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두고 '말의 영화'라 말한다면 이 영화는 그런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물들의 말의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말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방데에 있는 작은 마을의 젊은 사회주의 시장은 공유 녹초지에 거대한 스포츠 문화센터를 만들기 위해 정부의 승인을 얻으려 한다. 환경주의자인 문법 선생은 이 계획을 반대한다. 파리의 저널리스트는 마을에 내려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다. 시장의 딸과 선생의 딸이 친구가 되면서 이야기는 예견치 않은 결말로 향한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7개의 우연에 관한 영화로 '만약... 하지 않는다면'으로 시작한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메르적인 우연이 영화의 전체를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모두에 학교의 교사는 프랑스어 문법에서 상황을 나타낸 조건법의 용도를 가르치는데, 이런 내용에 입각해 르누아르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콩트가 전개된다. 우연을 동반한 조건법은 '만약 사회당의 지지율이 내리지 않는다면', '만약 초원의 버드나무가 긴 세월을 넘기지 못했다면'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우연이란 설정은 영화의 맥락에서 정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로메르의 우연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결정적인 사건처럼 기능하는 것도, 우연히 발생한 과실로 어떤 중요한 미래가 좌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우연은 인과관계의 환상에서 풀어헤쳐진 현재를 제시하는 것에 가깝다. 과거에의 감상이나 미래에의 기대에 종속되기 쉬운 현재를 그 자체로 제시하는 것이 그의 우연인 것이다. 일상을 순수하게 기록하고, 자연의 순수한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우연에 관한 이야기. 로메르는 이러한 현전성의 영화를 멜로드라마적으로 <겨울 이야기>에서 다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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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시네마테크의 선택작 에릭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지난 6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의 옥상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개막식 이후로 꾸준한 입소문을 탄 에릭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행렬이었다. 매진을 기록한 화제작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진득한 발걸음으로 로메르라는 작가와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영화의 자장을 짚어보는 뜻 깊은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런 영화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이 영화에 갖게 되는 의문이고, 동시에 에릭 로메르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이런 영화를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과 거기에 내포된,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일까’라는 존재론적인 의문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어쨌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은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다. 로메르는 <녹색광선>을 만든 이후에 즉흥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자체도 뭔가 일관된 것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전체적인 구성이 굉장히 느슨하다. 제목 또한 수수께끼다. 이 영화에서 모험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의문과 마찬가지로 이런 영화 안에서 영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로메르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은 그리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에릭 로메르 영화의 본성적인 측면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다.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레네트가 파리에 남기 위해 그림을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듯, 이 영화를 레네트라는 예술가의 생사투쟁을 건 모험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영화 이야기의 상당부분이 돈의 순환과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돈과 관련한 문제가 심각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의 문제를 다룬 사회적인 드라마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혹은, 이 영화는 일관적이고 반복적으로 침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이 가장 부각되는 것은 <블루 아워>라는 첫 번째 에피소드이지만 네번재 에피소드와도 연결된다. <블루 아워>에서의 침묵은 자연의 정적, 다시 말해 굉장히 자연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그 침묵은 인간간의 소통의 영역에서도 발생하게 되고, 레네트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타인과 교환할 때에도 침묵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침묵을 통한 인간적 소통을 다루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아주 대조적인,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 있는 두 여성간의 우정을 다룬 드라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제도와 인간의 문제를 다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드라마로 볼 수도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레네트는 2000프랑에 그림을 판매하는 데 성공하지만, 화상은 4000프랑에 그것을 판매한다. 이런 면에서 종국적으로 제도의 승리를 확언해주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두,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반복적으로 정치, 법, 규범 등과 개인 간의 충돌, 모멀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빈자를 어떻게 구제할 것이냐, 하는 도덕적인 딜레마에서 드러나듯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또,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로 강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이라는 세계와 파리라는 도시적인 환경 간의 대립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로메르 영화의 상당수가 젊은이들을 그리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젊은 여성 둘을 빌어서 80년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두 개의 뉴웨이브가 겹쳐지게 된다. 로메르는 이 영화를 초기 누벨바그의 동료들이 만들었던 단편 영화의 느낌으로 되돌아가서 만든 작품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 맥락에서 16mm로 영화를 찍었고, 굉장히 느슨한 에피소드들로 연결된 영화가 탄생했다. 동시에 거기에는 80년대라는 특정한 상황이 간접적으로 많이 들어가 있다. 이런 면에서 새로운 조건들 안에서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침묵에 대한 이야기라 했지만 영화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중요성도 상당히 많이 느껴진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이 영화가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굉장히 애매하다. 