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


<에덴의 동쪽>(1955)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영화에서도 등장인물인 보안관 샘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카인은 아벨을 죽인 뒤 여호와를 떠나 에덴의 동쪽에 있는 놋으로 갔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막을 통해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이 사리나스와 몬터레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담 트라스크(레이먼드 매시)의 농장은 에덴이고 아담을 떠난 케이트(조 반 플리트)가 바를 운영하면서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몬터레이는 놋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착한 아론(리처드 다바로스)은 아벨, 비뚤어진 칼(제임스 딘)은 카인이라고 봐도 될까? 아마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는 케이트와 아담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좀 더 상세하게 다뤄진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아론과 칼 형제의 성장 이후가 시간적 배경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런 까닭으로 영화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령 케이트의 자신의 손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

영화의 초반을 보면 분위기를 굉장히 잘 잡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케이트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지 의심하는 칼이 그녀를 미행하고 있는데, 칼이 어떤 이유로 그녀를 쫓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은 단순히 칼이 그녀를 쫓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위의 미장센 또한 이에 일조한다. 마치 그녀를 포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의 화려한 초록색 옷차림과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평범한 옷차림 및 색상의 대비,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주위의 시선들. 이 시선들 가운데로 칼이 파고들어온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적대당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타락한 술집여자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남편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인가? 이후 영화는 가족 사이의 애증이 폭발하는 드라마로 전개된다. 영화 초반부의 미행 장면뿐만 아니라 애브라(줄리 해리스)와 어울리지 말라는 아론의 비난을 듣고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에 뒤덮인 칼의 모습, 그로부터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를 대면하게 되는 바 장면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내용, 영화의 톤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에덴의 동쪽>을 이야기할 때 제임스 딘을 빼놓을 수 없는데, 영화 초반에 그는 항상 화면의 주변부에서 주위 사람들 곁을 얼쩡거린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자신은 너무도 어둡고 초라한 데 비해 주위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렇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는 사람들. 관심을 주고 사랑을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 달라고 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과장하거나 내심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엇나가게 된다. 영화 초반부에서 제임스 딘은 그런 인물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특히 기차 위에서 자신의 옷을 구속복 삼아 몸을 옥죄는 그의 연기는 그런 인물의 내면의 고통을 탁월하게 육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성이 아니라 그 느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확실히 그의 연기는 모성을 불러일으키는 면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이유없는 반항>에서도 그랬다고 생각되는데 제임스 딘은 불량하고 반항적인 소년이지만 진심으로 비뚤어진 인물이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오히려 내면에서는 순수하고 선함을 간직하고 있는데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임스 딘이 연기하는 인물이 일관되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입버릇처럼 자신은 불량하고 나쁜 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알고 보면 우등생에다 발명가인 자기 형제보다 더 창의적이고 더 똑똑하며 수완도 있고 배짱도 좋으며 ‘입에 발린 소리에 속지 않을’ 그런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아버지도 언젠가 진정한 자식이 누구인지 알게 될 거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하면 지금까지 보아온 저 인물의 모든 것은 사실은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게 된다. 인내할 줄 알고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현명함과 미숙함에서 나오는 내면적인 고통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은 영화에서 케이트와 아론을 취급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마치 영화로부터 버려진 것처럼 여겨진다. 케이트는 등을 떠밀린 아론이 자신의 몸 위로 넘어질 때 그의 곁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영화에서 퇴장하며 아론은 창문을 머리로 들이받아 깨버리는 극적인 몸짓을 보여주고, 현명하고 잘난 사랑받는 아들에서 우둔하고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인물로 추락한 채 전장으로 떠난다. 영화는 두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그들의 목소리,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는 칼의 행동 하나로 거의 살해당하다시피 한 희생자처럼 그려놓는다. 그런데 그들의 극적인 추락은 칼의 고양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칼이 아버지와 화해하고 숭고해지기 위해서 두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 것 같은 그런 기분까지 든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느껴지는 것은, 과연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갈등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칼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아담도 그러했는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가능한가? 모르겠다. 이 부분만은 앞으로도 질문으로 남을 것 같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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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대하를 삼키는 여인>


