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베니스 인 서울]


몰락과 유예의 디스토피아에 머문 신데렐라 - <가타 신데렐라>


  ‘고양이 신데렐라’로도 번역할 수 있는 <가타 신데렐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신데렐라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나폴리만에 정박한 유람선 “메가라이드”를 거점으로 도시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신기술을 개발한 과학자 비토리오 바질은 가수 안젤리카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바질의 어린 딸, 미아를 극진히 보살피는 경호원 제미토는 바질의 결혼이 탐탁지 않다. 안젤리카의 정부이자 마약상인 살바도르는 바질의 재산을 가로챌 목적으로 결혼식 당일 그를 저격한다. 일순 고아가 된 미아는 6명의 자녀를 둔 안젤리카의 방치나 다름없는 ‘보호’를 받으며 배 안에서 성장한다. 성년을 며칠 앞둔 미아는 아버지의 기술 덕분에 메가라이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저장된 홀로그램 이미지를 간간이 마주한다.

 <가타 신데렐라>는 살바도르의 마약 거래, 안젤리카의 딸들이 공연하는 카바레 쇼 등 어둠의 세계와 실패한 미래 사회를 뒤섞는다. 도입부에서 비토리오가 개발한 홀로그램은 신비로운 형상으로 눈을 사로잡지만 그의 죽음 이후에는 유령의 이미지로 선박 곳곳에 출몰한다. 홀로그램은 극 중 몰락한 비토리오의 공간을 배회하는 유령이기도 하지만 미아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출처이기도 하다. 한편, 단지 홀로그램의 영향만이 아니라, <가타 신데렐라>는 전반적으로 관객에게 반투명의 이미지가 화면에 부유한다는 느낌을 준다. 물속이 아니지만 물속에 잠긴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 같은 인상 말이다. 비토리오의 죽음을 기점으로 선체 내부와 항구에 산재하기 시작한 잿가루를 비롯해 조명과 햇살에 노출된 먼지, 미아가 목욕을 하면서 생성된 비눗방울이 화면 전체가 물결처럼 움직이는 듯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이는 단지 극 중 배경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효과를 넘어서 홀로그램과 더불어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정조와 결부돼 있다.

  <가타 신데렐라>는 구두의 형태로 고형화했지만 용액에 반응하며 산산이 부서지는 가루의 모습과 상통한다. 비토리오를 제거하며 메가라이드를 장악한 살바도르는 잿가루와 먼지가 쏟아지고 부서지고 흩날리는 세계의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한다. 그는 굳이 대입하자면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요정 대모와 왕자 캐릭터를 흡수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간악하지만 그만큼 목표 지향적이며 뚜렷한 성격을 지닌다. 메가라이드를 넘어 도시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 살바도르의 야망은 유사 가족의 맥락에서 유일하게 메가라이드 바깥에 생활하는 인물이란 특징과 맞물린다. 메가라이드는 비토리오의 죽음과 함께 쇠락한 폐허인 동시에 살바도르를 기다리는 유예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안젤리카에게 ‘살바도르와의 결혼’이란 강력한 동기가 작용하고 있다면 미아의 행동에서는 ‘몰락에 대한 종속’이란 자기 패배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메가라이드에 잠입한 제미토와 함께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미아는 배 안에 남는다. 방치와 학대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미아는 이를 타개하기보다 선체를 돌아다니는 고양이의 삶을 택한다. 말미에 이뤄지는 미아의 탈출 역시 자기 의지가 아닌, 제미토의 손에 이끌려서이다.

  여기서 그녀의 수동적이고 패배적인 태도를 부정적인 성격으로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비토리오는 미래와 발전을 위해 기억을 보존하는 홀로그램을 개발했지만 이 영화에서 홀로그램은 결코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미아는 과거의 이상향인 아버지와의 기억을 홀로그램을 통해 곱씹으며, 그 이미지는 유령처럼 등장했다가 유령처럼 사라진다. 몰락과 오랜 유예에 적응함으로써 살바도르를 기다리거나 말을 잃어버린 인물들은 배 안에서 부유한다. 메가라이드의 폭발을 잇는 다음 장면은 침몰한 선체와 기억의 홀로그램을 유영하는 흐름이다. 비열한 살바도르와 인정이라곤 찾을 수 없는 안젤리카가 부르는 매력적인 노래처럼 이 유폐와 몰락의 지경이 눈길을 끌지 않는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권세미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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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베니스 인 서울]

