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집시들은 음악으로 숨을 쉰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 가수 하림이 말하는 토니 갓리프의 '라쵸 드롬' 

 

지난 2월 2일, 영화 <라쵸 드롬>의 상영이 끝나고 ‘누에보 플라멩코 컴퍼니’의 열정적인 플라멩코 특별 공연이 있었다. 스크린 안에서 울려 퍼지던 집시 음악을 현실로 옮겨온 무대는 관객들로 하여금 넋을 놓게 만들었다. 뒤이어 가수 하림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하림은 관객들을 시종일관 웃게 만들다가, 마지막에는 ‘연어의 노래’를 부르며 감동을 선사했다. 그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 처음 참석하시게 된 소감은.
하림(가수): 원래 처음 친구들 영화제 있을 때부터 ‘친구들’로 있었다. 나로 하여금 영화를 고르게 해주신 건 대단한 영광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직접 필름으로 가져다 보여주셔서 정말 행복했다. 필름으로는 처음 본다.

 

허남웅: <라쵸 드롬>을 선택하신 이유는.
하림: 학교에서 강의할 때 교재로 쓰고 있다. (웃음) 여러분들께 나에 대한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기도 했다. 왜 앨범을 안내고 저렇게 10년 넘게 돌아다니고 있는지. 이 영화를 보고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나도 10년 넘도록 여행을 하면서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는 것이니까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골랐다.

 

허남웅: <라쵸 드롬>은 ‘좋은 길’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는데, 이 영화는 집시들이 이동하는 곳의 음악을 흡수하여 들려주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하림 씨도 여행을 많이 다니시고, 그 곳의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익히면서 자신의 음악을 해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 다녀온 여행지와 그 곳에서 배운 악기 또는 음악이 무엇인지.
하림: 최근에는 아프리카 쪽을 많이 갔다. 거기엔 악기가 워낙 없으니까 음악을 딱히 배우지는 않았다. 최근에 음악 쪽으로 많이 느낀 곳은 아랍문화권이다. 이집트 쪽 음악들에 흥미가 있다. 서양 음악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이집트 쪽의 음계나 리듬이 우리 핏속에 있는 ‘그것’을 건드려준다. 영화 중간에 할머니가 담배를 물고 왔다 갔다 하시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노래 중간에 박수를 치는 박자에서 약간 촌스럽다고 말하는 포인트가 있다. (직접 노래하며 설명) 그게 촌스러운 게 아니라, 동양 문화권에서는 강세가 앞에 있어서 그렇다. 본능적으로 앞부분에 치는 거다. 그런 것들을 볼 때, 아랍권이 서양과 동양이 나뉘는 경계선 같은 곳인데, 나는 그 곳의 음악을 들으면서 많이 느꼈다.

 

 

허남웅: 개인적으로 나이 드신 분이 춤을 추고 나서, 아기를 받아 젖을 먹이는 장면을 재미있게 보았다. 음악이 특별한 게 아니라 생활과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림 씨가 인상 깊게 본 장면을 소개해 달라.
하림: 프랑스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처음에 말을 씻기고 재주넘기 하다가 쫓겨나지 않나. 중간에 친구가 벤츠를 몰고 찾아온다. 정착 집시가 있고 유랑 집시가 있다. 부자인 정착 집시가 기타 연주를 하며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철조망에 매여 있는 꽃을 보고 따라간다. 꽃으로 길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남웅: 음악이 생활 속의 낭만을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든다.
하림: 집시들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음악을 하면서 위로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잘하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삶이 음악이 되는 것이고.

 