엘리아 카잔의 <대하를 삼키는 여인(Wild River)>(1960)은 미국의 이상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광활한 미대륙의 거친 자연을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제어해 나가는 정부(에서 파견된 인물)의 고난이 영화에 역동성을 부여하며, 그런 과정에서 개인들, 집단들 혹은 개인과 집단은 끊임없이 서로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결국 갈등은 해소되어 함께 더 나은 국가를 일구어 나가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물론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고 나가는 주요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관계로 나아간다. 이런 전개에서 영화적인 장치로 본토 대륙과 섬,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고 있는 강이라는 공간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영화의 초반에 노파의 섬은 본토 대륙에 못지않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등장한다. 댐 건설로 인해 강물이 차올라 섬이 잠길 것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파견된 척(몽고메리 클리프트)은 노파와 그의 가족들을 섬에서 나오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곳을 지속적으로 방문한다. 그럴 때마다 영화는 섬의 울밀한 숲과 비옥한 토지를 보여주며, 그곳에서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섬 주민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섬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섬의 일부분인 양 생활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노파가 바로 섬이고 섬이 바로 노파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섬, 즉 영화 속에 기입된 섬의 자연 풍경은 척이 강을 넘을 시에만 보이는데, 이것은 강을 건넘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본토 대륙과 섬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바꿔 말해 섬이 자신의 미시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시점은 척이 대륙에서 뗏목을 타고 강을 가로 질러 섬으로 건너갔을 때다. 그래서 섬의 주민이자 노파의 손녀인 캐롤(리 레믹)이 섬에서 강을 건너 대륙에 정착하려는 생각을 머금게 되면서부터, 또한 노파의 노예들(흑인 노동자들)인 샘과 여러 사람들이 대륙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면서부터 섬은 이전의 모습과 작별하게 된다.

이제 대륙과 섬은 동등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동등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섬은 점점 노파 개인의 고집과 그로인한 소외를 대변하는 듯이 고립되어 가며, 영화는 대륙에서의 척과 캐롤의 애정 관계와 흑인 노동자들의 일자리에 관련된 일들에 더 주목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무대는 도시적 공간이다. 더 이상 강이라는 공간은 대륙과 섬을 이어주던 매개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듯이 보인다. 섬과 강은 노파만큼이나 소외된 존재가 되었다. <대하를 삼키는 여인>의 처음에는 거센 강물이 대륙을 침범하고 뒤덮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등의 수많은 재난을 당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대륙에 사는 인간이 강물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역습을 벌이기 시작하는 것이다(적어도 영화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역습의 와중에 강의 일부인 섬 또한 피해를 입고 만다. 이런 측면에서 섬과 대륙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아니라, 대륙과 강 그리고 강의 중심부에 솟아난 섬이라고 정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정부와 개인의 갈등, 혹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이상과 그것의 실현 과정에서 겪는 개인들의 갈등이 인물들의 측면에서보다 풍경들의 대립적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인물들의 행태가 자연적 풍경을 무대로 한다기보다는 자연적 풍경이 인물들을 활용하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대하를 삼킨 여인>에서 자연적 풍경은 서로 간에 대립적으로 작용하고 있고, 이 자연적 풍경 전체는 인간과 서로 대치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미국 정부의 목표이자 이상은 인간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방대한 에너지원으로서의 자연을 통제하고 제어하고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발전이며, 그것을 위해서 척(과 미국 정부)은 발전을 위한 대상으로 자연에게 접근한다. 바로 이렇게 인간이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으로서의 자연은 서서히 도시의 풍경에 잠식되어가며 점점 척의 발치에 놓이는 듯하다. 가령 대륙의 공간, 그 도시적 풍경을 담은 프레임 속에 지속적으로 내걸리는 성조기나 노파를 이끌어내는 성조기가 걸린 배는 미국의 거대한 이상이 자연을 하나씩 지배해 가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래서인지 성조기가 새겨진 비행기가 대륙과 강, 그리고 댐을 아래에 둔 채 날고 있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척과 캐롤에게는 해피엔딩이기는 하나 섬뜩하게 다가온다.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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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초원의 빛>