  

나폴리를 영화 안에서 새롭게 상상하다

 -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마네티 형제의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2017)는 마피아 조직이 벌이는 범죄 행각과 킬러와 여인의 운명적인 로맨스를 동반한 독특한 뮤지컬 코미디이다. 영화는 나폴리의 ‘수산물의 왕’으로 불리는 마피아 보스 빈첸조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첫 번째 뮤지컬 넘버가 연주되면 관객들은 관 속에 누워 있던 빈첸조가 눈을 부릅뜨고 노래를 부르는 광경을 지켜보게 된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빈첸조의 장례식이, 그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나폴리를 떠날 수 있도록 꾸며낸 아내 마리아의 위장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건 얼마 뒤의 일이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빈첸조가 살아 있다는 걸 목격한 간호사 파티마는 킬러들의 표적이 되는데, 그녀를 따라온 킬러이자 과거의 연인인 시로와 재회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코미디 영화다.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면 범죄조직이 도시를 장악한 나폴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코미디라는 것이다. 마네티 형제는 영화의 중심 공간으로 나폴리를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화와 TV에서 볼 수 있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도시가 아니라,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문화적 활력과 공감을 불어넣는” 나폴리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이탈리아 영화가 제시하는 ‘현실적인 나폴리’의 풍경은 가난과 마약 밀매, 악명 높은 범죄와 부패로 얼룩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테오 가로네의 <고모라>(2008)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된다.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 또한 이와 같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나폴리를 찾은 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을 담아낸 영화의 도입부 에피소드에서 카메라는 나폴리 북부 스캄피아의 황량한 도시 전경을 전면에 드러내고, 관광객을 집중적으로 겨냥한 소매치기 행태를 보여준다. 요컨대 도입부에서 묘사되는 나폴리는 한쪽에선 빈첸조의 가짜 장례식이라는 거대조직의 부패가, 다른 한쪽에선 가난한 이들의 일상화된 범죄가 만연하게 벌어지는 공간이다.

다만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는 도시의 냉엄한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대신, 음악과 영화라는 대중적인 장치들로 작품의 분위기를 전환한다. 마리아는 <노팅 힐>(2005)을 비롯한 각종 영화의 DVD를 돌려보며 대사를 따라 하고, <007 두 번 산다>(1967)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빈첸조의 가짜 장례식을 기획한다. 빈첸조와 마리아는 자신들의 지하 아지트를 ‘패닉룸’이라 부르고(조디 포스터가 출연한 미국 영화의 제목이라는 첨언도 잊지 않는다),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치로와 다시 만난 파티마는 <플래시댄스>(1983)의 주제곡(‘What A Feeling’)에 맞춰 춤과 노래를 선보인다. ‘브루스 리’처럼 무술을 배웠다는 치로는 조직원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미션 임파서블>(1996)과 <매트릭스>(1999) 풍의 액션을 패러디한다. 뮤지컬의 양식과 대중문화의 기호들이 뒤섞이며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의 노선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의 무대에는 세 가지 영화적 힘이 공존한다. 하나는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빌린 계획으로 빈첸조의 죽음이라는 가상의 영화를 연출하려는 마리아의 열망이다. 이것이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라는 영화의 서사를 시동케 하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조직을 배신하고 죽음을 감수한 도피를 감행하는 치로와 파티마의 낭만적인 여정이다. 이들의 여정이 진전됨에 따라 영화는 초반부에 주어진 황량한 나폴리의 외관에서 벗어나 전형적인 액션 누아르 영화의 서사와 화면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열망이 있다. 각종 범죄와 부패가 창궐하는 나폴리의 피폐한 무대 위에 뮤지컬과 영화라는 대중문화의 외형을 덧씌우고자 하는 본편의 연출자 마네티 형제의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의 충돌을 수용하는 연출자의 태도가 때로는 눈 뜨고 보기 민망한 장면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탁월한 유머와 예기치 않은 근사한 리듬을 연주해내는 원리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랑과 총알을 그대에게>의 나폴리는 감독 자신의 말처럼 ‘문화적 활력’으로 가득한 가상의 영화 도시로 거듭난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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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마지막 숨결, 장 피에르 멜빌



