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별전 - 혁명과 영화]



“지금 현실 안에는 여전히 혁명의 유토피아적 이상이 내재되어 있다”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상영 후 영화평론가 예브게니 마이셀 시네토크





예브게니 마이셀(러시아 『영화예술』 편집인, 영화평론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은 자신의 탄생 50주년을 맞이해 기념 포스터를 제작할 때 한 가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먼저 하나의 큰 원형의 치즈 덩어리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치즈 덩어리 옆에 아주 조그만 생쥐를 그려 넣으면 좋겠다. 또 치즈 덩어리에 조그만 삼각형 모양의 조각을 내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삼각형 조각만큼의 작은 치즈 부스러기를 생쥐 옆에 따로 그려 넣으면 좋겠다.” 그 그림 밑에는 이렇게 해설을 달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큰 치즈 덩어리 밑에는 “영화의 가능성”, 생쥐 밑에는 “지난 50년 동안 영화인들이 들인 노력”, 작은 치즈 조각들 아래에는 “영화인들이 그동안 사용한 재료”. 다시 말해서 영화의 가능성은 치즈 덩어리만큼 무한한데 지난 기간 동안 영화인들은 고작 부스러기 정도밖에 개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본명은 다비드 카우프만이다. 카우프만은 1896년 러시아의 한 지방에서 태어났다. 추후에 이곳은 폴란드에 예속된다. 카우프만은 음악 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는 페트로그라드 신경의학대학교를 나왔고, 그 후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15년부터 지가 베르토프라는 예명을 새롭게 사용했는데 ‘지가’는 우크라이나어로 팽이를 뜻하고, ‘베르토프’는 ‘돌리다’라는 러시아 동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지가 베르토프’는 ‘팽이를 돌린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베르토프의 가족사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면, 그의 삼 형제 모두가 인정받는 영화인이었다. 베르토프의 동생인 미하엘 카우프만은 촬영감독으로 1920년대 초반 베르토프의 작품들을 함께 작업했다. 막냇동생인 보리스 카우프만은 프랑스에 이민을 간 뒤 촬영감독으로 장 비고 등과 작업했다. 장 비고 감독이 이른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보리스 카우프만은 잠시 휴식을 가져야 했다. 그 이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엘리아 카잔의 <워터프론트>,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 등에 참여했다.

베르토프가 영화계에 입문한 것은 1917년이다. 10월 혁명이 일어난 해와 동일하다. 베르토프는 1917년에 모스크바 영화위원회 뉴스릴 부서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18~19년에는 『주간영화』라는 잡지의 편집인으로도 활동했고, 1920년부터는 『키노-프라우다』라는 영화잡지를 발간한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다양한 영화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시대 특성상 영화 스튜디오가 빠르게 생겨나고 빠르게 사라지던 때다. 쿨트 키노, 국립영화제작소 등에서 일했다. 활동 초기에 베르토프는 영화인으로서 전문 영역을 인정받은 유망한 사람이었다. 1924년에 만든 <키노아이 Kinoglaz>라는 영화가 파리에서 열렸던 세계박람회에서 메달과 상장을 받았다. 극영화를 아예 찍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42년에는 <전선아, 너에게>라는 극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밖에 애니메이션도 만들었고, 1930년대에는 유성 영화를 작업하기도 했다. <돈바스 교향곡 The Donbass Symphony>이라는 유성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4년 <돈바스 교향곡>이 발표된 지 4년 후에 <레닌에 대한 세 가지 노래>라는 영화를 발표한다. 이 영화는 신문 『프라우다』에서 ‘전 세계에 대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베르토프는 청각적인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서로 다른 소리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연주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세계가 그려진다고 생각했다. 소리가 나타내는 색채의 다양성은 사람들이 평소에 듣는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베르토프의 작품명을 보더라도 음악적인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돈바스 교향곡>, <아가씨의 노래>, <자장가> 등이 그렇다. 채플린은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보고 나서 베르토프를 작곡가로 평하기도 했다. 유년 시절부터 베르토프는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를 기록하고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연에서 나는 소리는 물론 휘파람, 종소리, 입맞춤 소리, 톱질 소리, 기차 소리 등을 다 기억하고 기록하려 했다. 당시는 불협화음과 관련된 아방가르드 사조들이 발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르토프의 영화에 나오는 리듬은 당시의 아방가르드 음악인들이 사용했던 리듬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인위적인 노이즈를 음악이라고 평가하는 건 당시에는 정말 혁신적인 것이었다.