터키 이민자 출신으로 자신의 영화작업을 지속시키기 위해 ‘밀고자’라는 낙인이 찍힌 엘리아 카잔은 자신을 옹호한 영화 <워터프론트>(1954) 이후 끊임없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듯하다. 젊은 날의 초상, 청춘은 아름다웠다고 회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워터프론트> 직후인 1955년에 만든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1961년 작 <초원의 빛> 역시 그러하다. 두 영화 모두 당시의 시대가 아닌 1930년대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고, 풋풋한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편에서 제목을 따온 <초원의 빛>은 대공황기 직전인 1928년 미국 캔사스의 작은 마을과 고등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비운의 사랑 이야기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부잣집 도련님인 버드(이 영화로 데뷔한 워렌 비티)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모범적인 디니(나탈리 우드)는 서로 좋아하지만, 주변 시선과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혈기왕성한 버드는 디니의 육체적 관계를 원하지만, 순결교육을 엄하게 받은 디니는 이를 두려워한다.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버드는 다른 여학생과 관계를 갖고, 사랑하는 버드를 뺏길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떠는 디니는 심한 히스테리와 우울증을 앓게 되며, 급기야 자살을 기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짧은 재회를 하지만, 환경은 변해있고 결국 작별을 고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아름다운 청춘 남녀의 사랑이 환경에 의해 변형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 <초원의 빛>은 일종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라 불릴법한 수작이다.

영화는 버드와 디니가 마을 인근 폭포 옆에 세워둔 차 안에서 키스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이 첫 장면은 두 사람이 겪게 될 고민과 갈등적 요소를 압축적이고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의 열정, 호기심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사회적, 도덕적 질서와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젊은이의 초상. 남자는 자신의 이상과는 상관없이 명문대에 들어가 성공에 이르길 강요받고, 여자는 자신의 처녀성을 지켜내지 못하면 창녀로 전락하고 마는 선택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비난 받지 않고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남자답게, 여자답게 살아가려면 이를 지켜야만 한다. 영화는 두 사람 주변 도처에 존재하는 사회적 억압을 드러내며, 두 사람이 감정이 우선되는 사랑조차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경제적인 문제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회에 의해 억압된 열정은 강렬한 색채와 사운드와 몸짓의 형태로 폭발하듯 표현된다. 가령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힐난을 받은 디니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워즈워드의 시를 낭독하다 말고 교실을 뛰쳐나가는 장면이나 새해 기념 파티에서 버드가 술에 취한 그의 누나 지니(바바라 로든)를 찾다 동네 사내들에게 농락당한 지니를 위해 싸우고 울부짖는 장면, 혹은 디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거나, 물에 몸을 던지며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특히 첫 장면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폭포는 이러한 인물들이 처한 곤경과 그들의 열정을 한층 극화시키는 장소로 기능한다. 내러티브는 식상하리만치 전통적인 서사형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인물들의 개성어린 연기와 그들의 몸짓은 생생한 박진감을 가지고 있다. 엘리아 카잔은 탄탄하게 구축된 내러티브 속 인물의 상호 반작용을 통해 성적 억압을 비롯한 계층과 재산, 가족과 학교, 산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사회적 모순을 집중적이고 명료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속에서 인물들은 때론 비뚤어지고 왜곡된 모습을 보인다. 이혼녀라는 상흔을 안고 모든 이에게 무시당하지만 시종일관 비전통적이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니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카잔은 그러한 왜곡된 인간상은 이미 결정되어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더 이상 살아 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지니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을 보면, 사회란 필연적으로 그러한 모순을 담보하고 있고 완벽한 자유를 원한다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라스트 씬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디니가 버드를 찾아가 그의 아내와 그를 닮은 아이를 만나고,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라는 한 마디로 어색한 짧은 재회와 작별을 고하는 그 장면. 버드를 만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직도 버드를 사랑하냐”고 묻는 친구에게 디니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워즈워드의 시를 읊조린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어다.” 이 장면을 반추해서 생각해보면, 영화 <초원의 빛>은 여주인공 디니의 자기 형성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변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랑의 시련을 겪는 여주인공이 어떻게 상처 입고, 견뎌내고, 치유했는지를 그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이는 지금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 우리네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느 사회, 어느 가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겪는 고민이며 현실 그 자체다. 현실을 벗어나지, 떠나지 못할 거라면 살면서 입은 상흔은 성숙한 인생 태도로 받아들이고, 길을 계속 가야만 한다. 아름다운 기억, 추억이란 이름으로 저 편에 묻어둔 채. 마지막 장면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며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는 연유는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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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신사협정>

