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1914-1977)의 탄생 백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올해 랑글루아 백주년 행사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함께 벌일 예정이다. 랑글루아는 책에서 언급된 영화들, 영화의 역사에 그저 이름만 있던 영화들을 살아있게 했다. 시네마테크의 상영 덕분이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의 아버지이자 영화 프로그래머란 직업의 창시자로, 영화의 아이들(cine-fils)이 그러하듯 적어도 이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 의미로든 그의 아이들이다. 그의 특별함은 탁월한 열정뿐만이 아니라(그는 시네마의 종사자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열정passion이라 여겼다), 그것을 어떻게 전시하고 조직하는가에 있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역사에 정통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재능을 요하기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영화와 관련해 손쉬운 합의를 도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의 종사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우정을 보내기도 했지만, 또한 치명적인 증오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 치명적 결과는 알다시피 1968년에 있었던랑글루아 사태로 벌어졌다. <랑글루아의 유령>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클로드 샤브롤이 지적하듯이랑글루아 사태는 그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명성, 그리고 그가 필연적으로 양산한 적들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영화의 역사는 친구만이 아닌 적들과의 전투의 흔적들이다. 우리의 동료이자 친애하는 적들. 자연스럽게 어떤 친구들은 적으로 돌아서고, 또 반대로 그를 시기했던 이들이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가령,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못지않은 아름다운 벨기에 시네마테크의 설립 자인 자크 르도는 그의 적대적 경쟁자였다. 물론 나로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와 친구들과의 돈독한 우정이다. 특별히 랑글루아와 그의아이들중의 한 명인 주앙 베르나르 다 코스타(1935-2009)와의 우정의 관계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베르나르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를 포함해 페드로 코스타 등 포르투갈 감독들이 존경했던 포르투갈 시네마테크의 관장이었다. 베르나르는 젊은 시절에 리스본에서 영화사의 위대한 고전들과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5-60년대 리스본에서는 정치적 검열과 문화적 빈곤, 그리고 고립주의 때문에 과거의 영화와 만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1958, 23살의 나이에 그는 처음으로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를 방문해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의 고백. “극장문을 열고 처음 들어갔을 때의 그 감정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함 포템킨>, <국가의 탄생>, <일출>, 그리고 <잔다르크의 수난>과 같은, 글에서 많이 읽었던, 사진들로만 보았던 영화들을 내 눈앞의 스크린으로 마침내 보게 되었을 때의 그 감정을?” 영화는 늘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가 의미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았던 영화들을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우리가 기대하는 영화들은 언제나 아직 보지 못한, 하지만 존재하게 될 영화들’(고다르)이다. 그 후, 베르나르는 굴벤키안 문화재단의 영화부문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1973년 랑글루아의 도움으로 리스본에서로셀리니 회고전을 개최할 수 있었다. 리스본의 시네필들은 랑글루아가 대동한 로셀리니를 극장에서 만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무방비 도시>가 상영되는 오프닝 행사에서는 상영 후에 기립박수와 함께자유 만세파시즘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난무했다고 한다.

 

이런 훈훈한 우정에 더해 나로서는 그들의 우정을 넘어선 차이 또한 주목한다. 거부하고 싶더라도 우리는 결국 랑글루아의 키드이겠지만 서로 다른 상황과 시간대, 조건에 있기에 친화성 못지 않게 거리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리스본의 베르나르 또한 파리의 랑글루아와는 다른 프로그래밍을 해야만 했다. 마치, 파리의 고다르와 저 남미의 글라우버 로샤가 만났을 때 로샤가 말했던 것처럼. 당신들은 영화를 해체하고 있는데 우리는 해체할 영화가 없으니, 먼저 영화를 구축해야만 합니다! 랑글루아는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 저급한 것과 고급한 것의 문화적 기준을 거부하는 프로그래밍으로 유명했다. 그는 심지어 좋은 영화만 선별한 것이 아니라 아닌 모든 영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작품이 좋은지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영화사는 그 반대의 진실을 언제나 보여주었었다. 반면, 베르나르는 주로 작가들의 회고전에, 그리고 다소 교훈적이고 영화사의 위대한 정전의 작품을 상영하는 데에 치중했다. 이는 1970년대 리스본에서 절실했던 일이다. 무엇보다 먼저 관객을 늘리고 좋은 작품을 접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작들을, 그동안 상영되지 못했던 영화들을 소개하고 보다 근본적인 영화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했다.

