성성을 자각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이상화 했던 어머니가 내면에 품고 있는 악질적인 면을 느끼고 말았을 때, 카에는 두 번째로 만다라게 꽃밭에 서게 된다. 이제 어머니를 향한 카에의 동경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남편에게 가치 있는 부인이 되기 위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운폐에게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생명을 건 왜곡된 경쟁. 그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깨닫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를 보면, 그 경쟁과 안주인으로서의 위치가 그녀의 삶의 유일한 동력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그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고생하던 카에는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자마자 곧바로 입덧을 한다. 그리고 곧이어 두 아들을 낳게 된다. 가문의 대를 잇는다 함은 곧 아들을 낳는 것이고, 이것은 가문의 안주인의 몫이다. 그렇게 카에는 마침내 안주인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가문의 대를 잇는 아들을 낳는 것이다. 이제야 그녀 자신이 바로 8살 때 보았던 이상화된 여성상으로서의 어머니와 완전히 같은 위치에 섰다. 그러나 이상화했던 그 우아한 어머니의 위치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의 주체적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안다. 카에는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녀의 삶과 교감한다. 카에가 운폐의 여동생에게 자신과 어머니는 경쟁을 펼쳤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성공과 집안의 부흥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녀는 눈이 먼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맛을 잃은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그토록 동경하던 위치에 그녀 자신이 오르고 나서 겪게 되는 허망함과 부질없음의 감정일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만다라게 꽃밭에서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그 시절의 여성의 삶은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거둔 나름대로의 성공은 부질없고 더 없이 허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가? 마스무라는 운폐의 여동생의 입을 빌린다. 그녀는 ‘자기는 엄마와 새언니의 경쟁과 질투에 가득한 증오의 시선들을 바라봐 왔고, 그러고 사느니 차라리 혼자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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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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