미국의 한 하원의원의 반유대주의 발언과 그에 동조하는 분위기에 충격을 받은 로라 홉슨(Laura Z. Hobson)은 반유대주의 문제를 다룬 「신사협정」을 썼으며, 제작자인 대릴 자눅(Darryl F. Zanuck)은 당시 미국사회의 민감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섰다. 영화 <신사협정>(1947)의 내러티브는 원작을 기반으로 유기적이고 탄탄하게 진행된다. 대부분의 시퀀스나 장면에서는 특이한 카메라 앵글이나 편집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대사, 그리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빛을 발한다. ‘신사협정’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영화는 ‘격렬하고 광적인’ 반유대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백인기독교우월주의를 지닌 ‘좋은 사람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다. ‘신사협정’은 암묵적으로 반유대주의에 동조하는 것을 말한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터키에서 온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안착하는 일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자신이 ‘미국시민’으로서 ‘자유주의 국가’ 미국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소망을 영화에 반영한다. 이러한 감독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감독은 두 가지를 영화의 중심축에 놓고 있다. 하나는 캘리포니아(서부)에서 상처하고 아들과 어머니와 함께 뉴욕(동부)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주인공 필립 스칼러 그린(그레고리 펙 분, 유대인으로 분한 후 필 그린으로 바뀜)과 이혼 후 새로운 삶을 꿈꿔왔던 케시 레이시(도로시 맥과이어 분, 편집장의 조카)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반유대주의의 문제에 접근함에 있어 유대인을 중심축에 놓는다기보다는 미국 사회의 중요 구성원인 백인 기독교인의 태도 변화를 더 중점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인물 케시 레이시의 ‘백인기독교우월주의’를 점차로 드러내고 그녀를 극적으로 변모시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준다. 영화에서 주인공 필립 스칼러 그린이 완성한 기사를 통해 드러나듯이 반유대주의는 ‘자유주의 국가’ 미국의 썩은 열매와도 같은 것이다. 감독은 이를 해결하는 것이 미국사회의 통합과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는 듯하다.

