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욕망> 상영 후 유양근 박사와의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10일, 이마무라 쇼헤이의 <끝없는 욕망> 상영이 끝난 후 유양근 박사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스즈키 세이준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번 닛카츠 100주년 특별전 가운데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특별한 자리였다. 50년대 전후 신세대 일본 감독들의 특징과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세계의 디테일을 짚어보던 현장을 전한다.

 

 

유양근(니혼대학 예술학 박사): 이번에 함께 상영한 <인류학 입문>을 보신 분들은 이마무라 쇼헤이가 대략 어떤 유형의 영화를 찍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사실 이마무라는 어느 정도 일관된 작품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보신 <끝없는 욕망> 안에 그런 공통점들이 상당부분 드러나 있다.

 

50년대 중후반은 일본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고, ‘전후는 끝났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쟁의 아픔이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회복되었다는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와 더불어 전장을 경험하지 않은 신세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를 망가뜨린 기성세대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이전에 하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 상태였다. 그 분노에는 이때까지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에 대한 부정과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라가자는 여론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이 시기에 등장한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에서도 나타났다. 닛카츠는 전쟁 전에도 이미 있었지만 전쟁이 활발해지면서 국책으로 다른 회사와 합병되어 없어졌었다. 그런데 50년대 후반에 제작 부분이 회생되어 일종의 신생회사가 되었다. 당시 일본영화는 도제 시스템으로 감독이 되기까지는 조감독 5, 6년, 그 전 견습생을 포함해서 총 15년, 길게는 20년이 걸렸다. 그러나 새로 생긴 닛카츠는 신인 감독들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마무라도 여기에 속한다. 예전의 룰에 따르면 감독이 되기 힘들었던 젊은 세대가 감독이 될 수 있는 세태가 생긴 것이다. 이 세대는 또한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전 세대인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등의 거장들이 가지고 있는 학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세대의 감독들은 영화사에 들어가서 감독이 하는 일들을 보고 그걸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폭이 굉장히 넓은, 대학교육을 받은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다 보니 나타나는 캐릭터들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또한 일본영화에서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템포’도 달라졌다. 커트 수를 떠나서 스토리의 전개 방법이나 캐릭터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템포다. 이전까지는 상당히 느리고 정보를 많이 주는 방식이었다면 이들은 스토리텔링을 빠르게 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런 영화가 결국 젊은 세대에게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끝없는 욕망>은 오프닝부터 굉장히 이색적이다. 이마무라는 평이한 앵글을 써오던 이전세대의 감독들과 달리 특이한 앵글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분할화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에 있는 부분과 아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합성과 세트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그는 지속적으로 부감에 가까운 각도를 사용한다. 사람들 머리 위에서 상황을 한 번에 잡는 앵글이다. <붉은 살의>나 <돼지와 군함>에서도 이런 샷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종의 모험심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간세상 사는 것들이 다 똑같은 것 아니냐’ 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조명 역시 독특하다. <도둑맞은 욕정>이나 <끝없는 욕망>은 사실 일종의 코미디이다. 이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와 함께 많은 작업을 했던 가와시마 유조라는 감독인데, 그 감독의 작품들이 소시민들의 삶을 다룬 가벼운 희극이었다. 거기에 비해 이마무라는 자신의 작품을 ‘중희극’, 무거운 희극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희극임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보일법한 흔들리는 조명들을 쓰고 있다. 이는 장르를 떠나 상황에 맞게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그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캐릭터다. 이전의 영화들은 악역과 선한 역이 분명한 차이를 보였고 끝내는 선이 악을 이기는 이분법적 스토리였다. 그러나 이마무라의 영화에서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악인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그 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마무라는 사람 사는 것은 다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그런 인간을 사랑하며, 그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중심적 모티프 중 또 하나가 ‘구멍 파기’다. <신들의 깊은 욕망>에서는 남근 모양의 바위를 파서 무너뜨리는 형벌을 받는 남자가 나온다. 50년대 중후반에 나온 영화 제목들 중에 욕망이나 욕정이라는 단어로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전까지의 영화의 가치관들이 계속 억압해 왔던 것들이 바로 그 ‘욕’이다. 이마무라는 특히 <돼지와 군함>에서부터 그 억압에 반발하며 성과 욕망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세계』라는 책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특징 6가지를 꼽았는데, 그 중 세 가지가 하층계급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1년 늦게 데뷔한 동시대 감독 오시마 나기사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말에 “그가 사무라이라면 나는 농민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둘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오시마가 사회의 부조리를 정치적으로, 저널적으로 이야기했다면 이마무라는 기표에 나타나는 움직임에 주목하기 보다는 정말 ‘구멍을 파서’ 그 아래를 본 사람이다. 오시마와 이마무라 둘 다 나름의 일관적인 길을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에 오시마가 먼저 눈에 띈 것은 천황이나 전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가지는 선정성, 선명성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밑으로 파고들어간다’는 면에서, 일본 영화를 지속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이마무라와 이치가와 곤에게 주목하고 인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보신 <끝없는 욕망>이라는 작품 전체를, 이 우에노의 작은 마을을 일본이라고 생각해보자는 것이 제 아이디어다. 이것을 일본이라고 상정했을 때, 이마무라는 변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뭘까. 전쟁 전에는 천황에 따르고 군국주의를 숭배하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식 자본주의에 달려드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이마무라가 생각하는 일본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를 생각했을 때 그 답은 인간이다. 욕망을 가진 인간. 