 

 

 

파리의 랑글루아는 상상적인 프로그래밍을 꿈꾸었다. 그는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가정한 프로그래밍, 가령 이 가상의 관객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들이 하루 동안 종일 영화를 볼 경우에 서로 이질적인 영화들의 자유로운 배치로 영화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다리를 놓는 비밀스러운 기획을 하기를 원했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영화적 이미지들이 그려내는 비밀스러운 성좌의 구축. 이미 시네마테크를 설립하기도 전에 그는 샹젤리제의 작은 공간을 빌려서시네마 판타스티크Le Cinéma Fantastique’라는 제목의 기획전을 개최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에 랑글루아는 어떤 휴식 시간도 없이 세 편의 장편 영화를 연달아 상영했다. 장 엡스탱의 <어셔 가의 몰락>(1928),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그리고 폴 레니의 <라스트 워닝>(1929). 이 세 편의 정해진 주제와 기획의 의도는 분명치 않다. 그는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리고 다음 영화와의 관계에 영화가 놓여지기를 원했다. 라울 월쉬의 영화 전에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미조구치의 영화 다음에 히치콕의 영화를 상영하는 식으로. 계몽적인 기획의 주제보다는 삼투현상에 의한 영화 교육을 믿었던 것이다. 종종 랑글루아의 영화박물관의 전시는 심지어 연대기도 그 어떤 꼬리표도 달지 않은 전시물들의 배치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전통적인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은 랑글루아의 그런 방식의 배치에 비전문가라는 경멸을 표하기도 했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고물상의 무질서한 배치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라는 비난들. 하지만 상상의 시네마크는 이런 꿈이었다. 어느 날, 루브르 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모든 전시물들의 꼬리표를 제거하고 마음대로 예술품들을 뒤섞어 버린다. 그 다음 날 관객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박물관에 들어와 연대기도, 주제도 무시된 채 무질서하게 배치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게 된다. 그런 날들이 오게 되면 더 비밀스러운 예술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친구들이 어떤 일관된 기준 없이 선택한(친구들 스스로 작품을 선택하는 고유의 일관성과 철학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들이 상영되는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린다. 정말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이 무질서한 영화들의 사이, 우연한 관계와 배치에 더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부탁드린다. 위계와 통제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한계를 두어서는 안 된다. 짐 자무시의 영화가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상기하고 싶다. No Limits, No Control.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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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우리가 난잡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난잡하다"

- <솔루션>, <코메디: 다 웃자고 하는 얘기>의 김곡, 김선 감독

 

곡사가 작년에 발표한 두 개의 단편 <솔루션> <코메디: 다 웃자고 하는 얘기>는 그렇게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다. 어린아이는 문자 그대로 똥을 밥처럼 먹으며 해맑은 웃음을 짓고, 인기 없는 개그맨은 죽은 아내의 시체 옆에서 강박적인 개그를 시도한다. 곡사는 왜 이런 난감한 전략을 택한 것일까. 지난 2 23일에 진행했던 관객과의 대화 내용을 여기에 옮기니 그 답을 찾아보자.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곡사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웃긴 영화이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하고 비극적인 면도 있다. 일단 두 편의 영화가 모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고 <솔루션>의 유령과 <코메디>의 시체처럼 두 편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김선(영화감독): 나이가 들어서 가족 이야기에 관심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준비할 때의 상황부터 설명을 드리자면, 상업영화를 한 다음에 이제 정말 우리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작업이란 게 그때까지 축적해 온 내면의 경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이 <코메디>였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그리고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구성한 사회에 만연한 유령들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었다. 그건 정말 죽은 사람의 혼일 수도 있고,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압박감일 수도 있다. 사회적인 억압이나 압력들, 그런 유령들과 싸워나가는 이야기를 가족에서부터 시작해볼까 했다. 그리고 그런 어두운 존재인 유령들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보니 코미디언이 생각났다. 어두운 존재들을 잊게 만들고, 동시에 환기시키는 사람들인 것 같다. 진짜 웃긴 사람들은 슬픔도 같이 전달하지 않나. 그들이 무대에서는 유령들과 잘 싸우는 것 같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 유령들한테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패배를 인정하는 비참한 삶을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솔루션> 역시 같은 시기에 쓰였으니 비슷한 맥락의 시나리오다. 공교롭게도 <코메디>를 찍다가 전주국제영화제의 맹수진 프로그래머에게 <!!!> 프로젝트로 <솔루션>을 제안받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서 가족과 유령이 등장하는 비슷한 느낌의 시나리오가 나온 것 같다. 그런데 <솔루션>은 좀 더 적은 예산으로 찍어야 했기 때문에 페이크 다큐 포맷을 차용했다. 그리고 이제껏 영화를 찍으며 연구 끝에 도달한 이미지들 - 무당, 유령, 박정희, , 항문 같은 것들이 총 집약된 영화였다.