반유대주의에 관한 기사를 제안한 것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스미스주간지이다. 편집장인 존 미시피는 필에게 반유대주의 모임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가 아닌, 관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적인 방식으로 쓰도록 권고한다. 그는 자신의 잡지사가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가했다는 것을 알고는 종교에 제한 없는 채용공고를 내도록 지시한다. 반유대주의에 관한 기사가 ‘조용한 미국사회를 흔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침묵하는 것이 곧 동조하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인 필, 어머니, 의상 편집장인 앤 데트리, 심지어 유대인 친구인 데이브도 반유대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면 미국사회의 이상을 강조한다. 반유대주의에 관한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그의 아들 톰(의 말과 행동)은 그의 새로운 삶과 올바른 삶을 추동시키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어머니는 그의 험난한 여정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조력자가 되어 준다.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는 필을 대신해 자유주의의 이상이 담긴 기사를 읽어 내려간다. 필과 케시의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에 필이 케시에게 비난하는 점은 그녀가 미국사회의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자신의 아들에게 ‘백인우월주의’를 심어주려 했다는 것이었다. 감독은 지금 부모세대가 나서지 않으면 미국사회의 미래는 암울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듯하다. 어머니가 필의 완성된 기사를 읽고 나서(동시에 필과 케시의 재회를 예감하고) 미국사회의 미래가 기대된다며, 오래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은 미국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내다보는 감독의 바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첫 장면을 주목할 수 있겠다. 카메라는 뉴욕의 거대한 빌딩들을 훑고 지나간 후, 빌딩 사이의 도로를 지나 공원에서 걸어가는 필과 그의 아들을 비춘다. 아들은 순진한 표정으로 이곳에서 계속 살 것인지, 그리고 재혼할 생각이 있는지를 묻는다. 이어 두 사람은 ‘세상을 두 어깨로 짊어지고 가는’ 거대한 아틀라스 동상 앞에서 대화를 나눈 후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캘리포니아(서부)를 떠나 뉴욕(동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필의 과제가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반유대주의에 관한 기사를 제안 받은 필은 편집장의 조카인 케시를 만나고, 그녀가 이 기사를 제안했다는 말을 듣고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다. 이윽고 필은 기사를 쓰기로 결심하고, 영화는 기사의 방향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꽤 길게 보여준다. 이는 감독이 이 과제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필이 기사를 쓰게 된 결정적 동기는 아들 톰으로부터 작동된다. 아들이 순진하게 반유대주의가 무엇인지 또 “유대인이 나쁘냐”고 물었을 때, 필은 대답하기 곤란함을 느끼면서 기사쓰기로 결심하게 된다. 한참동안 기사의 방향을 잡지 못하던 필은 어머니가 아팠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기사를 포기하려 한다. 그는 어머니의 두려움을 직접 느낄 수 없는 자신의 심정을 얘기한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동안 직접 현장에서 당사자가 되어봄으로써 기사를 써왔음을 극적으로 깨닫고 유대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기의 겉모습이 유대인과 다를 바 없다면서 이름만 바꾸면 유대인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필이 유대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감독은 그가 유대인으로서 겪게 되는 편견들을 보여주지만, 케시와의 갈등을 좀 더 부각시켜 보여준다. 갈등은 필이 잠시 동안 유대인으로 산다는 바로 그 이유로 발생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갈등의 핵심은 ‘백인기독교우월주의’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 필은 기사를 위해 잠시나마 백인기독교인의 특권을 포기했고, 실제로 유대인처럼 느끼고 행동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케시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필과의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지 않으냐고 말한다. 갈등이 시작되는 장면은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이 케시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필이 유대인으로 산다고 말한 것 때문에 잠시 다툰 두 사람의 미묘한 사랑의 갈등이 어색한 두 사람의 표정과 제스처들로 보여 지고, 아름다운 뉴욕의 밤과 멋진 두 사람의 옷차림과 결합되면서 특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서둘러 집에 가려던 필은 결국 다시 돌아오고 두 사람은 서로 사과하고 사랑을 확인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불안과 긴장감을 예고한다.

한편 필 만큼이나 케시도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인물이다. 그런 케시의 바람은 유난히 길고 상세한 그녀의 집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여동생 제인에게 필이 유대인임을 알리는 문제로 다툰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하고,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지역(다리안)인 제인의 집에 초대받는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사람들은 초대되지 않은 가운데 파티는 조용하게 치러지고 평범한 농담만이 오간다. 케시는 파티에서 필을 데리고 나와서 자신이 정성들여 꾸민 집을 보여준다. 집으로 가기까지 두 사람은 숲속을 거닐고 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문을 열면 잘 꾸며진 넓게 트인 거실이 화면 가득 보여 진다. 두 사람은 깔끔하게 정돈된 집을 하나하나 둘러본다. 케시는 집에 얽힌 사연을 말하면서 이 집이 단순한 집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희망이 담긴 곳이며, 필과 함께 그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두 사람의 갈등은 폭발한다. 유대인으로 겪는 차별에 당당하게 맞서오던 필은 신혼여행지인 호텔 푸름인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부 당하고 조용히 쫓겨난다. 필은 비로소 유대인에 대한 심각한 편견을 몸소 느끼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필은 데이브가 집을 구하지 못해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게 된 상황에 대해 케시를 나무란다. 케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은 ‘신사협정’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이 가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필은 케시의 백인우월주의를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그 순간, 필의 아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더럽고 냄새나는 유대인 자식”이라고 놀림을 당하고 들어온다. 그녀는 톰을 안아주면서 “네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필은 케시를 뿌리친 후, 침착하게 아들을 달래고, 아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고는 격려하면서 자랑스러워한다. 케시는 필이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로 생각한다면서 그와 헤어지겠다고 말한다. 동시에 자신이 ‘백인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낀다고 인정한다.

