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시네바캉스 서울/Feature'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8.02 마이클 치미노, 시대를 잘못 타고난 이상주의자
  2. 2011.07.29 ‘문제의 올바른 제기’로서의 문학
  3. 2011.07.25 데자뷰, 혹은 되찾은 시간

마이클 치미노는 바로크적 스타일과 거침없는 직관에서 나온 솔직한 화술로 할리우드영화의 지평을 넓힌 감독이었다. 그의 대담한 표현은 현대의 할리우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너무 일찍 주류에서 추방당했다. 그의 성공과 좌절은 현대 할리우드의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1980년에 개봉한 마이클 치미노의 대작 서부극 <천국의 문>은 촬영 도중에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올랐다. 애초에 1천1백만 달러의 예산이 책정된 이 영화는 촬영 기간 동안 위대한 스펙터클을 만들려는 치미노의 과욕 때문에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최종 제작비는 3천5백만 달러였고 당시 제작비 최고 기록이었다. 게다가 치미노가 마침내 내놓은 완성판의 길이는 자그마치 5시간 25분이었다.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대경실색해서 수정판 편집을 요구했고 치미노는 영화를 3시간 45분 분량으로 줄였다. 그러나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대한 모든 평론가들은 누가 더 잘 빈정거리나 경쟁하듯이 <천국의 문>을 공격했다. 그들은 <디어 헌터>(1978)로 벼락출세한 풋내기 감독 치미노의 과욕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태도였다. 그들의 눈에 <천국의 문>은 뉴할리우드 시대의 자랑할 만한 성과였던 ‘리틀 필름’, 곧 적은 자본으로 작가의 예술적 비전을 담는 영화의 흐름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보였다. <천국의 문>이 미국 서부 신화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자 해체라는 것보다는 <죠스>(1975)와 <스타워즈>(1977) 등의 팝콘 블록버스터에 무의미하게 맞서는 대작 콤플렉스의 산물로 비쳤던 것이다. 평론가 폴린 카엘은 <천국의 문>이 ‘멍하게 만들 만큼 갈지자걸음을 걷는 영화’라고 냉소했다. <천국의 문>은 명쾌한 이야기와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예술적 과대망상으로 가득 찬 쓰레기처럼 보였다. 예매제를 실시하고 무제한 상영하기로 계약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뉴욕을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개봉하자마자 곧 바로 간판을 내렸다. 첫 개봉 후 일곱 달 만에 제작자의 지시를 받은 치미노가 2시간 29분으로 길이를 줄여 재개봉했지만 또다시 2주 만에 간판을 내렸다.