김성욱: 두 작품 모두 구순기와 항문기를 다루고 있다. <코메디>에서도 계속 담배를 입에 물고 있지 않나,

김곡, 김선: 녹색, 그린(좌중 폭소).주를 마시고 뭔가를 먹는 행위도 반복되고. 담배에 불이 잘 안 붙다가 마지막에만 확 켜지는 설정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솔루션>의 변 색깔은 무슨 색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푸른색이랄까(웃음).

김곡(영화감독): 굉장한 논쟁에 휩싸였던 부분이다. 보도자료에는 두세 시간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2, 3일을 싸웠다. 스탭들 역시 김곡파와 김선파로 나뉘어서 ‘리얼리즘’으로 가야할지 편하게 웃게 해야할지 나뉘었다. 김곡파는 갈색 계열만 아니면 된다는 쪽이었고, 김선은 원칙주의자였다.


김성욱: “사람 음식을 달라!”는 변짱이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강조된 대사는 아니지만 묘하게 와 닿더라.

김곡: 식변증도 사실 식인습성의 일종일 수도 있지 않나. 신체나 다름없는 거니까. 그리고 만들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시 관객 입장에서 보니 옛날에 만들어지고 역사 속에 버려두었던 쓰레기들, 그 똥들을 우리가 먹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싸는 것의 순환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거꾸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똥까지는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먹는 행위를 다루었는지 자문하게 되더라. 먹는다는 건 정치에서 굉장히 본질적인 행위인 것 같다. 권력이라는 건 누군가를 먹는 것이고, 많이 먹을수록 센 거 아니겠나. 오늘 보니 이런 원형적인 상징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김선: 어떻게 보면 다이어트처럼 안 먹는 게 권력이 되기도 하지만 먹는 것이 권력의 원형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먹는 것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역전되고 모순된 상태를 표상하고 싶었다. 설정이 괴팍한 만큼 형식도 재미있게 가보자는 생각으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나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들을 희화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코메디>에서는 그런 역전된 소화 상태를 극으로 풀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일상적으로 보이는 삶의 기저에 어두운 유령들이 깔려 있다는 것. 죽은 아내의 유령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웃겨야 하고, 이 세상을 웃겨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마누라까지 웃겨야 한다는 플롯을 떠올려보았다.


관객1: 페이크 다큐라는 형식이나 풍자가 담긴 영화들이 노리는 감정이 경쾌하고 통쾌한 것이라면 개인적으로 이 영화들은 난잡하게 느껴졌다. 공허하고 구차한 느낌이었다.

김곡: 일부러 난잡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숨기지도 않는다. 만약 난잡하게 보였다면 우리가 난잡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묘사하는 대상이 난잡해서 그런 것이다. 일단 세상이 똥밭이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잡해진다. 굉장히 기예가 좋은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이 와도 난잡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리얼리티 쇼라는 형식 자체가 난잡하다. 리얼리티 쇼에서는 하나의 디테일들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무대 안과 밖이 난잡하게 섞이기도 하고, 그들의 연기 안에서 공적인 지위와 사적인 욕망이 난잡하게 섞이기도 한다. 어떻게 말하면 난잡성에 열광하는 시대라는 거다. 오히려 이 영화가 욕을 먹어야 한다면 왜 리얼하지 않느냐, 가 아니라 왜 그대로 베꼈냐는 비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관객2: <솔루션>의 솔루션은 결국 항문으로 음식물을 흡입해서 입으로 내뱉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어떻게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선: 우리도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이다.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는 자기모순을 묘사하는 난잡한 영화가 될 텐데, 제목이 ‘솔루션’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곡사가 말하는 솔루션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분명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솔루션 없이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코메디>의 경우에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에게 담배 한 대 정도가 솔루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담배가 나의 생명을 줄일지언정 지금의 안도감으로 이 비극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솔루션이 아닐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솔루션>의 경우에서는 똥인지 된장인지를 아는 게 먼저라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 비록 주지는 못했지만 노력은 했다(웃음). 사회자까지 똥을 뒤집어쓰는 것, 누가 나쁜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느낌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변명처럼 애니메이션을 덧붙였는데 결과적으로 더 난잡해졌다.

