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침대에 누워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남자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인 살인범에게 복수하고자하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샤를이다. 그의 곁에 누워있는 여자는 그가 살인범을 찾기 위해 접근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 엘렌이다. 그들의 얼굴은 침대 옆에 있는 조명과 상대의 얼굴에 가려져, 두 사람 모두 한쪽 눈과 반쪽 얼굴만 카메라에 담긴다. 그런데 이들의 반쪽 얼굴은 또 하나의 얼굴을 이루어서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두 눈을 가진 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샤를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엘렌의 눈은 샤를을 응시한다. 엘렌은 샤를에게 왜 폴을 도와줬냐고 타박하지만, 샤를은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마치 샤를의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빨간 글씨들 같다. 차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샤를은 범인 찾기에 몰두해왔다. 그러다가 사고 현장에서 범인과 동승하고 있었던 여배우 엘렌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는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다가, 범행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에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마침내 샤를은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의 집까지 들어온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범인인 폴 때문에 고통 받는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폴을 향한 증오였다.


샤를은 특히 폴의 아들인 필립에게 어떤 연민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아빠를 죽여 달라고 말하는 필립을 꾸짖으면서 혼란스러워 한다. 홀로 고독하게 복수심을 키워왔던 샤를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연민 때문에 샤를은 폴을 죽일 수 있는 몇 번의 순간에도 주저하고 죽이기를 실패한다. ‘폴은 죽어야 한다는 당위로 생긴 샤를과 가족들 사이의 연대가 오히려 그 당위를 위협하는 것이다. 엘렌 역시 왜 폴을 도와줬냐면서 폴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엘렌의 눈은 당위의 눈빛이었고, 샤를의 눈은 연민과 주저함의 눈빛이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기괴한 얼굴은 샤를의 아이러니한 감정을 대변한다. 그는 다시 자신의 본래 목적을 생각하며 폴을 죽이겠노라고 다짐하지만, 보트 위에서의 계획도 실패로 끝난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당위가 흔들리는 지점은 야수에 대한 이해 때문이 아니다. 영화는 절대 악을 부정하지 않는다. 폴의 극악무도한 행동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영화는 이해할 수 없는 절대 악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써 어떤 연대를 보여준다. 설령 그것이 범인의 아들과의 연대라 하더라도, 샤를은 오히려 그리스 비극처럼 보인다면서 멋지다고 말한다. 결국 야수는 죽고, 연대가 당위를 이기지 못하지만, 샤를과 엘렌 그리고 샤를과 필립 사이의 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 하게될 장명 중 하나는 야수, 즉 폴이 죽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폴이 죽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텔레비전 화면으로 간략하게 사건 현장을 요약할 뿐이다. 이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어린 아들에 대한 샤를의 부정(父情)을 영사된 화면과 곰 인형으로만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 샤를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린 아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필립과의 연대다.


마지막 장면에서 샤를은 폴을 죽이고 자수한 필립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범인이라 말해달라고 엘렌에게 부탁의 편지를 남긴다. 편지를 남긴 후 떠나는 샤를은 걷고 또 걷는다. 침대에 누워서 근심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모습과는 다르다. 그는 필립의 희생을 받아들인 자신을 책망하며, 자신이 필립에게 폴을 죽어야한다는 암시를 은연중에 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바다로 멀리 멀리 떠난다. ‘야수는 죽어야 했는가에 대한, 그리고 누가 야수였는가에 대한 물음을 간직한 채로 자신의 형벌을 선택한 것이다.

 

