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누아르 특별전]

필름 누아르의 불온성을 지우다

- <길다>(찰스 비더)

 

<길다>는 두 개의 인상적인 만남으로 시작한다. 먼저 도박사 조니와 카지노 주인 밸린, 이 두 남자 사이의 만남이다. 조니는 뉴욕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굴러들어간 과거가 모호한 도박사다. 길거리에서 주사위 사기로 막 한몫을 잡았는데, 현지의 불량배에게 모두 뺏길 판이다. 그때 밸린이 나타나서 조니를 구한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강인한 인상의 밸린은 끝에 칼이 숨겨진 지팡이로 악당을 물리쳤다. 밤 항구에서 만난 두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고,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운다. 이들의 만남은 강한 스포트라이트 조명과 투 숏 덕분에 마치 연인들의 설레는 만남처럼 묘사돼 있다.

두 번째 만남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길다의 등장 장면이다. 길다는 밸린이 여행지에서 만나 바로 다음날 결혼한 미국인 여성이다. 밸린의 소개로 조니와 길다가 서로를 처음 봤을 때 두 사람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클로즈업의 빈번한 교환은 이들의 강렬한 욕망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다. <길다>는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필름 누아르다. 필름 누아르의 공식에 따르면 젊은 여성 길다는 팜므 파탈, 조니는 추락하는 순진한 남자, 그리고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희생되는 악당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길다>는 필름 누아르의 관습을 비튼다. 먼저 길다의 캐릭터가 남성들의 미움을 받는 악녀 팜므 파탈에 머물지 않는다. 길다는 다른 팜므 파탈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작전을 짜는 ‘영리한’ 인물이 아니라 오직 조니의 사랑에만 헌신하는 ‘착한’ 여성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길다가 처음 등장할 때, 누아르 특유의 범죄적 열정보다는 조니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더욱 강조된 데서 길다의 멜로드라마적 캐릭터는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길다는 누아르 특유의 불온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리고 두 남자의 관계도 전형성과 다르다. 이 점은 개봉 때부터 일부에 의해 꾸준히 지적돼 왔는데, 두 남자는 우정을 넘어 동성애적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첫 만남에서 두 남자가 보인 상대에 대한 특별한 호감, 그리고 조니가 남성성을 상징하는 밸린의 지팡이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주요한 이유로 제시됐다.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조니가 제거해야 하는 사랑의 라이벌이 아니다. 더 나아가 조니는 밸린과 길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랑의 포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밸린이 사라진 뒤 길다를 학대에 가깝게 대하는 조니의 태도는 밸린에 대한 배반의 죄책감을 길다에게 덧씌우는 것 같다. 이쯤 되면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이 길다인지 조니인지 혼란이 생길 정도다.

<길다>는 필름 누아르 계보에서 늘 빠지지 않는 대표작으로 소개된다. 아마도 리타 헤이워드의 압도적인 매력, 그리고 명암의 강렬한 대조를 마법처럼 잡아낸 촬영(루돌프 마테)의 솜씨 덕이 클 것이다. 그러나 사실 <길다>는 누아르의 불온성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결국 윤리를 강조하는 멜로드라마처럼 종결된다. 아마 스타였던 리타 헤이워드를 악녀 팜므 파탈로 만들거나 비극적 결말의 장본인으로 내세우는 데 큰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길다>는 불온성보다는 대중성을 선택했는데, 그럼에도 필름 누아르의 전설로 남은 특이한 위치에 있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필름 누아르 특별전]


밤과 도시의 이중적 성격

- <고독한 영혼>(니콜라스 레이)


<고독한 영혼>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살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던 딕슨이 형사 부부를 배우로 삼아 자신이 재구성한 살인현장을 연출하는 장면이다. 딕슨은 살인마 역할을 맡은 형사에게 아내의 목을 더 강하게 조일 것을 요구하면서 광기 어린 눈빛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포착한 그의 얼굴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빛이 드리워져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그러나 지금 딕슨의 얼굴을 강렬하게 뒤덮는 이 빛은 외부의 광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그의 내부로부터 분출된 가학적 쾌감의 시각화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딕슨의 광기를 추동하는 빛은 자연광이 아니라 도시의 인공조명이다. ‘황혼의 시인’이라 불린 니콜라스 레이가 선택한 주인공답게 딕슨은 백주의 시간대와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태양빛이 내리쬐는 동안 그는 졸음을 호소하거나,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몇 년 만이라며 무기력하게 중얼거린다. 그의 폭력성과 가학성은 밤의 기운 속에 침잠해 있다. 한밤의 도시가 내뿜는 야경의 빛이 그의 파괴적인 면모를 격렬하게 충전시키는 것이다(한편으론 딕슨이 지닌 밤의 정서는 대단히 매혹적이기도 한 것이어서, 그와 로렐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사건도 밤에 발발한다). 도시 한복판의 도로 위에서 발생한 사소한 시비를 담아낸 도입부의 광경은 과잉된 분노와 민감한 반응들로 가득한 도시의 구동원리를 지목한다. 도시는 개인의 고립을 과도한 폭력성으로 표출한다. 바로 이 세계를 딕슨이 떠돌고 있다. 원제에 명시된 ‘고독한 곳(lonely place)’은 딕슨의 폐쇄적인 내면을 가리키는 은유인 동시에 그의 서식지인 할리우드라는, 이 차가운 소외의 세계에 할당된 표지인 셈이다.

