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종말의 풍경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작은 그러하다. 껴안은 남녀 위로 흘러내리는 재. 반짝이는 재 아래로 애처로운 남녀의 몸은 이내 말라비틀어진 끝에 훅 불면 사라질 듯하다. 그들의 육체는 죽음을 기억한다. 이미 벌어진 죽음의 기억 위에 그들은 현재를 산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의 도입부도 그러하다. 시스코와 스카이는 서로의 육체를 더듬다 곧 뒤엉킨다. 그들의 육체는 싱싱하다. 여자의 팽팽한 육체에 비해 남자의 그것은 시들었으나, 죽음의 기운이 두 사람의 육체에 스며들기 전이다. 그들에게도 죽음은 예고되어 있다. 4시간 44분 후 세계가 종말을 고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에게 죽음은 기억된 무엇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할 무엇이다. 미래에 기억될 무엇. 그런데 누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한단 말인가.


종말이 벌어진 후에 시스코와 스카이의 육체는 어떻게 될까. <히로시마 내 사랑>의 그들 혹은 우리처럼 부패의 과정을 밟을까. <4:44 지구 최후의 날>이 만들어진 21세기는 디지털의 시대다. 영화는 대략 26개의 클립을 가져와 종말의 날을 기리고, 사람들은 화상 통화를 통해 육체의 접촉 없이 사랑하는 자를 불러내며, 삶의 스승들은 아이패드에 기거하며 지혜의 말씀을 전한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는 폐허도 없고 썩을 육체도 없고 아울러 어떤 기억도 없(을 것이). 시간이 마지막을 고하는 찰나, 세상은 디지털의 개별 조각처럼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가 순백의 화면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건 그래서다. 아무것도 없는 제로의 상태. <4:44 지구 최후의 날>은 종말을 다룬 어떤 SF영화보다 무서운 작품이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은 같은 해 나온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숲에 동떨어져 사는 <멜랑콜리아>의 인물들은 점점 발작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초월의 순간과 대면한다. 마침내 <멜랑콜리아>는 거대한 종말의 이미지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의 인물은 뉴욕의 한 귀퉁이에 사는 보헤미안이다. 섹스하고 그림을 그리고 가족과 통화하는 것이 그들이 하는 행동의 거의 전부다. 거리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바에서 노래하거나 친구들과 놀거나 거리를 거닌다. 어떤 이는 자살을 택하지만, 난데없이 찾아온 종말에 그들은 대개 평소 살던 방식으로 대응한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은 종말이 찾아온 시간조차 문득 다가온 낯설고 기괴한 방문자 정도로 처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9.11의 재현처럼 보인다.


“누가 종말을 초래했는가?”는 “누가 우리의 세상을 파괴했는가?”와 같은 의미로 통한다. ‘포스트 9.11’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가속화했고, 종말을 다룬 대개의 영화는 공격하는 자들과 전쟁을 벌인다. <4:44 지구 최후의 날>은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모든 것을 망쳤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 타자를 공격하고 원망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라고 묻는다. 대신, 보다 원초적인 질문들, 그리고 명상. 종말은 세상이 창조되면서부터 예고되었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걸까. 과연 인간은 존재해 마땅한 선한 존재일까. <4:44 지구 최후의 날>이 구한 진실은, 페라라가 예전 작품에서 추구한 주제와 사뭇 다르다.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졌음에도 <4:44 지구 최후의 날>은 가장 거대한 순간에 가장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펑키하던 페라라의 세계는 바야흐로 소울풀한 지점으로 옮아가는 중이다. 인물에 내재한 악의 종착점에 집착하다 유한한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영역을 확장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페라라를 말할 때 더 이상 마틴 스콜세지를 떠올릴 필요는 없겠다.


글/ 이용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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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좌담

에디터로서의 역할과 관객으로서의 역할


영화제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지난 22일, '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관객 에디터로 참여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마련된 이 자리에서 에디터들은 각자 리뷰를 쓰면서 가졌던 고민들, 녹취를 정리할 때의 어려움들, 관객 에디터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생각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민과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은 종종 교차하여, ‘에디터’가 아닌 ‘관객 에디터’로서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그 자리를 여기에 옮긴다.