즉 욕망이라는 것이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기제임은 분명한데, 욕망의 분출을 억압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그것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했다면 이마무라쇼헤이는 드러내지 않고 하층민의 삶을 통해 이야기 한 것 같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영화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감독이며, 전무후무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이런 지점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와도 통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역시 이런 보편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관객1: 영화를 보면서 김기영의 <하녀>나 봉준호의 <괴물>이 떠올랐는데 특히 괴물은 플롯과 스타일이 거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본 영화를 포함해서, 이 영화들이 하층계급들의 욕망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긍정한다기보다는 약간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층계급을 바라보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어떤 냉소인 것 같기도 하고. 봉준호의 경우 하층계급을 정말 긍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유양근: 김기영의 경우 물론 하층민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당시 주류로 형성되어가고 있었던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파헤치기 위해 하층민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하층민들을 그리려고 했던 것들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봉준호의 경우 <괴물> 속에서 송강호 일가족이 겪고 있는 아픔이나 삶의 대척점에는 정권이 있고, 가진 자들이 있고, 언론이 있다. 일종의 대비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층민들의 아픔을 그렸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반대항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마무라는 하층민들 그 자체를 다룸으로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오시마는 오히려 반대편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한 사람이다. 사실 이마무라는 의사의 아들로 나름대로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반부터 하층민들의 삶을 발굴하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자신의 영화 속에 나오는 어떤 캐릭터든 모두 사랑한다는 점이다.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같다. 언급하신 감독들과는 결론적으로 대척점을 가지고 있느냐, 반대편의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정리: 박예하(관객 에디터) |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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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강좌3] '이후'의 영화의 핵심 영화전사, 오시마를 말한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21일 저녁 <도쿄전쟁전후비화> 상영 후에는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영화평론가이자 부산시네마테크를 맡고 있는 허문영 원장이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적 유언장’이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허문영(부산시네마테크 원장, 영화평론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영상자료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을 하고 있다. 저도 구로사와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봤습니다만 여전히 압도적이다. 이 압도성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내러티브 경제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서사, 대사, 인물, 연기, 사운드, 편집, 그 모든 점에서 최소한의 가장 적절한 수준의 도구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장인적인 면이 구로사와 영화의 힘을 만든다고 본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구로사와의 영화를 자꾸 말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전전 일본영화의 거장과 전후 일본영화 감독 두 사람의 회고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역시 고전기 영화를 충분히 볼 필요가 있고 고전기 영화를 충분히 본 후에야 모던시네마를 더 잘 받아들이고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가지다. 왜냐하면 오시마 나기사 역시 ‘이후’를 그린 ‘이후’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모던시네마의 출발을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으로 잡든 아니면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잡든, 50년대에 시작된 모던시네마는 ‘이후’의 영화다. 무엇의 이후인가를 따져 물으면 고전기의 이후이기도 하고 2차 대전 전후 세계대란의 이후이기도 하고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후’의 영화다. ‘이후’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전의 고전적인 시기, 고전적인 상태, 고전적인 의식에 대한 심취와 매혹을 이해하지 않고 과연 ‘이후’를 제대로 즐기고 감각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기사 나기사는 일본영화사에서 전후의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2차 대전 이후만이 아니라, 영화의 사조와 경향에서 2차 대전 이후 큰 힘을 발휘한 쇼치쿠 누벨바그(일본 뉴웨이브)의 선구자이자 대표자이며 가장 전투적인 영화전사라는 점에서 일본의 ‘이후’의 영화, 단순히 전후의 영화가 아니라 ‘이후’의 영화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후라는 의미에 익숙하실 텐데, 오시마 나기사를 말할 때의 ‘이후’는 두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이후. 포스트, 포스트 고전기, 모던시네마 등 형식으로서의 이후의 측면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 고전기 영화는 내러티브의 경제를 완성한 시대의 영화이다. 모던시네마는 고전기 영화의 내러티브 경제성에 위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서 특히 데드타임을 중심으로 한 잉여들을 통해서 시네마를 다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일본영화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이후 번성한 모던시네마의 일반적인 원칙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물론 오늘 보신 <도쿄전쟁전후비화>에도 엄청나게 많은 데드타임이 등장하는데, 모토키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긴 장면을 포함해서 구지 보여줄 필요가 없는 텅 빈 장면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연결들이 계속 나온다.

그런데 오시마에게는 또 다른 ‘이후’의 측면이 있다. 그것은 영화외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오시마를 일본의 국가주의와 맹렬히 싸운 정치적인 감독으로 이야기한다. 이상한 것은 오시마가 정치적 이슈를 다룰 때 현장 안으로 직접 들어가 주인공을 그 현장 속에서 시작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시마의 영화에서 정치적 이슈는 항상 ‘이후’에서 그려진다. 이를테면 가장 정치적이라고 알려진 1960년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조차 50년대 일본 공산당계 좌파운동과 반공산당계의 학생운동 양진영의 싸움이 끝난 다음 여전히 둘의 싸움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배자는 마지막에 일본의 밤과 안개 안으로 사라져버린다. 여기에는 정치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전망을 찾으려고 애쓰는 전사나 투사의 모습이 없다. 1960년이면 오시마 나기사가 우리 나이로 불과 스물아홉인데, 20대의 나이에 가장 정치적이라고 알려진 세 번째 영화에서조차 오시마의 정치적 회상은 이상하게도 정치투쟁의 한가운데로 가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후’에서 이전을 바라보면서 실패를 응시하는 방식으로 정치영화를 만들었다.