허남웅: 플라멩코가 집시의 음악으로 분류되는 것인가.
하림: 집시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음악이다. 유럽에 여러 민족들의 본연의 음악이 있다. 그 중에 집시의 영향을 받은 유럽음악들이 곳곳에 있다. 그 중에 하나이다. 스페인에도 여러 종류의 음악들이 있는데, 그 중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들이 음악을 굉장히 잘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음악이기도 하지만 뿌리는 집시족에서 흘러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허남웅: 최근에 아랍 쪽을 여행하셨다고 했는데, 아랍 쪽에도 유목민들이 많지 않나. 유럽 집시들의 음악에 특징이 있는가.
하림: 집시 음악은 북인도 라자스탄, 즉 동양에서 출발했다. 그 쪽의 동양음악들을 보면, 아까 플라멩코도 그렇고, 음절이 딱딱 끊어지는 게 아니라 한 음절에서 여러 음이 나온다. (직접 ‘산토끼송’으로 시범) 이것을 전문용어로 멜리스마라고 한다. 우리나라 국악에도 이러한 전통이 있지만, 서양음악에는 멜리스마가 없다. 그리고 강세가 앞박자에 있다. 또 도레미로 음계가 구분이 안 간다. 피아노로 표현할 수 없는 음계들이 특징이다. (정리하자면) 꺾는 창법, 앞에 있는 악센트, 음계가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아니다. 박자도 세다 보면, 따라갈 수가 없다. 본능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이것이 집시음악을 비롯한 동양 음악의 특징이다. 토니 갓리프의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루마니아에서도 서양악기들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복잡한 음악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관객1: 영화 중반에 기도상 같은 것이 나오는데, 무슨 행사인지.
하림: 검은 얼굴의 성모마리아 주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 있는 카톨릭 명절이다. 종교들이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들은 프랑스에 있는 집시들이었다. 그들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연주를 하고 지하 동굴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지 않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관객2: 영화를 보면 항상 남자들은 악기를 치고, 여자들은 춤을 춘다. 그것이 집시들의 룰인지. 여자들은 즉흥적으로 춤을 춘 것인지. 또 집시들은 항상 흥에 겨워서 숨을 쉬는 것처럼 음악을 하는지.
하림: 남자들이 춤을 추는 것보단 여자들이 춤을 추는 것이 더 멋있다. (웃음) 물론 남자들도 영화 속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음악으로써 숨을 쉰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허남웅: 마지막 장면에서 벽으로 막힌 창문 앞에서 여성이 플라멩코 노래를 하는데, 음악에 담겨있는 가사 자체가 자신들의 처한 상황을 들어달라고 호소를 하는 것 같다.
하림: 영화의 결말에서는 집시들의 슬픈 혹은 피곤한 점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프랑코부터 히틀러까지 우리는 피해자였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나. 감독이 오랜 시간 동안 집시의 역사 속에 있었던 일들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중간에 아우슈비츠의 상황도 나오는데, 그 때 유대인들을 비롯한 슬라브족들, 거기에 집시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집시들이)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학살을 많이 당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관객3: 집시라는 말이 유럽에서 안 좋게 쓰인다는데. 정확히 그들을 지칭하는 말이 무엇이 있나. 또 집시와 집시 음악에 대한 영화를 추천해주신다면.
하림: 집시라는 말은 ‘이집트 사람’이라는 말이다. 집시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온 순례자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집시들이 자기 자신을 부르는 말은 ‘롬’(집시 말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헤미안이라는 말은 동유럽의 지방을 가리킨다. 또 영화 추천은 토니 갓리프가 집시 출신인 자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영화들이 있다. (집시 3부작 등) 동유럽 집시에 대한 영화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들도 집시를 많이 다루고 있다. 이 영화들을 보면 집시들의 성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지유진(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검은 여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와 풍요의 여신 '비너스'를 떠올릴 때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는 대개가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에 가깝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이 온전한 과정에서 이뤄진 걸까. 다시 말해, 비너스가 반드시 백인이어야 할 이유는 무얼까. 만약 비너스가 흑인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떤 이미지로 기억할 것인가. '만약'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압델 케시시 감독의 <블랙 비너스>(2010)는 흑인 여자가 어떻게 대상화되었는지를 '사트지 사라 바트만'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사트지는 1770년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노예 신분으로 유럽으로 건너와 서커스 쇼에서 사람들의 볼거리로 전락한다. 아프리카 흑인을 미개인으로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물에 가까운 '연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갇혀 울부짖는가 하면 우리를 빠져나와 음악에 맞춰 춤도 추는 등 인간에 가까운 행동으로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수치심을 참다 못 한 사트지는 공연 중 눈물을 흘렸다가 '인간'(?)인 사실이 발각되어 이용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도 살아야했기에 거리의 여자로 연명하던 사트지는 결국 성병에 걸려 1815년 사망한다.

압델 케시시가 <블랙 비너스>에서 카메라를 운용하는 방식은 사트지를 향한 유럽인들의 시선과 이 때문에 고통스런 그녀의 심정을 양가적으로 반영한다. 사트지가 '연기'를 하는 장면에서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으로써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면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 선 카메라는 표정에 서린 수치심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고통의 감정이 인간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할 때, 이와 같은 영화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극 중 유럽인들에게서 그들이 미개인으로 바라보는 사트지보다 더 야만적인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유럽인들의 시선을 부정적인 쪽으로만 단순화하는 건 아니다. 편협한 시선을 비판하면서 이들을 향해 특정한 시각으로 곡해할 수 있는 함정의 소지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하여 극 중 인물들 대부분이 사트지를 미개인 혹은 야만인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도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보호본능을 발휘하는 유럽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입체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건 이 때문이다. 오히려 <블랙 비너스>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편견의 학술화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실제로 사트지의 사망 후 프랑스 과학자의 손에 넘겨진 시신은 박제되어 그녀의 종족과 오랑우탄 간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에 활용되었다(영화는 이를 오프닝 장면에 배치한 후 그들이 미개인이라 일컫는 사트지가 실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밝혀 나간다). 심지어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에 넘겨져 1974년까지 전시되었을 정도다. 이는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선이 오랜 시간, 심지어 지금까지도 얼마나 고착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다.

사트지를 연기한 야히마 토레스는 <블랙 비너스>가 연기 데뷔작이었다. 압델 케시시는 <블랙 비너스>의 전작인 <생선 쿠스쿠스>(2007) 당시 야히마 토레스를 일찍이 점찍어두고 그녀에게 사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사트지의 인생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탓인데 야히마 토레스는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충격적인 영화의 결말만큼이나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보인다.