 

프리뷰와 리뷰 사이에서

박민석: 에디터 활동을 리뷰부터 시작했으니 리뷰에서부터 얘기를 해보자. 개인적으로는 비평 글에 익숙해져 있어서 프리뷰에 가까운 글을 쓸 때 어려움이 있었다.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을 상대로 설득하는 것이 영화를 본 관객을 상대로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 같다. 다른 분들은 어떤가?

최혁규: 자막 팀에서도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자막 작업을 맡은 영화의 리뷰를 맡았다. 관객의 흥미를 어떻게 이끄느냐는 고민보다는 같은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게 조금 더 곤혹스러웠다. 자막 작업을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사운드만 먼저 들렸는데 그것이 이미지와 합쳐질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송은경: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리뷰를 맡았는데 이 영화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에 놓인 영화인 것 같다. 안 본 사람도 많겠지만 영화를 자주 보는 관객들이라면 상당수가 이 영화를 이전에 접했을 것이다. 그래서 프리뷰와 리뷰 사이에 어디에 중점을 맞추고 써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김경민: 러프하게 말해서 글쓰기가 자기주장이라고 치면 프리뷰는 그것과 정보전달이 함께 가야되는 건데 그것이 좀 어려웠다. 내 글을 읽었던 다른 에디터 분들도 정보전달이 좀 빠져있는걸 지적했고 그런 걸 넣으면 서술형이 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배동미: 리뷰보다는 특집기사를 쓸 때 더 어려움을 겪었다. 댄스영화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페임>과 <플래시댄스>의 특집기사를 맡았다. 영화 상영 전까지 기한도 지켜야 되고 정신 없이 썼는데, 그래서 맘에 들지 않은 부분도 많다. 스스로 만족을 하지 못했던 글이다.

장지혜: <이터널 선샤인>의 리뷰를 맡아서 쓸 때는 고민을 많이 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영화라서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그게 좀 더 어려웠다. 반면에 스콜세지에 대한 특집기사를 쓸 때는 영화의 한 부분에 집중해서 쓰려고 하니까 오히려 글이 더 쓰기 편하더라.


시네토크

박민석: 시네토크를 정리하는 건 경우에 따라 녹취하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정리하는 본인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영화제 시네토크에서 인상 깊었던 점이 있었다면?

장지혜: <남부군>의 시네토크에서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90년대에 나온 영화였는데 당시의 얘기와 지금의 상황이 겹쳐지고 만나는 부분들이 있더라. 그래서 이걸 정리를 하면서 관객들이 별로 없었으니까 녹취 글도 많은 사람이 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경민: 이번에 에디터 업무와 별개로 시네토크 소개영상 편집일도 맡았는데, 그 영상에는 친구들이 왜 이 영화를 골랐는지에 대한 게 꼭 들어가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옛날에 봤던 영화를 스크린으로 보고 싶어서 추천을 했다고 한다. 스크린으로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아직 답은 잘 모르는데, 계속 그에 대해서 생각해봤던 것 같다.

배동미: 김경주 시인의 시네토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들을 때는 굉장히 재미있게 들었는데 정리를 하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시인이라서 그런지 시네토크 중간 중간에 시적인 표현들을 많이 쓰셔서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정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송은경: 저의 경우는 오승욱 감독의 녹취가 그랬다. 정리하기는 제일 힘들었지만 시네토크는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다. 관객석에서 작년과 달리 유쾌하게 집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서 재밌었다.

최혁규: 평론가들의 시네토크의 정리를 맡았다. 팀장님이 다 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제가 좀 욕심을 부렸다. 시네토크를 정리하는 것도 영화 공부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게 달라붙어서 했다. 유운성 평론가와 이용철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재미있었다. 영화비평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가 강하신 분들이라 특히 그랬다.


영화제 돌아보기

박민석: 이번 영화제 상영된 영화들은 어땠는가?

송은경: <황야의 7인>이 인상 깊었다. 친구들 영화제 전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특별전을 하지 않았나. 레오네 영화에 나왔던 배우들이 그대로 나오니까 너무 좋았고 집에 가서 서부극에 대해 찾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리뷰 쓰면서 이미 여러 번 봤지만 다시 확인하려고 <마르케타 라자로바>를 스크린으로 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실패했다.