오시마의 영화 중 제가 좋아하는 <백주의 살인마>(1966)는 살인범의 이야기다. 주인공 그룹이 농촌에 가서 공동체를 만들고 실패한 이후에야 살인범이 등장하고, 무엇인가 실패한 이후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실패한 이후에 그 실패를 안에서 복구하려는 그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 이후에 오시마의 주인공들은 자꾸 범죄와 섹스, 강간, 절도에 빠져든다. 오시마의 영화를 정치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고다르의 영화를 정치적이라고 할 때와는 매우 다른 차원의 비관적이고 회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다르와도 비교했지만, 6·8을 스무 살에 맞았던 필립 가렐과 비슷한 시기의 장 으스타슈, 이들은 죽을 때까지 6·8을 잊을 수 없었고 끊임없이 그 쪽으로 돌아가려 했으며 그것이 끝나고 나서 자신들의 인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끝난 이후로 모든 것이 끝났고 살아있는 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굉장히 차갑지만 집요한 노스탤지어의 정서가 있다. 그런데 오시마가 정치적 이슈나 50~60년대 일본사회의 정치투쟁을 다룰 때에 노스탤지어적인 정서가 전혀 없다. 오히려 항상 그것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 실패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속에서 정의된다. 결국 오시마가 담고자 했던 것은 스스로 몸담았던 50년대 좌파운동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목격했던 60년대 좌파운동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진단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실패하게끔 운명 지어진 것처럼 그려지고 있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한다. 이런 점이 오시마를 60년대 세대로 부르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래서 차라리 오시마 나기사적인 어떤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60년대 세대 혹은 쇼치쿠 누벨바그 세대가 아닌 다른 각도로 오시마 나기사를 분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도쿄전쟁전후비화> 여기서 말하는 도쿄전쟁은 영화의 내용상 60년대 학생운동 특히 6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이나 좌파운동 전체를 지칭하는 경향일 것이다. 그리고 전후비화라는 제목에서부터 ‘이후’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시마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는 <신주쿠 도둑일기>와 함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롭고 난해하고 비관습적인 영화이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시마의 다른 영화들이 주지 못한 절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절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소감과 제가 이 영화를 보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이 될 것 같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는 말씀드릴 생각이 별로 없다. 스토리 자체가 말이 안 되게 만들어져 있다. 아방가르드 형식을 취한 영화들이 자기 영화의 독법을 넌지시 일러주듯 이 영화도 나름대로 알려주는 것 같다. 영사기와 전등의 전원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그 부분이다.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유서로 남긴 필름을 누가 찍었는가라는 질문과 그 유서가 무엇을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불균질하게 내뱉는다. 두개의 질문을 하나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일종의 독법을 이 장면이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오시마는 쉽게 단번에 자신의 질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결국 오시마 나기사가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의 질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길 바란다.

첫 장면에서 모토키는 뺏긴 카메라를 찾으러 경찰차를 쫒아간다. 거기에서 오시마의 영화에서는 듣기 힘든 아름다운 선율을 듣게 된다. 이 테마음악은 유언필름이 상영될 때도 흘러나온다. 오시마가 영화에서 이렇게 음악을 정서적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영화가 거칠고 차갑고 형식주의적이기 때문에 이 장면은 지식을 동원해서 영화를 이해해야겠다는 긴장된 자세를 풀어주는 휴식처가 된다. 유언필름의 첫 상영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철길 너머의 작은 가게들, 사람들, 풍경들이 보이자 한 여학생이 무섭다는 말을 한다. 사실 무섭지는 않지만 60년대 세대를 생각하면 그 느낌이 이해된다. 영화에도 나왔다시피 영화를 현실변혁의 정치도구로 사용하고 모든 인간이 자기 부정을 통해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시대에, 유언필름은 모든 사건, 역사를 멈춰 세우고 시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상주의가 포괄하는 역사적 시간이 포섭할 수 없는 절대적 시간, 자연의 시간일 수도 있고 우주의 시간일 수도 있고 아주 일상적인 순환의 시간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다른 시간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이 영화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 상징적인 것은 오시마가 60년대의 마지막, 70년대의 출발선에 서서 자신의 새로운 출발이 과연 이 형식으로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안고 만든 것 같다는 점이다. 모토키가 자신을 던졌듯이 혹은 유언장으로 영화를 만들고 죽었듯이, 자신의 전존재를 건 새로운 도약이고 투쟁이자 오시마 자신의 질문, 다짐, 느낌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였다. 60년대에 정말 미친 사람처럼 거칠고 격렬한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이렇게 뭉클한 느낌을 주는 영화를 만들어서 이것이 오시마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후의 영화들에서는 이 영화의 질문이 발전하지 않기 때문에 오시마의 필모에서 이 영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오시마가 좋아했던 장 마리 스트라우프의 시간에 대한 오시마의 인상이 이 영화에 드러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있는데, 여인의 몸을 스크린으로 삼아 상영하는 장면에 대해서 이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영화가 자기의 전존재를 걸고 새로운 영화적 시간 혹은 새로운 영화적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오시마의 시도라면, 오시마가 이전까지 다뤘던 육체 그러니까 정치에 실패한 이후에 학대의 대상으로서의 육체와는 다른, 진정으로 자신의 몸이 체감하는 새로운 시간을 몸을 스크린 삼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몸과 시네마가 합일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굉장히 위태로운 결단인데 그런 의지, 욕망, 갈망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다시 유언필름을 상영할 때도 역시 그 앞에서 야스코가 옷을 벗는데, 이번에는 야스코의 몸에 영사되는 것이 아니라 뒤의 벽에 영사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장면인데, 고전기 영화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서 자주 썼던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했다. 중요한 것은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몸에 새겨진 영화, 몸에 새겨지고 싶었던 영화, 몸이 스크린 · 시네마가 되고자 했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는 불가능성, 죽음에 가까운 예감과 좌절이 두 번째의 분리된 스크린 프로세스 영사 장면에서 느껴진다. 실제로 그 장면은 서로 나체로 섹스를 하면서 목을 조르는 것으로 끝난다. 다가갈수록 스크린 혹은 시네마의 새로운 시간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그 것을 무릅쓰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긴장이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정리: 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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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강좌2] 오시마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영화적 화두, ‘정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20일 저녁, <일본의 밤과 안개> 상영 후에는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변성찬 영화평론가의 ‘오시마 나기사 정치영화의 원점’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그 현장의 일부를 이곳에 옮겨본다.


