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1914-1977)의 탄생 백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올해 랑글루아 백주년 행사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함께 벌일 예정이다. 랑글루아는 책에서 언급된 영화들, 영화의 역사에 그저 이름만 있던 영화들을 살아있게 했다. 시네마테크의 상영 덕분이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의 아버지이자 영화 프로그래머란 직업의 창시자로, 영화의 아이들(cine-fils)이 그러하듯 적어도 이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 의미로든 그의 아이들이다. 그의 특별함은 탁월한 열정뿐만이 아니라(그는 시네마의 종사자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열정passion이라 여겼다), 그것을 어떻게 전시하고 조직하는가에 있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역사에 정통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재능을 요하기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영화와 관련해 손쉬운 합의를 도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의 종사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우정을 보내기도 했지만, 또한 치명적인 증오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 치명적 결과는 알다시피 1968년에 있었던랑글루아 사태로 벌어졌다. <랑글루아의 유령>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클로드 샤브롤이 지적하듯이랑글루아 사태는 그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명성, 그리고 그가 필연적으로 양산한 적들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영화의 역사는 친구만이 아닌 적들과의 전투의 흔적들이다. 우리의 동료이자 친애하는 적들. 자연스럽게 어떤 친구들은 적으로 돌아서고, 또 반대로 그를 시기했던 이들이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가령,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못지않은 아름다운 벨기에 시네마테크의 설립 자인 자크 르도는 그의 적대적 경쟁자였다. 물론 나로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와 친구들과의 돈독한 우정이다. 특별히 랑글루아와 그의아이들중의 한 명인 주앙 베르나르 다 코스타(1935-2009)와의 우정의 관계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베르나르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를 포함해 페드로 코스타 등 포르투갈 감독들이 존경했던 포르투갈 시네마테크의 관장이었다. 베르나르는 젊은 시절에 리스본에서 영화사의 위대한 고전들과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5-60년대 리스본에서는 정치적 검열과 문화적 빈곤, 그리고 고립주의 때문에 과거의 영화와 만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1958, 23살의 나이에 그는 처음으로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를 방문해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의 고백. “극장문을 열고 처음 들어갔을 때의 그 감정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함 포템킨>, <국가의 탄생>, <일출>, 그리고 <잔다르크의 수난>과 같은, 글에서 많이 읽었던, 사진들로만 보았던 영화들을 내 눈앞의 스크린으로 마침내 보게 되었을 때의 그 감정을?” 영화는 늘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가 의미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았던 영화들을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우리가 기대하는 영화들은 언제나 아직 보지 못한, 하지만 존재하게 될 영화들’(고다르)이다. 그 후, 베르나르는 굴벤키안 문화재단의 영화부문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1973년 랑글루아의 도움으로 리스본에서로셀리니 회고전을 개최할 수 있었다. 리스본의 시네필들은 랑글루아가 대동한 로셀리니를 극장에서 만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무방비 도시>가 상영되는 오프닝 행사에서는 상영 후에 기립박수와 함께자유 만세파시즘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난무했다고 한다.

 

이런 훈훈한 우정에 더해 나로서는 그들의 우정을 넘어선 차이 또한 주목한다. 거부하고 싶더라도 우리는 결국 랑글루아의 키드이겠지만 서로 다른 상황과 시간대, 조건에 있기에 친화성 못지 않게 거리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리스본의 베르나르 또한 파리의 랑글루아와는 다른 프로그래밍을 해야만 했다. 마치, 파리의 고다르와 저 남미의 글라우버 로샤가 만났을 때 로샤가 말했던 것처럼. 당신들은 영화를 해체하고 있는데 우리는 해체할 영화가 없으니, 먼저 영화를 구축해야만 합니다! 랑글루아는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 저급한 것과 고급한 것의 문화적 기준을 거부하는 프로그래밍으로 유명했다. 그는 심지어 좋은 영화만 선별한 것이 아니라 아닌 모든 영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작품이 좋은지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영화사는 그 반대의 진실을 언제나 보여주었었다. 반면, 베르나르는 주로 작가들의 회고전에, 그리고 다소 교훈적이고 영화사의 위대한 정전의 작품을 상영하는 데에 치중했다. 이는 1970년대 리스본에서 절실했던 일이다. 무엇보다 먼저 관객을 늘리고 좋은 작품을 접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작들을, 그동안 상영되지 못했던 영화들을 소개하고 보다 근본적인 영화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했다.