김혜령 | 관객에디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석회동굴의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면 영화는 작은 마을의 전경을 비추며 시작된다. 어딘가 음울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던 석회동굴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마을의 모습은 조용하고 평범하다. 이어서 영화는 결혼식장으로 카메라를 옮기는데, 이곳은 처음으로 푸줏간 주인 포폴과 사립교사 교장 엘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다음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거칠게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포폴과 엘렌은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그러던 중 마을에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이 몇 차례 일어난다.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줄곧 포폴이 범인이 아닐까, 추측하던 관객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마을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는, 흔히 우리가 설정 쇼트라고 부를 법한 풍경의 장면들이 영화에는 몇 차례 등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영화에서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그저 앞으로 일어날 불운한 사태에 대한 조짐, 암시로써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포폴이 엘렌의 집에서 자신의 라이터를 발견하게 되는 씬 전에 보이는 풍경의 모습이 그렇다.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관객들이 무언가 불길한 조짐을 감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 포폴의 죽음 이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엘렌이 강가에서 밤을 새운 후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에서의 풍경 장면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다. 종국에 포폴은 (자살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살해하는데, 살인자가 죽은 후 이 마을의 풍경은 어쩐 일인지 여전히 스산하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강가에 앉아있는 엘렌, 그녀의 뒤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카메라는 이들과 점진적으로 멀어지며, 이른 아침의 뿌연 안개가 퍼진 마을의 풍경을 넓게 몽타주 한다.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엘런이 강가에서 밤을 새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포폴과 엘렌의 정사 장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말에 대한 동의를 차지하고, 그보다는 이 장면이 관객들에게 어떤 정서를 주는지에 먼저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 정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고립감이라고 생각된다.

 

샤브롤의 <도살자>를 범죄가 중심이 되는, 그래서 범인의 처벌로 이야기가 모두 해소되는 장르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이 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아직 사건이 다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찜찜함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엘렌의 표정, 마을 안에 고립되어 버린 느낌을 주는 컷과 줌 아웃 편집은 이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 냈던 핵심적인 요소가 아직도 이 마을 안에 잔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살인을 영화의 핵심적 요소라고 보기에 이 영화에서 포폴이 저지르는 살인은 게다가 어떤 긴장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지만 <도살자>에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보다 <도살자>의 그로테스크함을 만들어 내는 주된 요소는 음식이다. 샤브롤은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수반하는 도축, 살육의 야만성을 살인, 죄와 연결한다. 감독은 사람들이 모여 결혼식을 즐기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전에 결혼식을 위해 준비된 음식을 더 먼저 보여준다. 샤브롤의 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음식을 먹는다는 원초적인 행위는 <도살자>에서 유난히 강조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엘렌은 포폴 앞에서 우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체리를 먹고 있다. 샤브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야만성을 음식을 먹는다는 일상적인 행위에서 발견한다. 영화의 중반부에 엘렌이 아이들과 함께 석회동굴을 견학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듯, 야만성과 문명을 하나의 연장선 안에 놓인다.

 

포폴은 이 영화에서 끔찍한 변태적 살인마로 묘사되지 않는다. 동시에 관객이 그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동정하게 되지도 않는다. 가령, 영화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 군대에서의 복무 경험이 대사로 제시되고는 있지만 영화는 그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 포폴이 관객들에게 어떤 인물로 제시되는지도 모호하다. 그는 범인이지만, 온전한 악인은 아니며,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중점이 되는 것은 포폴과 일종의 계급적 차이가 뚜렷한 엘렌이 어떻게 그와 내면의 어떤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있다. 포폴이 행한 죄와 그의 내면이 엘렌과 공유됨으로써, 이러한 인간의 야만성은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작은 마을의 안개 서린 풍경은 이러한 야만성이 가진 보편적 성격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의 초반, 춤추고 있는 하객들 사이로 포폴과 엘렌을 향해 줌인했던 카메라는 이제 마을 전체를 한 컷에 담는 것으로 영화를 끝내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엘렌과 포폴의 이야기는 이 마지막에서 마을 전체로 확대되고, 엘렌은 (자기 자신도 가지고 있는) 야만성의 세계 안에 고립된다.

 

황선경 | 관객에디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피를 부르는 사랑

 

클로드 샤브롤은 히치콕처럼 거의 매번 범죄영화만 만들었다. 그래서 샤브롤은 브라이언 드 팔마와 더불어 흔히 히치콕의 대표적인 후예로 지목된다. 범죄물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그런 설명이 맞다. 그러나 스타일에서 보자면 샤브롤은 히치콕과 대단히 다른 작품들을 내놓았다.