변성찬(영화평론가):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를 처음 본 것은 2003년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때였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기사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매우 생경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영화들에서는 관능성을 쉽게 느낄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기 힘들었다. 인물들이 치열하게 사상 투쟁을 하는 것은 알겠지만, 왜 저렇게까지 치열한지도 의문이 들었다. 당사자들만이 가지는 근본적인 위화감이 있었지만, 그런 격렬함이나 이런 활동들에 대한 시대적 배경의 이해가 안 되어 감정이입이 힘들었고, 더욱이 근본적으로 나기사 감독은 수많은 쟁점들이 쏟아지는 것 속에 어디에 위치한 것인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경험이 생각난다.

나기사 감독 개인을 놓고 보면 세대적으로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구세대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초반에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일공이 무장투쟁노선을 취하던 시기이다. 나기사는 노선전환시점에서 졸업해서 쇼치쿠영화사에 들어갔는데, 구세대였고 학생운동을 했지만 정작 <일본의 밤과 안개>의 전체적 관점은 신 좌파학생 쪽에 있다. 사토 다다오라는 평론가는 나기사의 영화에 대해 신좌파입장에서 구좌파를 비판하며 신좌파에 힘을 싣는다는 평가를 했는데, 저는 이런 것이 ‘절반의 진실’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의 밤과 안개>를 본 것은 세 번째지만, 나기사 감독은 수많은 문제제기 입장들 속에서 어디에 자신을 위치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안보투쟁세대에 등장하는 오타라는 인물이 공감이 잘 안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타라는 학생이 주류파라면 비주류파인 다른 학생들이 오타라는 인물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영화를 보다보면 다 옳고 다 맞는 것 같게도 보이고, 좀 혼란스러운 지점들이 몇 군데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영화 마지막 장면, <일본의 밤과 안개>는 나까야마라는 인물의 일장연설로 영화를 끝맺는데, 그 순간 문제제기하던 모든 인물들이 정지된 동작을 하는 것이 핵심이다. 나까야마라는 인물의 사운드가 약해지며 묻혀지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영화에서 나기사가 하고 싶었던 것은 신좌파에 힘을 싣는 것보다 영화 마지막에 보여주는 나까야마같은 인물, 그러니까 공허한 일장연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욕망이 아닐까 생각된다. 욕망의 정치에 관한 이야기랄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나까야마의 주변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욕망의 공허성이다. 나기사는 운동을 했지만 비주체성 또는 공허성, 이런 것들에 거리를 두고 지내었고 결국 이것들을 그려내는 것이 영화에서 나기사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측면에서 60년대 나기사의 다른 영화들, <교사형>, <백주의 살인마>에서 보여주는 욕망과는 상충적이면서도 보안적 관계에 있다 생각한다. <백주의 살인마>에서는 빈농출신 의 병적욕망, <교사형>에서는 일본서는 소수자인 남성주체의 욕망, 둘 다 강간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로 하층계급출신들의 병적욕망을 그린다. <일본의 밤과 안개>는 거리두기와 냉정한 방식으로 인물을 묘사한다면 <백주의 살인마>나 <교사형>은 병적 섹슈얼리티를 굉장히 공감하고 최대한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풀어내려간다. 나기사 감독의 영화를 욕망의 정치학이라 할 때, 그는 영화에서 이것을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이 놓인 위치에 따라, 혹은 개인은 사회나 국가체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건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거다. 이게 오시마 나기사의 전체 영화를 관통하는 영화적 화두라 생각한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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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기념 특별 좌담 - 오시마 커넥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일본영화연구자인 히라사와 고를 초청,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오시마의 세계를 깊이 탐구해 볼 수 있는 특별 강연과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18일 오후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와 동아시아’란 주제로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진행 하에 히라사와 고, 변성찬, 후지이 다케시, 몬마 다카시 4명의 패널이 참석한 가운데 이어진 좌담은 오시마의 현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지금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도 진행되고 있는데 구로사와의 영화에 비하자면 오시마 감독을 이해하는 것에는 난제가 있다. 당대의 현실과 긴밀한 접속을 이뤄낸 작가였기에 지금의 관객들에게 수용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난제가 역설적으로 동시대성, 현재성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히라사와 고는 오시마를 개인-작가보다는 ‘운동체’로 보았는데, 오늘은 그런 접속들, 즉 ‘오시마 커넥션’이라 부를법한 오시마와 동아시아라는 커넥션을 살펴보려 한다.

