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부르는 사랑

 

클로드 샤브롤은 히치콕처럼 거의 매번 범죄영화만 만들었다. 그래서 샤브롤은 브라이언 드 팔마와 더불어 흔히 히치콕의 대표적인 후예로 지목된다. 범죄물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그런 설명이 맞다. 그러나 스타일에서 보자면 샤브롤은 히치콕과 대단히 다른 작품들을 내놓았다.

샤브롤의 후반기 작품인 <둘로 잘린 소녀>(2007)도 그의 전형적인 범죄 드라마다. 그의 영화가 늘 그렇듯 이 영화도 시작하자마자 아름다운 전원도시를 보여주고, 그런 평화로운 풍경에 어울릴듯한 아름다운 저택을 등장시킨다. 말하자면 샤브롤의 범죄물은 살벌한 도시보다는 자연과의 조화가 완벽해 보이는 평화로운 시골에서 주로 진행된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평화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전원도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는 프랑스 동부의 리옹 근처다. 푸른 들판, 키 큰 나무들,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이 있는 곳이다.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아름다운 집의 주인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샤를(프랑수아 벨레앙)이다. 50대로 보이며, 헌신적인 아내와 둘이 산다. 이 중년남자가 저자 사인회에서 만난 지역 방송의 기상캐스터 가브리엘(루디빈 사니에)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위험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왜 위험하냐면 샤브롤 영화의 상투성이기도 한데, 그의 대표작인 <부정한 여인>(1969)에서처럼 ‘불륜’이 있을 때, 종종 피를 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재벌 후손인 폴(브누아 마지멜)이 파티에서 가브리엘을 만난 뒤, 역시 호감을 가지면서 삼각관계가 시작된다. 그만큼 가브리엘은 밝은 표정에 눈부신 금발,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처녀다. 가브리엘 역의 루디빈 사니에는 프랑수아 오종과의 협업으로 유명한데, 특히 <스위밍풀>(2003)에서의 반누드의 연기로 단박에 알려진 배우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동년배인 청년 폴에게는 냉담하고, 부자연스럽게도 아버지 같은 존재인 샤를에게는 목을 맨다(폴 역의 브누아 마지멜은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2000)의 주연이었고, 샤브롤의 작품에도 곧잘 나왔다). 외모만 보면 폴은 가브리엘의 천생연분처럼 보인다. 그러나 샤브롤의 영화가 종종 그렇듯, 이야기는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둘로 잘린 소녀>는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다룬다.

샤브롤은 흔히 ‘반부르주아 드라마’의 대표 감독으로도 꼽힌다. 드라마의 갈등이 주로 부르주아 윤리의 억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개인의 죄의식을 건드린다면, 샤브롤은 계급의 윤리적 통념을 의심케 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가브리엘이 민망스럽게도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식이다. 그의 영화에는 이렇게 부르주아 윤리의 기반을 위험에 빠뜨리는 근친상간에 대한 위반이 늘 숨어 있다. 불륜을 저질렀으니, 처벌이 따르는데, 세 사람이 모두 피해자이기도 하고, 또 가해자이기도 한 혼란스런 입장에 놓이는 점도 샤브롤의 전형성이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윤리의 위반이라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는 참 냉소적인 태도이다.

엔딩은 더욱 샤브롤적이다. 히치콕처럼 감독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는 게 아니라, 결말은 자신도 모른다는 태도다. 말하자면 초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것, 이것도 샤브롤 영화의 일관된 특징이다.

 

글/ 한창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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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스무 네 살의 나는 기혼 남성에다가 아들까지 둔 가장이며 샐러리맨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라고 명명하면서 교회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악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가? 삶에 있어서 죄책감은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고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보라. 나는 그것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물론, ‘세상의 불행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외치며 이기적으로 구는 것보다 죄책감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20대의 나는 이렇게 모든 것에 시비를 걸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도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신부님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나의 방종한 사생활, 교회에 대한 분노 등을 부끄러움 없이 늘어놓았다. 이런 짓은 몇 년 동안 이어졌지만 나의 아내도 부모님도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이중생활이었다.