지금 말씀드렸던 모든 것이 이 영화에 있을 수도 있고, 이 모든 것들이 이 영화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굉장히 단순하고 소박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뉘앙스를 띄고 있고 굉장한 모호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서두에 말씀드렸듯 로메르의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영화를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과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로메르는 고다르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평생을 영화적 존재론에 대해서 고민하고 영화가 갖는 독특성에 대해 생각했던 작가다. 로메르는 자신이 시네마테크에서 무성영화로 영화를 시작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에게 시네마테크는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었다. 크게 보자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시네마테크가 영화에 과거가 있다는 것을 보존해주었다는 점이다. 로메르는 ‘예술에 있어서 과거는 언제나 보존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가 풍요롭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가 없이는 새로운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라파엘로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를 흉내 내는 미술가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남아있다면 이미테이션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고, 전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네마테크라는 공간 안에서 영화의 과거를 본다는 일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이었다. 그 지점이 고다르와는 조금 달랐다고 생각한다. 고다르는 굉장히 혁신적인 영화를 만든 감독이지만 언제나 과거의 채무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과거가 남겨준 숙제를 스스로 펼쳐내는 데 굉장한 고민을 한다. 고다르가 누벨바그가 시작인줄 알았던 끝이라 말했다면, 로메르는 조금 더 낙관적으로, 과거의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그것들을 제외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가치평가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시네마테크에서 얻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로메르는 영화가 문학이나 회화를 차용함으로서 더 나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네필리적인 것에 대해 오히려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시네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부정한 것이다. 영화 옆의 현실에는 영화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것들이 있다. 시네필리적인 현상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태도는 그의 작업과 관련된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클리셰들이나 영화로부터 차용해 온 부분들을 끊임없이 부정하려고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 안에서 영화적으로 보이는 것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이 다른 누벨바그리언들과 로메르의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로메르는 타고난 이야기꾼인데, 그 이야기들이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지 언제나 의문을 갖게 된다.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서 역시, 이 네 가지 에피소드 안에서 사건과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로메르적 사건은 우연에서 발생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무 이유나 설명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미라벨과 역시 그저 시골길을 걸어가던 레네트는 우연히 만나 미라벨의 자전거 바퀴를 함께 고치게 된다.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우연성에 근거하고 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보이는, 소소한 사건들이지만 동시에 이 우연은 부조리할 정도다. 너무도 우연적인 일들이 너무도 쉽게,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은 이런 우연적인 사건에 연결점들을 만들고, 인물들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데 사용된다. 로메르적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드라마틱한 일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물들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그들이 느끼는 바에 대해서, 그들의 관계들에 대해서 토로하는 순간 진정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들이 거의 대부분 지나간 행위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메르적 담화의 핵심은 진행 중인 일에 대한 담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담화는 현재진행 중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 혹은, 앞으로 올 것들의 사건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로메르의 담화는 가장 연애론적인 사건이다. 이미 헤어진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녹색광선>의 전체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메르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갖고 있는 위험성이 있다. 마치 이 영화의 화상이 레네트의 그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며 ‘내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수긍해야 한다’는 듯한 기세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입장을 갖게 될 것 같은 우려가 있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갖고 그것을 견지하는 가운데 편안하게, 끊임없이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것 같다. 각자의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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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영화평론가 정성일 감독이 추천한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어느덧 2주차에 접어들었다. 지난 25일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 세 편을 상영했던, 일명 '로메르 데이'였다. 마지막 회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가 상영 후에는 이 영화를 추천했던 정성일 영화평론가 겸 감독과 함께하는 시네토크도 이어졌다. 정성일 감독은 로메르의 영화세계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매우 긴 시간동안 열성적이고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객석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끝까지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정성일(영화감독/영화평론가): 올해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6년째 개근이다. 올해에도 백지수표가 도착해서 매우 기뻤고 어떤 영화를 써 넣을까 생각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편 중 하나이며, 이 영화가 로메르 영화의 정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로메르 영화세계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고, 더불어 이 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을 말씀드리려 한다.