샤브롤의 후반기 작품인 <둘로 잘린 소녀>(2007)도 그의 전형적인 범죄 드라마다. 그의 영화가 늘 그렇듯 이 영화도 시작하자마자 아름다운 전원도시를 보여주고, 그런 평화로운 풍경에 어울릴듯한 아름다운 저택을 등장시킨다. 말하자면 샤브롤의 범죄물은 살벌한 도시보다는 자연과의 조화가 완벽해 보이는 평화로운 시골에서 주로 진행된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평화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전원도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는 프랑스 동부의 리옹 근처다. 푸른 들판, 키 큰 나무들,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이 있는 곳이다.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아름다운 집의 주인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샤를(프랑수아 벨레앙)이다. 50대로 보이며, 헌신적인 아내와 둘이 산다. 이 중년남자가 저자 사인회에서 만난 지역 방송의 기상캐스터 가브리엘(루디빈 사니에)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위험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왜 위험하냐면 샤브롤 영화의 상투성이기도 한데, 그의 대표작인 <부정한 여인>(1969)에서처럼 ‘불륜’이 있을 때, 종종 피를 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재벌 후손인 폴(브누아 마지멜)이 파티에서 가브리엘을 만난 뒤, 역시 호감을 가지면서 삼각관계가 시작된다. 그만큼 가브리엘은 밝은 표정에 눈부신 금발,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처녀다. 가브리엘 역의 루디빈 사니에는 프랑수아 오종과의 협업으로 유명한데, 특히 <스위밍풀>(2003)에서의 반누드의 연기로 단박에 알려진 배우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동년배인 청년 폴에게는 냉담하고, 부자연스럽게도 아버지 같은 존재인 샤를에게는 목을 맨다(폴 역의 브누아 마지멜은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2000)의 주연이었고, 샤브롤의 작품에도 곧잘 나왔다). 외모만 보면 폴은 가브리엘의 천생연분처럼 보인다. 그러나 샤브롤의 영화가 종종 그렇듯, 이야기는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둘로 잘린 소녀>는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다룬다.

샤브롤은 흔히 ‘반부르주아 드라마’의 대표 감독으로도 꼽힌다. 드라마의 갈등이 주로 부르주아 윤리의 억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개인의 죄의식을 건드린다면, 샤브롤은 계급의 윤리적 통념을 의심케 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가브리엘이 민망스럽게도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식이다. 그의 영화에는 이렇게 부르주아 윤리의 기반을 위험에 빠뜨리는 근친상간에 대한 위반이 늘 숨어 있다. 불륜을 저질렀으니, 처벌이 따르는데, 세 사람이 모두 피해자이기도 하고, 또 가해자이기도 한 혼란스런 입장에 놓이는 점도 샤브롤의 전형성이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윤리의 위반이라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는 참 냉소적인 태도이다.

엔딩은 더욱 샤브롤적이다. 히치콕처럼 감독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는 게 아니라, 결말은 자신도 모른다는 태도다. 말하자면 초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것, 이것도 샤브롤 영화의 일관된 특징이다.

 

글/ 한창호(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스무 네 살의 나는 기혼 남성에다가 아들까지 둔 가장이며 샐러리맨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라고 명명하면서 교회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악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가? 삶에 있어서 죄책감은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고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보라. 나는 그것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물론, ‘세상의 불행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외치며 이기적으로 구는 것보다 죄책감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20대의 나는 이렇게 모든 것에 시비를 걸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도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신부님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나의 방종한 사생활, 교회에 대한 분노 등을 부끄러움 없이 늘어놓았다. 이런 짓은 몇 년 동안 이어졌지만 나의 아내도 부모님도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이중생활이었다.


고해실과 폭스 영화사 사무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카이에’지에 영화평을 썼다. 히치콕에 관한 글 덕분에 나는 ‘카이에’지 군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고수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벨바그 세대를 뜻함- 서로서로에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뜻을 같이 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감스러운 사람은 –지금 떠올려 보면 조금 우습지만 – 자크 리베트였다. 마치 작심이나 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구체적이고 치밀한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 알랭 레네가 가장 먼저 영화를 찍고 자크 리베트는 거기서 조감독을 맡으며 다음 차례는 리베트가 감독을,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조감독을 하는 등등. 그런데 무슨 일이든 예상을 뒤엎는 현상이 발생하는 법, 돈을 쥐는 자가 첫 메가폰을 잡게 되었고, 그건 바로 나였다. 