현대판 블랙리스트에 오른 감독

<천국의 문>은 할리우드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이후로 누구도 예술적 비전으로 가득 찬, 감독의 이름값에 기댄 영화에 투자하지 않게 됐다. <천국의 문>의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하고도 고작 15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둠으로써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로 영화 한 편 때문에 파산하고 MGM에 매각당하는 망신을 당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한때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버라이어티’의 충고를 받아들여 액션을 살리고 원판의 불행한 결말과는 달리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재편집할 것을 고민했다. <천국의 문>이 <존슨 주의 전쟁>이란 제목을 다시 달고 재개봉할 것이라는 소문도 떠돌았으나 <존슨 주의 전쟁>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마이클 치미노의 신작도 그 이후로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천국의 문> 이후 치미노는 고작 네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을 뿐이다. 치미노는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천국의 문> 제작자였던 스티븐 바흐는 <천국의 문>의 제작 후일담인 <파이널 커트>를 출판하면서 치미노를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불렀다. 치미노는 자아 도취병 중증 환자에다 통제 불능의 말썽꾸러기였다. 그러나 바흐는 <파이널 커트>의 개정판에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치미노도 벌써 50대에 접어들었다. 그는 시스템에 짓눌린 불운한 천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한 비극의 주인공 역할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이제 치미노도 말년의 반전을 꾀할 시점에 왔다.'
바흐의 예언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치미노는 시대를 거역하는 위대한 걸물의 풍모를 갖고 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평론가 로빈 우드에 따르면, 치미노는 "미국영화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가장 멋진 형식의 혁신자다. 치미노가 만들어낸 구조를 비평가들이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도 바로 이 혁신성 때문'이라고 평했다. 이를테면 치미노의 대표작인 <디어 헌터>의 초반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철강 도시 클레어튼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젊은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락은 치미노식 화술의 결정판이다. 베트남에 파병되기에 앞서 마이크, 닉, 스티븐을 축으로 한 젊은이들은 사슴 사냥을 가고 스티븐의 결혼식에서 한바탕 떠들썩한 잔치를 벌인다. <디어 헌터>의 시사회에서 관계자들은 스티븐의 결혼식 장면이 너무 길다고 줄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 장면을 영화에서 많이 쳐내자 이상하게 영화의 힘이 떨어져버렸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보여도 이 장면은 러시아계 미국인들의 삶과 정서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 내러티브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이야기체 영화의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의 초기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1915)은 남북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그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로 치환함으로써 개인적 내러티브가 관객의 흥미를 붙잡아둘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발견했다. 하지만 치미노는 이 장구한 이야기체 영화의 전통에 관심이 없다. <천국의 문>에서 두 남자 주인공과 한 명의 여자 주인공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치미노는 영화의 반이 지날 때까지 그 삼각관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중반이 넘어서야 관객은 그들이 삼각관계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야기 전개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세부 묘사들을 마구잡이로 우겨넣고 역동적인 카메라 연출로 박력 있게 끌고 간다. 인물간의 관계, 상황의 소개, 갈등의 전개와 해결이라는 고전적 드라마의 정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부들을 모아놓고 되풀이해 보여주면서 질서 정연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많은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우리의 삶을 영화 속에 재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미국 신화에 비치는 도발적 만가