후지이 다케시(역사학자):
전후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살지만 아무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다. 6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는데,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교사형>의 모델이 된 이진우 사건이다. 1958년 8월에 여고생 실종된다. 전화가 와서 옥상에 가보니 여고생이 있었다. 여고생의 유품인 빗이 장례식에 배달되어 왔다. 이진우라는 재일조선인 소년이 체포당하게 되는데, 추리소설의 애독자일 것이라는 추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애독자였던 소년이었다. 공상했던 것을 실제로 옮긴 것이라고 하면서 사건이 성립되었다. 물증은 없었고 자백만으로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한국에서도 60년 11월부터 있었는데, 4.19혁명 이후라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62년 7월에 다시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해 11월에 사형집행이 있었다. 이진우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 한국에서도 영화화할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산됐다. 아마 유현목 감독의 작품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오에 겐자부로가 이와 관련한 단편소설을 썼었다. 그는 이진우라는 캐릭터에 관심을 보였는데, 일본의 장 주네로 본 것이다. 이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사건을 조명한 게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이라 할 수 있다. 나로서는 <칼리가리박사의 밀실>과 유사한 것을 느꼈다. 교육부장은 칼리가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웃음) 세트장에서 표현주의적 배경으로 연극이 이루어진다. 이진우라는 소년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해해서 다시 구성하는 영화로, 역사학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소재라고 본다.

히라사와 고(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와 동아시아를 생각할 때 <잊혀진 황군>은 필수불가결한 작품이다. 오시마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은 그가 쇼치쿠 영화사를 그만두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그랬지만, 다른 한편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막 등장했기에 표현의 폭이 더 자유로웠다. <잊혀진 황군>은 전후 일본이 부흥하는 가운데에 전쟁책임을 잊고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통력한 비판을 다뤘다. 1965년에는 <청춘의 비>로 한국 고아원을, 한국에서 촬영한 스틸사진으로 <윤복이의 일기>를, 1968년에는 대동아전쟁 당시의 일본, 미국의 뉴스 영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1969년에는 모택동의 생애와 문화대혁명을 만들었다. 오시마는 일본이라는 범위에서 영화나 세계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항상 한국을, 중국을 생각해 대문자의 일본과 민족을 비판해, 동아시아의 영화인, 지식인으로서의 영화를, 세계를 사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몬마 다카시(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를 우회로 해서 일본영화가 한국인을 어떻게 다뤘는지 말씀드리겠다. 오시마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다. 20세기 초의 일본 기록영화에서 먼저 조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을 소개하기 위한 것으로 왕실이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담겼다. 그러다가 조선인도 극영화에 등장하는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상호이해나 융화가 소박한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크게 보면 국책영화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시기엔 비교적 호의적인 관점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두 가지 스테레오 타입이 생겼는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코미디 영화에서 실수하는 익살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 시기에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좋아하는 외국인 1위가 조선인이었다. 일제 침략기의 후반이 되면 황국신민으로 책임을 다하는 게 조선인에게 요구됨에 따라 국책영화에 나오는 조선인은 일본을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인측의 바람이나 환상이었을 것이다. 이때까지 일본영화에서 조선인은 적대시되거나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대상은 아니었다. 패전을 맞이해 그러나 영화계도 변화했다. 전쟁책임과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이 점이 영화에 반영됐다. 이 시기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한국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두 가지 생겼다. 남한이나 북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재일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들자면, 재일 한국인을 올바른 성실한 사람으로 그리는 것과 반사회적인 무법자로 그리는 것이 있다. 어딘가 극단적인 모습이다.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을 그린 것은 아마도 최양일의 <달은 어디에 떠 있나>가 처음일 것이다. 그 전까지 재일조선인은 특수한 존재였다. 오시마는 어땠는가 하면, 이러한 두 가지 입장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국이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매개였다. 조선이라는 것을 매개로 일본을 다시 보려고 했던 것이다. <교사형>을 통해 양쪽에 대한 비판을 봤을 것이다. 조선이나 한국은 60년대 일본인들이 잊고 싶었던 존재들이었다. 오시마는 일부러 제시를 하는 것으로 영하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시마는 뛰어난 선동가였다. 그런 태도는 일관된 것이다. <잊혀진 황군>은 1963년 8월 16일, 즉 패전기념일 바로 다음날에 방영됐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에게 충격을 주기에 딱 좋은날이었다. <윤복이의 일기>가 개봉된 것은 65년 12월로, 그 직전 한일조약이 발효됐다. 이런 점에서 오시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성욱: 1992년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오시마의 발언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그는 ‘일본인 제일의 결함은 우리가 과거에 다른 나라와 어떤 식으로 교류했는가를 완전히 잊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의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교사형>에서 나타나는 재일한국인의 얼굴은 그런 일본인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변성찬(영화평론가):