카메라는 공기를 찍을 수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영화는 공기를 담을 수 없다. 영화는 가장 구체적인 액션들만 찍을 수 있지 추상적인 것을 담을 순 없다. 그러나 어떤 감독은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로 주인공의 거센 기운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감독은 총에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의 마지막 숨결을 생생하게 잡아내는 그런 기적을 이뤄내기도 한다. 장 피에르 멜빌은 주인공이 죽어가는 순간을 냉혹하고, 잔인하게 낱낱이 기록하는 감독이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이다(이 경험은 이후 <그림자 군단>에서 정밀하게 묘사된다). 사내들이 서로 친구가 되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둘 이상의 사내가 모이면 반드시 배신과 배반이 일어나며, 그들이 만약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면 필연적으로 예정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말하는 그런 남자다. 그는 미국의 범죄영화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존 휴스톤과 안소니 만처럼 B무비 감독이 되고 싶어했지만, 프랑스 주류 영화계에서 항상 소외되었고 과소평가받았던 감독이었다. 그는 항상 동시대 ‘침묵의 작가’ 로베르 브레송과 비교되곤 했는데, 브레송이 메이저의 마이너리티라면 멜빌은 마이너의 메이저리티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노스의 소설 <시골 사제의 일기>를 읽고 영화화하려 했지만 동시대의 라이벌 로베르 브레송이 선수를 쳐서 빼앗겼고, <암흑가의 세 사람>은 미국에서 건너 온 줄스 다신이 먼저 <리피피>란 영화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서랍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그는 10년이 지나서야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세심한 죽음

내가 멜빌의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태양은 가득히>와 <암흑가의 두 사람> 때문에 매혹된 알랭 들롱과, <공포의 보수>에서 반했던 이브 몽탕까지 나오는 <대결>이란 제목의 영화였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들이 모두 다 단호하게 코를 땅에 박고 죽는 라스트의 스산한 공기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개봉 당시 “대결”이란 제목으로 상영된 이 영화는 <암흑가의 세 사람>으로 비디오 출시되었다(원제는 “레드 서클(The Red Circle)”이었다). 주인공 알랭 들롱과 장 마리아 블론테, 이브 몽탕, 이 세 사람은 모두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죽는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가면서 남기는 몸짓과 마지막 숨결은 너무나 허무하여, 그때까지 보았던 다른 영화들 속 주인공의 죽음을 모두 가짜로 만들어 버릴 만큼 진짜 같았다. 이 영화에서 죽은 주인공들은 감독의 컷 소리를 들어도 절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가짜의, 위선의 죽음들이 영화에서 판을 치고 있는가?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총에 맞은 주인공들은 검은 외투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고, 그들의 하얀 와이셔츠 소매 깃은 어스름한 저녁 빛과 겨울나무들을 배경으로 허공을 어이없이 크게 휘저은 채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토해내는 마지막 숨결이 저럴 것이라는 설득력을 주는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는, 축축하게 젖은 겨울 풀밭 위에 코를 박고 죽어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것 같은 초저녁 추위 속에서 마지막 입김을 토해내며 들롱이 죽어간 영화 속 공기가, 극장 안의 담배 냄새와 온갖 시시한 냄새를 걷어내 버리고 내 콧속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멜빌은 왜 그렇게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해 저토록 세심하게 그들이 토해내는 마지막 숨결까지 잡아내려고 하는 것일까? 주인공들이 죽는다는 것은 멜빌의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멜빌 영화의 주인공들이 지닌 숙명이다. 그의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어떻게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테면 <형사>는 범죄자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한 명씩 장례식을 치러주는 형사 알랭 들롱의 이야기였다. 가장 의미심장한 죽음은 범죄자들 중 가장 범죄자 같지 않던 은행원 출신 주인공의 자살 장면이었다. 형사 알랭 들롱이 범죄자의 집에 들이닥치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내는 남편이 욕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욕실 문을 연 알랭 들롱은 범죄자가 입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문을 닫고 기다린다. 총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들롱은 쓰러지는 범죄자를 아주, 아주 정중하게 잡아서 바닥에 눕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형사는 자살을 막았어야 한다. 그러나 들롱은 자살을 방조하고, 범죄자가 죽어 넘어지는 순간 그의 영혼을 떠받치듯 소중하게 그의 등을 부축하여 땅에 내려놓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저 이상한 사내들의 이상한 몸짓들. 그건 혹시 어떤 종류의 의식이 아닐까? 혹은, 주인공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그리하여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그토록 세심하게 묘사한 감독이 또 어디 있을까? 뭔가를 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는 사내들의 모습이 멜빌의 영화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장면이다. <형사>의 기차 속 강탈 신에서 주인공이 더러워진 작업복을 벗고 ‘진짜’ 작업복인 나이트가운으로 바꿔 입는 장면은 너무나 세심해서 기가 찰 뿐이다. 이제 다 갈아입었겠지 하면 범죄자는 실내화를 꺼내 갈아 신고, 이제 정말 끝났군 하면 범죄 도구인 말굽 자석을 꺼내들어 주머니에 넣는다.