베르토프의 또 다른 관심 영역은 시(詩)다. 그는 시를 소리의 측면에서 다시 해석했다. 시가 가진 음률과 조화에 관심을 가졌다. 음악과 시에 관심을 가졌던 베르토프에게 영화는 세상의 소리를 영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적절한 재료였다. 그런 측면에서 베르토프와 에이젠슈테인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에이젠슈테인도 영화를 통해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하려 했던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젠슈테인은 영화는 결국 흥미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베르토프는 인간이라는 소재 없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르토프는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더 전념했다. 심지어 그는 에이젠슈테인이 만들었던 극영화들을 쓸모없는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베르토프는 영화를 향한 엄청난 열의를 가진 감독이었다. 미하엘 카우프만을 비롯한 많은 스탭들은 때로 목숨을 내놓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한번은 베르토프가 1.5층 높이의 건물에서 직접 뛰어내리면서 촬영 감독에게 카메라를 최대한 빨리 돌리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 점프 영상을 슬로우 모션으로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상세한 이미지를 기계를 통해 볼 수 있었고, 물론 베르토프의 공포에 질린 얼굴도 함께 담겼다. 이렇듯 베르토프는 카메라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바로 여기에서 ‘키노-아이’ 이론이 등장한다. 그런데 ‘키노-아이’는 카메라를 통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본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해석하고 변형시키는 것을 전부 포함한다. 1922년에 베르토프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키노키(kinoki)라는 집단을 만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다. 성명서는 “우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우리는 영화 촬영 대상 목록에서 인간을 잠시 배제한다. 인간은 자신의 움직임을 충분히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는 흉측하게 몸을 뒤트는 한 시민을 기계를 통해 전기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길을 향할 것이다. 새로운 신(新)인간, 다시 말해 더 이상 미숙하고 무거운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인간은 기계의 정확하고 가벼운 움직임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때야 인간은 비로소 영화 촬영에 유용한 대상이 될 것이다.” 건방진 어투로 들리기도 하지만 베르토프는 이 성명을 통해 기존의 영화 기법과 예술들은 사실상 타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극영화는 더는 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며 다큐멘터리가 우리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했다.