김곡: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정치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솔루션>은 타이틀만 ‘솔루션’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선 : 처음에는 그럴듯한 저서를 남기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다면, 영화를 찍으면 찍을수록 책을 쓰는 게 아니고 춤을 추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솔루션>은 막춤, <코메디>는 살풀이 같은 것이다. 영화의 커트나 호흡감 같은 것들이 신체와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감독 일을 해가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나리오를 쓰거나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 때 춤을 생각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감독은 글쟁이가 아니라 모션을 하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김성욱: 어쨌든 두 분이 만든 영화들 중 가장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 봐서 더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새로운 5년’이 시작되는데 어떻게 계속 비타협적으로 영화를 만들어갈 예정인가.

김선: 최근 많은 연락을 받았다. 지금 제한상영가를 받아서 행정소송 중인 <자가당착>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별 거 아니고 포돌이가 나와서 쥐 잡는 내용인데 두 번이나 제한상영가를 받았다. 앞으로의 5년 동안 곡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일단 제한상영가 투쟁이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는 독립영화/상업영화의 구분 없이 막 찍으려고 하는 편이다. 찍고 싶은 것을 무조건 찍어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들이라 찍고 싶은 대로 찍을 것이다. 그리고 요전에도 찍으려다가 엎어진 영화가 있는데, 그중에는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영화도 있었다. 눈치 보지 않고 찍고 싶으면 찍겠다.

김성욱: <솔루션>의 일본 제목은 <역분사가족>이라고 해도 되겠다(좌중 폭소). 오늘은 곡사의 영화를 보고 내일은 <칠레전투>를 상영하고, 모레는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다. 특정한 시대와 관계를 가진 영화들을 연달아봐서 더 의미가 깊었던 것 같다.

 

정리: 박예하(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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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역사의 새로운 시각들이 힘을 갖고 반향을 일으켰던 시기의 영화   

- 민규동 감독이 말하는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지난 2월 16일, 민규동 감독의 선택작인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 상영 후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들을 열렬히 지지하기 보다는 기본적인 애정을 갖고서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민규동 감독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선택작들 중 가장 의외의 선택이라는 인상도 잠시, 시네토크가 끝날 즈음 민규동 감독이 만든 역사극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여러 편을 추천해 주셨는데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는 <남부군>(1990)을 상영하게 되었다. 처음 선택하신 영화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민규동(영화감독): 2차 세계대전 말기를 배경으로 독일군의 패배를 다룬 전투 영화 <벌지 대전투>(1965),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초기작인 <미행>(1998)이나 <뮤직 박스>(1989), <레미제라블>의 예전 버전의 영화 등을 추천했지만 모두 상영이 어려웠다. 해방 공간에 대해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서 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보니,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즈음 <닥터 지바고>(1965)를 봤다. 두 영화 모두 사상적인 압박 속에서 개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남부군>은 당시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었고, 당시 흥행에도 성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한 번쯤 언급하곤 했던 영화였다. 


김성욱: 90년대 초에 <남부군>, <우묵배미의 사랑>(1990), <그들도 우리처럼>(1990) 같은 영화들, 대학가에서는 자주제작으로 만든 영화들이 나왔다. 사회적인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고, 소비에트 붕괴나 천안문 사태 등 여러 면에서 사회 격변기였다. 감독님은 90년대 초반, 그 시절에 어떻게 살아가고 계셨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90년대 전세 값이 급하게 올라서 파동이 있었다. 어딜 가도 비싸다 보니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시도하기도 했다. 암울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못 버틸 거라는, 세상이 곧 뒤집혀질 거라는, 낭만적인 혁명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남부군>과 같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고, 우리가 잘 몰랐고 언급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이런 분위기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었다.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전쟁이나 빨치산, 좌우대립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들이 언급되면서 역사에 관심이 없었거나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굉장한 카오스를 겪으며 흔들리게 된다. 그 흔들림에서 오는 에너지들이 문화에 반향을 일으켰었다. 『태백산맥』이 워낙 깊이 있고 진동이 큰 문학이었기 때문에 그에 비해 『남부군』은 상대적으로 얕고, 또한 전향을 해서 살아남은 사람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수정주의적이고 타협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 자체도 빨치산의 인간적인 면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빨치산을 미화하는 것이라고 격하게 비난하는 시각과 더 흔들림 없는, 진짜 빨치산을 그리기에는 너무 온정적이지 않느냐는 비판 사이에 묘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김성욱: <벌지 대전투>나 <남부군>처럼 주로 대규모로 인물이 등장하고 소셜한 관계들을 다룬 영화들을 선택하셨는데. 