<고독한 영혼>이 그려낸 밤의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불안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음험하다. 이곳엔 모순된 비이성적 충동이 도처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밤에는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시나리오 작가는 폭행과 스캔들을 일삼으며, 상대를 향한 무시와 다툼은 일상적으로 만연해 있고, 차들은 위협적으로 달려들며, 인물들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에 휩싸이는 곳. 연인의 사랑과 동료들의 격려를 주변에 두고 있음에도 광기와 분노에 휩싸이며 파국을 맞이하는 딕슨의 운명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엔딩에 이르러 딕슨은 집을 나서 거리를 향해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오직 신경질이 난무하는 도시의 무방비한 거리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장소라는 것을 깨달은 체념 섞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도시의 야경과 딕슨의 얼굴에 드리워진 빛이 그토록 강렬하게 각인된 까닭도 여기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도시라는 고독의 세계와 딕슨의 얼굴이 공명하고 있음을 예견하는, 또한 딕슨의 자기파괴를 탐미적으로 수긍하는 도취의 빛이다. 딕슨은 할리우드의 밤거리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마지막 장면의 딕슨은 첫 장면의 도로 위로 되돌아올 것이다). 니콜라스 레이 특유의 냉엄한 관측과 묘사가 이 사내와 그가 몸담은 도시 전경에 독특한 비애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고독한 영혼>의 미감에는 밤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한 남자가 마주한 파국의 기운이 연결되어 있다. 불길하지만 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신부님은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내 친구 정일우>의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내 친구 정일우>를 어떻게 처음 기획했는지 궁금하다.

김동원(감독) 개봉할 생각 없이 만든 작품이다. 요즘 개봉 이야기가 나와서 좀 혼란스럽긴 하다(웃음). 처음에는 예수회나 제정구기념사업회도 이 영화를 만들 계획이 없었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나중에 예수회와 일반 후원회원들에게 지원을 받아서 만들었다.

김성욱 감독님의 작품 중 <한사람>(2001)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작품과 <내 친구 정일우>가 연속 선상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사람>에 대해 감독님이 “한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에 대한 작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는 건 감독과 그 사람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 관객들도 영화를 볼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를 만들 때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김동원 <내 친구 정일우>를 만들 때는 <한사람>의 방법론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두 영화 모두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를 다루기 때문에 영화의 형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두 영화를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일우 신부님이 너무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다큐에 담았을 때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신부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취합해서라도 신부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려고 했다.

김성욱 60~70년대의 청계천, 80년대의 상계동, 그 이후 농촌 생활로 이어지는 신부님의 삶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이때 서로 다른 네 사람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각 시대와 관련된 분들이 나레이션을 한 것 같은데, 이 구성은 어떻게 생각한 건가.

김동원 <송환>에서 과도한 나레이션을 쓰긴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나레이션을 어려워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신부님의 모습은 실제 그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신부님의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하고 묘사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 신부님께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예수회 시절에서 한 분, 청계천 시절에서 한 분, 괴산 시절 한 분. 가장 가까웠던 분들에게 편지를 받았고, 화면이랑 대조해 나갔다.



김성욱 영화에서 느껴지는 시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공동체의 붕괴다. 상계동에서 같이 계셨던 분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걸 거부하기도 한다. 점점 공동체가 붕괴되고 작아지는 것에 대해 감독님이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동원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에 대한 나의 확신이 엷어져 가는 것에 대한 성찰. 괴산의 할머니가 옛날에는 대보름 잔치가 신났는데 이제는 잔치 같지도 않다는 말씀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요즘엔 집들이 같은 것도 없어졌다.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가 변한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공동체의 미덕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상계동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김성욱 영화 첫 장면도 인상적이다. 신부님이 무슨 생각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건너오셨을까. 어떤 생각과 믿음으로 이런 일들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누가 신부님에게 고민을 얘기했을 때 어떤 조언을 하기 보다는 그냥 듣고 있었다는 증언들도 인상적이다.