고해실과 폭스 영화사 사무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카이에’지에 영화평을 썼다. 히치콕에 관한 글 덕분에 나는 ‘카이에’지 군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고수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벨바그 세대를 뜻함- 서로서로에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뜻을 같이 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감스러운 사람은 –지금 떠올려 보면 조금 우습지만 – 자크 리베트였다. 마치 작심이나 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구체적이고 치밀한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 알랭 레네가 가장 먼저 영화를 찍고 자크 리베트는 거기서 조감독을 맡으며 다음 차례는 리베트가 감독을,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조감독을 하는 등등. 그런데 무슨 일이든 예상을 뒤엎는 현상이 발생하는 법, 돈을 쥐는 자가 첫 메가폰을 잡게 되었고, 그건 바로 나였다. 






아내의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내에게 유산이 분배되었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돈 보따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알랭 레네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어떨까?’ 아내의 뜻밖의 대답인즉 ‘흠, 당신이 먼저 영화를 만드는 건 어때?’. 그리하여 <미남 세르쥬>를 찍을 수 있었다. 첫 편집 필름은 2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이었는데, 리베트의 눈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건 너무 길잖아! 한 시간 내로 끊어야지!’ 그런데 트뤼포의 장인 모르겐스타인이 운영하는 제작사에서 배급받는 기회를 그만 놓치고야 말았다. 모르겐스타인은 테뉴지Tenoudji 에게 자신의 제작사를 넘기면서 <미남 세르쥬>’의 배급을 추천했다. <미남 세르쥬>는 흑자를 거두었고, 이윤이 생기자 나는 즉각 <사촌들>의 촬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자본이 넉넉하지 않아 <사촌들>은 난관에 부딪쳤다. <사촌들>은 위험도 많았고, 상징적인 영화가 되었다: 리베트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동안 나는 두 편을 찍은 것이다.


나는 비평을 그만두었다. 남의 고기를 팔아주기 위한 글은 더 이상 쓰지 않았고, 친구들의 영화들에 관해 아첨하는 글을 가끔 써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치켜세워 주었고, 그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룰이었다: 영화 두 편을 찍는 동안 아무도 배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었다. 삶의 다양한 굴곡을 거치면서도 나는 언제가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코 안달하지 않았다. 잠이 들 때면 호주에서 메가폰을 쥐고 있는 나를 꿈꾸었고, 때문에 이루어질 꿈이라고 –자주 말하여지는 것처럼- 알고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장담한 적도 없었다.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두고 보자구’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더욱 곤란한 꿈이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나의 꿈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태연했다. 태연한(serein)그리고 숙맥(serin), 나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순진함이었다: 내가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그건 곧 성공을 의미하리라.


나 역시 영화계에 일찍 발을 들여 조감독 역할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감독들은 첫 메가폰을 잡기위해서 15년 동안 맥주를 날라야 했다. 나는 나를 왕으로 여기며 자랐는데 맥주를 나르라고? 차라리 영화관에서 살겠다! 나라고 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여러 가지 계산을 해보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한 일은 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에두른 방식으로 보이겠지만, ‘카이에’지 동료들과 나는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파리를 세포 조직화 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약아 빠졌었다! 무엇보다 장 콕토를 우리의 손아귀에 넣었던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데뷔시절은 장 콕토의 데뷔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카이에’지 사무실에 직접 거동을 하거나 그의 영화 첫 시사회에 우리를 꼭 초대하여 프랑스 영화계 인맥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닫힌 문을 열어주는 열쇠나 같았으며 큰 보증이 되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인식했고, 그러한 상황에 어느 정도 편승하였다.