키노키는 1922~25년까지 『키노-프라우다』라는 잡지를 제작한다. ‘키노-프라우다’, 다시 말해 ‘영화-진실’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간하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세계를 공산주의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베르토프는 세계의 움직임을 기록할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는 단순히 소련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아우르는 범위였다. 베르토프는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친분이 두터웠다. 1923년에 마야코프스키가 발간한  『레프』라는 잡지에 베르토프의 “키노키-혁명”이라는 성명서가 실렸다. 그 성명서에는 “내가 키노-아이다. 내가 아담보다 완전한 인간을 창조할 것이다. 수천 명의 다양한 인간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1924년에 베르토프는 <키노아이>라는 영화를 제작하는데, 여기에 ‘뜻밖의 삶’이라는 부제를 단다. 베르토프의 말에 따르면 처음으로 배우, 스튜디오, 시나리오, 무대 장식, 의상 없이 만들어진 영화다. <키노아이>라는 영화 후에 <일리이치가 없는 첫 10월 The First October Without Ilich>이란 영화를 만든다. 이 영화는 레닌의 죽음을 전 세계를 강타하는 사건으로 묘사했고, 군중들의 마음속에 레닌의 영혼이 들어가는 장면도 집어넣었다. 베르토프는 이 영화의 필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색칠해서 색채가 있는 영상을 만들어 내려 했다. <키노아이>와 <일리이치가 없는 첫 10월>에 대한 언론 평이 좋았기 때문에 베르토프는 계속해서 <소비에트여 걸어라 Forward, Soviet!>(1926), <세계의 1/6 A Sixth of the World>(1926)을 제작한다. <소비에트여 걸어라>는 기계들의 발레라고 보면 된다. 트랙터, 증기기관차, 바퀴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통해 소련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산업화를 진행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베르토프가 형식주의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큐멘터리가 다큐멘터리 같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르토프는 어떤 도시를 촬영한 영상을 이용해 다른 도시를 설명하기도 했는데, 이건 당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 달랐다. 다큐멘터리의 정의에 대한 논쟁은 당시에도 있었고, 베르토프는 ‘뭘 촬영하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베르토프는 어떤 대상을 촬영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팩트가 아니라고 답했다. 촬영한 영상에 촬영 날짜와 제목을 적지 않는 이상 그 영상은 사실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논쟁이 커지면서 베르토프는 스튜디오에서 해고를 당한다. 공식적인 해고 이유는 차기작의 시나리오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이제 막 비상을 시작한 아방가르드 작가의 날개를 꺾으려는 시도였다. 그 시점에서 키노키는 해체된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에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제작했다. 그는 이 영화를 여러 도시에서 촬영했다. 어떤 특정한 도시의 현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도시’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이 영화에는 허다한 무리의 사람들, 기차들, 기계들의 모습이 나온다. 당시 영화계가 사용할 수 있던 최고의 영화기법을 사용하며 도시의 심포니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많은 영화인들이 칭송하는 걸작이지만 당시에는 혹평을 받았다. 그다음 만든 영화는 <돈바스 교향곡>(1931)이었는데 <카메라를 든 사나이>보다 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채플린이 이 영화를 높이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이 영화가 심포니가 아닌 불협화음이라고 이야기했다. 1935년에는 <레닌에 대한 세 가지 노래>를 발표했다. 루이 아라공과 해롤드 로이드는 소련이 자랑할 수 있는 영화라고 이 영화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1930년대 소련에는 스탈린이라는 아주 중요한 관객이 있었다. 그의 평가가 영화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했다. 그의 눈에 드는 것은 베르토프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레닌에 대한 세 가지 노래>는 조기 종영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 스탈린이 단 한 장면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스탈린은 이후 베르토프에게 붉은 별 훈장을 수여한다. 그리고 베르토프가 이 제스처를 나름대로 해석했는지 다음에는 여자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 돈이 어떻게 한 여성을 타락의 길로 이끄는지 그린 영화였다. 자본주의 국가의 여성들이 돈을 위해 타락하는 상황과 소련 여성들의 행복한 삶을 대비시키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는 단 한 명의 남성도 등장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수정을 거쳤고 단 한 명의 남자가 아버지로 등장하는데 그는 스탈린으로 형상화된다. 이 작품이 결국 1937년에 <자장가 Lullaby>라는 이름으로 개봉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현인을 만나러 모스크바로 향한다. 그는 당연히 스탈린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여성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데, 그중 몇 명은 스탈린과 손을 잡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신비로운 마법의 힘으로 여성들이 임신하게 된다. 어떤 여성이 스탈린에게 손을 대면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하늘에서 정자를 형상화한 낙하산이 내려온다. 그다음 장면에서는 많은 여성이 차례로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퀀스가 하나의 노래로 묶인다. “조국이 너를 껴안아준다. 크렘린 성벽 뒤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모두가 사랑한다. 너에게 있어 단 하나의 기쁨과 행복은 그로부터 받은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는 “스탈린, 오 위대한 그 이름이여”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런데 스탈린은 직접 자신을 언급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결국 <자장가>는 5일 만에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제작된 이후 영화제작소 소장은 총살을 당했고 베르토프는 해고를 당했다.