치미노는 내러티브보다는 영화의 주제적, 상징적 구조를 세우는 데 능하다. 로빈 우드에 따르면, 그것이 치미노가 영화 형식에서 이룬 혁신이다. <디어 헌터>는 클레어튼-베트남-클레어튼-베트남-클레어튼으로 공간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공간의 교체가 반복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각 이야기 단락의 길이는 점점 줄어든다. 이는 점차 이야기 단락이 점차 줄어드는 형식의 원칙으로 내용을 강조하는 뛰어난 수법이다. 영화 초반부에 그처럼 활기찬 젊은이들이었던 마이크, 닉, 스티븐이 베트남에 간 이후로, 닉은 목숨을 잃고 스티븐은 다리를 잃었으며 마이크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잃었다. 공간을 교차, 감축시키면서 치미노는 이야기보다는 장대한 역사와 인생의 비유를 직조해낸다. 사슴 사냥을 위해 조준하는 총 한 방과 베트콩에게 붙잡혀 러시안 룰렛 게임을 강요당할 때, 총 한 방이라는 모티프를 교차시키면서 치미노는 관례적인 이야기 수법 이상의 것을 보여준 것이다.
<디어 헌터>는 도덕적으로 선량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에 가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이야기를 보여줬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을 정치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아예 포기했다고 좌파 쪽으로부터 비난을 듣기도 했다. 클레어튼 단락이 끝난 후 갑작스럽게 베트남 전쟁 단락으로 넘어가면 방공호에 숨어 있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베트남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보고 격분한 마이크는 화염 방사기로 그 베트남 병사를 죽여 버린다. 많은 관객들이 마이크가 죽인 베트남 병사를 베트콩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병사는 사실 미군과 같이 싸운 베트남군 병사였다. 이는 서구인의 눈으로 동양인을 낯선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전형적 수법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들었던, 베트콩들이 미군 포로를 데리고 러시안 룰렛 게임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허구적 조작이다. 이런 맥락을 따라가면 영화의 말미에 살아남은 주인공들이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고 술집에서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부르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디어 헌터>는 선량한 미국의 젊은이들, 문명화된 백인들이 야만의 땅에서 자신들의 휴머니즘에 상처를 입고 회복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다는 백인 중심적 한계를 드러낸다. 뜻밖에도 평론가 로빈 우드는 다른 좌파 이론가들과는 달리 그런 치미노를 다르게 본다. ‘자기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치미노의 위대함’이고 그런 솔직한 태도 덕분에 치미노는 복합적으로 풍부하게 미국의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드의 고전영화가 이상적인 미국의 개념이 세워지는 순간에 놓인 미국의 신화에 관심을 가졌다면 치미노는 이상적인 미국의 개념이 해체되는 순간에 놓인 미국의 신화에 관심을 모은다. 이 영화에서 공동체의 결속을 보여주는 아름답고 따뜻한 순간들은 존 포드의 서부 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온기를 풍기지 않는다. 초반 결혼식 장면에서 신랑인 스티븐은 신부인 안젤라가 대변하는 가정의 세계와 사슴 사냥이 대변하는 남성 친구들과의 우정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 심지어 그는 안젤라와 한 번도 동침하지 않았는데 안젤라는 임신한 상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불길한 전조처럼 신랑 신부가 잔을 나눌 때 포도주가 한 방울 흘러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붉은빛으로 적신다. 결혼식의 춤 파티 장면도 존 포드의 영화에서처럼 고도로 조직되고 정해진 패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불확실한 질서로 넘쳐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주인공 마이크는 그 거대한 붕괴의 순간을 목격하는 영웅이다. 마이크는 카리스마가 강하고 다른 사람에 비해 우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본질적으로는 고독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문명에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만 결국에는 미국 문명의 가치를 보호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한다. 영화 말미에 마이크는 러시안 룰렛 게임에 중독돼 함락 직전의 사이공에서 돈을 걸고 룰렛 게임을 하고 있는 닉을 구하려 사이공에 가지만 닉은 허망하게 죽는다. 마이크는 삶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친구들은 고인이 되거나 폐인이 됐고 고향은 풍비박산 났다. 귀향한 마이크는 다시 사슴 사냥을 나가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사슴의 맑은 눈을 보고 총구를 내리는 이 장면을 두고 뻔한 휴머니즘의 감상으로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맥락에서 보면 마이크는 이미 인생에서 방아쇠를 당길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단 한번 승부하는 것이 인생이다.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디어 헌터>는 미국 신화의 만가이자 청춘의 만가이기도 하다.

<천국의 문>, 거장이 될 뻔한 감독의 원죄

마이클 치미노가 데뷔 당시부터 꿈꾼 프로젝트였던 <천국의 문>은 미국 서부극 신화의 장대한 붕괴라는 치미노 특유의 비전을 만천하에 보여줄 만한 위대한 업적일 수도 있었다. ‘존슨 주의 전쟁’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천국의 문>은 일찍이 미국에 도착해 기득권을 가진 농장주들과 뒤에 도착한 이민 농부들 사이에서 일어난 백인들끼리의 학살을 다루면서 아메리칸드림의 원죄 의식을 장쾌하게 묘사했다. 유럽의 평단은 절찬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악의적 비난을 산 이 영화는 그대로 치미노의 원죄가 돼버렸다. 치미노는 5시간 25분 분량의 감독 편집판을 자신의 집에 소중히 보관해두었으며 그 오리지널 영화는 칸에서 상영돼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비슷한 수모와 복권 절차를 밟았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와는 달리 <천국의 문>은 아직까지 미국에서 명예 복권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인들에게 서부 시대의 역사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처절한 유혈극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치욕의 얼굴인 것이다.
<천국의 문> 이후 치미노는 계속 비틀거렸다. 1985년 올리버 스톤의 각본으로 만든 <이어 오브 드래곤>(1985)은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주의라는 비난을 또 들으면서 극장 흥행에서 참패했다. 미키 루크가 주연한 이 영화는 <프렌치 커넥션>(1971)이 그랬던 것처럼, 이념적 지평과 상관없이,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현장과 그에 맞서는 백인 우월주의자 형사의 모습을 가감 없이 제시한다. 유럽에선 절찬했지만 미국에선 냉대 받은 이 영화 이후로 미국에 발붙이기 어렵게 된 치미노는 유럽 시장을 노리고 디노 드 로렌티스의 제작으로 1987년 <시실리안>(1987)을 찍었다. 그러나 1백46분 분량의 감독판 편집본 대신 다시 1백 15분 분량의 축약판으로 공개된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도적 살바토르 줄리아노의 성격을 밋밋한 포커페이스로 연기한 주연 크리스토퍼 램버트의 우스꽝스런 연기만큼이나 작품성이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이클 콜린스>를 연출하겠다는 일련의 기획이 계속 거절당하면서 치미노가 마지못해 만든 1991년 작품 <광란의 시간>(1990)은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었으나 원작과 비교당하면서 조소만 샀다. 199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선체이서>가 공개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치미노의 신작을 기대하지 않게 됐다. 실제로 <디어 헌터>와 <천국의 문>을 그토록 그럴듯하게 만들어줬던 혼란스럽고 풍부한 이미지가 <선체이서>에는 보이지 않았다.