아내의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내에게 유산이 분배되었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돈 보따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알랭 레네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어떨까?’ 아내의 뜻밖의 대답인즉 ‘흠, 당신이 먼저 영화를 만드는 건 어때?’. 그리하여 <미남 세르쥬>를 찍을 수 있었다. 첫 편집 필름은 2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이었는데, 리베트의 눈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건 너무 길잖아! 한 시간 내로 끊어야지!’ 그런데 트뤼포의 장인 모르겐스타인이 운영하는 제작사에서 배급받는 기회를 그만 놓치고야 말았다. 모르겐스타인은 테뉴지Tenoudji 에게 자신의 제작사를 넘기면서 <미남 세르쥬>’의 배급을 추천했다. <미남 세르쥬>는 흑자를 거두었고, 이윤이 생기자 나는 즉각 <사촌들>의 촬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자본이 넉넉하지 않아 <사촌들>은 난관에 부딪쳤다. <사촌들>은 위험도 많았고, 상징적인 영화가 되었다: 리베트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동안 나는 두 편을 찍은 것이다.


나는 비평을 그만두었다. 남의 고기를 팔아주기 위한 글은 더 이상 쓰지 않았고, 친구들의 영화들에 관해 아첨하는 글을 가끔 써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치켜세워 주었고, 그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룰이었다: 영화 두 편을 찍는 동안 아무도 배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었다. 삶의 다양한 굴곡을 거치면서도 나는 언제가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코 안달하지 않았다. 잠이 들 때면 호주에서 메가폰을 쥐고 있는 나를 꿈꾸었고, 때문에 이루어질 꿈이라고 –자주 말하여지는 것처럼- 알고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장담한 적도 없었다.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두고 보자구’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더욱 곤란한 꿈이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나의 꿈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태연했다. 태연한(serein)그리고 숙맥(serin), 나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순진함이었다: 내가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그건 곧 성공을 의미하리라.


나 역시 영화계에 일찍 발을 들여 조감독 역할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감독들은 첫 메가폰을 잡기위해서 15년 동안 맥주를 날라야 했다. 나는 나를 왕으로 여기며 자랐는데 맥주를 나르라고? 차라리 영화관에서 살겠다! 나라고 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여러 가지 계산을 해보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한 일은 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에두른 방식으로 보이겠지만, ‘카이에’지 동료들과 나는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파리를 세포 조직화 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약아 빠졌었다! 무엇보다 장 콕토를 우리의 손아귀에 넣었던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데뷔시절은 장 콕토의 데뷔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카이에’지 사무실에 직접 거동을 하거나 그의 영화 첫 시사회에 우리를 꼭 초대하여 프랑스 영화계 인맥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닫힌 문을 열어주는 열쇠나 같았으며 큰 보증이 되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인식했고, 그러한 상황에 어느 정도 편승하였다.






나는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 인해 눈이 멀지는 않았다. 뭐든 활용하는 것은 나의 타고난 성질이어서 내가 어떤 계획을 실현할 경우,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만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일이 엉망진창이면 나는 금새 사태를 깨달았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강조하자면 나는 내 영화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이나 의견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점 또한 나의 절대에 가까운 회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교육과 훈육에 대한 반발심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내 첫 영화들에 대하여 ‘카이에’지는 분명 허풍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책략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확실히 틀리다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남 세르주>가 개봉했을 때, 그리고 <사촌들>이 연이어 소개되자 어떤 이들은 나를 두고 발자크에다가 베토벤이 약간 섞여 윤회 했다는 둥, 그것도 모자라 드가나 툴루즈 로트렉의 화법을 연상시킨다고 하였다.


아, 내가 그런 비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오줌 누는 법도 잊어버린 식물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분명 영화감독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코타파비Cottafavi라고, 고전시대 영화 전문가로서 재미있는 감독이었다.  그는 고전에 관한 지식에 통달했으며 그에 관한 디테일한 요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대단한 마니아였다. 그러자 곧 사람들은 그를 세익스피어와 시세론에 비교하였고 ‘카이에’지도 그런 글을 썼다. 문제는 코타파비가 그걸 그대로 믿은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더 이상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파스칼의 ‘팡세’의 수준에 도달하는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물론 장 피에르 멜빌의 경우처럼 허풍스런 비평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칸 영화제 기간, 누군가가 장 피에르 멜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  감독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세요?’멜빌은 심각하게 대답하길, ‘참 지키기 힘든 자리이다’. 나는 그의 대답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자신이 하는 말을 믿고 있었고, 자신의 머리가 너무 커지자 거기에 맞는 모자를 찾을 수 없는 지경이 오고야 말았다. 아무튼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는 부류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삼킬 만큼 겸손하지 않다. 나 자신과 사랑에 빠질 만큼 어리석지도 않으며 나르시시즘에 관한한, 나는 항상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과 유쾌하게 살고 있으며 나 자신이 조소거리가 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끝)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고등학교시절 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한 덕분인지 바까롤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시험)을 턱걸이로 겨우 통과했다. 나처럼 똑똑하고 명석한 학생에게는 불명예스러운 결과였는데, 나는 원래부터 시험이라는 제도에 관심이 없었다. 시험은 지루하고 따분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항상 시험 성적이 좋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력은 없으면서 시험은 잘 치는 학생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굳히게 된 이후에도 나를 평가하는 제도나 사람에 관해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세자르 상이니, 황금종려상이니 하는 것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영화제를 나는 경멸한다.  