 

글/ 허남웅(영화 칼럼니스트)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현실에 발붙인 사랑이야기

 

<별난 인연>이라는 국내 제목이 이 영화의 내용을 적절하게 압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주인공 '미니와 모스코비츠 Minnie and Moskowitz'는 진짜 별나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모스코비츠(세이무어 카셀) 쪽은 유아적이다 못해 괴팍하게 비칠 정도다. 주차관리원으로 근무하는 그는 퇴근 후 혼자 영화를 보고 술집에 들어가 여자를 희롱하는 게 일상의 전부인 노총각이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미니(지나 롤랜즈)는 모스코비츠처럼 개차반은 아니지만 남자 복만큼은 지지리도 없는 여자다. 사랑하는 유부남은 아무렇지 않게 손찌검을 하고 어쩌다 소개받은 남자는 아뿔싸(!) 이런 비호감이 없다. 이때 미니 앞에 나타난 모스코비츠, 이들은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헤드윅>으로 유명한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은 <숏버스>(2006)를 만들 당시 "영화의 톤이나 스타일 면에서 존 카사베츠의 작품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며 특별히 <별난 인연>에 대해서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별난 인연>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형태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와 관련한 단서는 극 초반 <카사블랑카>(1942)을 관람하고 나온 미니가 동료와 나누는 대화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현실에선 보기(험프리 보가트 애칭)같은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하물며 영화에서처럼 로맨틱한 사랑은 언감생심이지." 그러니까 <별난 인연>은 하늘에 붕 뜬 조각구름 같은 로맨스가 아니라 질퍽한 현실에서 벌이는 진흙탕 싸움 같은 사랑영화다.

 

미니는 선녀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이 눈에 거슬리는 모스코비츠는 선남과 거리가 멀고 멋들어진 레스토랑이 아닌 지저분한 거리의 포장마차가 이들 데이트의 배경이 되며 스포츠카에서의 밀담과 같은 낭만 따위는 저 멀리 나빌레라 엔진 소리 요란한 트럭이 '별난' 이들의 인연을 강조한다. 이렇듯 기존의 장르와 미장센 자체의 격(?)이 다르다보니 진행되는 이야기의 양상도 다르다. 외로움에 사무쳤지만 소통에는 미숙해 사사건건 부딪히기 일쑤인 이들의 삶에는 달콤한 환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간신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그럼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도 됐을 결말을 카사베츠는 굳이 더 들어가 이들의 사랑에 찬물을 끼얹는 에피소드를 마련, 일말의 환상마저도 깨버리는 것이다.

 

존 카사베츠 영화가 갖는 편집의 독특함, 즉 앞뒤 재지 않고 불친절하게 장면과 장면을 뚝 끊어 연결하는 방식은 즉물적인 캐릭터들의 성격과 태도에서 기인한다. 홍상수 영화의 즉흥적인 서술 방식이 극 중 인물들이 그 때 그 때 벌이는 술자리에서의 노닥거림의 반영이듯 존 카사베츠 역시도 미니와 모스코비치의 즉각적인 감정 표현을 편집에 그대로 반영한다. 이는 카사베츠가 사건보다 인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매번 루저에 가까운 인물이 등장하는 그의 영화는 그래서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인디펜던트 영화가 갖는 특유의 생생함이 카사베츠의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는데 그처럼 <별난 인연>의 미니와 모스코비츠도 결국엔 관객들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자리 잡는다. (허남웅 / 영화 칼럼니스트)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슈퍼 에이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발화되는 열차 전복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이 영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처럼 <슈퍼 에이트>의 괴수를 실은 '열차의 도착'은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장르의 본격적인 출현을 예고한다. 지난해만 해도 <황당한 외계인: 폴>의 그렉 모톨라, <리얼 스틸>의 숀 레비 등 스필버그에게 영향을 받은 '스필버그 키드'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 중 <슈퍼 에이트>의 J. J. 에이브람스는 <미지와의 조우>(1977)와 <E.T.>(1982)에 대한 오마주로 <슈퍼 에이트>를 제작, 연출함으로써 좀 더 직접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신화를 2010년대 버전으로 갈무리하는 것이다.