 

 

 

파리의 랑글루아는 상상적인 프로그래밍을 꿈꾸었다. 그는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가정한 프로그래밍, 가령 이 가상의 관객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들이 하루 동안 종일 영화를 볼 경우에 서로 이질적인 영화들의 자유로운 배치로 영화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다리를 놓는 비밀스러운 기획을 하기를 원했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영화적 이미지들이 그려내는 비밀스러운 성좌의 구축. 이미 시네마테크를 설립하기도 전에 그는 샹젤리제의 작은 공간을 빌려서시네마 판타스티크Le Cinéma Fantastique’라는 제목의 기획전을 개최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에 랑글루아는 어떤 휴식 시간도 없이 세 편의 장편 영화를 연달아 상영했다. 장 엡스탱의 <어셔 가의 몰락>(1928),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그리고 폴 레니의 <라스트 워닝>(1929). 이 세 편의 정해진 주제와 기획의 의도는 분명치 않다. 그는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리고 다음 영화와의 관계에 영화가 놓여지기를 원했다. 라울 월쉬의 영화 전에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미조구치의 영화 다음에 히치콕의 영화를 상영하는 식으로. 계몽적인 기획의 주제보다는 삼투현상에 의한 영화 교육을 믿었던 것이다. 종종 랑글루아의 영화박물관의 전시는 심지어 연대기도 그 어떤 꼬리표도 달지 않은 전시물들의 배치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전통적인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은 랑글루아의 그런 방식의 배치에 비전문가라는 경멸을 표하기도 했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고물상의 무질서한 배치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라는 비난들. 하지만 상상의 시네마크는 이런 꿈이었다. 어느 날, 루브르 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모든 전시물들의 꼬리표를 제거하고 마음대로 예술품들을 뒤섞어 버린다. 그 다음 날 관객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박물관에 들어와 연대기도, 주제도 무시된 채 무질서하게 배치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게 된다. 그런 날들이 오게 되면 더 비밀스러운 예술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친구들이 어떤 일관된 기준 없이 선택한(친구들 스스로 작품을 선택하는 고유의 일관성과 철학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들이 상영되는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린다. 정말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이 무질서한 영화들의 사이, 우연한 관계와 배치에 더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부탁드린다. 위계와 통제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한계를 두어서는 안 된다. 짐 자무시의 영화가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상기하고 싶다. No Limits, No Control.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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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

 

- 페이 무의 <작은 마을의 봄>의 모순과 충돌

 

 

 

침울함 가득한 작은 마을,

일렁이는 정념을 품고 있는 사람들

死氣沈沈的小城, 春心蕩漾的人們

 

지아장커는 <플랫폼>의 선전 책자에 이 글귀를 써 넣음으로써, 작은 마을 속 무너진 성벽 위에서 어찌할 도리 없는 심경을 토로하던 <작은 마을의 봄 小城之春>(1948)의 위원(玉紋) 30년 뒤 펀양(汾陽)의 젊은이들을 오버랩시킨다. <해상전기> <베니스 70 : 미래 재장전>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작은 마을의 봄>의 성벽을 보여줌으로써, 잊혀진영화를 기념하고자 했다. <해상전기>에서는 상하이의 기억과 함께 페이 무(費穆)를 다시 불러들였고, <베니스 70 : 미래 재장전>에서는 넓은 홀 안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작은 마을의 봄>의 공공연한 상연을 꾀한 것이다.