로메르는 1920년 4월 4일 생이다. 영화가 아직 무성영화에 머물러 있던 시절, 장편영화가 막 시작했던 시절에 태어났단 뜻이다.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은 모두 토키영화가 시작된 후에 시작했다. 로메르 영화를 보면서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의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로메르가 그들과 아주 다른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영화를 경유하여 세상의 리듬을 느끼는 방식에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로메르는 2차 대전 당시, 다른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처럼 어린 아이로서 보낸 게 아니다. 10대에서 20대를 통과하는 나이에 전쟁을 겪었고, 자의식을 갖고 고스란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20살에 게슈타포에게 잡혀가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형을 고발하라는 위협을 받기도 했다. 로메르는 이때,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의 변화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로메르는 1948년에 '영화, 공간의 예술'이라는 글을 썼다. 이처럼 로메르는 공간을 통해 영화에 다가갔던 사람이다. 여기서 로메르는 영화 공간에 두 개의 가능성이 앞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오슨 웰즈의 딥 포커스의 공간, 또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갔던 로셀리니의 공간이다. 로메르는 두 개의 공간을 다 활용하고 싶어 했다. 도덕이야기, 희극과 격언, 사계절 이야기 같은 영화들은 로셀리니의 길을 따르며, 70년대 만들어진 시대극들은 웰스의 전통을 따른다. 또한 그는 파울로 우첼로나 엘 그레코 등, 화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1960년대 후반에 네스토르 알멘드로스라는 촬영기사를 만나면서 그와 함께 인상주의 화가들이 해냈었던 것과 같이 영화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로메르를 이끌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독일적인 문화였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은 영화에서 스타일의 혁신을 이야기했다. 로메르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메르는 영화는 스타일이 아니라 테마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고전주의자였던 셈이다. 로메르는 사물을 거기에 배치했을 때, 그것이 주는 가짜스러움을 끔찍하게 혐오했다. 일례로 트뤼포의 영화에서 나오는 눈은 다 가짜 눈이었던데 반해,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가짜 눈이 내린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 로메르는 그 지역을 찍기 3년 전부터 일기예보를 계속 체크했다고 한다. 로메르는 좋은 영화는 어떻게 스타일을 혁신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테마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나온다고 말했다.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테마와 주제를 연결시킬 때, 그에게 핵심은 도덕이라는 문제였다. 자기 영화에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도덕이었다. 반대로 고다르에게 영화는 스타일이고, 스타일이 모든 것이었다. 고다르가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유다. 모든 것에 대한 와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의 세계관과 영화를 분리했을 때, 대부분 그 영화는 사기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직 영화를 만들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밀어붙였을 때, 로메르에게는 결국 도덕이라는 문제로 귀결된 것처럼, 또한 고다르가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감독이라면 자기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원칙이 되는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로메르의 영화를 물으면, 목록이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신기한 것은 로메르의 경우, 상대방이 어떤 영화를 이야기했을 때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으며, 그 사람이 어떤 영화의 취향과 미감을 가진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상 로메르 영화의 테마는 간단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 두 가지의 끝없는 변주이고 반복이다. 차이는 단지 영화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계절에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만나느냐의 문제다. 이 말의 방점은 '만남'에 있다. 이 만남을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느냐에 따라 많은 변주가 발생한다.

로메르의 많은 영화는 현대를 무대로 해서, 모던한 세계에서의 일상생활을 담는다. 모던한 소도구들, 건축물들, 모던한 구조 안에 둘러싸인 세계. 로메르는 실내에 들어가서조차도 망원렌즈를 쓰면서 인물과 배경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밀어붙여 공간의 깊이를 없애고 몽드리앙의 그림처럼 선으로 이뤄진 세계로 화면을 쪼개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인물을 쪼개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가상선을 그어 인물의 이쪽과 저쪽을 자르고 붙이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그 때 로메르는 창문을 걸어 찍으며,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킨다. 로메르가 일상생활을 찍어나가는 방법에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핸드 헬드 카메라에 대한 여타 누벨바그 감독들과 다른 방식의 활용이다. 이는 인류학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장 루슈의 '시네마 베리떼'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루슈가 다큐멘터리에서 한 방법을 로메르는 극영화에서 한 것이다. 로메르가 확보하려 한 것은 카메라의 존재론적인 객관적 인칭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상에 대해 탐구하는 방식으로서의 카메라를 취하는 것이었다.