김동원 내가 신부님을 미화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신부님은 눈에 띄지 않게 일을 했다. 상계동에서 철거가 시작되면 계속 녹음기를 가지고 당시의 정황을 녹음했다. 그 기록들을 통해 상계동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일을 많이 하셨다. ‘복음자리’와 ‘목화마을’을 만든 것도 신부님이었다. 그런데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게 신부님의 신념이었다. 훗날 상계동 사람들에게 배반당했을 때, 복음자리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 신부님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픈 경험은 신부님뿐 아니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거기서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이겨내는 사람이 있는데, 신부님은 후자였다. 버티는 게 목회자나 활동가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관객 1 신부님이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영화 제작을 언제 결심했는지 궁금하다. 또 2007년에 상계동 주민들과 술자리를 갖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빈 테이블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김동원 신부님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고는 했었는데 구체적인 준비는 못 한 상태에서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따로 인터뷰도 한 번 못 했기 때문에 후회를 많이 했다.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 때는 투쟁의 주체는 주민들이어야지, 신부님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괴산에도 몇 번 가지 못했다. 병원에 계실 때의 모습은 간병인들이 찍은 거고, 괴산 장면은 거의 평화방송이 찍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다.

사실 20년 전부터 상계동 주민들의 지금 삶에 대한 영화를 기획했다. 그런데 자꾸만 기획 의도가 달라지더라. 주민들의 지금 삶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뚜렷한 관점을 제시하기 어려웠다. 포기의 순간까지 갔었지만 신부님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다시 상계동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관객 2 영화 중간에 세월호 선체를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김동원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사람들이 앞서서 싸우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장 선봉에 서는 모습을 상계동에서도, 세월호 참사 때도 보았다. 그분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난뱅이가 세상을 바꾼다”는 신부님의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그렇게 될까 싶은 회의도 있다.

김성욱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 계획을 듣고 싶다.

김동원 내 나이는 이제 하나씩 정리만 해도 좋을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일단 <송환>의 다음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 작품을 ‘상계동 올림픽 2’라고 우기고도 싶다(웃음). 또 봉천동 이야기도 정리해야 하고, <상계동 올림픽>의 나레이션을 하셨던 손인숙 수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 아직은 모호한 생각만 있다.


일시 6월 21일(수) 오후 7시 30분 <내 친구 정일우> 상영 후

사진 이한슬 자원활동가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배우의 표정에 대한 짧은 생각

-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 배우의 연기를 보고



1.

영화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배우의 얼굴이다. 물론 손의 작은 움직임이나 어깨의 떨림으로도 감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건 결국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은 이마의 주름, 눈썹의 각도, 눈가의 주름, 코의 찡긋거림, 굳게 다문 입술 등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다.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에 적절한 표정을 만들어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은 배우가 만들어낸 이목구비의 기표들을 해석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짐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배우가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양 눈썹을 위로 올리고 입을 크게 벌리면 우리는 그 캐릭터가 화가 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즉 배우의 얼굴은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특권적인 신체 기관이다.

이때 연기는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표준적인’ 방식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고, 기쁨을 연기하는 배우는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독자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실험적인 연기’를 한다고 평가받거나, ‘연기를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맥락에서 연기의 의미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기본적인 합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합의’는 자칫 상투적인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만약 슬픔을 연기하는 백 명의 배우들이 모두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존의 익숙한 방식으로만 슬픔을 연기한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의 감정은 느끼지 못한 채 단지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기표만 보게 될 것이다(요즘 한국영화에서 거의 모든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선보이는 ‘감정 폭발’의 연기를 떠올려보자). 결국 배우는 기본적인 연기 양식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진다.

또 다른 문제는 배우가 캐릭터의 감정을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캐릭터의 감정을 꼼꼼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어떤 인물의 마음 상태는 여러 가지 감정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정확한 구성 요소와 비율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개입과 해석을 통해 그 캐릭터의 심리를 상상해야 한다. 같은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보기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며 영화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백을 거의 남겨두지 않은 채 캐릭터의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관객이 캐릭터의 내면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연기의 대부분이 어떤 모호한 감정의 영역을 끌어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그래서 때로는 얼굴, 또는 표정을 지우는 연기가 상투적으로 친절한 연기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의 배우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동경 이야기>에서 하라 세츠코가 이렇게 운다). 이때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지만 그(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감독은 짙은 그림자로 배우의 얼굴을 덮기도 한다(필름 누아르가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스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은 관객이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밖에도 배우가 카메라를 등진 채 연기하거나 가면이나 붕대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방법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배우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배우의 표정을 가리는 연출이 항상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의 표정과 그 감정의 관계, 나아가 ‘좋은 연기’에 대해 더 다양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3.

최근 이런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든 건 <꿈의 제인> 속 이민지 배우가 보여준 연기였다. 이 영화에서 이민지가 연기한 소현은 매우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다. 현실과 환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이야기하자면 소현은 최소 두 명의 친구를 떠나보냈으며 자신 역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게다가 미래에도 별 희망은 없어 보여 당분간은 계속 괴로운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이처럼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소현은, 또는 이민지는 관객에게 (오열이 아닌) 무표정을 보여준다.