 

지아장커의 이러한 시도는 중국 대륙에서 <작은 마을의 봄>과 페이 무가 너무나 오랫동안 망각과 부정을 강요당하고 있었음에 대한 한 가지 이의 제기라 할 것이다. 오늘날 페이 무의 <작은 마을의 봄>이 중국 영화사상 최고 걸작으로 상찬받고 있음을 생각할 때, 지아장커의 이러한 시도는 의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작은 마을의 봄>은 중국 영화사상 최초로 카메라의 내적인 주관 시점을 확립한 영화이자, 섬세한 묘사, 다원적인 시공간, 단선적인 서사 진행을 깨뜨린 환형 서사 구조를 이룬 영화로서 미학적 성취와 영화사적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들이 페이 무와 <작은 마을의 봄>을 오랫동안 대륙에서 쫓아낸 이유였으며, 페이 무 자신과 <작은 마을의 봄>이 품고 있는 모순이기도 하다.

 

 

 

1932 <도시의 밤 城市之夜>으로 데뷔한 페이 무는 1951년 홍콩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미완성작을 포함해 스무 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고전 문화에 대한 소양을 익혔고, 자라서는 서구식 신식 교육을 받은 그는 동서 문물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지식인 영화 인사로서 상하이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영화가그림자 연극 影戱으로 불리고 있었고, 서사 면에서는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소설, 극 전통에서 비롯한 전기傳奇 형식이 우세했던 시절, 페이 무는 연극이 문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듯 영화 역시 독립된 예술 형식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는 달리 시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동일한 내용이 어떤 형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무수히 변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감독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으로, 관객을 극 중 인물이 처한 환경에 동화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 영화만의 분위기를 창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카메라 운용, 리듬감, 사운드, 정서를 통해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구체적 방법의 제시로 이어졌다. ‘신영희新影戱라고 명명된 이 주장은 중국의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을 통해 중국 영화를 정의하고자 했던 당시의소설적전통에 대해시詩로써 응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당시 시대적 정황 속에서 거처할 바를 얻을 수 없었다.

 

페이 무가 영화를 만들던 때는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와 겹친다. 국민당과 공산당을 막론하고 영화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선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당시의 중국 영화들에 대해 내용이 형식을 초월해 버리는 경향이 종종 보인다며 우려를 표하던 그 역시 그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도시의 밤>은 빈민과 부르주아의 명확한 대비를 이루었다며 좌익 평론가들에게 상찬을 받았고, <랑산첩혈기 狼山喋血記>(1936)는 시골 촌부가 늑대를 잡는 이야기를 통해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는 항전 선전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고, 돌아온 탕자의 참회와 인류애를 그린 <천륜 天倫>(1935)은 가정 윤리의 회복을 그림으로써 공산당의 계급 투쟁론에 대한 응수로 유교적 전통 윤리관을 강조한 국민당의 신생활운동에 영합하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작 페이 무는 공산당과 국민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이 둘 양쪽으로부터 그의 영화는 종종 오해를 받았고, 비난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어찌 낙담하지 않고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작은 마을의 봄> 직전에 그는 <금수강산 錦繡江山>이란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미완성으로 끝난 이 영화는 항일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며 모두가 하나되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항일 전쟁 승리 후 <금수강산>을 통해 어떤 기대를 표시하고자 했던 시도는 국공내전의 재시작으로 좌절되었고, 아마 이때 그가 맛보았을 피로감이 <작은 마을의 봄> 전반에 깔렸을 터.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하고 나서, 주류로 등극한 좌익적 시선이 모든 분야에 걸친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하면서 페이 무는 철저한 부정을 당하게 된다. 이는 <도시의 밤> 이후 페이 무의 영화들이 형식주의로 향하는 퇴보를 계속했다고 보던 3, 40년대 좌익 평론가들의 시선을 계승한 것이었고, 드물기는 하나영혼의 현실주의라며 그의 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목소리들은 삭제한 것이다. 페이 무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80년대 말이 오기 전까지, 신중국에서 페이무를 언급한 문헌은 단 하나. 1962년에 출판된 청지화程季華의 『중국전영발전사』다. 이 책에서 페이 무는계급 투쟁에 대해 소심하고 불안정한 태도를 보였고, 퇴폐로 기울었다고 서술되었고, <작은 마을의 봄>쁘티 부르주아 계급 예술가로서 페이 무가 지닌 이중성과 허약함을 반영하며, 위대한 (인민) 해방 전쟁 시대에 대한 그의 우울, 모순, 소심함을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책은 비록 청지화의 이름을 달고는 있었으나, 편찬 과정에서 샤옌夏衍을 비롯한 문화부 주요 인사들의 검토와 협의를 일일이 거쳤다고 한다. 중국 영화사의 정본으로 오랫동안 권위를 갖고 있던 이 책은 그러므로 신중국이라는 집단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 되며, <작은 마을의 봄>은 그렇게 70년대 말까지도 대륙에서는 공개적으로 상영될 수가 없었다.