배동미: 영화보다는 감독들이 더 인상 깊었는데 그들에게서 정 같은 것을 느꼈다. 감독들이 처한 상황이 있지 않나. 김곡 감독 같은 경우는 <자가당착>이 개봉하지 못하고 있고 이명세 감독은 촬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는데, 그런 걸 서로 걱정해주더라. 서로 다른 영화로 만났으면서 또 그 감독의 영화 작업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고. 그런 게 친구들 영화제의 매력 같았다.

김경민: <좋은 친구들>이 제일 인상 깊었는데 볼 때 정말 신나게 봤고 보고 나서도 너무 좋더라. 원래 갱영화나 서부영화에 편견 같은 게 있었다. 너무 마초적일 것 같고 시끄러울 것 같고. 영화를 이어폰으로 보니까 시끄러운 영화는 기피하게 되더라.(웃음) 혼자 볼 때는 우디 앨런이나 로메르 영화 같은 조용한 영화만 봤는데, 이 영화를 계기로 남성성이 가득한 영화들에도 애정이 생긴 것 같다.

장지혜: 상영작들 보면 개별적으로 선택된 작품이지 않나. 공교롭게도 그 안에서 묶이는 게 있더라. <페임>이나 <플래시댄스>. <내일을 위한 길>과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묵배미의 사랑>과 <남부군>. 이런 식으로 상영작들 내에서 제 나름대로 엮일 수 있는 영화들을 찾는 것도 흥미로웠다.


인터뷰

박민석: 영화를 보기 전에 다른 관객들은 여기에 어떻게 왔을지,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궁금할 때가 있는데 이들을 모아줄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관객인터뷰가 이를 약간이나마 해소해줄 수 있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분들은 생각이 어떠한지?

최혁규: 예전에는 에디터가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지금의 구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있어서 안으로 뭉치면서 밖으로 퍼질 수 있는 게 있었다. 앞으로는 그런 구심점 같은 걸 에디터가 많이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가 트위터를 활용하는 것이었는데 실현되지는 않았다. 서로 수동적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할 것 같다.

박민석: 관객 인터뷰 외에 아트시네마의 직원 분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배동미: 직원 인터뷰는 두 분 했는데 두 분 다 영화를 많이 좋아하시고 극장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고자 하는 모습이 보였고 극장을 누구보다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관객 에디터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극장에 오랫동안 머물고 계신 분들의 말씀이 굉장히 감동적이다. 극장에 대한 사랑이나 영화에 대한 사랑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송은경: 인터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은 몰랐다. 김보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랑 인터뷰를 했는데 굉장히 대화가 안 이어져서 민망한 상황이 많았다.(웃음) 관객 인터뷰를 하나 실패하기도 해서 인터뷰를 어떻게 하는게 좋은 건지 방법론에 대한 고민들이 생겼다. 그리고 직원 인터뷰를 계획했던 것만큼 못했는데 영사팀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서 아쉽다. 필름으로 상영하는 곳은 이제 시네마테크밖에 없으니까.


관객/에디터

박민석: 이번에 관객 에디터로 참여하면서 하고 싶었지만 못한 일도 있을 테고 아쉬웠던 점도 있을 것이다.

최혁규: 기본적으로 참여를 제대로 못해서 죄송하다. 이런 작업이 지속적으로 많아졌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이 의무감을 가지고 할 필요는 없지만 무언가 하고 싶다고 느꼈을 때는 이런 활동이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바라는 점은 친구들 영화제가 끝나더라도 관객 에디터라는 형식을 끝까지 갖고 갔으면 하는 것이다.

박민석: 우리가 그냥 에디터가 아닌 ‘관객’ 에디터로 참여하는 만큼 관객 문화에 무언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다가갈 수 있는 몇몇 기획들이 회의에서만 이야기하고 실행되지 못했는데 나 스스로 조금만 더 열심히 참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배동미: 관객 에디터로 참여하는 게 굉장히 좋은 기회인데 자꾸 까먹고 게을리한 부분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극장 측에서는 많은 기회를 준건데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김경민: 관객 에디터로서라기보다 관객으로서의 바람이 있다. 얼마 전에 상영 몇 분 전에 정전이 났던 적이 있다. 이게 만약에 상영 중이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점이 극장을 자주 가다보니까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하루빨리 안정적인 환경의 극장에서 좋은 사람들과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참석 에디터: 김경민, 박민석, 배동미, 송은경, 장지혜, 최혁규