에이브람스 버전의 <E.T.>

특수 분장에 관심이 많은 조이(조엘 코트니)를 필두로 감독지망생 찰스(라일리 그리피스)와 마틴(가브리엘 바소), 캐리(라이언 리), 프레스턴(작 밀스), 그리고 앨리스(엘르 패닝)는 슈퍼 8 카메라를 가지고 좀비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할 생각에 부풀어 있다. 각자 역할을 맡아 밤에 몰래 기차역에서 촬영을 하던 중 선로에 뛰어든 의문의 자동차로 인해 운송열차가 전복되는 사건을 목격한다. 그 사이에 정체불명의 괴수가 탈출하고 이후 마을에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전기를 발동시키는 전자부품들이 사라져 수시로 정전이 되는가 하면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지기까지 한다. 급기야 군인들이 마을을 들쑤시면서 괴수는 정체를 드러내기에 이르고 아이들은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슈퍼 에이트>는 에이브람스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10대 초반 '슈퍼 8'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 출품한 경험 말이다. (이는 당시 신문에도 실렸는데 기사를 본 스필버그는 본인의 8mm 영화 편집을 어린 에이브람스에게 맡기기도 했다.) 영화로 사고하고 그러면서 성장한 에이브람스의 무비 키드로서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슈퍼 에이트>는 극 중에서 발생하는 재난현장이 곧 아이들이 찍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구조로 진행이 되는 까닭에 '<E.T.>와 <클로버필드>가 만났을 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온갖 시각적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을 슈퍼 8 카메라 렌즈에 고정시킨다면 그 속을 채우는 건 스필버그의 초기 외계인 장르의 영화다.
<미지와의 조우> <E.T.>는 외계인 장르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외계인이 이들 영화에서는 인간에게 전혀 악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체된 미국 중산층 가족의 결합을 돕거나(<미지와의 조우>) 아빠가 부재한 아이들의 대체 부모 역할을 할(<E.T.>) 정도로 친근하게 묘사됐던 것이다. 다만 <슈퍼 에이트>는 조이와 친구들이 외계의 존재, 즉 괴수를 지구로부터 탈출시킨다는 내용 때문에 <미지와의 조우>보다는 <E.T.>의 정서에 더 가깝다. 영화가 시작되면 떠오르는 엠블린 엔터테인먼트의 이티를 태운 자전거가 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로고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 때문에 영화의 배경 역시 <E.T.>가 개봉했던 1980년대를 전후로 하고 있는데 <슈퍼 에이트>는 두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 설정을 보인다. <E.T.>의 엘리엇, 마이클, 거티 남매에게 아버지가 부재했던 것과 달리 <슈퍼 에이트>의 조이는 끔찍한 사고로 엄마를 잃었으며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귀엽고 다소 어수룩해 보였던 외계인의 이미지는 에이브람스 버전에서는 끔찍하고 공격적인 괴수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차이는 영화 내적으로보다 외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E.T.>와 <슈퍼 에이트>가 각각 제작된 시기의 사회적 배경, 특히 가족의 위상과 관련해서 말이다. <E.T.>에서 스필버그는 외계인을 대체 아버지의 위치에 세워두고 해체된 엘리엇 가족의 봉합을 이야기했는데 <슈퍼 에이트>는 그 방법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2010년대의 가족신화


<슈퍼 에이트>가 종국에 내세우는 메시지는 사이가 벌어진 가족의 결합이다. <E.T.>와 비교해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다다르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두 영화가 극 중 비슷한 시간대의 배경을 공유하지만 실제 개봉 시기는 무려 30년 가까운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 할만하다. 그동안 스필버그는 가족의 봉합을 넘어 아버지의 지위 복권을 일관되게 전파해왔다. 그러면서 외계인을 바라보는 스필버그의 시선은 완전히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예컨대, <우주전쟁>(2005)의 세 발 달린 거대한 외계의 존재만 하더라도 무차별적 살육으로 인간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자식을 돌보는데 무관심했던 레이(톰 크루즈)는 외부의 침입자에 맞서 끝까지 아이들을 보호, 흩어진 가족을 불러 모으며 강인한 아버지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니까 에이브람스는 변모한 스필버그의 외계인 장르 공식을 가지고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릴법한 <E.T.>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슈퍼 에이트>의 관건은 하나. 육체는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아빠의 지위 복권은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조의 아빠 잭슨(카일 챈들러) 경관은 부인을 잃은 후 사면초가다. 혼자서는 도무지 조를 키울 능력이 떨어져 보인다. 화장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가 하면 방학동안에 조를 야구 캠프에 보내 잠시간 짐(?)을 덜어낼 생각까지 한다. 무엇보다 앨리스와 어울려 영화를 찍는 조를 도무지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인의 죽음에 앨리스의 아빠 루이스(론 엘다드)가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잭슨이 아빠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조뿐만 아니라 루이스와도 관계 개선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들의 화해를 중간에서 주선해야 하는 것은 실은 엄마의 몫이다. 하지만 조나 앨리스의 엄마는 모두 부재한 상태다. (앨리스의 아빠 왈, "앨리스 너도 엄마처럼 날 떠나버려") 대신 이들의 관계 개선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괴수다. 다시 말해, '괴수=엄마'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인데 얼핏 봐서는 논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괴수가 엄마라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파괴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괴롭혀서다. 괴수는 공군기지 '에어리어 51'에 갇혀 이유 없이 생체 실험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며 인간에 대한 증오가 생겼고, 조의 엄마는 그녀의 죽음으로 조와 앨리스 집안 사이의 분란의 원인을 제공했으니 죽어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어떻게 해서든 조와 앨리스 집안에 생긴 오해를 풀어줘야지만 마음 편하게 이승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두 집안 사이의 화해를 이끌어낼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바로 괴수다. 괴수가 마을의 온갖 쇠붙이를 끌어 모아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를 떠나려는 행위는 곧 조의 엄마가 그녀로 인해 생긴 현세의 오해를 해결한 후에 하늘나라로 올라가려는 은유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여 에이브람스는 괴수의 특정행동들을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오해를 해결하는 일종의 힌트처럼 작용시킨다. 무덤 옆 주차장 공간 지하에 은신처를 마련케 함으로써 괴수를 죽은 조의 엄마의 대리인으로 위치시키고, 괴수에 의해 납치된 앨리스를 이곳에 보관해 놓아 조가 오게끔 유도함으로써 어린 연인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하며, 그동안 불화하던 조와 앨리스의 아빠가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게 괴수=엄마라는 공식이 서서히 무르익을 때 쯤 감질 맛나게 부분적으로 모습을 비추던 괴수는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크리처 디자이너 네빌 페이지에 따르면, 괴수의 눈은 극 중 조의 엄마의 눈에 가깝게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 과정은 잭슨과 루이스 사이에 생긴 불화가 풀어지는 흐름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것은 이들의 아빠로서의 정신적 성장과 맞물려 진행된다. 루이스가 공장에 결근한 탓에 대신 출근한 조의 엄마가 사고를 당한 것을 두고두고 원망하던 잭슨은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단순한 사고("accident, just accident")였다고 인정하며 화를 푸는 것이다. "우린 이해해. 살다 보면 나쁜 일도 생겨. 나쁜 일도 있지만 계속 살아갈 수 있어. 살아갈 수 있다고." 위기에 빠진 조가 괴수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던지는 말인데 조와 괴수의 관계뿐 아니라 잭슨과 루이스 사이에서도 유효한 메시지다.