대학에 가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일단 문학부에 입학했다. 특히 영문학에 통달한 나는 오히려 교수님을 가르칠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미국 문학과 문명에 관한 학위도 수료하였다. 문학뿐 아니라 나는 대학에서 법학을 따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건 1년 반 만에 때려치우고 말았다. 너무 지루한 학문이었다. 시앙스 포(Scienc-Po: 프랑스 그랑제꼴계의 정치학교)에도 입학했지만 보름 만에 그만두었다. 정말이지 내 체질에는 맞지 않는 과정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버지의 약국 운영에 2년 동안 동참했던 나는 그것 또한 중단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음과 같은 궤변으로 설득시켰다. ‘아버지는 이제 겨우 48세에 불과해요. 내가 계속 학교를 다닌다면 앞으로 5년은 더 공부해야 하고, 그럼 아버지는 몇 살이죠? 53살!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약국을 물려받는다고 하면,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아깝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와 약국의 수입을 나눠가져야 하니 지금보다 수입이 두 배나 줄어들잖아요? 저도 아버지와 늘 나눠가져야 하고, 이렇듯 우리에게 모두 불리한 사업을 왜 계속해야 합니까?’ 결국 아버지는 약국 운영을 다시 혼자 맡았고, 내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년 반 동안 법학부의 학생노조를 들락거리며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중 르펜(나중에 프랑스 극우단체를 이끈 우두머리가 된다) 과도미나티가 있었다. 3년 동안 우리는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놀았다. 몽마르트를 비롯하여 파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생 미셀의 주점 ‘라볼레 La Bolée’는 우리의 술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라 볼레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난장판을 벌이자!’라고 외치며 라 볼레로 향했고, 우리가 외친 그대로 밤새 내내 주점에서 난동을 부리고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 엄마는 21살이 넘은 내가 숫총각이라고 여겼고, 야밤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낮에는 성실하고 착한 학생의 얼굴로 공부에 전념하는 척하였고, 밤에는 술독에 빠져 이중생활을 즐겼던 나는 아침 8시가 넘으면 어김없이 집 근처에 있는 법학과 사무실로 뚜벅 뚜벅 걸어가서 사무실 안에 있는 피아노를 신나게 쳤다. 이윽고 친구들이 오면 그들과 함께 포커를 치며 놀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에 와서 친구들과 포커를 친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되면 노는데 지쳐서 집으로 쉬러 갔다. 그리고 모두 잠든 시간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고, 새벽이 되서 다시 고양이처럼 집으로 들어왔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양심에 찔리긴 했으나, 내가 하는 짓이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놀 수 있을 때 마음껏 놀고 탈선적인 행동을 하거나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정직함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나 가능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씀을 신조로 삼았다. 아버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하셨다. 거짓말 자체는 좋은 의도에 따라 충분히 존재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러한 가치관은 나중에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도 적용되었는데, 나 스스로 판단하길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면서 명작을 만든다고 착각한 적이 없다. 내가 왜 졸작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에게는 정직했다고 믿는다. 