 

고독한 전문가들

<암흑가의 세 사람>에 등장하는 세 명의 범죄자 들롱, 블론테, 몽탕과 한 명의 형사 브루빌은 모두 자신의 일에서는 전문가이지만, 그 외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상에는 미숙아이다. 브루빌이 연기한 마테오 형사 역시 마찬가지다. 마테오는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서 아이들을 부르는 것처럼 다정하게 세 명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거실의 불을 켜면 집안에는 사람이 없고, 세 마리의 고양이가 소파와 거실 바닥에 앉아 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고, 부엌으로 가서 고양이 먹이를 준다. 집안의 사진들로 추측건대 아내가 일찍 세상을 뜨고 자식들이 없는 쓸쓸한 사람인 것 같다. 들롱의 경우 여자에게 배신당했다. 그녀는 들롱을 배신한 옛날에는 친구였던 자와 같이 살고 있다. 블론테는 체포된 범죄자로 이송 중이었으니, 이미 가족과는 멀리 떨어진 존재이자 외톨이인 것 같다. 이브 몽탕 역시 알콜 중독자로 커다란 방안에 가구라곤 하나도 없고,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된 커다란 트렁크 두 개가 거실 벽에 입을 벌리고 옷장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결혼 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들, 사내들의 사랑은 절대적 평등의 세계이다. 사내들끼리 서로의 평등을 확인한 순간이 그들의 우정을 확인하고 죽으러 가는 순간이다.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내들의 관계에서 우정은 절대로 없다. 그래서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들롱과 블론테가 처음 만난 순간. 그들은 서로 처음 본 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순간,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아무런 소통 없이도 믿고 의지하며,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 동참하여 같이 죽어버린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어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때 조용히 일을 한다. 그들이 도둑질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소리는 전혀 안 들리고,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 전깃불 소리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다. 그들은 범죄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마치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만 신경을 쏟을 뿐 그 나머지 인간관계와 성공을 위한 비즈니스에는 백치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너무나 경건하고, 원칙을 철통같이 지키며, 악마처럼 교활하다. 하지만 범죄에 성공한 그 다음 순간부터 그들은 모든 것에 미숙하여, 또 다른 도플갱어인 형사들(그들 역시 범인을 잡는 일에는 너무나 교활하고 경건한 예술가들이지만, 그 외의 것에는 백치 수준이다)이 파놓은 함정에 너무나 어이없게 걸려들거나 죽음을 맞는다. 말하자면 멜빌 영화의 사내들은 현대인이 아니다. 멜빌의 주인공들은 전근대적인 낭만주의자들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들이다. <암흑가의 세 사람>의 범죄 장면 클라이맥스에서, 이브 몽탕은 트라이포드와 망원경이라는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그동안 쌓아 올린 자신의 스킬과 직감을 믿은 채 단호하게 총을 들어올려 쏘아버리고 성공한다.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인 그들은 필연적으로 배신을 당하기 위한 존재들이고, 배신을 당하는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몰사를 당하고 만다. 그들은 너무나 금욕적이고 윤리적이어서 배신 앞에서는 혼란에 빠지고, 그동안 쌓아 올렸던 전문가적 냉혹함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범죄를 하는 행위 자체가 경건한 예배와도 같은 인간들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범죄를 할 때 너무나 금욕적이고, 원칙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철저한 윤리적인 인간들이다. 범죄를 완성하고, 함정에 걸려들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그들은 너무나 순진한 패배자들이자 날지 못하는 새, 알바트로스들이다. 그래서 어둑한 저녁 무렵,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두어 발의 총에 맞아 축축한 땅에 코를 처박고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죽을 때. 그 마지막 숨결에서 나는 숭고함을 발견하고 몸을 부르르 떤다.