진행/정리: 박민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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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치밀한 기록이 더 큰 생명력을 가진다

- 김동원 감독이 말하는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 전투 3부작'


올해로 8회째인 '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마지막 주인공은 김동원 감독이다. 영화제 마지막날이었던 24일은 그가 선택한 <칠레 전투> 3부작이, 약 4시간 반 동안 상영되었다. 마지막 3부 상영 후 이 작품을 선택한 김동원 감독과의 시네토크에서는 비껴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민들과 다큐멘터리가 가진 기록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김동원 감독은 영화 속에 나왔던 빅토르 하라의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를 찾아 관객들과 함께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영화제 대미를 장식한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공교롭게도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는 첫 날의 하루 전에 의도치 않게 이 영화를 틀게 되었다. 우연처럼 상영하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 이 영화를 추천하셨고, 어떻게 이 영화를 어떻게 접하게 되셨고, 다시 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셨는지.

김동원(영화감독):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처음 들은 건 86, 7년 쯤인 것 같다. 장선우 감독이 쓴 책에 남미의 영화들이 소개되었는데, 그 때는 볼 방법이 없었고, 90년대 지나서 책에 있던 영화들을 구해볼 수 있었다. 그 때 시네마 누보 운동과 맞물려 쓰이는 용어인 ‘제 3영화’들이 현실과 치열하게 맞닿아 있는 영화라고 소개 되었는데, 사실 조악한 비디오 화질이라 그런지 (영화에 대해) 실망한 경우가 많았다. 98년도에 인권영화제를 통해 <칠레 전투>를 보았는데, 4시간 반이라는 것을 알고 겁을 먹었으나 한 번 보기 시작하니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보게 되었다. 그 다음에도 몇 번씩 보면서 새로운 디테일들이 새록새록 다가오면서 매번 나에게 큰 영화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있었던 현장들, 상계동부터 최근에 용산이나 강정 같은 곳의 주민들 얼굴이 떠올랐고 투쟁 과정들이 영화와 오버랩 되는 걸 많이 느꼈다. 오늘도 영화를 보면서 구즈만 감독이 끝까지 가졌던 희망의 크기가 지금 나에게 어느 정도의 크기로 남아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성욱: 새롭게 다가오는 디테일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하다. 이 다큐멘터리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이 다큐를 어떤 시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면.

김동원: 이 영화를 보고 영화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 얼만큼 의의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는 72년부터 73년까지 1년여 동안 촬영을 하고, 편집까지 포함해 제 3부작이 완성되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고 한다. 감독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1부, 2부는 주로 부르주아들의 반혁명, 즉 그들이 어떤 논리로 아이옌데를 공격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가에 대한 논리와 과정들이 촘촘하게 들어가 있다. 반면, 노동자들과 민중의 시각에서 아이옌데 집권 하에 있었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실험들과 민중이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노동자들과 민중의 역량을 따로 모아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1부, 2부에서는 아무런 음악이 깔리지 않는다. 구즈만 감독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건조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1, 2부를 묘사하고 있다면 3부에서는 애잔하게 편곡된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빅토르 하라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반복해서 들려준다. 이는 구즈만 감독의 주관적인 정서일 수 있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1부, 2부에서는 감독이 중립적이지는 않되 최대한 객관적이려 하는 태도였다고 한다면, 3부에서는 자기 속내를 마음껏 내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구즈만 감독이 자기 자신을 억누르면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맨 마지막에 자기의 표현을 하긴 했지만, 그 표현마저 절제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구즈만 감독이 이 영화를 끝내고 당연히 망명을 해야만 했다. 쿠바에서 편집을 하고 세계 곳곳을 유랑하다가 95년 즈음 20년 만에 (칠레에) 돌아왔다고 한다. <칠레 전투>를 90년 초 무렵 젊은이들에게 보여주는 장면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 나오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학살했던 국립 경기장 같은 장소들, 영화를 찍다 죽은 카메라맨인 호로세 뮬러의 가족들도 만나는 것을 엮어서 <칠레, 끈질긴 기억>을 만들었다. 그 영화도 인권 영화제에서 봤는데, 구즈만 감독은 첫 영화인 이 영화에서부터 최근의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까지도 아이옌데 시절과 혁명기의 칠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가들은 한 가지 주제에 평생을 매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구즈만 감독도 다른 주제의 영화들은 없는 것 같다. <칠레, 끈질긴 기억>에서 보면 젊은이들이 20년 전에 조국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이 영화를 보여주는데,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있었는지 몰랐다”며 흐느끼기도 한다. 구즈만 감독은 역사에 대한 이 트라우마를 가지고 평생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김성욱: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한국의 경우에도 8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기록 되었던 부분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옌데 정권 시절에 구즈만 감독도 극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다가, 지금은 극영화를 찍을 때가 아니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없었다면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다른 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현장성 있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록이 가진 힘이 다른 다큐멘터리보다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사건 이후에 ‘재구성’해나가는 게 아니라, 현장의 중심에서 기록을 해나갔다는 것 자체가 크게 와 닿았다.