조숙한 대가, 시대의 희생양


시대를 잘못 타고난 치미노는 불운했다. <천국의 문>은 시대착오적 스펙터클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감성으로 전쟁 영화를 연출해 마치 미치광이가 찍은 것 같은 해방감을 줬던 <1941>(1979)을 만들었고 마틴 스콜세지는 재즈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은 153분짜리 대작 <뉴욕, 뉴욕>(1977)을 만들었다. 코폴라는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조에트로프 스튜디오에서 찍은 초호화 뮤지컬 <원 프럼 더 하트>(1982)는 <천국의 문> 못지않게 흥행에 참패했다.
뉴할리우드 시대의 감독들은 그렇게 몰락했다.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할리우드의 제왕으로 떠오르는 순간에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감독들은, 스콜세지와 드 팔마를 빼면, 대다수가 몰락했다.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종언을 고하는 시점에서 위대한 할리우드의 부활을 꿈꿨던 패기만만한 감독들의 '표현 과잉' 시대는 짧게 끝났다. 그들은 자기 세대의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가 되고자 했으나 그것으로 종말이었다. 특히 마이클 치미노의 몰락은 할리우드 르네상스의 몰락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의 몰락으로 할리우드는 새로운 표현법과 이상주의 정신을 이식받을 뻔한 기회를 놓쳤다. 로빈 우드의 표현대로, “치미노는 좋건 나쁘건 간에 이상주의와 그것을 믿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 치미노의 이상주의는 현대문명이 폐기 처분해 버렸지만 여전히 숭고함과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 대한 탄식을 만들어낸다”.