 

죽음을 완성하는 경건한 예배

사실 그런 것 아닌가? 어떤 일에는 너무나 강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어느 순간 틈새를 열어 추락한 알바트로스처럼 비웃음과 조롱을 당할 때, 그에게 매혹당하고 마는 것 아닌가? 멜빌 영화에서 사내들이 행하는 의식은 마지막에는 필연적으로 당하고야 말 배신을 준비하는 경건한 예배와 기도였던 셈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죽으며 내뱉는 마지막 숨결은 그 예배의 완성의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세심하게 기록해야 하겠는가?  



오승욱 영화감독 

*이 글은 『판타스틱』 10호(2008년 2월)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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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빗 린치 특별전]


‘보기’라는 행위의 미스터리 <광란의 사랑>


“나는 현실을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미스터리를 좋아한다.”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중) 이것이야말로 데이빗 린치 영화의 모든 것이다. 그는 비현실 또는 초현실과 미스터리가 불러낸 혼돈을 이성적 사고로 조목조목 따지는 데 관심이 없다. 그가 바라는 건 강렬한 이미지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어떤 인상(impression)이다. 그 인상을 저마다의 영화적 경험으로 감각하면 그뿐이라는 쪽에 가깝다. <광란의 사랑> 역시도 그러하다. “신의 미스터리”라고밖에 달리 말할 길 없는 환영과 히스테릭하고 괴이하며 광적인 이미지들이 멜로드라마와 로드무비, 뮤지컬과 갱스터 장르를 품고 있는 이 영화에 자리한다.

<광란의 사랑>이 빚어내는 인상은 오프닝 타이틀이 뜰 때 이미 전달되기 시작한다. 성냥의 머리에 불이 붙는가 싶더니 불씨는 이내 광폭한 화마로 번져 나간다. 불의 발화와 그 결과로서의 전소(절멸)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전조, 예언처럼 보인다. 이 불길과 함께 “Wild At Heart”(황량한 마음)라는 제목이 스크린에 박히면 그것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황량함 내지는 화마 이후의 황량함일 것만 같다. 불의 전이는 영화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불꽃은 또한 주인공들의 심리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도 맞물린다. 곤경에 빠진 룰라(로라 던)와 세일러(니콜라스 케이지)가 물고 있던 담배 끝의 불꽃과 앞선 불꽃과의 디졸브나 담배를 피우던 주인공들이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회상할 때면 어김없이 이 불꽃이 등장한다. 과거와 현재는 그렇게 불꽃의 이미지로 연결돼 있다. 모든 게 다 타버린 지난 시간은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 안에 어른대며 접붙이기를 시도한다. 주인공의 사랑을 위협하는 결정적인 이유 역시도 이 화마의 순간과 관련돼 있음을 영화가 진행되면 알 수 있다. 심지어 불길의 한쪽에는 악마의 날갯죽지와 같은 무언가가 보인다. 사악한 기운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사악함에 대해서라면, <광란의 사랑>이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데이빗 린치 식의 인용과 해석이라는 점에서 얼마간 이유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신비한 나라인 오즈로 갔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환상의 이야기. <광란의 사랑>은 회오리바람 대신 화마가 세일러와 룰라를 ‘신비한 나라’로 데리고 갔다가 그들만의 ‘집’(사랑)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 ‘세일러’(Sailor)는 살인으로 복역한 후 가석방이 되자마자 연인 룰라와 함께 ‘케이프 피어’에서 “미친 도시” 뉴올리언스를 거쳐 텍사스로 이동한다. 이 여정에서 그들은 과거의 비밀이 현재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과 직면해야 한다. 룰라가 외계인에 대한 망상에 빠져 있던 삼촌에 대해 말하며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면 좋았을 걸”이라 할 때, 세일러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답한다. 그들의 현재가 망상가의 기벽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뉘앙스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은 룰라가 신고 있던 빨간 구두의 양 뒤축을 격하게 맞부딪힐 때면 그건 다분히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외던 주문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룰라의 불안증과 광적인 상태를 강렬한 이미지로 보여준 경우이기도 하다. 여기에 마녀들의 환영과 환청까지 가세한다. 이를테면 모텔에서 룰라가 세일러와 달콤한 시간을 보낸 뒤 듣게 되는 기분 나쁜 여자의 웃음소리를 떠올려 보자. 그 소리가 옆방에서 나는 소리인지, 룰라가 기억 속 누군가의 웃음을 상기한 것인지, 혹은 룰라의 엄마 마리에타(다이안 래드)의 웃음을 암시하듯 들려주는 것인지 모호하다. 웃음의 출처도 방향도 정확하게 분간되지 않는다. 불명확함과 애매함은 두려움과 혼란을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고전 속에서 ‘마녀’ 하면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사실 실체의 불명확성에서 오는 균열과 불안은 그 자체로 데이빗 린치가 즐기는 영화의 화법이기도 하다.