필은 3편의 기사를 완성하고, 그의 기사는 특종감이 된다. 그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뉴욕에서의 새로운 삶이 실패할지도 모를 순간에 감독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기 위해 앤과 데이브를 등장시킨다. 그동안 필을 좋아하고 막역한 친구였던 지적이고 당당한 여성 앤 덴트리가 케시의 위선을 폭로하고, 필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곧 이어서 데이브와 만난 케시가 극적으로 ‘개종’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앤은 케시와 헤어진 필을 저녁에 초대하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려 한다. 필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앤은 케시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면서 케시의 위선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앤은 케시가 결코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필의 생각을 지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필에게 청혼한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데이브는 케시를 만나서 차분하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 케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케시는 저녁식사에서 상스러운 농담을 하는 사람에게 화가 났지만 보고만 있었고, 그로 인해 아팠다고 말한다. 데이브는 일상에서의 작은 농담들 뒤에도 푸름인, 다리안, 그리고 톰과 같은 아이들이 있다면서, 이 농담을 묵인하는 것이 곧 반유대주의를 묵인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자신은 항상 이런 상황에 처해 왔고, 그 상황에 맞서 싸워왔다는 것. 또한 용기 있게 맞섰을 때, 아프지 않고 오히려 의기양양해진다고도 말해준다. 눈물을 흘리면서 점점 마음이 움직여가는 케시에게 데이브는 필을 대신해 바람직한 아내의 상을 얘기한다. 거기에는 필과 같은 신념을 가지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케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장면은 그녀가 행동으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결국,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꺼이 포기하고, 필과 함께 살고자 했던 집을 데이브에게 빌려준다. 이 사실을 안 필은 케시를 찾아가 포옹하고 영화는 끝난다.

감독에게 중요했던 것은 좋은 사람들이 신사협정을 스스로 깨는 것이고, 동시에 과거의 삶을 딛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좋은 사람인 케시의 변화를 통해 사랑을 이어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에 앤과 데이브를 등장시켜 케시의 위선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고, 동시에 그 만큼 더 극적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이는 달리 보면 미국사회의 좋은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도 변할 수 있다고, 그것은 곧 미국사회의 이상을 위한 것이라고 설파하고 싶은 감독의 바람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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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워터프론트> 상영 후, ‘배우의 감독, 엘리아 카잔’이란 주제로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카잔과 말론 브랜도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물론, 메소드 연기 스타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의 일부를 옮긴다.


