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샤브롤은 현실과 주류 영화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 <야수는 죽어야 한다> 상영 후 이명세 감독 시네토크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프랑스 문화원 시절에 영화들을 보고 다니던 사람들이 고다르, 트뤼포를 얘기할 때 이명세 감독은 유난히 샤브롤 얘기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이명세(감독) 1970년대 말 불란서문화원의 시네 클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었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에릭 로메르,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들을 상영했다. 이 감독들은 당시 영화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고다르를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이었다. 샤브롤의 영화가 재밌고 좋은데 샤브롤을 얘기하면 조금 무식해 보이는 분위기가 있었다(웃음). 누구나 그렇듯 나도 추리와 서스펜스 장르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샤브롤은 좀 독특했다. 살인이 벌어지는데 시각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이상한 유머도 쓴다. 긴장감을 강조하기 위해 주류 영화와는 다른 방법을 쓰는 것 같았다.


김성욱 샤브롤 영화는 오프닝이 흥미롭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에서 자동차에 꼬마 아이가 치이는 장면이 딱 세 개의 커트로 되어 있다. 그 장면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데, 굉장히 과감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줌의 활용도 특별하다.


이명세 클로드 샤브롤은 줌을 특이하게 많이 사용한다. 특히 60~70년대에는 줌을 안 쓰는 경향이 있었다. 줌을 쓰면 뭔가 촌스럽고, 소위 ‘작가’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그런 걸 비웃듯이 거칠게 보이는 연출을 많이 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샤를이 벽돌을 들었다 놓는 장면에서 줌과 패닝이 거칠게 들어간다. 블랙코미디 같다. 줌이 만드는 거친 느낌과 점프 컷의 조화, 그 불협화음이 좋았다.

전체적으로 진지한 영화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코미디 장르의 연극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를이 폴의 정비소에서 증거를 찾으려 부품을 뒤적거리는 장면도 그렇다. 연기를 과장되거나 우스꽝스럽게 하는 것도 아닌데 유머가 있다. 관객을 가지고 논다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영화와 관객 사이에 오가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특히 거실 장면에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짙다. 폴의 어머니가 무척 인상적이지 않나. 며느리를 조롱하는 웃음도 그렇고 기괴한 느낌이 있다. 저 인물로 인해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단순히 하나의 스릴러 서스펜스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김성욱 이 영화의 마지막에 관해서 논란이 조금 있었다. 실제로 기자가 샤브롤에게 묻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폴을 죽였냐는 것이다. 그때 샤브롤은 “샤를이 폴을 죽인 장면을 당신은 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명세 『오리엔트 특급 살인』처럼 모든 사람이 폴을 죽였을 것 같지 않나?(웃음) 살인이 일어난 다음 TV 뉴스가 이 사건을 보여준다. 이때 폴의 엄마를 제외한 TV 화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전형적인 미스테리 연극처럼 그려진다. 폴을 죽일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실 폴의 엄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폴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진짜 범인을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누가 범인이냐고 따지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말씀하신 대로 폴은 죽인 진범에 대한 질문은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레스토랑 장면에서 샤를과 엘렌은 굉장히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그때 식탁에서는 웨이터가 닭을 자르고 있다. 이야기의 시간을 보면 그때 아마 폴이 죽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레스토랑 장면이 샤를이 폴을 죽이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명세 아주 클리셰적인 장면이다. 살인과 육식이 붙는 건 몽타주의 전형이다. 살인 후에 야채를 먹는 장면은 없지 않나(웃음). 그 당시에 만들어졌던 영화들, ‘주류 영화’들을 함께 놓고 생각하면 샤브롤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냉소적인 시선이 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김성욱 후반부에 모리스 피알라 감독이 형사로 등장한다. 영화를 찍을 수 없던 시절에 연기를 했었는데, 영화 속 그의 인상은 잊을 수가 없다. 그가 샤를이 일기를 쓴 이유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위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샤를의 나레이션이 자기 고백이 아니라 알리바이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내레이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이상한 말이지만, 샤브롤은 명확하면서도 모호한 영화를 찍고 있다. 명확해 보이지만 자꾸 생각하면 모호하다. 감독님도 잠정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살인자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샤브롤에 관한 평을 썼던 외국의 평론가는 ‘범죄의 평등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이명세 샤를은 마지막 편지에서 마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처럼 말한 다음 바다로 떠난다. 그런데 그 장면 자체만 보면 바다가 너무 반짝거린다. 그냥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마지막 그 편지조차 알리바이로 보이기도 한다. 샤를은 처음 등장할 때도 가명으로 등장한다. 이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그 본명의 진위를 영화 안에서 밝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조차도 관객에게 내세우는 알리바이로 볼 수도 있다.