마리에타는 상당히 요상한 인물이다. 그녀가 립스틱으로 얼굴 전체를 시뻘겋게 칠했을 때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피로 범벅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인형처럼 보인다. 얼굴 위에 한 꺼풀이 덧씌워진 듯한 그 모습이 이물처럼 느껴져 더욱 괴기스럽다. 이어서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내려와 코가 뾰족하니 말아 올라져 있는 그녀의 신발을 확인하듯 보여준다. ‘이것이 마녀의 신발이다’라는 투. 그녀는 산토스(룰라를 성폭행한 남자를 처음 마리에타에게 소개한 자이기도 하다.)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룰라의 아버지가 화마에 휩싸여 죽게 된 데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당시 산토스의 운전기사였던 세일러는 룰라의 아버지가 죽던 날 화마의 현장에 있었다. 세일러가 살인의 목격자는 아니라 해도 마리에타에게는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 즉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된다. 세일러는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연루된 것이다. 이처럼 관련 없는 것들이 서로 얽혀들고 그것이 어떻게 뻗어나가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에서 다른 세계와 미스터리를 결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나 연루의 당사자는 이 연루의 순간을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연루됨의 사악함이 있다.

마리에타는 영화가 시작하고 곧바로 진행되는 세일러의 살인의 정황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거기 있긴 했지만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룰라 아버지 살해 현장에 있었던 세일러가 해야 할 말을 그대로 가져와 본인의 것인 양 써버린다. 데이빗 린치 영화에서 ‘본다’는 행위가 갖는 어떤 허점과 한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사태나 상황의 극히 일부분뿐일지도 모른다. 정작 봐야 할 것은 실제로는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광란의 사랑>에 아주 짧게 등장하는 ‘눈먼 자’가 ‘눈이 멀지 않은 자’에 대한 이상한 조롱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보고 있어도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본다'는 것은 한정적이다. 같은 경우로 세일러가 클럽에서,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노래가 모두 립싱크라는 점도 그렇다. 클럽 신에서 세일러의 노래에 맞춰 들려오는 여성들의 환호 역시도 녹음된 것이다. 사랑에의 도취의 순간과 영화적 클라이맥스에 라이브가 아닌 이미 만들어진 노래가 오버랩될 때의 이상한 불일치. 이런 것들이 비현실적인 순간, 웃음이 비죽이 나오는 동화적이자 환상적인 순간으로 만들어진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진짜와 가짜 사이의 경계조차 그렇게 무람 없이 허물어지고야 만다.


정지혜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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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 특별전]


거대하고도 황홀한 영화적 인상화 - <인랜드 엠파이어>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 속 이미지들의 인과관계는 물론 인물들의 정체조차 명확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케팅을 맡은 사람들조차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몰라 대충 ‘곤경에 빠진 여자’라고 태그라인을 붙이고 말아버렸다는 건 농담이 아니다. 물론 억지로 이렇게 추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거물 남편을 둔 한 여배우가 새로 이사 온 이웃의 예언대로 얼마 전 오디션을 본 영화에 캐스팅이 된다. 불륜과 사랑에 관한 낭만과 광기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그 영화는 알고 보니 두 주인공 배우가 살해를 당해 제작이 중단되고 만 어느 폴란드 영화의 리메이크작이다. 제작진은 무성한 소문과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고 촬영을 개시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니키가 실제 현실과 극 중 현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그러면서 영화 또한 그녀가 출연 중인 영화와 폴란드 원작영화 등을 넘나들며 거대한 악몽의 미로 속으로 접어들고 만다.