민규동: 어릴 때부터 전쟁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혐오감이 많았지만, 그렇게 굉장히 큰 필드에서 벌어지는 생과 사의 문제, 국가 사이의 정치적인 역학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이런 것이 주는 긴장과 재미를 즐겼던 것 같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작은 영화들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역사를 관통하는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소우주로 넓혀내는 개인에 얽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지금도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전쟁과 혁명을 다룬 그런 큰 영화들을 떠올려보다가 <남부군>까지 온 것 같다. 


김성욱: 이런 류의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영화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보셨나. 

민규동: 이 영화는 <피아니스트>(2002)처럼 한 인물을 끝까지 따라간다. 안성기 씨의 시점으로 존재하고 중간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인물들이 많다. 실화에 많이 근거하다 보니 실제 공간, 실제 인물들에 맞춰져 있어 전형적이지 않는 인물 배치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실제 일지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장르적으로 균형을 맞추는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그리도 빨치산 내에서의 인물군을 잘 뽑아서 균형 있게 배치하려고 많이 노력하신 것 같다. 


김성욱: 말씀하신 것처럼 <피아니스트>와 전체적인 이미지의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피아니스트>를 만들면서 로만 폴란스키가 염두에 둔 하나의 이미지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것, 완전히 폐허 더미가 된 가운데 혼자 서 있는 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남부군>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는 아무래도 안성기 씨가 하얀 눈밭에 혼자 남겨져 있거나 시체들이 뒹구는 가운데 혼자 서 있는 상태의 느낌들이 크게 와 닿는다. 

민규동: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적인 부분, 따뜻한 점들을 덜어내고, 좀 더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을 따라다녔으면 좀 더 냉정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김성욱: 근래에 나왔던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당시에는 이런 내용을 다루면 굉장히 문제가 많이 됐다. 대학생 때 학교에서 북한 영화를 상영한다는 날 대학에 헬기가 뜨고 최루탄이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상영하거나 본다는 행위 자체가 사람들이나 세상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나라에서 진압을 할 정도였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이런 영화들을 편하게 볼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있다. 오히려 무관심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의미가 없어진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영화를 보려고, 혹은 만들려고 했던 힘들이 증발되고, 이제는 전쟁을 하더라도 반드시 재미가 담보되어야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데 정말 좋은 세상이 오겠지?’라는 회의적인 질문을 불안하게 던지는데, 시간이 지나 그 의미는 없어지고 이미지만 남게 된 지금의 순간이 묘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김성욱: 90년대 초반에는 영화를 전복적인 예술로 봤던 것 같다. 상업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대중적 동원의 측면에서 영화를 하나의 스펙타클의 장으로도 봤던 것 같다. 자주제작의 영화들이 대학에서 상영될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가 굉장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멀티플렉스에서 <레미제라블>(2012)을 보면서 혁명에 대한 찬가를 듣게 되는데 그 느낌이 묘했다. 이런 영화들을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보고 있는 경험적인 측면에서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규동: 어떤 박제를 바라보는 느낌이지 바리케이드에 서있는 그 절절함의 의미를 이해하는 느낌은 아닐 것 같다. 예전에 <닥터 지바고>를 보면서 주인공이 빨치산에 끌려가 의도치 않게 혁명에 종사하다가 탈출하고 죽어갈 때 당시에는 정말 그 인물과 함께 행군하는 느낌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환희 같은 것이 절절하게 다가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모두 다 이미지화된 것 같다. 


관객1: 정지영 감독님의 영화들에 대해 너무 감정 묘사가 직접적이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반응이 있지만, 그럼에도 항상 어떤 진정성이 느껴진다. 정말 뭔가 말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이다. 

민규동: 이야기의 선택에 있어서 남다른 지점이 있으신 것 같다.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이야기를 선택했을 때는 그 방향이 명백한 것 같고, 그런 감독님의 역사적, 철학적 입장을 반영하는 가장 적합한 얼굴이 안성기 씨라는 생각이 든다. 안성기 씨의 얼굴은 잘생겼고, 지식인 얼굴이기도 하고, 휴머니즘을 담고 있고, 연륜도 있고, 그런데 뭔가 성욕은 제거되어 있다. 더 자신을 학대하는데 익숙하고,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데 서툰 지점들이 비슷하게 영화에 결기가 이어지고 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가 사람을 끌어가려는 어떤 결기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정지영 감독님의 영화가 선택을 강요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모호한 입장을 취할 수 없게 하고, 지지하거나 반대하거나 이다. 감독님의 행동가로서의 어떤 확고한 지점들이 계속 있는 것 같다. 