화해의 메시지


J. J. 에이브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버지의 지위 복권에 따른 가족 봉합을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한다. 아버지의 성장 메타포는 받아들이되 가족 화해의 단위를 이웃으로까지 범위를 늘려 화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가족영화가 온전히 미국 내부의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에이브람스의 영화는 내부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읽힌다. <E.T.> 당시만 하더라도 외부의 침입에 따른 내부의 결속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외부의 문제가 내부에 잔존한 <슈퍼 에이트>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내부 결속을 넘어선 외부 세계와의 화해다. 화해는 집착을 놓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결국 이와 같은 소동이 벌어진 것은 지구에 불시착한 괴수가 자기 별로 돌아가려는 것을 도와주기는커녕 군사적으로 이용해먹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됐다.
그런 이기심은 대개 집착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지구를 떠나려는 괴수를 포획하려는 어느 군인의 집착, 부모 사이에 생긴 갈등을 자식으로까지 전가하려는 잭슨과 루이스의 집착, 그리고 죽음 엄마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으려는 조의 집착. 조와 앨리스 집안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조의 엄마를 두고 벌어진 집착으로 빚어진 결과다. (그래서 <슈퍼 에이트>의 오프닝은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미장센으로 시작한다.) 조가 웬만해서는 품속에서 꺼내지 않는 엄마와의 사진이 든 목걸이는 그런 집착을 상징하는 도구다. 아빠의 성장이 집착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했듯이 조의 성장 역시도 엄마와의 옛 기억을 놓을 때 이뤄진다. 우주선의 자성에 이끌려 날아가던 목걸이를 손에서 놓자 괴수는 비로소 지구를 떠날 수 있게 되는데 마치 조가 붙들고 있던 엄마의 기억에 대한 집착을 저 멀리 떠나보내는 모습과 꼭 닮아있다. 새로운 시대는 그렇게 열리는 법이다. 스필버그 키드의 대표주자인 에이브람스가 스필버그의 유산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 새로운 스필버그 장르를 완성한 것처럼 말이다.

by 허남웅_영화칼럼니스트 (www.hernamwoong.com)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돼지의 왕연상호 감독 GV 현장스케치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며 개봉 전부터 이례적인 화제를 모아 어느덧 2만 관객 돌파의 고지에 선 <돼지의 왕>이 지난 10일 저녁,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작은 영화의 조용한 반란상영작에 포함되어 상영되었다. 화제작임을 입증하듯 많은 관객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 상영이 끝난 후에는 연상호 감독과의 GV가 이어졌다.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차분하게 각자의 모습을 반추해보며 작품 속에서 발화하는 계급적 문제의식에서부터 제작 과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그 현장을 전한다.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번 기획전에 작은 영화의 조용한 반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돼지의 왕>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기 때문에 이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2만 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본 걸로 알고 있는데, <돼지의 왕>에 쏠리는 관심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연상호(영화 감독): 부산에서 상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웃음)

허남웅: 아무래도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군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나리오를 구상했다고 알고 있는데, 학창시절도 많은 연관을 맺고 있지 않나. 그런 계급적인 문제들을 중학교 때부터 갖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연상호: 중학교 때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저희 집이 연립주택이었는데 옆에 차고가 있었다. 그 차고를 개조해서 다세대 주택으로 만들었었고, 그게 바로 영화에서 철이와 철이 엄마가 사는 집의 모델이 됐다. 반 지하라 여름에 비가 오면 물이 들어갔는데, 거기서 예쁜 여자들이 나와서 물을 막 퍼내는 거다. 그때만 해도 예쁜 사람은 부자라는 인식이 있던 터라, 예쁜 여자들이 왜 굴 같은 데서 나와 물을 퍼내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사색에 빠졌었는데, 알고 보니 영동시장에 있는 가라오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부터 계급적 의식을 가지게 됐다.

허남웅: 군대도 굉장한 계급사회지 않나. 그런 환경도 영향을 미쳤는지.

연상호: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을 하는데 소위 군대에서 말하는 풀린군번이라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군대에 있을 때에는 할 게 없어서 시나리오를 많이 썼다. 철책 근무를 섰는데 8시간 동안 나가서 임진강 물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할 게 없어서 매일 같이 이렇게 저렇게 나는 생각들을 육군수첩에 적었다. 그 수첩을 제대할 때 가지고 나왔는데 다 쓰레기였고 <돼지의 왕> 하나 건진 거다.

허남웅: 군대에 있을 때라면 십 년도 더 넘은 시간일 텐데 그때의 형태와 지금이 많이 달라졌나.