관객 범죄를 다루는 영화들을 보면 감독이 그 대상에 대해 취한 태도나 시선이 특히 도드라져 보인다. 영화 안에서 잔혹한 일을 묘사하는 것과 현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명세랙코미디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사람이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했는데 도중에 의자가 부러지는 바람에 넘어져 죽었다, 같은 이야기들. 요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더 영화 같아서 시나리오를 못 쓰겠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현실에서 살인을 볼 수 있겠나.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는 영화 안에서 항상 살인과 같은 비일상적 요소들과 계속 마주친다. 샤브롤은 이런 이상한 전형성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김성욱 사실 샤브롤의 황금기는 아주 초반에 끝났고 이후 1967년에서 1978년 사이의 시기를 2차 전성기라고 한다. 2차 전성기의 샤브롤은 한 명의 제작자와 계속 작업했다. 이때 샤브롤이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건 그 특별한 제작 환경의 영향이 크다. 샤브롤은 ‘감독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명세 감독님도 샤브롤의 입장에 맞는 분이라는 개인적인 느낌이 있다.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이명세 내년까지는 꼭 새 영화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웃음).


일시 I 3월 31일(금) 오후 7시 30분

정리 I 황선경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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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침대에 누워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남자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인 살인범에게 복수하고자하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샤를이다. 그의 곁에 누워있는 여자는 그가 살인범을 찾기 위해 접근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 엘렌이다. 그들의 얼굴은 침대 옆에 있는 조명과 상대의 얼굴에 가려져, 두 사람 모두 한쪽 눈과 반쪽 얼굴만 카메라에 담긴다. 그런데 이들의 반쪽 얼굴은 또 하나의 얼굴을 이루어서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두 눈을 가진 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샤를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엘렌의 눈은 샤를을 응시한다. 엘렌은 샤를에게 왜 폴을 도와줬냐고 타박하지만, 샤를은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마치 샤를의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빨간 글씨들 같다. 차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샤를은 범인 찾기에 몰두해왔다. 그러다가 사고 현장에서 범인과 동승하고 있었던 여배우 엘렌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는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다가, 범행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에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마침내 샤를은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의 집까지 들어온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범인인 폴 때문에 고통 받는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폴을 향한 증오였다.


샤를은 특히 폴의 아들인 필립에게 어떤 연민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아빠를 죽여 달라고 말하는 필립을 꾸짖으면서 혼란스러워 한다. 홀로 고독하게 복수심을 키워왔던 샤를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연민 때문에 샤를은 폴을 죽일 수 있는 몇 번의 순간에도 주저하고 죽이기를 실패한다. ‘폴은 죽어야 한다는 당위로 생긴 샤를과 가족들 사이의 연대가 오히려 그 당위를 위협하는 것이다. 엘렌 역시 왜 폴을 도와줬냐면서 폴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엘렌의 눈은 당위의 눈빛이었고, 샤를의 눈은 연민과 주저함의 눈빛이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기괴한 얼굴은 샤를의 아이러니한 감정을 대변한다. 그는 다시 자신의 본래 목적을 생각하며 폴을 죽이겠노라고 다짐하지만, 보트 위에서의 계획도 실패로 끝난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당위가 흔들리는 지점은 야수에 대한 이해 때문이 아니다. 영화는 절대 악을 부정하지 않는다. 폴의 극악무도한 행동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영화는 이해할 수 없는 절대 악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써 어떤 연대를 보여준다. 설령 그것이 범인의 아들과의 연대라 하더라도, 샤를은 오히려 그리스 비극처럼 보인다면서 멋지다고 말한다. 결국 야수는 죽고, 연대가 당위를 이기지 못하지만, 샤를과 엘렌 그리고 샤를과 필립 사이의 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 하게될 장명 중 하나는 야수, 즉 폴이 죽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폴이 죽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텔레비전 화면으로 간략하게 사건 현장을 요약할 뿐이다. 이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어린 아들에 대한 샤를의 부정(父情)을 영사된 화면과 곰 인형으로만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 샤를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린 아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필립과의 연대다.