발표를 들으면서 한국영화에서 표상된 일본인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생각했다. 9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은 착하거나 나쁜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타입 중에 굳이 깡패가 아니어도 일본인이 등장하면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부였다. 우리도 그런 문제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년대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사실은 굉장히 낯설고 어렵다. 감정이입도 안되고 곤혹스러운 경험이 생각난다. <교사형>은 7년 전에 처음 봤는데, 가장 떠오르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중간까지는 대극점에 일본이 있는데, 마지막에 가면 일본이라는 호명이 국가로 바뀌면서 국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주인공 R이 장엄한, 영웅적인 패배를 맞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런 것으로 보였다. 인간의 개인적인 욕망이 범죄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국가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서 처벌하거나 이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전복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에 대한 질문으로 일종의 비약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오시마가 60년대 갖고 있었던 정치성의 강렬함 같은 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후지이 다케시: 저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에 일본이 국가로 바뀌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한국이나 조선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못 벗어난 채로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의 아이로 죽어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양쪽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죽어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김성욱: <교사형>에는 다양한 영화적 표현방식이 눈길을 끈다. R은 일종의 산송장, 미이라에 가깝다. ‘데드 맨 워킹’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스틸사진들이 또한 활용되고 있다. 오시마는 <닌자 무예장>이나 <윤복이의 일기>에서는 완전히 정지된 이미지로 영화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다. 연극적 재현을 스틸사진으로 병치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러한 충돌성의 느낌은 파솔리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연극적 재연인데, 이것의 의도는 전혀 기억을 갖지 못한 R에게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이런 퍼포먼스를 거쳐 일본인 교도관들 모두가 재일 한국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말미에 ‘관객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관객들도 이러한 퍼포먼스에 참여하듯이 유도한다. <돌아온 술주정뱅이>들의 후반부에서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고 물어볼 때, 모든 이들이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이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R이 멈추는 그 지점에서부터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라사와 고: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교사형>의 예고편을 보면, 이 예고편은 아다치 마사오가 촬영했는데(그는 이 영화에서 경비과장으로 출연한다), 교사형 집행을 할 때 오미사 목에 줄을 걸고 연설하는 장면이 있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적으로 무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국가가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예고편에서 던지고 있다. 당시에 영화비평가로 모든 범죄가 혁명적이라는 테제를 제시한 사람도 있다. 이게 옳은지를 떠나서 계속 영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형>의 마지막에서 그가 밖으로 나가봤자 국가가 있는 한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상징적 장면이라 생각한다. <교사형>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년>에서 떠돌이 일가는 계속 경범죄를 저지른다. 어딜가나 일장기가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떠돌이 가족에게는 사실 국가가 상관없다. 그런데도 어딜 가나 국가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것을 더 발전시킨 것이 <도쿄전쟁전후비화>에 나오는 풍경들이다. 국가 권력이라는 것이 경찰이나 국회 같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풍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시마가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평범한 풍경들이다. <교사형>에서 시사했던 국가를 더 발전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교사형>에서 R이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과연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멈추고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김성욱: 오시마 영화의 커넥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1960년대라는 시점에서 보자면 동시대적으로 베트남 전쟁, 중국의 문화혁명, 그리고 한국의 4.19 등의 정치, 사회적 격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제의 문제, 과거 식민지와 관련한 문제, 운동집단의 몰락 등의 다양한 사건들이 오시마 영화에 복잡하고 모순적인 접합을 이뤄내고 있다. 이러한 접속의 방식은 무엇일까? 동시대 유럽의 파스빈더는 과거 나치의 기억과 유대인 표상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 등의 문제를 영화에 담아냈다. 오시마는 이와 유사한 작업을 했지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히라사와 고: ‘접합’이라는 표현처럼, 오시마의 영화는 개인의 작가의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다. 항상 오시마는 작업을 할 때 집단을 형성해서 작업했다. 텔레비전이든 영화든 간에. 집단 속의 다양성이 있다. 다양한 사상들이 응축되어서 작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때그때 일하는 비평가나 각본가의 사상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순적인 접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를 찍은 것은 물론 오시마라는 감독이지만, 거기에는 그 때 당시의 운동 상황, 정치적인 상황이 논의를 통해서 어떤 방향이 생긴다. 그렇기에 충돌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오시마는 충돌을 포함해서 하나의 영화운동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시마 같은 경우는 영화적으로 보자면 쇼치쿠 시기를 작가주의 시기, 이후를 지가 베르토프 집단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몬마 타카시:
오시마가 60년대에 찍은 영화를 논의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 원인은 영화 속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히라사와씨가 지적했듯이 집단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여러 가지 요소로 조립된 작품으로, 깔끔한 논문처럼 정리되기 어렵다. 이 시기에 오시마가 만든 영화는 모순을 안은 채로 그 덩어리를 그대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질문을 던지고 선동하는 측면이 있다. 김성욱씩가 지적한 것처럼 퍼포먼스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돌아온 술주정뱅이>에 나오는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은 보고 있는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이다. <교사형>의 맨 마지막에 ‘관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이미 관객이 영호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교사형>의 논의는 사형제도, 재일조선인 문제 등으로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일본인들이 잊고 지내고, 보기 싫은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그런 점에선 파스빈더와 비슷하다 생각한다.