김동원: 다큐멘터리는 기록을 하는 영화지만, 최근에는 기록보다는 감독의 주관성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이 쓰이기도 한다. 기록을 한다는 것은 대상을 제작 주체보다 우위에 놓는다는 태도인 것 같다. 그만큼 대상을 존중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구즈만 감독이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지만,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굉장히 절제하는 태도를 보인다. 누가 기록하느냐 보다 ‘기록됨’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일 것이다. 영상시대에는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지 않으면 글로 아무리 열심히 쓴다 하더라도 묻혀진 역사가 되고 말지 않나. 요새는 ‘찍(히)지 않으면 역사가 아니다’라고도 말한다. 시각적으로 확인할만한 기록, 대중들이 다가갈 만한 통로가 없으면 수많은 역사들이 묻히고 만다. 칠레의 9‧11에 관한 영화들은 이 영화 말고도 많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의 무게감을 가진 기록물은 없는 것 같다. 영화적인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옌데 집권 3년 동안에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건이 어떤 변증법적인 충돌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는지 이 영화만큼 꼼꼼하게 찍은 기록물이 없다고 본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솔라나스 감독의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가 당시에는 더 문제작이었다. 이 영화는 솔라나스 감독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스타일의 힘은 강하지만 기록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점에 와서 평가를 하자면 솔라나스가 실험했던 화려한 수사, 강렬한 톤은 구즈만의 냉정한 톤이 가진 영화적 힘에 못 미친다고 본다. 결국 치밀한 기록이 훨씬 더 큰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정리: 지유진(관객에디터) 사진: 김윤슬(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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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작가들이 공유하는 공기가 그들 영화의 특


징을 만들어 낸다


이용철 평론가에게 듣는 그가 추천한 ‘Unseen Cinema’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 처음 친구로 참여한 이용철 평론가는 ‘Unseen Cinema’ 섹션에 포함된,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쉽게 만나보기 어려웠던 영화 세 편을 추천했다. 그리고 지난 7일과 8일 양일간 그가 선택한 세 편의 영화 <마르케타 라자로바>,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마을을 위한 레퀴엠>가 연이어 상영되었고, 8일 저녁 마지막 상영작인 <마을을 위한 레퀴엠>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영화를 선택한 개별적 이유와 각 영화들에 특징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그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이용철(영화평론가): 이번에 유운성 평론가와 함께 Unseen cinema를 맡게 됐다. 이번에 상영하는 작품은 <마르게타 라자로바> <마을을 위한 레퀴엠>,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이렇게 총 세 편이다. 내일이 추석 연휴날인데 이런날 <마을을 위한 레퀴엠> 같은 영화를 배치한 시네마테크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웃음) 사실 개인적인 취향은 웨스턴과 느와르에 더 가깝기 때문에 이번에 뽑은 영화는 취향과 상관없는 영화다. 세 작품은 취향에 따라 선택한 게 아니라 개별적인 이유에 따라서 선택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강연의 전반부는 <마르케타 라자로바>,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후반부는 데이빗 글래드웰 영화의 특성을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마르케타 라자로바>는 몇 해 전 광주국제영화제에서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다. 2004년 광주영화제에서 시네마스코프 시절의 명작들을 상영한 적이 있었는데, 더글라스 서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니콜라스 레이의 <파티 걸>, 프리츠 랑의 <문플릿>과 같은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꼭 시네마스코프 작품뿐만 아니라 시네마테크를 다니면서 봤던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나 프리츠 랑의 <니벨룽겐> 같은 작품들이 줬던 스크린의 위대함과 거대함을 한 번 더 경험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마르케타 라자로바>.