글/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안톤 체호프의 문학 세계

모스필름 특별전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러시아의 최대 제작사 모스필름의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다. 이번에는 특별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 겸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다섯 편 <결혼> <베짱이> <철 지난 꽃> <갈매기> <6호실>을 소개한다. 이에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의 오원교 HK연구교수가 안톤 체호프의 문학세계에 대한 소개 글을 보내왔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단편 소설가이자 새로운 드라마 형식을 창조한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960년 1월 17일,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의 작은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파벨 예고로비치(Павел Егорович)와 예브게니야 야코블레브나(Евгения Яковлевна) 사이의 5남 1녀 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규모 잡화상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예술과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은 개성이 강하고 다소 전제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충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현모양처였다. 체호프는 후에 “재능은 아버지로부터, 정신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라고 술회하였다. 1876년 아버지의 경제적 파산으로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체호프는 고향에 혼자 남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마쳤다. 어린 시절 타간로그에서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은 작가의 세계관과 자연관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체호프 문학이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었다. 1879년 작가는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의 입학을 계기로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지만, 궁핍한 가정 형편 때문에 고단한 대학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체호프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순수한 예술적 동기라기보다는 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였다. 1880년 3월 잡지 <잠자리>에 실린 첫 작품을 시작으로 ‘안토샤 체혼테’, ‘환자 없는 의사’, ‘쓸게 빠진 인간’ 등의 필명으로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단편소설, 콩트, 단막극, 만평을 썼다. 이 시기에는 출판사의 요구로 대부분 짤막한 작품들을 썼는데, 이러한 극도의 간결성에 대한 추구 — “간결함은 재능의 누이이다” —는 장차 단편작가 체호프의 고유한 시학적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84년에 의학 수업을 마친 체호프는 이후 수년간 간헐적으로 의술 활동에 종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병행해 나갔다. 의학을 비롯한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 강하게 지속되었으며, 특히 의학 수업과 의술 경험은 그의 작품들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의술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세밀하고 직접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했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삶의 중대한 고비에 선 인간의 깊은 심리를 파고들면서 공감을 표하되 감상에 젖지 않고 냉혹하리만큼 명징한 객관성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훌륭한 의사와도 같은 작가의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체호프는 과학자로서의 신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작가는 화학자와도 같이 객관적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1885년 원로 작가 그리고로비치(Д.В. Григорович)의 충고와 격려, 당대의 유력 신문 <신시대>의 발행인 수보린(А.С. Суворин)과의 만남을 계기로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체호프는 점차 초기의 희극적이고 풍자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보다 진지한 문학성을 지향하게 된다. 1886년 단편 <추도식>에서 처음으로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체호프는 <우수>, <아뉴따>, <반까>, <자고 싶어> 등에서 일상의 외적 희극성을 넘어 존재의 복잡한 심연으로 천착해 들어가 당대 러시아인들의 삶의 본질적 측면들을 예리하게 반추한다. 그는 자신의 인물들을 결코 치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짓누르는 온갖 삶의 고뇌와 인간적 실상을 들추어냈다.



1888년 체호프는 러시아 남부 돈 강지역의 여행에 기초해서 자신의 서정적 산문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인 중편소설 <초원>을 집필하면서 확연히 문학적 전환을 이뤄냈고, 마침내 단편집 <황혼녘에>로 러시아 학술원에서 푸슈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문단의 기대와 주목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이시기에 체호프는 산문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극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바노프>, <숲의 정령> 등의 작품은 절제된 체호프적 드라마 기법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했지만, 주위의 일면적 이해와 부당한 평가와는 별도로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이미 적지 않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문학적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체호프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심각한 고뇌에 빠지고 근본적인 자기 성찰에 몰입하게 된다. 1880년대 말은 체호프에게 문학 세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긴장어린 정신적, 예술적 추구의 시기였다. 그는 이제 인간의 불행, 행복, 사랑 등의 보편적 문제를 넘어 당대 러시아 지성인들의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었던 구체적이고 예민한 사회적 물음들, 특히 이른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시대적 과제에 다가서게 되는데, 톨스토이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그 대표적 예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와중에 그는 1890년 4월 강제노역과 유형의 땅,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길에서 체호프는 <시베리아에서>를 집필하였고, 유형지의 실태를 직접 체험하고 그 해 12월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사할린 섬>, <구세프>, <아낙네들>, <유형지에서> 등의 작품을 통해 커다란 문학적,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참을 수 없는 고행의 땅이자 악마의 섬’에 대한 자발적 순례였던 사할린 섬 여행은 체호프의 삶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라는 현실에 대한 인간적 각성과 참회뿐만 아니라, 이제 “문제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이다”라는 문학에 관한 획기적 인식을 낳는다.