베르토프는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직접 참전하려 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고, 평생 전쟁에 대한 뉴스 영화를 편집해야 했다.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탄압받았지만 여전히 공산당 지도부는 그를 싫어했다. 2차 대전 중 유대인학살이 일어났을 때 그의 영화는 다시 한 번 검열을 당했고 모두 반공산주의적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 형식주의에 싸여 있고, 소부르주아적이라는 죄목을 받았다. 베르토프는 인민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키노-아이를 통해 인민들을 현실에서 떨어뜨리려 틈새를 찾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일간 뉴스』라는 영화잡지를 편집하며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또 일상을 보장받기 위해 맑시즘과 레닌의 이론을 배우는 강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베르토프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자 “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가 베르토프는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베르토프는 1954년에 세상을 떠났고, 프랑스의 영화인들은 그를 칭송하였다. 특히 고다르는 ‘정치적인 영화가 있고, 정치적으로 촬영한 영화가 있는데 베르토프는 후자에 해당한다’고 말하며 베르토프야말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에는 소련 내부에서도 베르토프의 명예 회복 움직임이 시작된다. 1966년에는 베르토프의 글을 모은 책이 나오기도 했고 모스크바에서 베르토프의 회고전도 열렸다. 당시 젊은이들은 아마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접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은 영화인들이 베르토프를 자신의 스승으로 부른다. 프랑스 영화인들, 고드프리 레지오(Godfrey Reggio), 라스 폰 트리에 등이 그렇다.

영화인들은 선배들이 일궈놓은 자산을 반드시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에이젠슈타인은 영화인들이 50년 동안 치즈 덩어리 속에서 겨우 작은 조각만을 얻어냈다고 평가한다. 그가 보기에 당시 영화인들이 많은 것을 놓쳤다고 느꼈겠지만, 우리는 영화의 선구자들이 일궈놓은 유산을 받아 배우고 있다. 영화의 선구자들이 영화의 수평선을 그렸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시야를 얻었다는 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선구자들이야말로 큰 치즈 덩어리를 다 먹어치운 사람들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베르토프가 오늘날 영화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자. 그 당시에는 사상이라는 굴레가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좌파예술인은 보통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사실상 자유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20세기 전반의 많은 인재들은 그들의 유능함과는 별개로 대개 전체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기계의 눈으로 현실을 보겠다고 주창했던 베르토프도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엔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베르토프는 극단적인 반휴머니즘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적 반휴머니즘을 표방했던 베르토프는 인간을 이상적인 기계로 변형하고 만들어가려 했다. 이것이 그의 영화에 나타난 유토피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그만의 독특한 시도들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에이젠슈테인은 자신이 영화감독이 되었던 과정을 “연극에서 영화로”라는 글을 통해 말한 적 있다. 그는 연극에서 영화로 전환했다. 베르토프는 1907년 무렵 페테르부르크에서 2년간 생리학연구소에서 일한 다음 영화로 전환했다. 이런 독특한 경력이 그의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예브게니 마이셀 생리학이나 의학은 당시 많은 영화인에게 영향을 끼쳤고, 베르토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르토프는 영화를 단순히 촬영하는 것을 넘어 수용자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했던 감독이다. 아마 생리학에서 배운 내용을 영화에 적용했을 거다. 에이젠슈테인이나 베르토프는 다빈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가장 좋고 유능한 것을 뽑아 그것들을 모두 취하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련에는 검열이라는 장치가 엄격했지만 많은 예술인들이 지식을 추구했다. ‘소련인’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을 일컬었고,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가장 뛰어난 최신의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다들 생각했다.


관객 1 고드프리 레지오나 고다르의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 베르토프에게 받은 영향을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예브게니 마이셀 레지오는 영화의 서사적 측면에서 베르토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레지오와 베르토프는 영화를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이야기로 보지 않고 어떤 상태의 흐름으로 보았다.