 

그랬던 것이, 80년대 말에 이르러 대륙에서 페이 무와 <작은 마을의 봄>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는 바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1982년에 이탈리아에서 중국 초기 영화 회고전이 열렸고, 홍콩과 타이완 인사들의 평론과 연구 성과가 소개되었다. <작은 마을의 봄>형식주의는 영화 예술 본연의 가능성을 개척한 시도라 재평가되었고, 화면 중의 정지 화면으로 제시되는난초는 동양화와 고전 시가의 사의寫意를 재현한 것이라며 중국의 전통 미학을 영화 속에 구현한 사례로 상찬되었다. 그리고 2006, 페이 무 탄생 백 주년을 기리는 토론회가 열렸다, 잠깐 동안의 홍콩 피난을 거쳐 신중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돌아갔다가 냉대와 모욕을 당하고 쫓겨났던 바로 그 베이징에서.

 

지역성이 강조되고 다원적인 헤게모니가 공존하리라는 전지구화적 세계 전망 아래, <작은 마을의 봄>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일원론적인 영화 중심에 대항할 중국 영화의중국다움의 지표로 재정의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장을 통해 전지구화적 주도권 다툼에 참여하고자 하는 중국 영화의 야심과화어전영 華語電影이 자기정체성을 기대고자 하는 중화 문화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일종의 초조감이 작용한다. 대륙에서 근래 나오고 있는 <작은 마을의 봄>에 대한 연구들이 이 영화가 지닌 중국다움을 강조하며, 오늘날의 중국 영화가 참고해야만 할중국 영화의 원 텍스트로서 의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5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어떤 한 영화를 둘러싼 평가는 이렇게뒤집어졌다’. 이것이 <작은 마을의 봄>이 품고 있는 모순이다.

 

한 가지 더, 글을 마치기 전에 <작은 마을의 봄>의 현대성을 두고 홍콩의 영화 평론가 리주오타오 李焯桃가 제기한 문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작은 마을의 봄> 9일간 다섯 명의 인물들이 닫혀 있는 작은 마을 안에서 겪게 되는 육肉과 영靈, 정情과 이理의 충돌을 그린 영화다. 위원이 전자라면, 그녀의 남편 리옌 禮言은 후자를 대표한다. 영화의 목소리가 관객들로 하여금 위원에 동감하게 했지만, 카메라는 리옌의 눈높이를 취함으로써 리옌을 동정하게 한다. 이렇게 소리와 영상은 충돌을 이루며, 우리를 욕망과 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한다. 동과 서, 공산당과 국민당, 내용과 형식, 계몽과 봉건 사이를 오가는 페이 무의 모순이 거처한 바다.