관객2: <남부군>과 비교해서 <태백산맥>(1994)과 <하얀 전쟁>(1992)은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민규동: 『태백산맥』은 긴 서사시이고, 어떤 한 인물도 평면적이지 않게 입체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태백산맥>은 소설이 갖고 있는 진지함이나 무서울 정도로 깊이 바라보던 시선이 많이 희석되고 결국은 별로 모난 것 없이 안성기 씨가 바라보던 시선처럼 상식적인 메시지밖에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한계를 많이 노출했었다. <하얀 전쟁>도 비슷하게, 전쟁의 무의미함과 남겨진 트라우마에 대한 메시지 자체는 굉장히 상식적이라고 생각을 했었고, 특별한 자극을 받지는 못했다. 한국군의 모호한 입장에 대해 좀 더 문제제기하고 깊이 있게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정지영 감독님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긴 하지만 열렬히 지지하기는 어려운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김성욱: 이런 영화들을 선택한 데에는 차기작에 대한 생각들도 있으셨던 것 같은데.

민규동: 차기작이 뭐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남녀 간의 멜로드라마를 써놓은 것이 있고, 40년대 해방공간의 느와르, 전쟁직후의 첩보멜로를 써놓고 구상 중이다. 좀 더 열어놓고 스스로도 궁금해 하고 있다.


정리: 장지혜(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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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작은 몸짓과 시선이 전하는 통렬함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가 말하는 시네마테크 선택작 ‘내일을 위한 길’

 

지난 1월 30일,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인 레오 맥커리의 <내일을 위한 길> 상영 후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 영화는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작품 중 하나'라는 소회로 시작된 강연은 영화의 감흥을 곱씹을 수 있도록 한 시간이었다. 그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을 고르며 고민하던 중 문득 생각했던 작품이 레오 맥커리의 <내일을 위한 길>이었다. 노년이 되신 분들이 시대의 흐름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있지 않나.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영화의 목록들도 있지만, 삶의 마지막에 아마도 보고 싶은 영화들도 있다. 예를 들어 파스빈더는 삶의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나에게는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후반부가 아주 인상 깊다. 부부가 작별을 고하기 위해 허니문을 떠났던 도시를 다시 방문하는 부분이다. 앞으로 서로를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마지막을 어떻게 정리해 가는지,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뭉클하다. 영화가 아주 정갈하다.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은 많지 않다. 다만 몇 가지 사전적인 정보를 말씀드리고 싶다. 이 영화를 만들었던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제 불황이 계속되던 때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의 차압이나, 일자리 부족 같은 문제가 많았다. 시기적으로만 보자면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또한 루즈벨트에 의해 사회보장제도가 처음 마련되던 시기였다. 영화의 후반부, "젊은 때 저축하라"는 표어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이 보장제도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인 맥락에서만 보자면, 이 시대에 노년의 부부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은 결혼 생활동안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주다 보니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불행인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레오 맥커리의 개인적인 사정이다. 1936년에 레오 맥커리는 상한 우유를 먹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경험이 맥커리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민감성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개인적인 사연 때문인지 맥커리의 영화 인물들은 동시대 비고되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속의 인물들보다 어둡고 자기비하적이거나 불안, 혹은 민감함이 더 커 보인다. 비슷한 스크루볼 코미디를 찍어왔음에도 이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1936년에 맥커리가 건강을 회복 한 후에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937년에 노인을 다루는 영화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레오 맥커리는 로렐과 하디, 막스 브라더스와 함께 코미디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이렇게 슬픈 멜로 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노년의 멜로드라마, 이것은 장르적으로도 특별한 경우다. 이 영화가 맥커리의 가장 웃긴 영화라고 하는 <놀라운 진실>과 같은 해에 나왔다는 것은 놀랍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영화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와 비슷하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레오 맥커리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장면 편집, 카메라 워킹에는 화려한 부분이 전혀 없다. 하지만 한 장면 안에서 인물들을 위치시켜놓고 찍어 나가는 그 순간,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통렬함이 잘 표현되어있다.