연상호: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일단 <1991년 우리의 영웅 철이>라는 제목이었고, 내용은 종석이와 경민이가 철이라고 하는 어렸을 때의 히어로를 회상하는 거다. 알고 보니 히어로가 아니었는데 스스로 기억을 조작해서 히어로였다고 생각을 하면서 끝이 나는 내용이었다. 그걸 가지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개, 돼지가 들어갔고 <돼지의 왕>이라는 제목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시나리오도 많이 바뀌었다.

허남웅: <돼지의 왕>도 제작비 문제 때문에 실사 영화로의 제작도 염두에 두었다고 들었는데, 그럴 경우 지금보다 더 잔인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상호: 그때 제작지원을 못 받으면서 <돼지의 왕>을 못 만드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못 만들어지다니 하는 마음에 가슴이 많이 아팠다. (웃음) 그러던 와중에 재정이 안정된 것 같은 제작사 분이 와서 투자를 알아봐주시면서 실사로 하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했는데, 그래도 투자가 잘 안됐다. 그러는 과정에서 시나리오를 다시 써보라고 해서 회사 대표님과 얘기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썼고, 그 작품이 <사이비>.

허남웅: 상상마당에서 지원을 좀 받기도 했고 적은 비용으로 이 작품을 만들게 됐다고 알고 있는데, 그 과정은 어땠나.
연상호: 일단은 그 과정에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진 않았다. 스태프들도 미친 듯이 일을 한 건 아니다. 대신 내가 쓰는 시나리오가 가뜩이나 애니메이션인데다가 투자를 받기 힘든 내용이라는 걸 옛날부터 알고 있어서 제작 노하우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었다. 투자를 많이 못 받을 테니 적은 돈으로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스킬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점점 고도화되다 보니까 돈이 없어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더라. 시나리오만 써서 기계에 넣으면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가끔 든다. (웃음)

허남웅: 다음 작품은 <돼지의 왕>보다 환경이 더 나아진 상황에서 진행하게 되는 건가.

연상호: 많은 분들이 환경 제안을 해 주시는데, 그런 것들이 막 당기지는 않더라. 만들기는 계속 만들면서 좀 더 시간을 두고, 투자자들의 어떤 태도나 관상 같은 것을 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웃음) 돈 없이도 만들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노하우가 많이 축적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여러분들이 많이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다. 각자의 욕구에 맞게 학교라든가 여러 프로그램 업체 등에서 도와주면 그 프로그램을 쓰면서 홍보를 해준다든가 하는 방법도 있고, 제작비 절감에 대한 얘기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합치면 진행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일단 진행하면서 상황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고 있다. 또 맞춤형 기술이 생기다 보니, 이제는 참 좋다. 이걸 스필버그 감독에게 알려주면 당장 나를 캐스팅할 텐데, 영어를 못해서 아쉽다. (웃음)

허남웅: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는 해석이 좀 달리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많은 분들이 비극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하면서 오히려 어떤 개선의 여지를 남겨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감독님은 어떤 의도로 넣었는지 궁금하다.

연상호: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여성에게 짐 지우는 장면을 만들어 버리게 됐는데, 원래는 엔딩에 대한 몇 개의 아이디어가 있었다. 하나는 명미(종석의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나 지금 짐 싸서 나왔어라고 얘기하는 것도 있었고 전화 장면이 아예 없는 것도 있었다. 또 경민이의 시체를 보고 울다가 일어서서 도망가는 종석이의 뒷모습을 잡으면서 끝나는 내용도 있었는데, 여러 가지 중에서 제가 강하게 선택을 했던 것이 지금의 이 엔딩이다. 그건 마지막 대사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너무 매끄러우면 재미가 없지 않나. 영화가 리얼하게 만들기 대회도 아니고, 이 정도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1억 가지고 하는 건데 망해봐야 얼마나 망하겠나 하는 생각도 했는데, 제 생각에는 잘 넣은 것 같다.



허남웅: 처음에는 피라미드 구조의 가장 상층과 하층을 나눠서 얘기를 하다가 뒤로 갈수록 약자 계급 속의 약육강식 구조를 보여주는 데, 처음부터 그런 구분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구성했나.

연상호: 저는 쓰는 재미를 중요시 여긴다. 쓰는 게 재미가 있어야지 즐겁다. 뭐랄까, 남들이 안 쓰는 방식을 쓰는 데에 즐거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돼지의 왕>이 처음 잡았던 컨셉이 있다. 보통 반전 영화라고 하면 앞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이 무엇일까를 맞추게 하는 힘이 있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유도를 하지 않나. ‘이게 답일 거야하다가 아니었다고 하는 게 보통 반전 영화의 구조인데, 그 질문 자체가 뒤에 와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늦게 질문하고 연이어 빨리 답해버리는 형식이라면 그 사이에. 복선 같은 게 들어갈 필요가 없지 않나. 복선이라는 게 그것을 끌어오면서 배신감을 상쇄하기 위한 건데 그 두 개를 붙여 버리면 복선도 필요 없고 그저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그걸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생긴 문제가 그 앞은 무엇으로 채울까 하는 거였다. 반전 영화의 묘미는 역시 이 답을 알게 하는 재미로 끌고 가는 건데, 앞은 무엇으로 채울까 하다가 장르영화로 채우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장르 영화적인 뭔가를 찾다 보니 학원폭력물이라고 하는 주제가 또 계급 문제를 나타내기 가장 쉬운 장르이기도 해서 학원폭력물이 들어갔고, 뒤에는 그 장르물을 비꼬는 방식의 패러디가 들어가서 영화와 패러디 무비 같은 게 합쳐진 형식이 된 것이다. 앞의 장르영화는 드래곤볼의 구성을 차용했다. 하나의 적을 없애면 그 위가 있고 또 그 위가 있고 하는, 드래곤볼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왜 드래곤볼만큼 히트가 안 되는 걸까. (웃음)

관객1: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종석이 노무현 대통령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연상호: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실제로 많이 나오는 얘기다. 종석이는 노무현 대통령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고 양동근을 모델로 했다. (웃음) 양동근을 모델로 했는데 내용 때문인지 외형 때문인지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각을 많이 하시더라.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다.