 

홍지영푸단대 연극영화학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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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숨길 수 없는 낙관성

- 애드리안 라인의 <플래시댄스>

 

 

 

 

 

<플래시댄스>는 “제니퍼 빌즈의, 제니퍼 빌즈에 의한, 제니퍼 빌즈를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릴 만한 새로운 얼굴로 발탁된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되어 이후 배우 경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플래시댄스>를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80년대와 9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돈 심슨과 제리 브룩하이머 콤비의 첫 작품이기도 한 <플래시댄스>는 매우 단순하고 심지어 노골적인 영화다. 영화는 수시로 춤을 추는 제니퍼 빌즈의 육체를 훑으며 그녀의 풍성하고도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클로즈업한다. 제니퍼 빌즈가 맡은 알렉스는 성당 신부에게 “요즘 부쩍 섹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라며 고해를 하는 순진한 아가씨이면서 동시에 식당에서 남자친구인 닉을 육체적으로 유혹하는 대담함을 보이는 캐릭터로 설정된다.

 

제니퍼 빌즈의 매력은 ‘남자들을 위한 노골적인 유혹의 영화’에 반감을 품는 여성관객들마저도 반하게 만들 정도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이후 숱한 영화에서 패러디 및 오마주의 대상이 되었다. 난니 모레티 감독 역시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제니퍼 빌즈에세 찬사를 바치기도 한다. 또한 <풀 몬티>에서 주인공들이 본격적으로 스트립쇼를 연습하기 전 참고삼아 보는 영화 역시 <플래시댄스>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는 존 트라볼타와 <토요일 밤의 열기>로부터 시작된 디스코 열풍을 이어가면서도 한편으로 뉴욕 브룩클린에서 유행하던 브레이크 댄스를 전세계에 전파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알렉스가 친구인 지니와 함께 거리에서 만난 ‘스트리트 댄서’는 브레이크 댄스씬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크레이즈 레그스. 그는 알렉스의 오디션 장면에서 일부 브레이크 댄싱의 대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들어진 지 딱 30년 만에 다시 보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80년대 미국을 지배한 주요 슬로건이었던 ‘낙관성’이다. 꿈과 실력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한 번도 정식 댄스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알렉스는 정식 발레학교로의 진학과 부유한 남자친구와의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성공의 주역이 된다.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고 실격한 지니가 부모에게 “엉덩방아 찧는 것도 잘하더라”라며 위로를 받는 장면이나, 알렉스가 오디션 장에서 실수를 하지만 “다시 해도 될까요?”라며 즉시 재도전을 해 결국 합격통지서를 받아드는 엔딩 장면에서 이러한 낙관성은 극대화된다. 6, 70년대 꽃을 피웠던 로큰롤과 아메리칸 뉴 시네마, 그리고 ‘새로운 헐리우드’의 시대가 종말을 맞았던, 그리고 노조의 파업에 ‘대량해고’로 맞섰던 레이건 재임기의 보수적인 미국을 ‘좋았던 시절’로 느끼게 만드는 장면들인 것이다. 불과 30년의 간극에 이 영화가 더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김숙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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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새로운 시각기계가 야기하는 공포

- 스튜어트 고든의 <지옥인간>

 

 

 

 

메리 셸리가 19세기 초에 『프랑켄슈타인』을 쓴 이후로 SF나 공포 장르에서 과학자들은 종종 인간 이상의 능력을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에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이러한 과학자들은 기술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다가 신의 영역에 도전한 죄로 처벌받는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을 각색한 <지옥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튜어트 고든의 <지옥 인간>은 그의 데뷔작 <좀비오>처럼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 과학자들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좀비오>에서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이었다면 <지옥 인간>에서는 ‘제3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에드워드 프레토리우스 박사는 기계를 통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생물체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의 조수인 크로포드는 기계의 위험성을 눈치 채고 그를 말리지만, 에드워드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에드워드의 죽음 이후 크로포드는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자신이 정상임을 주장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인 캐서린과 함께 에드워드의 사택으로 돌아와 기계를 보여준다. 캐서린은 기계를 작동하고 난 뒤에 이 기계가 가진 알 수 없는 힘에 매혹된다.

 

이 영화에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괴한 생물체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기계가 불러오는 생물체들뿐만 아니라 기계 자체도 등장인물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괴물들을 물리적으로 처단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계의 플러그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 기계는 일종의 시각 기계이다. 이 기계의 플러그를 올리는 것은 감추어진 무언가를 보려는 시도이다. 등장인물들은 종종 기계 자체에 이끌리는 동시에 기계를 혐오한다.