체호프는 이듬해 수보린과 함께 유럽을 여행한 후, 1892년 모스크바 남쪽의 멜리호보 마을에 작은 영지를 구입하여 가족과 함께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체호프는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등의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체호프는 레비탄((И.И. Левитан)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가, 학자, 미술가, 음악가 등과의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였는데, 1895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톨스토이(Л.Н. Толстой)와 조우했다. 멜리호보에서 작가 체호프는 문학의 절정기를 맞게 되는 데, 1892~1898년 사이에 <결투>, <6호실>, <신학생>, <3년>, <농부들>, <나의 삶>, <상자 속의 인간>, <나무딸기>, <사랑에 대하여>, <이오니치> 등과 같은 주옥같은 단편들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들은 러시아의 삶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예술적 탐색의 심연과 작가의 인본주의적 신념의 강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890년대 체호프의 작품들에서는 개인적, 사회적 삶의 차원에서 진리, 미(美),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인간의 사회적-역사적 임무 혹은 사명이라는 문제가 가장 결정적인 의의를 지니게 되고, 이는 인간적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종래의 이해에 대한 본질적 재고로 나아간다. 예컨대, 체호프는 인간의 행복 추구를 본성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권리로 간주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고귀한 목적에 상응하는 행복만을 옹호하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르쉰의 땅이나 저택이 아니라 광활함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모든 본성과 특성을 펼칠 수 있는 지구 전체, 자연 전부이다.” 또한 1890년대 말 체호프는 다시 희곡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1896년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에 실패하여 작가에게 충격을 주었던 <갈매기>는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МХАТ)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바냐 아저씨>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7년에 체호프는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의사의 권유로 1898년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얄타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체호프는 ‘하얀 별장’을 짓고, 육체적 쇠약에도 불구하고 문학 창작과 지인들과의 만남을 활발하게 펼쳤다. 1900년 체호프는 희곡, <세 자매>를 탈고하고, 이 작품으로 1902년 그리보예도프 상을 수상하였으며, 1898년에 처음 만났던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Ольга Книппер)와 1901년 5월 25일 결혼하였다. 한편 1900년 초 러시아 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던 체호프는 고리키(М. Горький)의 제명에 항의하여 회원 자격을 스스로 반납하기도 하였다. 1903년에는 마지막 단편 <약혼녀>와 희곡 <벚꽃 동산>을 탈고하였다. 말년에 체호프의 문학에서는 인간 내면에 대한 면밀한 숙고와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더욱 깊어지는 가운데 만연한 상투성과 산문성에 대한 예리한 질타와 지양의 모색이 두드러진다. 1904년 6월 체호프는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함께 독일 남부의 유명한 요양지인 바덴바일러로 갔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904년 7월 2일 새벽 3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청했던 마지막 샴페인 한 잔을 다 비우지 못한 채, “나는 죽는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로 운구 되어 수많은 군중이 애도하는 가운데 7월 9일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새로운, 온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라고 일갈한 체호프 문학의 요체는 다름 아닌 ‘문제의 올바른 제기’이라는 독특한 ‘객관성의 시학’이다. 체호프에 따르면 예술가(작가)는 재판관이 아니라 ‘불편부당한 목격자’이고, 따라서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것의 ‘올바른 제기’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레르몬토프(М. Лермонтов)적 전통의 혁신으로 읽혀지고 체호프 문학의 새로움과 고유성을 가장 본질적으로 표현해주는 시학적 원리인 ‘문제의 올바른 제기’는 고리키의 진단처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드높은 사고에 기초한다. 체호프의 객관성의 시학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절대적 총체성 앞에서 인간적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예술-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문제의 올바른 제기는 당대 비평가들의 힐난과는 달리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가지론적 허무주의나 상대주의의 표출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을 독단적이거나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19세기와 당대의 러시아 문학의 지배적 조류에 맞서는 작가의 반성적 인식의 표출이자, 대상에 대한 대화적 관계를 견지하며 양심적 진리를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예술가 정신의 표현이다. 체호프 문학에서 문제 제기의 올바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문제 자체의 합리성과 함께 서사 대상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서사 주체, 즉 작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작가적 입장을 원칙적으로 규정한다. 체호프에 따르면 문학가는 화학자처럼 객관적이어야 하며, 일상의 주관성으로부터 절연됨으로써 일체의 강요, 허위 그리고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요컨대 문제 제기의 올바름은 ‘불편부당성’, ‘합리성’, ‘객관성’, ‘냉정함’, ‘냉담함’ 그리고 ‘정의’의 총체이며, 이것은 체호프에게서 양심적 진리를 사명으로 하는 문학의 예술성을 재는 척도이자 강한 인상의 기초이다. ‘산문 속의 푸슈킨’이라고 일컬어진 체호프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이른바 간결성과 절제성은 바로 이러한 시학적 원리의 구현이다.