나는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 인해 눈이 멀지는 않았다. 뭐든 활용하는 것은 나의 타고난 성질이어서 내가 어떤 계획을 실현할 경우,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만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일이 엉망진창이면 나는 금새 사태를 깨달았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강조하자면 나는 내 영화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이나 의견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점 또한 나의 절대에 가까운 회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교육과 훈육에 대한 반발심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내 첫 영화들에 대하여 ‘카이에’지는 분명 허풍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책략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확실히 틀리다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남 세르주>가 개봉했을 때, 그리고 <사촌들>이 연이어 소개되자 어떤 이들은 나를 두고 발자크에다가 베토벤이 약간 섞여 윤회 했다는 둥, 그것도 모자라 드가나 툴루즈 로트렉의 화법을 연상시킨다고 하였다.


아, 내가 그런 비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오줌 누는 법도 잊어버린 식물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분명 영화감독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코타파비Cottafavi라고, 고전시대 영화 전문가로서 재미있는 감독이었다.  그는 고전에 관한 지식에 통달했으며 그에 관한 디테일한 요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대단한 마니아였다. 그러자 곧 사람들은 그를 세익스피어와 시세론에 비교하였고 ‘카이에’지도 그런 글을 썼다. 문제는 코타파비가 그걸 그대로 믿은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더 이상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파스칼의 ‘팡세’의 수준에 도달하는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물론 장 피에르 멜빌의 경우처럼 허풍스런 비평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칸 영화제 기간, 누군가가 장 피에르 멜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  감독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세요?’멜빌은 심각하게 대답하길, ‘참 지키기 힘든 자리이다’. 나는 그의 대답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자신이 하는 말을 믿고 있었고, 자신의 머리가 너무 커지자 거기에 맞는 모자를 찾을 수 없는 지경이 오고야 말았다. 아무튼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는 부류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삼킬 만큼 겸손하지 않다. 나 자신과 사랑에 빠질 만큼 어리석지도 않으며 나르시시즘에 관한한, 나는 항상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과 유쾌하게 살고 있으며 나 자신이 조소거리가 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끝)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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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고등학교시절 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한 덕분인지 바까롤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시험)을 턱걸이로 겨우 통과했다. 나처럼 똑똑하고 명석한 학생에게는 불명예스러운 결과였는데, 나는 원래부터 시험이라는 제도에 관심이 없었다. 시험은 지루하고 따분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항상 시험 성적이 좋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력은 없으면서 시험은 잘 치는 학생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굳히게 된 이후에도 나를 평가하는 제도나 사람에 관해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세자르 상이니, 황금종려상이니 하는 것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영화제를 나는 경멸한다.  