 

이 영화에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을 연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기계가 신체의 변형을 유도하는 시각 기계라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에드워드의 조수인 크로포드의 송과선은 기계로부터 자극되어 머리 밖으로 튀어나와 ‘제3의 눈’이 된다. 이것은 크로포드로 하여금 보는 행위를 새롭게 하는 동시에 크로포드의 정신을 장악한다. 크로포드는 자신의 새로운 시각 때문에 괴물이 된다. 이러한 점이 시각 기계로부터 얻은 ‘새로운 육체(new flesh)’를 이야기하는 <비디오드롬>을 상기시킨다. <지옥 인간>은 <비디오드롬>만큼 비디오 시대의 공포감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새로운 형태의 시각 기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운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흥미로운 공포 영화이다.

 

박민석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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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제계 음악은 그저 좋은 것입니다

- 가수 이자람이 말하는 <페임>

 

올해 ‘친구들 영화제’의 첫 번째 시네토크의 주인공은 판소리꾼이자 뮤지컬 배우, 그리고 가수인 이자람이다. 지난 1월 19일, 시네토크의 첫 문을 연 그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열정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영화를 잘 모른다며 겸손해 했다. 여러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던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올해 ‘친구들 영화제’의 첫 번째 시네토크의 주인공은 판소리꾼이자 뮤지컬 배우, 그리고 가수인 이자람이다. 지난 1월 19일, 시네토크의 첫 문을 연 그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열정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영화를 잘 모른다며 겸손해 했다. 여러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던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이번에 처음 친구들영화제에 참여하신 이자람씨에게 먼저 소감을 여쭈도록 하겠다.

이자람(가수):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영화인’이라는 이름에는 소외감을 느끼는 수준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시네마테크에서 연락을 주셔서 같이 영화를 볼 수 있고, 그 영화를 고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겁 없이 함께 하기로 했다가 조금 후회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어렸을 때 봤던 영화중에 제 가슴을 뜨겁게 했던 영화가 뭐가 있을까 생각했고 <페임>을 골랐다.

 

허남웅: <페임>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처음 <페임>을 보셨고, 그 뜨거운 감정이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이자람: 정말 어렸을 때 <페임>을 봤다. 어머니께서 삽입곡인 아이린 카라의 ‘페임’을 좋아하셔서 비디오로 빌려다 봤다. 대체 언제인지도 모를 어릴 때의 일이다. 젊은 친구들이 재능은 있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는 것 같다. 참 옛날인데도 굉장히 잘 만들었구나하고 다시 느꼈다.

 

허남웅: <페임>은 재능이 과연 나에게 있는 것일까, 또 이 재능을 앞으로 계속해서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고민들과 불안에 대한 영화다.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겪었던 고민이나 갈등이 <페임>을 보면서 새롭게 생각났을 것 같다.

이자람: 물론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에서 울컥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택시를 몰고 오더니, 스피커를 돌려서 음악을 크게 틀고, ‘우리 아들이야!’라고 막 외치는 장면이 그것이다. 자식이 예술이라는 텃밭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는 다들 그런 마음인 것 같다. 어느 부모나 자기 자식이 유명해지기를, 스타가 되기를, 그래서 적어도 먹고 살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즐거운 것은 잠깐이기 때문에 많이들 걱정을 한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하는 말들이 와 닿았다. 어렸을 때는 뻔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러나 지금은 제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페임>속 선생님들이 많이 하더라.

 

허남웅: 그 중에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선생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이자람: 다른 분야의 선생님들이 모두 그 분야의 예술이 가장 어렵다고 할 때 공감했다. 그 어떤 것도 어렵지 않은 것이 없다. 회사에 가는 것,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 판소리를 하는 것, 노래를 하는 것, 배우로서 사는 것, 창작하는 것. 그 중에서 겪어본 것들은 몇 개 없지만 가끔은 배우라는 이름도 듣고, 가끔은 밴더라는 이야기도 듣고, 가끔은 뮤지컬 배우라는 말도 듣곤 하는데 각 단어가 주는 책임감은 정말 무거운 것 같다.