변성찬: 60년대의 오시마는 영화운동을 한다는 의식이 제작방식이나 영화에서 분명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의식> 이후 <감각의 제국>부터 보면 일정한 변화가 보인다. 히라사와 고씨는 미시정치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는데, 거기서 연속성을 강조하느냐 단절을 강조하느냐 라는 점은 오시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절과 연속성,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히라사와 고 :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다. 물론 68적인 문제의식에서 본다면 <감각의 제국> 이후에 미시정치의 측면에서 오시마가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에도 그런 비판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감각의 제국> 이후에도 일본에서의 대문자 정치에 저항을 하려고 했던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8년 당시에 오시마는 자기 영화에 대해서는 ‘예감의 영화’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정치나 사회가 먼저 있고, 그것을 영화가 표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시마는 자기가 만든 영화는 영화가 먼저 앞서서 정치를 예감한다고 생각했었다. 70년대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전쟁이 끝난 지점에서 이제 영화에 대한 의미를 바꿔가려 한 점이 보인다. <그 여름의 누이>를 마지막으로 동시대를 그리는 것은 그만 두었다. 역사를 거슬러 가고 있다. 예감의 영화라는 입장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다른 각도에서 동아시아를 재검토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68전후 시기의 영화라는 것이 큰 자극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감각의 제국> 등이 역사적인 재해석이라는 관점을 주고, 그런 데서 자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고하토>는 68시기에 찍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영화다. <고하토> 이후라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리: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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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일본영화연구자 히라사와 고 특별 강연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일본영화연구자이자 '오시마 나기사 저작집'의 공동편집자인
히라사와 고를 초청,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특별 강연 및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17일 오후 <신주쿠의 도둑일기> 상영 후에 오시마 나기사라는 운동체 - ATG시대란 제목으로 히라사와 고가 들려준 오시마의 세계에 대한 강연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히라사와 고(일본영화연구자): 현재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감독으로 오시마 나기사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59년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를 한 뒤, 일본 영화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 오시마 나기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68 <교사형>이후에는 해외에서 활약을 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무대에서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만큼 세계적으로 알려졌음에도 작가주의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독도 드물다. 물론 오시마 나기사라는 존재 없이는 어느 영화도 성립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오시마 나기사의 작품들을 보면 특이하고 걸출한 한 작가의 재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오시마 나기사를 하나의 매개체로 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겨난 큰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오시마는 대학 시절에 학생운동을 했었는데, 이것을 이론적, 실존적인 배경으로 하면서 쇼치쿠 시절에 조감독 그룹에서 시나리오집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쇼치쿠에서 독립한 이후에는 어떤 집단에서의 창조성을 그 기반으로 삼아왔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영화라는 것은 집단적인 작업이 필요한 미디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영화도 집단 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시마는 기술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주제, 내용, 사상까지 포함해서 스태프들, 배우들, 또는 친한 비평가들, 문학자, 예술가들과 논의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작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ATG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ATG
에 대해서 먼저 설명드리자면, 1961 11월 상업적으로는 힘들었던 세계 예술영화 실험 영화를 배급하는 아트하우스 조직으로서 결성되었다. 전국에 10군데의 전문 극장을 설립하고 30년 이상에 걸쳐서 수 많은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이런 것이 생긴 것은 그때까지 상업 영화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일본의 영화 산업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시도의 배경에는 영화 산업 전체의 변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58년이 일본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동원된 한 해였다. 하지만 그 뒤로는 TV가 출연해서 관객수도 극장수도 줄어갔다. 그래서 대형 영화사들은 경영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런 과정에서 오시마 나기사는 1959년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를 하게 된다. 요시다 요시게는 <몹쓸 놈>으로 1962년에 데뷔를 한다. 이들은 조감독 시절부터 동인지를 내면서 스스로의 시나리오를 발표하고 전위적인 영화 비평지에 기고하면서 기존의 영화 시스템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발언을 하게 된다. 그런 활동을 가리켜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따와 쇼치쿠 누벨바그라고 부르게 된다. 오시마와 요시다는 스스로 그런 호칭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원래 대형 영화사였던 쇼치쿠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오시마 같은 사람과 독립 영화를 하고 있는 고다르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 식으로 본인들은 호칭을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오시마와 요시다는 압도적이 지지를 얻어내게 된다. 그런 것들 속에서 일본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쇼치쿠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이와 유사한 대형 영화사들도 감독들을 적극적으로 데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 뉴웨이브라는 것은 경영이 힘들어졌던 대형 영화사들에서 영화를 재생시키기 위해서 했던 상업주의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었던 운동이었다. 