허남웅: 동물을 의인화한 점 역시도 메시지를 소개하는 데 적절한 방식이었다는 생각을 하는데, 처음에 그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나.

연상호: 그런 생각은 아주 예전부터 했었다. 개와 돼지가 불평등하게 대우를 받고 있다 하는 생각 말이다. 돼지는 살아있을 때부터 식량이지 않나. 돼지는 자신의 살을 스스로 쓰는 게 아니라 인간들에게 먹히기 위한 몸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많은 속성들을 보고 있었다. 황우석이 그렇게 되어봐야 돌아오는 게 없는데 몰입을 하게 된다든가, 김연아의 피겨 실적이 좋다고 애니메이션이 잘 되는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들. 솔직히 아사다 마오의 근성을 좋아했다. (웃음) 해주는 것도 없는 국가와 나라를 위해 사람들이 충성을 다하는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런 불만들이 오랫동안 있었던 거다. 개도 마찬가지다. 어떤 노조가 데모를 할 때 먹고 살만한데 왜 그러냐, 배가 불러서 그렇다 하는 얘기들을 하는데 막상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을 보면 이미 먹고 살만한데다 자식까지 먹고 살만한 재산과 별 필요도 없는 재산을 많이 가진 분들이더라. 그런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려면 본인이 먹고 살만한 재산 외의 돈은 기부를 하면 괜찮은데 그렇지도 않지 않나. 그러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것 이상의 뭔가를 가지려고 하면 왜 그 이상의 것을 욕심 내냐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이 다 같은 인간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다.

관객2: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와이 슌지의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잠깐 생각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애들 사이에 그렇게 끔찍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데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르나 하는 의문이 들었었고, 또 하나는 왜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아무 말도 안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었다.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도 역시나 학교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어른들은 기계적인 균형에 의한 잣대를 들이대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체벌을 한다든가 하는 것과, 아이들 역시도 그런 문제에 대해 스스로 항변하지 않는 것 즉 소통하지 않는 단절된 부분이 부각된 것이 또 우리 사회의 단면이기도 해서, 이 두 영화를 절절하게 본 부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불편하고, 직시하게 만드는 효과 때문인지 너무 가슴 아프게 봤다. 이 부분에 대해 감독님께서는 <나는 세상이 이렇다고 본다. 그것에 대한 재론의 여지는 없다> 같은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쓰셨는지 궁금하다.

연상호: 요즘 GV를 하러 다니면서 많이 인용하는 영화가 있다. <치킨 런>이라는 영화인데, <월레스와 그로밋>을 만든 아드만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영화에서는 양계장이 폭력적인 사회로 나오고 거기에 똑똑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 등장한다. 결과적으로는 양계장에서 닭들을 탈출시키려고 하는 거다. 나중에 온 미국 닭에게 탈출시켜달라고 하지 않나. 그러나 한 마리가 탈출을 하는 건 쉽지만 전체가 탈출을 하는 건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다음 각자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나는 법을 배우는데 그게 또 사기였다는 게 밝혀지고 절망을 한다. 결국은 그들이 합심을 해서 양계장을 개조한 비행기를 만들어서 탈출을 하는데, 이처럼 이 영화가 여러 가지를 많이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기본적인 담론들을 보면, 한 명이 탈출하는 담론은 정말 쉽다. 그런데 그것을 전체에다 넣으려고들 많이 한다. ‘이렇게 살면 되지 않느냐하는 것을 따라 하려고 하는데, 그건 기득권에서 만드는 이미지라고 생각을 한다. <돼지의 왕> 개봉 이후 인터뷰를 하면서 조심하려고 했던 게, 미친 듯이 노력을 하고 고생을 많이 해서 성취했다 라고 하는 얘기를 안 하려고 했던 부분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게 기득권들이 이 세계는 정당해라고 말하는 증거로서 많이 쓰이지 않나.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 그 다음에 택하는 게, 개개인의 수양이나 사회를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입장, 정신세계를 통해 풀려고들 많이 한다. 사람이 마음이 편해야 사회가 편하다든가 하는 접근을 많이 하는데, 결국 <치킨 런>에서 모든 닭을 날게 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다. <치킨 런>에서 성공을 하는 건 연대해서 큰 구조를 만들고 그곳에서 빠져 나오는 거다.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딱 하나다. 우상을 통한 하위계급의 연대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상위 계급들의 연대는 쉽지만 밑으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피라미드 구조라 이해관계가 굉장히 복잡해지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의 연대는 불가능하다. 보통 상위 계급이 연대하는 방식으로 하위 계급을 연대시키려고 하다 보니 그게 안 되는 거다. <돼지의 왕>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을 했고, 이런 것에 대한 일종의 큰 우화다. 학교문제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하위 계급의 연대, 우상을 통한 연대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게 심플한 목적이었다.