20대시절의 방탕한 생활에 대가를 치르게 됐다. 나는 병에 걸리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관찰하였다. 술기운에 절은 나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도 행인들은 나의 얼굴을 훑어보고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잠그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온통 붉은 점으로 가득 찬 얼굴! 옷을 벗어보니 몸 전체에도 붉은 점이 퍼져있었다. ‘흠, 음식을 잘 못 먹은 모양이겠지. 한 숨자고 나면 괜찮아 질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침대에 픽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붉은 점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엄마 몰래 살짝 약국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내 몸의 이상한 증세를 드러내었다. 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관찰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 두 가지 중 하나야. 넌 성병에 노출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뒤늦게 수두를 앓는 거라고. 그런데 두 번째 가정은 네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지니…이 몹쓸 녀석, 넌 성병에 걸린거야! ’

아버지는 나를 기분 나쁘게 째려본 뒤 마치 내가 길가의 오물이나 되는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가증스러울 정도로 추악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순간이었으니! 나중에야 밝혀졌지만-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는 오진을 했고, 그것은 수두였다. 어찌되었건 나는 정력을 낭비했음을 깨달았다. 그건 무시무시한 진실로 다가왔다.  수두사건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그 병에서 완쾌되자마자 방탕한 생활에 결별을 고했고, 더욱이 결혼이라는 관습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모님의 친구 분이 수두 후유증으로 버둥대는 나를 스위스 니옹 근처의 공기 좋은 산간 지방으로 요양을 보내라고 귀띔했다. 나는 미련 없이 떠났고, 거기서 나의 첫 아내를 만났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나는 당시 파리의 어떤 카페 직원과 연애중이어서 평범한 만남으로 그쳐야만 했다. 게다가 성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시기를 통과한 후 나는 외출을 극도로 삼가하고 있었다. 헌데 그녀를 두 번째 보았을 때는 평범한 만남으로 방점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니옹 지방의 갑부 딸이었고, 집안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저택에 자주 초대되었다. 대가족이 우글대고 있는 그 집에서 그녀의 어린 동생들의 가정교사도 해주고 그녀의 부모님과 친인척이 모일 때면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치와 말솜씨를 발휘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집안의 공공연한 사위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는 아무개의 남편이 된, 자연스럽게 성사된 결혼이었다. 결혼은 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더 이상 대학에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아내 집안의 풍족한 경제적인 배경덕분에 돈 문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이다. 그러나 결혼한 뒤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영화와 연극관람, 독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누릴 수 있던 사실은 확실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파리의 부르조아 상류층이 모여 사는 네이유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주 즐겁고도 기상천외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는데, 그건 마누라 등에 업혀 산다는 현실이었다. 그걸 오랫동안 좋아할 사내는 드물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고 때가되면 하리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 마음이 무거웠다. 군입대시기가 닥쳐오자, 회의로 덮인 그 시간으로 부터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입대 후에는 병역을 채우지 않는 술수를 부려 3개월 만에 나는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상황 파악에 능란한 나의 감각은 군대에서도 발휘되었다. 군대 행정에 구멍이 난 것을 알아챈 나는 입대한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도 나의 입대가 공식적으로 발효되지 않았음을 항의 했고, 그걸 빌미로 나는 병역 의무일수를 줄이는 빌미를 얻어냈다. 더군다나 나는 군대에서 실적을 올리며 병역 의무일수를 또 줄여나갔다. 당시에는 헌혈이 국방 의무화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내무반 군인들에게 ‘지금 자청해서 헌혈을 하는 것이 나중 의무화 될 때 하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며 부추겼다. 결국 다른 내무반보다 더 많은 헌혈지원자가 생겨나 지휘관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틀이나 더 받아 챙길 수 있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로 다시 아내 덕에 먹고 사는 남편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폭스 영화사에서 홍보담당을 맡는 기회가 생겼다. 영화계에 첫발을 대딛는 셈이었다. 폭스 영화사에서는 영어권 영화의 프랑스어 제목을 찾는 일이나 -그건 너무나 재미 있었다- 혹은 폭스에서 배급하는 영화들에 관한 홍보용 기사를 올리는 일을 주로 맡았다. 예를 들어 프랭크 타쉴린의 1956년작 <The girl can’t help it> 의제작사에서 보낸 홍보 문구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 여주인공을 맡은 제인 맨스필드의 프로필을 나는 이렇게 조작하였다: 제인 맨스필드, 그녀는 방년 11세에 이미 자신의 가슴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예지하였으니..!’ 천박하기 짝이 없는 문구였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적절했었다. 이렇게 폭스사에서 나는 1년 반을 꼬박 채워 일하다가 곧 시간제로 업무를 줄였다. 첫 영화를 준비하기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의 꿈은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