로메르 영화의 이야기가 고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문제가 발생할 때, 기적이라는 것이 슬쩍 개입되면서 문제가 갑자기 해결된다. 로메르의 영화에는 기적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에서도 '~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문제는 늘 갑자기 해결된다. 이 기적을 즐기면서 세상이란 얼마나 신비로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의 기적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배움은 아마도 칼 드레이어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데트>에서. 또한 로메르에게는 파스칼 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학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내기를 해야 하는가?" 로메르는 그 내기에 영화가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인간학, 그리고 탐구로부터, 기적 같은 내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로메르가 그것을 유머로 긍정으로 비전으로 열어놓는 방식을 택했다면, 반대로 염세와 추락의 방식을 택했던 내기꾼이 있으니 이는 키에슬로프스키다. 의외로 이 두 사람이 편집하는 방법에 있어 상당 부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로메르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마치 그 수많은 영화들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처럼 시기와 순서를 무시하곤 한다. 이는 로메르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스타일을 발전시키거나 형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결정의 선택권을 누구에게 주느냐를 놓고 영화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다. 관객은 게임의 규칙을 아는 순간 이야기가 아닌 프로세스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해 흥미를 잃게 만들어야만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교란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밀고나간다. 로메르 영화에서 깜짝 놀라는 순간은, 이야기를 좇아가면서 이 이야기의 구조로는 절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갑자기 가능해지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게 기적 같은 것이다.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네트워크를,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가능한 현실로 변경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19세기 탐정소설에서 가져온 서사문제의 해결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중 가장 단순한 영화다. 그리고 말이 많다. 이 영화를 이야기 할 때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라는 질문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영화가 시작하면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게 조건법과 종속절을 설명하고, 그 이후의 영화는 모두 조건법, 종속절로 진행이 된다. 사실상 이 영화는 '말'을 찍었다. 존재하는 나무와 존재하지 않는 메디아테크.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나무와 현재에서 미래로 만들어질 준비를 했던 미디어테크 사이의 대립이, 말을 사이에 놓고 진행되고 있다. 즉 진행 중에 놓인 시제에 대해, 말을 가지고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 영화가 공간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시제를 담기 위해 택한 것은 결국 '말'이다. 영화에서 대사가 미장센의 경지에 오르며 시네마틱한 것으로 활용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말의 미장센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만든 것은 스트라브와 위예의 방식이다. 로메르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의 미장센'을 보여주었다. 가장 아름답게. 나는 이 영화가 로메르의 이례적인 영화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 미학의 어떤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화라고 믿는다.

(정리: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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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는 여러 영화에 걸쳐 한 배우를 찍곤 했다. 재미있는 점은 각각의 영화들에서 그 인물들의 성격이 일관되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 배우가 자신의 성격과 맥락에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베아트리스 로망은 바로 그 대표적인 여배우이다. 그녀는 10대 때부터 그의 영화에 출연해 <아름다운 결혼>(1982)에서는 주인공 사빈느 역할을 맡았다. 로메르의 의뭉스러운 인물들 사이에서 가장 솔직하고 충동적인 이 아가씨는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의견에 굽힘이 없다. 오죽하면 <녹색광선>(1986)에서는 불쌍한 마리 리비에르를 몰아붙이다가 울리기까지 한다. (그러고는 사과도 하지 않는다!) 툭하면 싸우기 일쑤인 그녀는, 그러나 감정의 기복이 죄다 드러나서, 귀엽다. <아름다운 결혼>은 이 저돌적이며 총명하고 귀여운 여성이 결혼을 향해 돌진하다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그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미술사 석사과정 중인 여학생 사빈느는 유부남 화가 시몽(페오도르 아트킨)과 사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걸려 온 가족전화에 그녀는 문득 이별을 결심하고 충동적으로 선언한다. “나 결혼 할 거야.” 마침 친구 클라리스(아리엘 동발)는 한 결혼식에서 사빈느에게 근사한 변호사 에드몽(앙드레 뒤솔리에)을 소개시켜주고 둘 사이에는 호감의 시선이 오가지만 일로 늘 바쁜 에드몽이 황급히 자리를 뜨며 별 소득 없이 만남은 마무리된다. 이후 어설픈 중매자 클라리스의 부추김과, 사빈느의 결혼에 대한 욕망, 에드몽의 우유부단한 상냥함이 엇갈리며 이야기는 대책 없이 흘러간다.