대학에 가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일단 문학부에 입학했다. 특히 영문학에 통달한 나는 오히려 교수님을 가르칠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미국 문학과 문명에 관한 학위도 수료하였다. 문학뿐 아니라 나는 대학에서 법학을 따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건 1년 반 만에 때려치우고 말았다. 너무 지루한 학문이었다. 시앙스 포(Scienc-Po: 프랑스 그랑제꼴계의 정치학교)에도 입학했지만 보름 만에 그만두었다. 정말이지 내 체질에는 맞지 않는 과정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버지의 약국 운영에 2년 동안 동참했던 나는 그것 또한 중단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음과 같은 궤변으로 설득시켰다. ‘아버지는 이제 겨우 48세에 불과해요. 내가 계속 학교를 다닌다면 앞으로 5년은 더 공부해야 하고, 그럼 아버지는 몇 살이죠? 53살!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약국을 물려받는다고 하면,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아깝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와 약국의 수입을 나눠가져야 하니 지금보다 수입이 두 배나 줄어들잖아요? 저도 아버지와 늘 나눠가져야 하고, 이렇듯 우리에게 모두 불리한 사업을 왜 계속해야 합니까?’ 결국 아버지는 약국 운영을 다시 혼자 맡았고, 내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년 반 동안 법학부의 학생노조를 들락거리며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중 르펜(나중에 프랑스 극우단체를 이끈 우두머리가 된다) 과도미나티가 있었다. 3년 동안 우리는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놀았다. 몽마르트를 비롯하여 파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생 미셀의 주점 ‘라볼레 La Bolée’는 우리의 술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라 볼레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난장판을 벌이자!’라고 외치며 라 볼레로 향했고, 우리가 외친 그대로 밤새 내내 주점에서 난동을 부리고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 엄마는 21살이 넘은 내가 숫총각이라고 여겼고, 야밤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낮에는 성실하고 착한 학생의 얼굴로 공부에 전념하는 척하였고, 밤에는 술독에 빠져 이중생활을 즐겼던 나는 아침 8시가 넘으면 어김없이 집 근처에 있는 법학과 사무실로 뚜벅 뚜벅 걸어가서 사무실 안에 있는 피아노를 신나게 쳤다. 이윽고 친구들이 오면 그들과 함께 포커를 치며 놀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에 와서 친구들과 포커를 친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되면 노는데 지쳐서 집으로 쉬러 갔다. 그리고 모두 잠든 시간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고, 새벽이 되서 다시 고양이처럼 집으로 들어왔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양심에 찔리긴 했으나, 내가 하는 짓이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놀 수 있을 때 마음껏 놀고 탈선적인 행동을 하거나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정직함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나 가능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씀을 신조로 삼았다. 아버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하셨다. 거짓말 자체는 좋은 의도에 따라 충분히 존재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러한 가치관은 나중에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도 적용되었는데, 나 스스로 판단하길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면서 명작을 만든다고 착각한 적이 없다. 내가 왜 졸작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에게는 정직했다고 믿는다. 

20대시절의 방탕한 생활에 대가를 치르게 됐다. 나는 병에 걸리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관찰하였다. 술기운에 절은 나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도 행인들은 나의 얼굴을 훑어보고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잠그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온통 붉은 점으로 가득 찬 얼굴! 옷을 벗어보니 몸 전체에도 붉은 점이 퍼져있었다. ‘흠, 음식을 잘 못 먹은 모양이겠지. 한 숨자고 나면 괜찮아 질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침대에 픽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붉은 점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엄마 몰래 살짝 약국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내 몸의 이상한 증세를 드러내었다. 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관찰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 두 가지 중 하나야. 넌 성병에 노출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뒤늦게 수두를 앓는 거라고. 그런데 두 번째 가정은 네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지니…이 몹쓸 녀석, 넌 성병에 걸린거야! ’