관객3: 시나리오를 쓰실 때 감독님은 돼지의 입장이었는지, 아니면 돼지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입장이었는지가 궁금하다.

연상호: 일단 구조를 짠 다음에는 감정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감정으로 쓴 영화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을 했다. 오랫동안 한국대중에 대한 분석을 하다 보니 소위 야마를 중요하게 여기더라. 하나의 예를 들자면 다이나믹 듀오보다는 항상 리쌍이 인기가 많다는 것이다. 공신력 있어 보이지 않나(웃음). 다이나믹 듀오는 쿨한 느낌이고 리쌍은 쥐어 짜는 느낌인데, 보면 항상 리쌍이 인기가 많다. 대중적이려면 감정적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구조를 구상한 다음에 연기를 하면서 썼다. 종석이의 기분으로 많이 썼을 것이다. 그리고 저는 저를 당연히 돼지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셔도 그렇다. (일동 웃음) 의심스러운 게 저는 당연히 돼지라고 생각을 하는데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돼지일까, 개일까하는 의문을 갖더라. 돼지인데, 왜들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일동 웃음) 돼지라는 것을 알면서 돼지라고 절대 말을 못하는 것부터 잘못된 거라고 생각을 한다. 자기가 돼지라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뭔가가 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김미화 씨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얼핏 들었는데,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난 지역에서 동학축제를 주도하는 전교 회장 학생의 인터뷰였다. 굉장히 똘똘한 학생이었는데 학생이 받은 마지막 질문이 학생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냐는 거였다. 그러자 학생이 머뭇거리면서 농민을 도와주는 착한 양반이라고 대답을 하더라.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그렇게 설명하면서도 죽어도 농민은 싫은 거다. 양반이 좋은 거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다 돼지다. (웃음)

관객4: 그림체 얘기를 하고 싶다. 일본적이지도 않고 미국적이지도 않고 한국적인 그림체라고 느꼈다. 캐릭터들이 잘생기고 멋지고 보기 편한 얼굴들은 아닌데 포인트를 준 부분이 있나. 화면 왜곡 효과 같은 것은 만화에서만 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또 하위 계급 학생들의 미래는 어떻게 됐는지 알 것 같은데, 시나리오 작업하실 때 상위 계급 학생들의 미래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도 궁금하다.

연상호: 처음 시나리오 쓸 때는 강민이 커서 출판사 사장이 됐다는 느낌으로 그렸는데, 최근에 강민의 근황을 확실히 알게 됐다. 강민이 개명을 했더라. 용석으로. 그림체는 엄밀히 보자면 일본의 그림체다. 일본만화를 폭 넓게 보지 않으셔서 모를 뿐이지, <사채꾼 우시지마>라는 만화책을 보면 <돼지의 왕>과 같은 그림체라고 느끼실 거다. 또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등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체들이 있고, 삽화체를 좋아한다. 못생긴 주인공은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하고 싶었다. 계급문제나 인권을 다룬 영화를 보면 보통 선과 악의 싸움으로 많이 그린다. 인권을 착취하는 쪽은 너무 악독하고 그 반대로 인권을 보호하거나 착취당하는 편은 너무 선해서 심지어 얼굴도 공유(배우)’같고 그렇다. 이 설정을 바꾸면 관객들이 혼란해할 게 분명하고 저놈은 착취당해도 마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것 같아서, 영화를 만들 때 주인공은 못생긴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다. 다음 작품에서는 제 작품 최초로 대머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대머리에 대한 간단한 소회를 말하자면, 바코드 머리를 비하하며 빡빡 미는 게 당당하다는 식의 노래들이 있는데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코드 머리는 머리의 빈 부분을 양 옆의 검은색으로 메워서 톤을 맞추려고 하는 거고, 머리를 민다는 것은 그 반대일 뿐이다. 즉 밝은 색으로 톤을 맞추는 것뿐인데 한 쪽은 왜 당당하고 한쪽은 또 왜 비굴하다는 건지, 그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그래서 다음 작품 주인공은 대머리다.

허남웅: 이제 앞으로의 감독님의 계획을 여쭙고 이 자리를 마치고자 한다.

연상호: <사이비>라는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앞부분도 지루하지 않고 뒤에 깜짝 놀랄 만한 반전도 있다. (웃음) 사이비 종교에 대한 내용인데, 기독교와 굉장히 흡사한 사이비 종교에 대한 얘기다. <돼지의 왕> 캐릭터들은 대체로 입체적인데 비해 <사이비>에는 입체적이지 않은,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나온다. 다 평면적으로 자기 주장만 하는 캐릭터들이 나와서 죽도록 자기 주장만하다가 다 죽어버리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일동 웃음) 또 단편 하나를 빨리 끝내야 한다. 군대 얘기고 내년 초까지 완성을 해서 끝낼 예정이다. 이 단편이 끝나면 바로 장편 작업에 들어갈 거고, 다다음 작품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또 요즘은 만화(단행본)도 한 편 그려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정리 장미경(관객에디터) 사진 주원탁(자원활동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