 

공간 속에 있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아주 작은 표정, 시선, 몸짓들이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브리지 게임을 하는 중, 헤어진 아내에게 남편의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을 보자. 카메라는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그 아내를 관객들이 정명으로 보게끔 만든다.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중심인물들을 정면으로 보도록 만들거나 반대로 거꾸로 등져 보이도록 한다. 마치 중심인물들이 무대의 객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남편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서 아내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브리지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소리가 커져가자 게임을 중단하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이 장면이 지속되는 내내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며 그녀가 이 장면에서 초래하는 결과들, 그녀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이 멜로드라마적인 통렬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영화 속에 많이있다. 양로원에서 온 편지를 보는 장면, 이 장면은 아주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다. 양로원에 가겠다고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자 아들의 표정에는 잠깐 미소가 번지다가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다. 하나의 장면 안에서 감정의 미묘한 상태가 변해가는 미니멀한 부분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위치와 시선, 몇 개 정도의 짧은 컷들이 복합되어 감정을 컨트롤 해 나간다. 특히 관객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구성해 나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17살 손녀딸 로다와 할머니가 이야기 하는 장면을 보자.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17살 때는 모든 게 아름답게 보였고, 70살이 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편의적으로 3막으로 보자면, 영화의 초반에 주인공의 집이 저당 잡히는 순간으로부터 모든 파국이 발생한다. 사실 이 출발점은 작은 사건에 불과해 보인다(아마도 얼마 후에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대사처럼). 이후의 이야기는 작은 헤어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는 일로 흘러가는 것이다. 2막에서 부부는 헤어졌다가, 3막에서 다시 만난다. 1막과 2막은 가족의 이야기다. 그런데 3막이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는 이야기가 가족에서 소셜한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태도가 사회적인 영영에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장면을 보자. 노부부는 1막에서부터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3막에서 노부부에게 차를 판매하려던 사람 역시 차를 태워주며 그런척한다. 결국 부부가 차를 자랑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며 차를 살 형편은 아니다 라고 말 했을 때, 그 또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호텔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가족 관계에서는 잘 기능하기 힘들었던 일이사회적인 규모로 확장되어 진행된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정작 노부부는 대우를 받고 있다. 3막의 부분은,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에 의한 대우랄까, 관계성의 회복에 대한 사회적 비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감정을 분명히 토로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간다. 이 영화의 세계는 잘 구성된 세계인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이유가 다 있지 않나. 부모도, 자식들도 (부모를 모실 수 없는) 이유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 내에서 조그만 하나의 변화가 어떻게 이 전체를 교란시켜나가는가를 보여준다. 조화로운 질서의 파괴가 어떻게 작은 것에서 번져나가는지를 보게 된다.

 

정리: 김경민(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주원탁(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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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우습고, 비열하고, 진짜 사람 같은 사람들

- 윤종빈 감독이 말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지난 1월 26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의 로비는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1990)과 이 영화를 선택한 윤종빈 감독과의 시네토크를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윤종빈 감독은 <좋은 친구들>을 서른 번도 넘게 봤을 정도로 좋아한다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흥미로웠던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좋은 친구들>에서 어떤 면들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오늘 또다시 보면서 어떤 것들을 새로이 생각하게 됐는지.

윤종빈(영화감독): 23살 때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마피아도 아니고 이탈리아 사람도 아니지만 왠지 그 세계는 진짜 그럴 것 같아서 충격을 받았다. 두세 번 보니까 영화에 플롯도 없고, 장르적인 면도 거의 없다는 게 들어왔다. 그런데도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힘 있게 끌어갔던 게 신기했다. 그리고 계속 보다보니까 음악이 들어왔다. 이 영화는 사운드트랙이 굉장히 훌륭하다. 기존에 있던 곡들을 삽입한 건데, 그 장면의 정서에 맞거나 부딪히는 방식으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그리고 또 재밌는 건, 이 영화엔 어떠한 멜로드라마적인 순간도 존재하지 않고, 영화에 나오는 인물에게 이입할 수도 없고, 그 사람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순간도 없는데 왠지 그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짜 인간인 것처럼 착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들이다.

 

김성욱: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 인물을 그려나간다는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내레이션을 쓰고 있지만 전통적이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 같다. 짧긴 하지만 부인의 내레이션도 나온다. 내레이션보다 오히려 코멘터리 같은 느낌이 강하다. 방금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인물들이 그럴듯하게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는데, 정확하게 어떤 부분들이 그러한가?

윤종빈: 가령 이 영화와 비슷하다고들 하는 <대부>(1972)는 멜로드라마적인 면에 많이 기대고 있다. <대부>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착해 보이기도 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영화엔 사람들이 시종일관 우스꽝스럽고, 비열해 보이고, 그런데도 사람 같다. 그런 것들이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헨리가 폴리의 식당을 찾아가서 잘못했다면서 우는 장면에서 헨리의 그 표정이 너무 불쌍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김성욱: 이 영화는 인상적인 촬영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얘기할 때 꼭 언급하는 장면, 헨리가 카렌과 데이트를 하면서 코파카바나 클럽으로 내려가면서 맨 앞자리까지 들어가는 장면이 하나의 컷으로 길게 촬영됐다. 마치 다큐멘터리적인 촬영 방식이다. 그런 식의 촬영이 내용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 같다.