아버지는 나를 기분 나쁘게 째려본 뒤 마치 내가 길가의 오물이나 되는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가증스러울 정도로 추악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순간이었으니! 나중에야 밝혀졌지만-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는 오진을 했고, 그것은 수두였다. 어찌되었건 나는 정력을 낭비했음을 깨달았다. 그건 무시무시한 진실로 다가왔다.  수두사건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그 병에서 완쾌되자마자 방탕한 생활에 결별을 고했고, 더욱이 결혼이라는 관습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모님의 친구 분이 수두 후유증으로 버둥대는 나를 스위스 니옹 근처의 공기 좋은 산간 지방으로 요양을 보내라고 귀띔했다. 나는 미련 없이 떠났고, 거기서 나의 첫 아내를 만났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나는 당시 파리의 어떤 카페 직원과 연애중이어서 평범한 만남으로 그쳐야만 했다. 게다가 성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시기를 통과한 후 나는 외출을 극도로 삼가하고 있었다. 헌데 그녀를 두 번째 보았을 때는 평범한 만남으로 방점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니옹 지방의 갑부 딸이었고, 집안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저택에 자주 초대되었다. 대가족이 우글대고 있는 그 집에서 그녀의 어린 동생들의 가정교사도 해주고 그녀의 부모님과 친인척이 모일 때면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치와 말솜씨를 발휘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집안의 공공연한 사위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는 아무개의 남편이 된, 자연스럽게 성사된 결혼이었다. 결혼은 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더 이상 대학에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아내 집안의 풍족한 경제적인 배경덕분에 돈 문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이다. 그러나 결혼한 뒤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영화와 연극관람, 독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누릴 수 있던 사실은 확실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파리의 부르조아 상류층이 모여 사는 네이유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주 즐겁고도 기상천외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는데, 그건 마누라 등에 업혀 산다는 현실이었다. 그걸 오랫동안 좋아할 사내는 드물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고 때가되면 하리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 마음이 무거웠다. 군입대시기가 닥쳐오자, 회의로 덮인 그 시간으로 부터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입대 후에는 병역을 채우지 않는 술수를 부려 3개월 만에 나는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상황 파악에 능란한 나의 감각은 군대에서도 발휘되었다. 군대 행정에 구멍이 난 것을 알아챈 나는 입대한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도 나의 입대가 공식적으로 발효되지 않았음을 항의 했고, 그걸 빌미로 나는 병역 의무일수를 줄이는 빌미를 얻어냈다. 더군다나 나는 군대에서 실적을 올리며 병역 의무일수를 또 줄여나갔다. 당시에는 헌혈이 국방 의무화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내무반 군인들에게 ‘지금 자청해서 헌혈을 하는 것이 나중 의무화 될 때 하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며 부추겼다. 결국 다른 내무반보다 더 많은 헌혈지원자가 생겨나 지휘관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틀이나 더 받아 챙길 수 있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로 다시 아내 덕에 먹고 사는 남편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폭스 영화사에서 홍보담당을 맡는 기회가 생겼다. 영화계에 첫발을 대딛는 셈이었다. 폭스 영화사에서는 영어권 영화의 프랑스어 제목을 찾는 일이나 -그건 너무나 재미 있었다- 혹은 폭스에서 배급하는 영화들에 관한 홍보용 기사를 올리는 일을 주로 맡았다. 예를 들어 프랭크 타쉴린의 1956년작 <The girl can’t help it> 의제작사에서 보낸 홍보 문구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 여주인공을 맡은 제인 맨스필드의 프로필을 나는 이렇게 조작하였다: 제인 맨스필드, 그녀는 방년 11세에 이미 자신의 가슴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예지하였으니..!’ 천박하기 짝이 없는 문구였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적절했었다. 이렇게 폭스사에서 나는 1년 반을 꼬박 채워 일하다가 곧 시간제로 업무를 줄였다. 첫 영화를 준비하기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의 꿈은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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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전쟁도 끝났고, 사르당 지방에서의 왕 노릇도 끝났다. 4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아들을 보자마자 부모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줄께’라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명문 고등학교 루이 르 그랑에 나는 무난히 입학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전히 권력에 취한 청소년이었던 나는, 이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나는 반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하고만 어울렸다. 나는 그들처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괴짜 시골뜨기로서 별의별것을 후두룩 꿰어 잘 알고 있는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모험담과 삶의 생생한 지식을 펼쳐놓았고, 소중한 동무가 되었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추켜세웠으며,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문학에 푹 빠져 지냈는데, 원문으로 된 그 책자들을 사들여 달달 외울 정도로 읽은 뒤 모조리 비싼 값으로 되팔기도 했다. 나는 상술에 재주가 있었다. 어쨌거나 나의 용돈은 나의 욕망에 비해 늘 빈약했고, 궁여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헤밍웨이나 도스 파소스와 같은 문호들의 친필 사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나는 감히 그들의 사인을 흉내 내어 내 책 머리에다 갈겨썼고, 웃돈을 얹어다 팔았다. 사람들은 나의 사기를 의심하지 않고 책을 챙겨 갔다. 나는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다시 책을 구입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나는 이렇게 사기꾼에다 강탈꾼인데다가 황당한 책들을 읽어댔다.  20세기 초 유행했던 대중 소설 중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키치스런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이었는데, 나는 그러한 점이 너무나 좋았다! 학교와 집에서는 늘 내게 엄격함을 요구하였고 나는 그러한 환경을 잘 견디는 성향이 아니어서, 이와 같은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돌파구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 소설 속 인물들에 영향을 받은 나는 학교에서 엉뚱하고 대담한 행동을 하여 학교 괴짜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대표적으로 라틴어 선생님과의 대결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정말 구질구질했을 뿐 아니라 라틴어의 문법을 엉망으로 가르치는 형편없는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와 대결하기 위해 이중적인 얼굴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평소 나는 샤브롤이었지만, 그에게 대들고 맞설 때는 마냐드라고 자칭하였다. 그에게 빈정거리며 반항할 때면 약이 잔뜩 오른 그가 나를 붙잡고 ‘마냐드, 거기서지 못해!’라고 하면서 뒤돌아서 싱긋 웃으며 ‘선생님, 저는 마냐드가 아니라 샤브롤입니다’라고 해서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냐드와 샤브롤은 이렇게  2년 동안 교내에서 존재해왔다. 교내 벽보에 ‘마냐드는 미친 녀석’, ‘샤브롤은 희롱을 즐기는 녀석’등이 게시되기 시작했다. 우리(마냐드와 샤브롤)에 대해 너무 많은 소문이 나돌았고, 나는 교원회의에 소출되었다. 이틀간의 정학처분이 내려지면서 교장선생님은 내게 마치 공범자처럼 윙크를 했다. 