흔히 체코 영화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감독들은 이리 멘젤, 밀로스 포먼, 얀 네멕 등일 것이다. 프란티세크 블라칠은 서구에서조차도 많이 거론된 감독이 아니었고, 90년대 이후에 조금씩 거론되고 재평가됐다. 왜 블라칠의 영화가 묻혀 있었을까? 아마도 그의 영화가 체코의 뉴웨이브 작품들과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뉴웨이브 작품은 소련이나 공산당의 부패와 같은 현실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비판을 했다. 반면에 블라칠 감독은 역사적 소재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젊은 영화의 흐름에서 봤을 때 그의 영화는 구시대적 영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블라칠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억압 받는 자유의 문제다. 이런 것을 시대극에서 표현하는 방식은 종교 문제를 다루며 이데올로기의 도그마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블라칠은 그것이 아무리 선의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영혼을 억압한다면 비판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의 가장 큰 특색은 정교하게 구성된 이미지에 있다. 다른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영화가 짧든 길든 한 장면도 허투루 만든 장면이 없다. 블라칠 영화의 이미지를 보면 그가 영화라는 미디어에 접근하는 자세를 볼 수 있다. 그의 이미지에는 이야기를 위해서 소모되는 이미지가 하나도 없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집과 도구, 그리고 자연을 비출 때 어떤 각도에서 어떤 속도로 보느냐에 따라 미적 외향을 갖춘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증명한다.

다음 추천작은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원래는 이 영화를 추천한 것은 아니었고 페이 모 감독의 1948년 작품인 <작은 마을의 봄>이라는 중국 영화를 추천했었다. 이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보고 싶었던 이유는 신파라는 것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신파라는 것에 훨씬 더 모던한 것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쉽게 폄하하는 신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으면 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선택한 작품이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 조너선 로젠봄이 말했듯이,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야기의 재미와 연기를 떠나서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에 있다. 특히 이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은 제리 가르시아와 루이스 부뉴엘이다. 부뉴엘의 <자유의 환영>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영화 모두 고야의 그림으로 시작하고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방식도 유사하다. 물론 말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고전영화 중에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재밌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막스 오필스의 <윤무>. 이 영화와 가장 전복적인 형태를 띈 영화가 <자유의 환영>이고, 그사이 어느 지점에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가 자리하고 있다.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와 매우 유사한 한국 영화가 있는데, 바로 손영성 감독의 <약탈자들>이다. 어쨌든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기발한 방식의 영화라는 측면에서 <사라고사의 매뉴스크립트>를 추천했다.



마지막 추천작은 데이빗 글레드웰의 1975년작 <마을을 위한 레퀴엠>이다. 영국의 정부 지원 하에 제작되던 다큐멘터리가 일정 부분 성공을 이루자 나중엔 각 산업별로 다큐멘터리 지원을 하게 된다. 데이빗 글래드웰은 이 다양한 분야 가운데 교통 산업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담당하면서 1960년대부터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회화를 전공한 사람으로 그가 주로 맡았던 역할은 편집이다. 그가 편집을 했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린제이 핸더슨 <이프>라는 영화가 있다. 글래드웰이라는 사람이 공공의 선이나 교육을 위한 다큐멘터리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인 영화는 실험적이고 탐미적이다.

<마을을 위한 레퀴엠>에 대해 영국의 한 비평가는 이 영화가 선언이 아니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바로 이점이 내가 이 영화를 여러분들과 함께 보고 싶었던 이유다. 보통 영화들은 자기가 고집하는 것에 대해 선언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을을 위한 레퀴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화라는 것이 굳어진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부드러운 유기체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예를 들면 과거와 현재, 사라진 것 다가오는 것, 침묵과 소음, 탄생과 죽음, 찰나와 기억을 강요하듯이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층을 쌓고 관객이 자연스럽게 그것에 스며들도록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감독의 생각에 동의를 할 수도 비판을 할 수도 있다고 본다. 특히 글래드웰의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슬로우모션이다. 그는 모든 영화에서 슬로우모션을 사용하는데 그가 슬로우모션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그가 다루는 대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가 사용하는 소재들은 항상 사라지고 있는 것들, 곧 잊혀질 것들, 곧 죽을 것들이다. 글래드웰은 그런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진 감독이다. 피사체들은 영화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곧 사라지고 죽을 것들이다. 이것들은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것들인데 글래드웰은 이런 피사체들에 가능한 긴 시간을 부여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시간을 더 줌으로 인해 그들이 가진 시간을 늘려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구스 반 산트의 <앨리펀트>도 이와 유사한 측면에서 슬로우모션을 사용한다.