윤종빈: 내용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것 같지만 촬영은 매우 스타일리시하다. 무빙이 많고 테크닉이 굉장히 많이 들어간 영화다. 그런데 영화에 빠지게 되면 그런 스타일을 인지하기 힘든 것 같다.

 

 

김성욱: 어떤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가?

윤종빈: 대부분의 장면을 다 좋아하는데 에릭 클랩튼의 ‘Layla’ 후반부가 나오면서 사람들이 핑크색 차 안에 죽어 있는 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일순간 화면이 정지하고, 음악이 흐르고, 죽은 사람이 나오는, 굉장히 영화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니콜라스 필레지라는 마피아 갱단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그런데 영화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너무 리얼해서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가 각색이 됐는지가 진짜 궁금하다. 가령 헨리, 지미, 타미가 마피아를 묻으러 가다가 칼 가지러 집에 들렀는데, 엄마한테 붙잡혀서 밥을 먹고, 엄마는 난데없이 그림을 보여준다.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에피소드인 것 같다. 끊임없이 봐도 이 영화가 참 좋은 게, 전형적인 씬들이 거의 없다. 항상 뭔가를 비틀어낸다. 지미가 새벽에 식당에서 나오면서 잠복하다가 잠든 FBI를 깨우는 장면도 참 재미있다.

 

김성욱: <대부>도 그렇고 <범죄와의 전쟁>도 일종의 범죄자의 공동체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좋은 친구들>의 조직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이 영화의 패밀리는 그렇게 인위적이지도 않고 인정으로 뭉쳐있다는 느낌도 별로 없고, 돈이라는 커넥션에 의해 뭉쳐져서 <대부> 1편에서 보이는 가족적인 느낌과는 굉장히 다르다. 게다가 주인공은 마피아로 보자면 일종의 진골이 아니기에 정통 시칠리 마피아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윤종빈: <대부>는 영화가 좋고 나쁜 것과 상관없이 리얼한 것과는 좀 거리가 먼 것 같다. <대부>의 패밀리는 약간 과장되고 판타지가 있는 패밀리 아닌가. 얼마 전 스콜세지 인터뷰집을 봤는데 <좋은 친구들>, <비열한 거리>(1994) 얘기 할 때는 그냥 자기가 살던 동네가 진짜 그랬다고 하더라. 이태리 이주민들이 모여서 정말 못사는데, 다 갱들이 있고, 갱이 없으면 생활에 불편함을 겪는다고 했다. <좋은 친구들>은 왜 마피아를 할 수밖에 없는지, 집단을 합리화시키는 명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자기가 갱스터 되고 싶은 이유는 줄을 서기 싫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쿨하고 재밌는 화법인 것 같다.

 

관객1: 영화 안에서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많은데 그럼에도 폭력성은 늘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심한 폭력이라고 보는 부분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

윤종빈: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인 장면은 두 씬이 있다. 식당에 찾아온 헨리에게 폴리가 돈 몇 천 주고 관계를 끝내버리는 장면, 그리고 지미가 헨리를 불러서 누구를 죽이고 오라고 부탁하는 장면. 그 장면에선 배우들의 표정도 굉장히 서늘했던 것 같다. 물리적 폭력도 무섭겠지만 좋게 지내던 관계들이 한순간에 탁 끊어지는 게 싸늘하면서도 무서웠다.

 

관객2: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엔 그렇게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범죄와의 전쟁>은 보기에 약간 불편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영화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준이 어느 정도가 적절하다고 보시는지 궁금하다.

윤종빈: 기본적으로 피나 신체가 절단되는 것들을 직접 보여주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영화마다 다른데, 드라마가 있는 영화라면 표현하는 형식들이 주제를 뛰어넘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담담하게 수위를 많이 줄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관객3: 스콜세지는 최근까지도 영화를 찍고 있는데, 스콜세지의 다른 영화들 중에 무슨 영화를 좋아하시는지 궁금하다.

윤종빈: 스콜세지 영화는 거의 대부분 다 좋아한다. 스콜세지가 만든 영화들 중에서 정말 좋아하는 영화는 <카지노>(1995)가 마지막인 것 같다. 그 이후보단 이전 영화들이 더 좋은 것 같다. 최근에 본 <휴고>는 좋았다.

 

정리: 송은경(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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