이 무표정은 일단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 정도의 힘도 없는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관객은 무표정을 통해 소현이 극도로 지쳐버린, 일종의 감정의 진공 상태에 처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무표정의 두 번째 효과는 관객의 불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의 표정은 그 캐릭터의 감정을 알려주는 특권적인 지표이다. 하지만 이민지의 무표정은 관객이 소현의 감정을 정확히 짐작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소현이 어떻게, 얼마나 슬퍼하고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즉 소현의 심리 상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이때 우리는 캐릭터의 감정을 쫓아갈 표지를 잃어버리고, 이는 결국 어떤 불안함으로 이어진다. 스크린 속에서 따라가고 있던 캐릭터가 갑자기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백지와 같은 이민지의 얼굴을 보며 단지 이런저런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얼굴의 의미는 마지막까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민지의 무표정의 얼굴이 <꿈의 제인>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순간의 정서가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 역시 구체적으로 답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현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이민지의 무표정을 매개 삼아 그 자체로 굉장히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민지의 연기는 관객에게 불안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고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출구는 도처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 <폭력의 씨앗>(임태규)

 

군대는 더는 비밀의 장소가 아니다. 숨겨진 것을 들추려는 욕망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TV 예능 프로그램은 금지된 공간으로서의 군대를 소재로 삼으며 운신의 폭을 넓혔다. 생활관과 훈련 장면을 공개하면서 군대의 본질을 알려주는 듯 굴었던 TV쇼와는 달리 영화 <폭력의 씨앗>은 단 한 번도 생활관 내부로 침투하지 않는 이상한 군대 영화다. 카메라는 생활관은커녕 부대 정문조차 통과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첫 번째 숏에서 단체 외출 이후 복귀하는 부대원들의 발걸음은 정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정문 주변을 배회하다 끝난다. 다음 숏은 다른 날처럼 보이는데 이들은 여전히 외출 중이다.



롱테이크 숏은 영화에 필연적인 현장감을 부여하는데, 이때 관객은 상황 외부의 관찰자가 아닌 개입자로 초대된다. 4:3 비율의 좁은 화면에서 사건의 조망자를 위한 자리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이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속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굳은 채 있는 이병 필립과 무수한 동선의 창조자인 일병 주용의 얼굴이다. 이들의 얼굴은 카메라가 주로 주용을 따라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시각적 방점을 찍는다. 이미 배역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선임들과는 달리 필립과 주용은 아직 자신의 배역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배역을 마지못해 수행하는 듯 보이는 미숙한 배우다. 두 사람의 불안한 하모니는 상부 복종식 군대 시스템을 연약하게 교란하는 동시에, 관객에게는 다소 불안한 안내자가 된다.

군부대 근처를 배회하던 카메라는 주용이 필립의 치과 치료를 핑계로, 실은 누나를 찾아 철원에서 인천으로 향하면서 부대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그러나 인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다른 국면을 창출하기보다는 기시감을 일으키는 반복에 가깝다. 이는 치과의사인 형부의 고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카키색 반소매 티셔츠 차림에 툭툭 던지는 말투, 은근히 위협하는 형부의 눈빛은 주용의 군대 선임들의 태도와 분리되지 않는다. 주용의 누나를 폭행한 사실을 은폐하려는 형부는 군대 내 폭행을 은폐하려는 선임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주용을 압박한다. “처남도 내 덕 좀 봤잖아”라는 형부의 발언은 그 작동원리가 바뀌었을 뿐 군대 바깥은 또 다른 군대일 뿐임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군대를 둘러싼 상하관계의 변주와 생성, 이것이 양산하는 강자와 약자의 대립은 영화가 말하려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주목할 것은 관계의 속성이 아니라 불안한 감정 그 자체다. 인물들의 불안한 표정은 해석을 중지시키고 오직 감정을 전염시키는 힘을 지닌다. 주용의 누나, 주용, 필립은 공고한 사회구조에서 약자의 역할을 떠안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의 변주 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보듬는 대신 끝내 서로 할퀸다. 그렇다면 영화는 결국 연대 불가능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예정된 절망으로 회귀하기 전에 영화가 보여준 잉여로운 순간 하나를 떠올려보고 싶다. 인천행 고속버스 안에서 주용과 필립은 내내 긴장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모처럼 숨을 돌린다. 이 순간은 이들과 동행해 온 관객을 위한 휴지부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대화 내용은 군대라는 테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으나, 그 속에 이례적으로 나른하고 편안한 공기가 깃들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짧은 숏은 하나의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의 지대로 남아 영화의 절망적 결말을 가까스로 유보시킨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