 

 

 

 

 

허남웅: <페임>은 오디션에서부터 1,2,3,4학년의 과정들을 일렬로 보여준다. 이자람씨는 자유로운 영혼이시지만 본인 역시도 제도권의 교육에 들어가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과정이 경험과 흡사한 면이 있을 테고, 차이점이 있을 텐데.

이자람: 그렇다. 일단 예술을 하는 사람이 모인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쳤지만 그런 점심시간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웃음) 그런 것을 의도해서 공연을 만들려고 노력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적은 없다. 실제로 예술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는 모두가 자신의 끼와 재능을 뿜어내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자신보다 더 큰 재능과 끼가 있는 친구를 부러워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이 굉장히 초라하게 느껴진다. 마치 영화 속에서 따로 나가서 밥 먹는 친구들처럼.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끼와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모였다가 이후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인가’, ‘그 끼와 재능을 담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허남웅: 아마 예술에 종사하는 분들은 계속해서 고민의 차원이 있을 거라고 본다. 영화가 보여줬듯이 처음에는 오디션에 합격될 수 있을 것인가, 합격하고 나서는 내 재능이 만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최종적인 고민은 이 제목과 같다고 본다. 이자람씨는 음악을 하면서 그 고민의 차원들이 어떻게 발전을 해왔는지. 특히나 먹고 사는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이자람: 왜냐면 먹고 사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예술과 먹고 사는 것이 별개라고 생각을 했다. 또 그게 멋있어 보였고.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허세이고, 불가능하거나, 망가지거나, 혹은 0.01%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다. 음악이랑 공연예술을 하시는 분들에게 성공의 척도는 인기를 얻는 것이다. 인기를 얻는 것은 얼마나 표가 팔리는가, 얼마나 표가 팔려서 내가 극장이나 해외에 팔려나가는가의 척도다. 요즘은 많은 오디션, 많은 스타 탄생이 나타나고 있다. 순수예술이라고 말해도 좋을 장르에 몸을 담고 있는 나는 아무리 공연이 나고, 매진이 되고, 해외를 가더라도 대중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페임>의 아이들 중에는 할리우드 스타도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판소리의 길을 모색하면 아무리 성공을 해도 그런 삶을 살 수는 없다.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자기가 가고 싶은 정확한 성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언제나 이러한 것들이 숙제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허남웅: 사실 <페임>을 보면서 4학년을 마쳤다고 해도 이 친구들이 모두 성공하리라 낙관하기 힘들다. 다른 질문을 던져주는 결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졸업 후에는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자람씨는 결말을 어떻게 보셨는지.

이자람: ‘이제 쟤들 큰일 났다.’하는 생각을 했다.(웃음)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친구며, 냉담한 관객들 앞에서 자신을 컨트롤할 공력이 부족한 친구며. 그런 것들이 그들을 단단하게 하거나 혹은 갑자기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큰 결말을 만드는 거니까 응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남웅: <페임>을 보면 힘들어하는 학생이 나온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계기는 오직 음악이다. 마지막 장면 역시 음악에 의해 그 모든 갈등들이 풀어진다. 이자람씨에게 음악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자람: 저한테 음악은 그냥 좋은 것입니다.(웃음) 되게 좋은 것 중에 하나다. 이를테면 미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을 보는 걸 좋아한다. 사진은 잘 모르지만 사진을 보는 걸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음악도 좋아하고 소비하는 것 중에 하나다. 때로는 만들 수도 있더라. 때로는 내가 무대 위에서 할 수도 있다. 그만큼 누군가가 또 금방 할 수 있는 것이고, 열심히 하는 누군가의 음악은 대단해서 부럽기도 하고, 무릎을 꿇을 때도 있다. 음악은 나에게 여러 가지 삶의 면 중에 하나다.

 

정리: 배동미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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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