요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들은, 소위 거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 직접 영화를 서로 보지도 않고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젊은 감독을 만나 예전에 내가 본 영화들과 당신의 영화가 비슷하다라고 하면 그 젊은 감독은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카피했다, 하지 않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공유하는 것처럼 작가들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영화들의 특징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정리: 최혁규(관객에디터) | 사진: 이유정(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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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상영작 리뷰


지옥인간 


스튜어트 고든의 '지옥인간'





<지옥인간>은 재능있는 창작자들의 결합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스튜어트 고든은 인간 본연의 정수를 들여다보는 도구로써 호러 장르를 선택했다. 브라이언 유즈나는 끊임없이 새롭고 진귀한 것을 시각화해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아이디어 뱅크였다. 고든은 작가였고 유즈나는 퍼포머에 가까웠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경제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스튜어트 고든은 연출을 했다. 브라이언 유즈나는 제작을 했다. 각본은 함께 썼다. 첫번째 결과물은 러브 크래프트의 원작을 각색한 <좀비오>(리 애니메이터)였다. 그들은 전설이 되었다.

1986년에 발표된 <지옥인간>은 그들의 두번째 작품이다. 역시 러브 크래프트의 원작을 각색했다. <리 애니메이터>도 거의 새로 쓴 이야기에 가까웠지만 <지옥인간>은 더욱 그랬다. 고작 5장 안팍의 단편 소설을 원안으로 만들어낸 <지옥인간>의 이야기는, 원작에서 잠시 등장하는 ‘송과선’ 연구를 바탕에 두고 더욱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배치했다.

캐스팅을 보면 <지옥인간>은 <좀비오>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다. 우리들의 영원한 ‘허버트 웨스트’ 제프리 콤즈가 주인공 크로포드를 연기한다. 역시 <좀비오>에서 주연을 맡았던 바바라 크램톤이 등장한다. 잠시 언급하자면 호러영화를 사랑한 어린 소년들에게 바바라 크램톤은 마릴린 먼로였다.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켄 포리가 주인공 삼인방 가운데 마지막을 맡아 알몸에 빨간색 팬티만 걸치고 열연을 펼친다. 그는 최근 <시체들의 새벽>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에서 전도사 역으로 깜짝 출연해 여전히 건재함을 드러낸 바 있다.

<지옥인간>은 송과선을 자극하는 기계장치로 인해 벌어지는 참극을 다룬다. 송과선은 척추동물의 간뇌에 돌출해있는 내분비선이다. 생체리듬에 관여하는 호르몬을 형성한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송과선을 제 3의 눈이라고 불렀다. 이후 많은 텍스트들에서 송과선을 신비주의 이론과 결합하여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했다. <지옥인간>에서 송과선은 인간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도구로 등장한다. 프레토리우스 박사(잠시 프로메테우스-프랑켄슈타인-프레토리우스로 이어지는 컨텍스트를 환기해보자)의 송과선 해방 장치는 어떤 이에게는 성욕의 과잉을, 어떤 이에게는 식욕의 폭발을 가져온다.

과학이 초래한 비극을 주인공들이 해결한다는 점은 5,60년대 고전 SF영화의 개성과 닿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려 애쓰는 이들 또한 과학자라는 점은 7, 80년대 SF영화와 궤를 함께한다. 비록 스플래터 호러 장르의 물고를 텄던 <좀비오>의 참신함이나 결말의 파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옥인간>의 이야기에는 흡사 고전 활극을 연상하게 만드는 다양한 매력과 재미가 있다. <지옥인간>은 한국의 극장에서 상영된 적이 없다. 스튜어트 고든과 브라이언 유즈나 콤비의 영화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이 영화를 극장 스크린에서 필름상영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특권이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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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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