고다르는 영화를 정치적인 영화와 정치적으로 촬영한 영화로 나눈다. 정치적인 영화는 정치에 대한 주제를 담은 영화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촬영한 영화는 현재를 자기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는 영화를 말한다. 베르토프는 작업을 통해서 항상 무언가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그가 자평했듯이, 영화감독들을 위한 영화다. 고다르나 지가 베르토프 그룹에게 베르토프의 영화가 중요했던 건 그가 ‘지적(知的)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훗날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큰 규모의 연출을 하지 않고 쉽게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활용해서 영화를 제작한다. 당시 고다르와 그의 그룹들은 길거리 모임들, 노동자의 모습 등을 다뤘다. 베르토프와 고다르를 이어주는 건 공산주의적 사상과 실험적인 영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관객 2 스탈린의 전체주의와 베르토프의 전체주의는 다른 것이 아닌지?

예브게니 마이셀 당시 전체주의자들은 객관적인 이상을 추구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동원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상을 달성시킨 수단은 모두 합리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과 베르토프가 유사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관객 3 당시 문예인들 사이에 있었던 아방가르드 영화와 관련된 논쟁에 대해 듣고 싶다.


예브게니 마이셀 1910~30년대는 이론가들 사이에 각종 논쟁이 많았던 시기다. 당시 유명한 감독들은 모두 동시에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들이 영화의 선구자인 이유이다. 끊임없이 성명을 발표하고 다른 감독의 영화를 비판했다. 논쟁이 허다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무척 격렬한 활동이었다.

베르토프는 상상해낸 이야기, 즉 극영화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보는 세계는 굉장히 거대하고 무질서한 세계였다. 그 세계를 영화를 통해 정리하고 구획하려 했다. 개인의 행복을 표현할 겨를이 없었다. 현대의 사람들이 1920년대 소련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련이 신생 사회였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이 열정적으로 국가 건설에 참여했던 사회다. 그리고 베르토프는 예술인으로서 영화를 만들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그런 그에게 극영화란 불필요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는 그가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흥행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더 큰 성과를 거둔 건 에이젠슈테인이다.


김성욱 당시 러시아 영화는 한편으로는 할리우드 영화와 대적하고 있었고, 최초의 ‘포스트 시네마’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영화로 담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요구가 있었고, 대중의 요구도 있었으며, 영화인들이 가진 의식적인 아방가르드적 목표도 있었다. 이 세 개의 불협화음이 당시 소비에트 영화감독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에이젠슈테인도 나중에는 형식주의자로 몰렸고, 보리스 바르넷은 결국 자살을 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서 이 당시의 영화들을 어떤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예브게니 마이셀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다. 1920~30년대 소비에트 영화가 세운 공은 질문자가 말했듯이 할리우드 영화의 대체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1920년대에 발명됐던 모든 영화적 기법들은 공산주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인데도 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비에트 지도부는 그런 영화인을 모두 형식주의자로 비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들은 당시 소비에트가 어떻게 설립됐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자산이다.

두 번째로는 그때 고안된 다양한 영화적 기법들이 지금의 영화 언어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 물론 당시 영화들은 프로파간다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영화적 스타일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화를 통해 더 복잡하고 미묘한 세계관이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다양성을 잃지 않았다. 개별 작가들이 저마다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김성욱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브게니 마이셀 한국에서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는 점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지금 러시아는 후기 푸티니즘을 겪고 있다. 지금의 러시아는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에만 초점이 맞춰진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는 혁명에 대해, 혁명적 예술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한다.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가 승리한 사회를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혁명의 유토피아적 이상이 내재해 있다고 말하고 싶다. 혁명기 예술에 관심을 가져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자리는 나에게 굉장히 큰 영광이다.