그런 상업주의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1960년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다큐멘터리나 자주영화, 실험영화와 같은 것들이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1950년대 후반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뉴웨이브는 영화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연극이나 미술, 음악, 문학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일어났던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오시마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 혹은 ATG와 같은 조직이 생겨난 것은 이 때가 전환기였기 때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청춘 잔혹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청춘극이라는 것과 실재성을 강조하는데, 저 같은 경우 여기서 주인공들이 목도하게 된다는 설정으로 한국의 4.19 혁명, 일본의 안보투쟁과 같은 주제들을 대형 영화사의 영화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니면 계속 오시마가 중심적으로 생각했던 것 동아시아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러한 생각의 맹아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일본 학생 운동에서는 4.19혁명을 이끈 한국의 학생들을 따르라는 구호들이 실제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4.19혁명과 안보투쟁을 연결하는 것은 오시마가 특별히 작가주의적인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영화에서 그런 것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는 부분은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시장이었던 가마가사키를 무대로 해서 하층 노동자들의 폭동을 보여주고 있는 <태양의 묘지>같은 작품은 68적인 상황을 예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보여드린 <일본의 밤과 안개>같은 작품은 안보투쟁 패배 이후에 공산당과 신좌파 사이의 대립을 군상극으로 그려낸 것인데, 여기서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면서, 특유의 롱테이크를 사용해 오시마 특유의 영화 세계를 담아낸 작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일본의 밤과 안개는 개봉 직후에 정치적인 탄압에 의해서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오시마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던 동지들이 함께 쇼치쿠를 그만두고 독립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대형영화사들끼리 협정을 맺어 여타 영화사들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것 때문에 자기마음대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영화를 찍는다는 게 영화사에 취직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영화를 못 찍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 TV라는 새로운 매체에 활로를 찾게 된다. 다음에 소개할 몇 개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그런 한편 대형 영화사나 TV에 의지하지 않는 자주 영화 상영 시스템의 확립을 목표로 해서 활동하면서 TV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한국에서 찍어두었던 아이들의 스틸을 통해 단편영화 <윤복이의 일기>를 완성시킨다. ATG의 중심 극장의 지배인이었던 긴시로는 극장 개봉이 필요했던 오시마와의 얘기를 해서 상영이 끝난 뒤, 밤에 극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레드쇼를 기획하게 되었고, 신주쿠 문화 레드쇼에서 오시마의 강연까지 해서 <윤복이의 일기>를 상영했다. 이후 영화를 오래 틀 수만 있다면 레드쇼만 해도 충분히 영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났고,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ATG를 통해서 배급을 한다는 루트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오시마가 다양한 시행착오를 하는 가운데 ATG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 한 편에서 오시마와 쇼치쿠의 관계도 개선되면서 외주라는 형태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들었던 영화들은 당시의 스타들을 배우로 기용함으로써 상업성을 확보하면서 내용에서는 정치적인 특이성이 포함되어 있는 <일본 춘가고> <돌아온 주정뱅이>같은 영화다. 1963년에 <잊혀진 황금>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혀지는 전쟁에서의 일본의 책임, 한반도와 관련한 질문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영화는 쇼치쿠의 아이돌 영화이면서도, 당시에 일본의 기원절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것에 반대를 하고 검은 일장기를 등장시키고, 종군 위안부의 노래를 부르는 재일 조선인의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밀항해온 군인들과 학생들의 영화인 <돌아온 술주정뱅이>를 통해 동아시아, 일본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전을 결합시켜보여 주었고, 이들을 거쳐서 ATG 시절의 절정을 보여주는 <교사형>까지 이르게 된다. 그 영화는 68년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1968년의 상황에서 지지를 받으면서 칸에서도 상영되기로 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상영하면서도 높이 평가 받고 배급도 된다. 당시에 세계적으로 알려졌던 감독들을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러한 액츄얼하고 동시대적인 영화라는 맥락에서 오시마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주목할 것은 세계적으로 오시마가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그의 실험적, 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식민주의의 문제들을 제기하였다는 것, 일본에서 한국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컸던 것 같다.


프랑스의 뉴웨이브가 알제리를 다루었고, 각국의 뉴웨이브가 식민지 문제 혹은 베트남의 문제를 그렸듯이 오시마는 한반도 문제, 그리고 동아시아의 문제를 그려냈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교사형>이후에도 오시마는 이러한 횡단적인 실험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영화가 <신주쿠의 도둑일기>. 이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은 모두 실제의 인물들이었다. 학생 운동, 패션, 문화 등이 뒤섞여서 신주쿠라는 도시의 카오스를 필름을 통해서 표현해냈다. 세계적인 시간을 동시에 보여주면서도, 마지막에 실제 파출소 습격 장면, 이것은 실제 기록영상인데 이런 것을 막을 내리는 이 영화는 그 뒤에 오는 68, 69년의 폭동을 예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시마 스스로는 예감의 영화라는 표현을 했었는데, 이 영화에 앞선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과 더불어 봉기를 예감하고 이로써 봉기를 호소하는 영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는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를 그대로 출연시켰고,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천재로 잘 알려져 있던 하라 마사토를 등용시켜서 포스트 68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풍경을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뒤에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일본의 권력 구조의 부조리를 보여준 <소년>이라는 작품도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족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해 쇼와시대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의식>, 오키나와 반환을 둘러싼 로드무비 <그 여름날의 누이>를 마지막으로 오시마는 창조사를 해산하고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거기서 함께 싸웠던 감독들이 고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오시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68이라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오시마, 창조사라는 것이 변형하게 되면서 그는 <감각의 제국>을 통해서 새로운 영화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오시마 나기사라는 작가, 오시마 영화들은 작가주의, 혹은 영화사라는 관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만나고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역설적으로 운동의 결과를 그려내는 것은 지극히 영화적인 것이고 영화를 통해서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오시마 영화를 통해서 동아시아를, 전후 영화를, 일본을, 세계영화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마를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에도 동시대적이고 자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서 잠재성을 발견하고 이를 확인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리: 우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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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