<아름다운 결혼>은 <해변의 폴린느>, <보름달이 뜨는 밤>, <녹색광선>등이 포함 된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연작들은 대체로 정체불명의 결핍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들의 방황기를 다루며, 그 결핍이 인물의 성격과 결합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의지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빈느는 모든 해결책으로 '결혼'을 결심한 뒤 이를 밀어붙인다. 부정한 남자를 만난 과거에 대한 해결책도 결혼이며, 불만스런 현재 진로에 대한 해결책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해결책도 결혼이다. 이는 어쩌면 창조적인 작업을 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는 클라리스로부터 비롯된 욕망 같기도 하고, 실패한 결혼생활로 외도 중인 전 애인 시몬에 대한 복수처럼도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잘도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가며 시대착오적으로 결혼에 매달린다. 



에릭 로메르의 인물들은 이처럼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곧잘 욕망에 지고 만다. 그러고는 태연히 시치미 떼는 데 능숙하다. 그런데 이 시치미의 순간은 기만적이고 파렴치하기보단 오히려 산뜻하고 경쾌하며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삶에 대한 긍정이 이루어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뭐, 아무렴 어때.' 사빈느는 에드몽에게 완벽히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조용히 미소 짓는다. 대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의 영화에서 이 같은 침묵의 순간은 흐르던 시간을 잠시 여울에 고여두는 재주가 있다. 그렇게 잠시 정지한 채, 제 삶을 응시하고, 실수를 깨닫고, 다시 살아나간다. 다행스러운 점은 로메르의 세계에서 실수가 꼭 우리 탓만은 아니며 그 불운만큼 행운의 우연도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단촐한 세계가 우리 삶에 선사하는 풍성함이다. (백희원: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1월 25일(화) 16:30 에릭 로메르의 <아름다운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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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파스칼의 내기’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논증을 제시한다. 신을 믿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신이 있으면 천국에 간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런 이득도 없고 신이 있으면 지옥에 간다. 그러므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 신을 믿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에릭 로메르는 이를 사랑에 적용한다. 파스칼의 내기에 대한 로메르식의 해석인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1992)는 믿음과 대한 작고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펠리시(샤를로트 베리)는 휴양지에서 샤를르(프레데릭 반 덴 드리에슈)를 만나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이상적인 나날을 보낸다. 휴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샤를르에게 주소를 건넸지만, 5년이 흐른 뒤에 그녀는 그때 생긴 딸을 키우며 여전히 샤를르를 기다리고 있다. 미용사 일을 하며 애인인 로익(에르베 퓌릭)의 집에서 지내던 펠리시는 또 다른 애인인 맥상스(미셸 볼레티)를 따라 느베르로 이사하게 되지만, 보채는 딸에게 마지못해 이끌려 들어간 성당에서 묘한 깨달음을 얻고 파리로 돌아온다.



펠리시의 여러 얼굴을 자주, 그리고 진중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에는 그녀의 시점숏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번, 샤를르와 비슷한 사람을 쫓아 시장으로 들어갔을 때 쓰이는 시점숏은 어느 특정한 인물도 주목하지 않고 수많은 익명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때의 프레임은 텅 빈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샤를르와 펠리시가 휴양지에서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나서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펠리시의 얼굴뿐이다. 숏의 빈도나 지속시간, 앵글까지 모두 온전히 펠리시에게 집중되어있다. 이는 <겨울 이야기>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펠리시는 영화 내내 한결같이 샤를르를 기다리며, 주변의 모든 인물들과 샤를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샤를르가 돌아오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 되었든 펠리시는 샤를르가 돌아올 것을 믿으며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겨울 이야기>가 응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펠리시의 그 믿음이다.



그러나 “나는 도식화를 원치 않는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Ma nuit chez Maud>(1969)에서 나는 한 명의 맑시스트와 한 명의 카톨릭주의자를 보여주는 것이지, 맑시스트와 카톨릭주의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로메르의 말처럼, 영화의 라스트에 펠리시에게 찾아오는 기적이 믿음에 대한 강요나 약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가지고 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살면 기적이 찾아올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파스칼의 내기는 여전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믿어보기로 하는 것이다. 펠리시에게 찾아오는 기적은 파스칼의 내기에 응할 용기를 준다. 로메르와 눈을 맞추고 그것을 건네받을 수 있는 이들에게, <겨울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소박한 기적이, 희미하지만 분명히 빛나는 녹색광선이 된다.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1월. 25일. 14:00 에릭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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