김영진(영화 평론가, 명지대 교수):
엘리아 카잔이란 감독과 배우들에 얽힌 얘기를 드리겠다. <워터프론트>는 1954년에 아카데미에서 거의 상을 휩쓴 영화인데, 반미 위원회에서 엘리아 카잔이 동료들을 밀고한, 당대의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은 영화이다. 권력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운명을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상당히 복잡한 맥락에 있었던 영화이고 카잔의 경력에서는 오점이었던 작품이다. 말론 브랜도는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출현을 꺼려했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매일 오후 4시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카잔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채플린이나 조셉 로지 같은 감독들은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카잔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고, 밀고 안하면 추방이나 망명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건 곧 카잔에겐 자기 경력이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엘리아 카잔은 카메라 밖에서 드라마를 만드는데 굉장히 능했던 감독이다.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배우가 연기하게끔 하는, 카메라 바깥에서 이미 그 사람이 되게끔 하는 연기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서 어떤 사람은 카잔과 일하는 것을 너무 지긋지긋해 했다고 한다. 일례로 <혁명아 사파타>란 영화에 말론 브랜도와 안소니 퀸이 형제 역으로 출현했는데, 처음에 카잔은 둘이 형제같은 감정을 갖게 하려고 숙소, 현장에도 매일 붙어있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이 스타일이 너무 달라 친해지는 게 쉽지 않았는데, 후반부에는 둘 간의 배신의 드라마가 펼쳐지니까 그때부터는 둘을 이간질시켰다고 한다. 그 일은 안소니 퀸과 말론 브랜도는 15년 동안 말을 안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워터프론트>의 테리 말로이를 만들기 위해 말론 브랜도는 실제 복싱을 했고, 매일 에바 마리 세인트와 손을 잡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으며, 심지어 부두 조폭 두목과 점심도 같이 먹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카잔은 요구했던 것이다. 그렇게 브랜도는 몰입해서 테리 말로이가 되어 갔던 거다. 카잔은 작품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즉흥 연기로도 유명하다. <워터프론트>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이디가 장갑 떨어뜨리고 테리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과 형인 찰리와 택시에서 얘기하는 장면을 꼽는데, 그 두 장면 모두 카잔의 용인 하에 즉흥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카잔은 그런 점에서 배우들의 감독이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에서 대가를 치루고 연기를 하고 나면 훌륭한 연기자가 되게끔 만드는 감독이다. 말론 브랜도와의 관계도 그렇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말론 브랜도는 브로드웨이 연극무대로도 섰었는데 처음엔 너무 긴장해 그 폭발이 안나왔는데 카잔의 도움으로 독방에서 소리를 지른 후 무대에서 큰 외침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제임스 딘 같은 배우도 카잔이 발굴한 대표적인 배우 중 하나다. 카잔은 그렇게 카메라 바깥에서 실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유형의 감독이다. 가짜가 아닌 진짜 연기를 끌어내는 것에 카잔처럼 능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사실 말론 브랜도가 연기를 그렇게 잘했지만 연기자란 직업을 혐오하고 고통스러워했다는 것만 봐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말론 브랜도가 후에 아예 섬을 사서 안 나타나고 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몇몇 일화만 봐도 엘리아 카잔이 미국영화사에 끼친 영향이 크다. 특히 배우의 창작에 관한, 즉 연기를 어떻게 끄집어 낼 지의 측면에서 그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

이외에도 특히 40년대 중후반부터 50년대 카잔이 이뤄낸 또 다른 업적은 실제 거리에서 찍었던 스트리트 필름이 많았다는 거다. <거리의 공황>이나 <와일드 리버>, <에덴의 동쪽> 같은 영화의 장소를 보면 ‘저건 로케이션의 승리다’ 그런 느낌이 들 정도다. 결코 스튜디오에서는 나올 수 없는 장면이란 걸 체감하게 한다. 또 카잔은 몹씬도 굉장히 실감나게 찍는다. <워터프론트>의 마지막 부두 노동자들을 찍은 것만 봐도 그런데, 그건 아마도 현장에서 실제 단역배우들을 살게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밀고자라는 뇌상이 커서 카잔은 60년대 <초원의 빛>이란 영화 이후 지속적으로 하강하는 경력을 갖게 된다. 전성기는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까지였고, 정치적 맥락에서 창작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불행한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받았던 사건은 그에게 있어 너무 잔인한 퇴장을 하게 만든 것으로 기억된다. 할리우드가 자신의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 엘리아 카잔에게 뒤 집어 씌웠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었지만, 엘리아 카잔은 ‘나는 조용히 사라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멘트를 남기고 떠나 복합적인 생각을 들게 한다. <워터프론트>는 엘리아 카잔과 버드 슐버그에게 자기변명 같은 영화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떤 보편적인 감동, 추상화 시켜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동 상당히 오래 갈 것 같은 영화이고, 그 무엇보다 배우들의 감독이라는 명성을 가졌던 엘리아 카잔의 연출자적 개성을 가장 잘 증명하는 영화다. (정리: 신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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