일시 I 3월 11일(토) 오후 2시

정리 I 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I 주민규 자원활동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별전: 혁명과 영화]

   

'혁명과 아방가르드' - <샤갈-말레비치>(알렉산드르 미타, 2014) 상영 후 강연





알렉산드르 미타 감독의 최근작 <샤갈-말레비치>(2014)의 제목은 흥미롭다. ‘샤갈’과 ‘말레비치’가 그 어떤 술어나 수식어, 하물며 접속사도 없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어의 줄표(-)가 가진 계사(copula)로서의 기능을 생각해 본다면 이 짧은 제목 ‘샤갈-말레비치’는 심지어 ‘샤갈은 말레비치다’로도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이는 알렉산드르 미타 감독이 이 영화를 단순히 ‘샤갈과 말레비치’로, 다시 말해 그들이 함께 활동하고 대립에 이르며 결국에는 샤갈이 자신의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전기적 사실만으로 그리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샤갈-말레비치>는 러시아 제국의 변방이었던 비텝스크 출신 화가 마르크 샤갈이 프랑스에서 돌아와 고향에 머물렀던 짧은 몇 년 동안의 사건에 집중하면서 러시아 혁명과 혁명의 소용돌이 가운데 놓인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하는 영화다. 그러나 푸르스름한 파스텔톤의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샤갈의 그림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어쩐지 핏빛 깃발이 휘날리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과격한 러시아 혁명을 그의 삶과 연결 짓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샤갈은 혁명과 관련된 그림도, 혁명적인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근대적 회화가 유럽에 비해 늦게 발달한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민중과 함께 했던 이콘, 루복 같은 원시적 예술 형식이나 러시아 전통 문양의 장식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였던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부르주아 예술의 정점이라 할 페테르부르크의 예술세계파가 추구한 유미주의와 데카당스 미학을 흡수했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 농촌의 풍경과 민중들의 삶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에서 혁명의 외침을 듣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그것은 고양된 영혼이 누리는 절대적 자유를 향한 꿈과 의지로 충만하다. 오히려 주변의 삶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샤갈의 시선이야말로 그가 혁명을 지지하고 혁명에 의해 변화된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도록 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이었다. 진정한 실재를 그리기 위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낡은 현실의 모든 껍데기들을 파괴하고 해체하려 했던 그의 급진적 시도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절대적 암흑과도 같은 대표작 『검은 사각형』으로 수렴되었다. 절대주의라 명명된 이 검은 사각형은 분명 죽음과 온전한 파괴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그 검은 표면은 보이지 않는 절대적 비-대상의 존재를 선언하고 그것이 회화적 표면 위에 현전하게 한다. 검은 사각형에 이어 나타난 흰 사각형은 이러한 절대적 대상을 향한 초월을 지시하는 사건이 된다. 그의 창작 행위는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붉은 쐐기가 흰 원이 이루는 완결된 세계를 뚫고 들어가는 그 파열의 순간과도 같았다.



샤갈이 삶의 의지와 에로스의 예술가였다면 말레비치는 죽음 충동과 타나토스의 화신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다른 두 예술가를 비텝스크라는 특수한 공간에 공존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혁명이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이들은 예술을 통해 각자가 꿈꾸는 혁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들의 그림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을 때조차 혁명에 대한, 혹은 혁명을 향한 퍼포먼스가 되었다. 세계에 대한 재현이 아닌 세계 그 자체가 되는 것, 재현 불가능한 다른 세계의 형상을 예술 텍스트 안에서만이라도 명멸하는 순간으로 계속해서 체험하게 하는 것. 이들의 예술은 소멸을 마주한 채로 끊임없이 존재를 강요하는 집요한 현재성으로 채워져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세계상을 넘어서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해 치열하게 내달린 혁명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정수는 이미 세워진 기념비를 부수고 적극적으로 폐허를 창조하는 무자비한 힘, 곧 죽음 충동에 가깝다. 완결된 혁명이란 죽음과 무에 대한 선언일 수밖에 없다. 에이젠슈타인의 <10월>에서 혁명은 군중이 치켜 든 낫과 머리가 잘려 나가는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이 병치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미 완성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혁명의 운명을 함께한다. 그 가운데서 폭발하는 힘과 포효하는 외침을, 변화의 순간을, 생성을 향한 비명을 그린다. 여기에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두 명의 전위적 예술가인 샤갈과 말레비치의 서로 다른 삶은 그러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혁명으로 이끌었던 예술창조를 통한 세계 창조라는 굳은 신념을, 결국 이를 져버리지 못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를 향한 꿈과 그것의 좌절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지연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