가능한 줄거리는 거기까지다. 그 다음부터 관객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이 영화 속 영화의 한 장면인지 영화 속 실제 상황인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인물이 실제 주인공인지 주인공이 연기하는 인물인지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거기다 애초부터 해석 불가능한 장면들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토끼 탈을 쓴 배우들이 벌이는 실내극 장면이 대표적인데, 어떤 이들은 이를 린치의 다른 영상 작업들과 연관지어 파악해 보려고도 한 듯하나 별 소득은 없었던 듯하다. 자명한 사실은 누군가가 이 영화의 모든 조각들을 어떻게든 연결시켜 하나의 완벽한 해설을 도출해 본다고 한들 결국 거기에 절대적 근거나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내러티브 중심으로 영화를 보고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를 일찌감치 좌절시키는 영화다. 대신 이 영화는 감상자에게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데이빗 린치가 베니스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직접 말한 것처럼, 이 영화가 퍼즐이라면 그것은 “지적 논리”가 아닌 “인상” 작용을 통해 끼워 맞춰야만 하는 퍼즐이다. 그중 특히 ‘인상’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필름 카메라에 비해 디지털 카메라는 현대 회화의 붓과 같은 것에 훨씬 더 가까운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그의 카메라가 어떠한 대상에 대해 계획적으로 완성된 화면을 구성하기보다 구성 요소들에 의해 일어난 인상들을 말 그대로 그때그때 ‘찍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상자는 어떤 장면의 대사나 공간적 구조나 인물 구도가 마치 자유연상 작용을 일으키듯 이후 다른 장면들을 잉태시키거나 파생시켜 나가는 상황을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사용된 디지털 카메라는 영화 제작의 현실적 조건과 한계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한 경제적 매체로서 선택되었다는 느낌 이상으로 창작자의 내적 필요에 의해 그의 영화적 아이디어들을 자유롭게 찍어내고 연결하고 덧칠하여 그것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배가시키기 위한 회화적 매체로서 선택되기도 했다는 느낌을 준다.

더불어 이 영화는 단지 디지털 카메라를 썼기 때문에 디지털 영화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만 가능한 지극히 실험적인 제작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기억되는 디지털 영화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대감독과 대배우들이 2년 반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HD급도 아니고 소니 DV 카메라 PD-150을 가지고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짬짬이 되는 대로 영화를 찍은 것이다. 처음에는 장편 영화를 찍을 생각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단편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촬영을 했고, 그러니 완성된 시나리오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으며, 때로는 제대로 된 대본조차 없어 린치가 현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설명해 주면 배우들은 그것이 다른 장면들과 어떻게 연결될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주어진 순간에 충실하여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과정상의 특징이 이 디지털 영화의 중요한 감각적 성질로도 그대로 옮겨져 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거대하고도 황홀한 영화적 인상화는 조악하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심도 화면의 포커스는 이따금씩 날아가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때때로 왜곡된 비율로 잡혀 있거나 과도하게 번득이고, 어둠은 종종 뭉뚱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불명료하면서도 강렬한 현재적 인상들과 그 인상들이 안기는 불완전한 감각에 의존해 헤쳐 나가야만 하는 미적 미로에 다름 아니다. 특히 난감한 사실은 앞서 등장한 인물들, 공간들, 상황들에 대한 인상과 감각 또한 갑작스레 변모하기를 거듭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가 로라 던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다루는 방식만 봐도 그녀의 인상이 언제 어떻게 느닷없이 변해버릴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비교적 친절한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 영화의 감상자는 준거점 없는 이야기의 세계, 원본 없는 감각의 세계에서 길을 잃기를 기꺼이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체험이 설렘보다 불편함과 귀찮음으로 다가온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좋은 디지털적 영화 체험의 지옥이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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