말하자면 체호프 문학에서 문제 제기의 올바름 내지 객관성은 결코 삶에 대한 자신의 기존 지식의 주장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고 타자의 지식, 견해, 진리에 대한 가치평가, 상이한 진리들의 대조, 진리들의 자질과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전제한다. 또한 진정한 진리의 끝없는 추구 과정에서 어떠한 대답도 유일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제기된 물음에 대한 가능한 답의 추구 노력 속에서 표현된다. 이처럼 문제의 올바른 제기라는 체호프의 문학 창작의 원리는 현실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에 근거해서 그것을 고유의 복합성과 충만함 속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섣불리 문제의 해결만을 추구하는 주관성의 시학에 맞서는 객관성의 시학의 본체인 것이다. 한마디로 체호프의 객관성의 시학은 해체와 회색빛 좌절, 산문적인 질서가 지배하는 파편화된 당대 현실에 대한 체호프의 작가적 대응이며, 구원의 가능성이 모호하고, 거대 서사의 황금시대가 종말을 고하며, 부정과 모색이라는 문학의 툰드라 시대에 맞선 작가의 진실하고 냉정한 문학적 형식이다. 바로 이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모든 본성이 만개하고 인간 속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는 드넓은 세상에 대한 체호프의 인본주의적 갈구가 샘솟는다.

글/ 오원교(모스크바 국립대학 박사,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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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고다르는 우리가 총체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온갖 형태의 수사학의 시기, 언어적 테러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다르는 자신이 영화의 평범한 고용인으로서 말과 이름이 지배하기 이전의 사물에 대해 말하고 싶고, 아빠와 엄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전의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는 아직 이름을 갖기 전의 바다, 파도,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전(以前)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원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논란적인 그림이 상기시키듯이 기원으로의 회귀는 세계의 기원, 미스터리의 기원, 불명료함과 순수한 나체의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고다르는 <영화사>의 2A에서 사티아지트 레이의 <아푸의 세계>(1959)와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의 이미지를 혼합하고 여기에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영상과 흑백의 포르노그래피 영상을 연결하는 과감한 몽타주를 선보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예술의 아름다움의 가능성, 혹은 그것의 유년성이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계의 몰락 이전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 이후, 체르노빌 이후, CNN의 공습이후, 9.11테러 이후에 잃어버린 세계와 시간을 되찾으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아니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이후의 시간에서 이전의 가능성을 되찾는 것. 그래서 과거는 죽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다르에게 만약 영화가 현재의 예술이라면 그것은 과거의 현재(기억), 현재의 현재(직관), 미래의 현재(기대)라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인데, 이는 일종의 데자뷰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매 시대는 다음에 이어질 시대를 꿈꾼다고 말했던 이는 벤야민 입니다. 그는 새 것에서 자극받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사실은 근원적 과거와 이어져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사물이 존재하는데 왜 그것을 조작하려 하느냐’라는 로셀리니의 유명한 말은 이미지가 항상 거기에 존재하고 있기에, 그 이전에 있었기에 이후에 도래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는 세계로 우리를 내던지는 행위이다. 영화적 체험이란 결국 데자뷰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혹은,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영화를 보는 것이 이미 데자뷰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관객에게는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 서로가 이미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사람들이라는 기묘한 체험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2011년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그런 데자뷰의 신비한 체험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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