마지막 장면에서 샤를은 폴을 죽이고 자수한 필립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범인이라 말해달라고 엘렌에게 부탁의 편지를 남긴다. 편지를 남긴 후 떠나는 샤를은 걷고 또 걷는다. 침대에 누워서 근심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모습과는 다르다. 그는 필립의 희생을 받아들인 자신을 책망하며, 자신이 필립에게 폴을 죽어야한다는 암시를 은연중에 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바다로 멀리 멀리 떠난다. ‘야수는 죽어야 했는가에 대한, 그리고 누가 야수였는가에 대한 물음을 간직한 채로 자신의 형벌을 선택한 것이다.

 

김혜령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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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동굴의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면 영화는 작은 마을의 전경을 비추며 시작된다. 어딘가 음울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던 석회동굴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마을의 모습은 조용하고 평범하다. 이어서 영화는 결혼식장으로 카메라를 옮기는데, 이곳은 처음으로 푸줏간 주인 포폴과 사립교사 교장 엘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다음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거칠게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포폴과 엘렌은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그러던 중 마을에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이 몇 차례 일어난다.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줄곧 포폴이 범인이 아닐까, 추측하던 관객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마을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는, 흔히 우리가 설정 쇼트라고 부를 법한 풍경의 장면들이 영화에는 몇 차례 등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영화에서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그저 앞으로 일어날 불운한 사태에 대한 조짐, 암시로써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포폴이 엘렌의 집에서 자신의 라이터를 발견하게 되는 씬 전에 보이는 풍경의 모습이 그렇다.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관객들이 무언가 불길한 조짐을 감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 포폴의 죽음 이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엘렌이 강가에서 밤을 새운 후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에서의 풍경 장면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다. 종국에 포폴은 (자살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살해하는데, 살인자가 죽은 후 이 마을의 풍경은 어쩐 일인지 여전히 스산하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강가에 앉아있는 엘렌, 그녀의 뒤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카메라는 이들과 점진적으로 멀어지며, 이른 아침의 뿌연 안개가 퍼진 마을의 풍경을 넓게 몽타주 한다.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엘런이 강가에서 밤을 새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포폴과 엘렌의 정사 장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말에 대한 동의를 차지하고, 그보다는 이 장면이 관객들에게 어떤 정서를 주는지에 먼저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 정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고립감이라고 생각된다.

 

샤브롤의 <도살자>를 범죄가 중심이 되는, 그래서 범인의 처벌로 이야기가 모두 해소되는 장르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이 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아직 사건이 다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찜찜함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엘렌의 표정, 마을 안에 고립되어 버린 느낌을 주는 컷과 줌 아웃 편집은 이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 냈던 핵심적인 요소가 아직도 이 마을 안에 잔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살인을 영화의 핵심적 요소라고 보기에 이 영화에서 포폴이 저지르는 살인은 게다가 어떤 긴장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지만 <도살자>에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보다 <도살자>의 그로테스크함을 만들어 내는 주된 요소는 음식이다. 샤브롤은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수반하는 도축, 살육의 야만성을 살인, 죄와 연결한다. 감독은 사람들이 모여 결혼식을 즐기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전에 결혼식을 위해 준비된 음식을 더 먼저 보여준다. 샤브롤의 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음식을 먹는다는 원초적인 행위는 <도살자>에서 유난히 강조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엘렌은 포폴 앞에서 우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체리를 먹고 있다. 샤브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야만성을 음식을 먹는다는 일상적인 행위에서 발견한다. 영화의 중반부에 엘렌이 아이들과 함께 석회동굴을 견학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듯, 야만성과 문명을 하나의 연장선 안에 놓인다.

 

포폴은 이 영화에서 끔찍한 변태적 살인마로 묘사되지 않는다. 동시에 관객이 그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동정하게 되지도 않는다. 가령, 영화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 군대에서의 복무 경험이 대사로 제시되고는 있지만 영화는 그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 포폴이 관객들에게 어떤 인물로 제시되는지도 모호하다. 그는 범인이지만, 온전한 악인은 아니며,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중점이 되는 것은 포폴과 일종의 계급적 차이가 뚜렷한 엘렌이 어떻게 그와 내면의 어떤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있다. 포폴이 행한 죄와 그의 내면이 엘렌과 공유됨으로써, 이러한 인간의 야만성은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작은 마을의 안개 서린 풍경은 이러한 야만성이 가진 보편적 성격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의 초반, 춤추고 있는 하객들 사이로 포폴과 엘렌을 향해 줌인했던 카메라는 이제 마을 전체를 한 컷에 담는 것으로 영화를 끝내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엘렌과 포폴의 이야기는 이 마지막에서 마을 전체로 확대되고, 엘렌은 (자기 자신도 가지고 있는) 야만성의 세계 안에 고립된다.

 

황선경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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