부모님 또한 교내에서의 나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영화관에 가느라 학교 수업을 빼먹는 것만은 쉽게 용납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부모님은 우리 집 하숙생에게 내 뒤를 밟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날 아침만은 학교를 빼먹지 않을 작정으로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로 가는 길은 팡데옹 극장을 지나가야 한다. 나는 잠시 팡데옹 극장 앞에 멈춰 서서 전날 보았던 영화의 스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뒤를 밟던 하숙생이 내 목덜미를 쥐고는 ‘요 녀석! 너 또 학교 빼먹고 영화관 가는거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나의 목덜미를 끌고 집으로 직행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부모님께 하숙생의 착각을 주장하며 그의 착각으로 인해 진실과 정의가 얼마나 처참하게 무시당하고 있는지를 역설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과장된 언변술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할 거라고 맹세해!’라며 큰 소리를 치셨다.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 몰래 무수히 학교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으로 향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풀리는 일이 없었다. 사르당에서는 여자애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었는데, 파리에서는 여자애들이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했다. 결국 나는 심통이 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여자애들의 엉덩이를 집적거렸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날씬하고도 근육질의 몸집에 사제 같은 얼굴로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럴 경우 으레 엉큼해 보이는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들이 의심을 받고는 모두가 ‘몹쓸 인간이네!’라고 한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나는 몇 번 뺨을 얻어맞기도 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참 실험적인 시절이 아니었던가.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짓을 무려 2년 동안 하고 다녔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까. 나는 항상 행복과 더 인연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원한 것은 꼭 얻어내고야 말았다. 헌데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으니 나는 초조해졌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무슨 일을 저질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파리지엔느들을 꼬시는 방법을 심사숙고하게 되었고, 그것은 ‘부끄러움 타는 방법’으로 결론지어졌다. 여자애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시선을 끈 다음 나는 더없이 부끄러운 남학생으로 돌변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여자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 시절 여자 친구 사귀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은 할머니와 영화관에 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탈선행위에 유일한 공범자였다. 할머니는 내가 영화관에 가기 위해 수업을 빼먹는 것도 괘념치 않았고,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해도 모른척했다. 영화관에 가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동반자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우리는 영사기에 영화 필름이 끼워 맞추기 시작할 아침나절부터 이 극장 저 극장으로 돌아다니며 영화를 보았다.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는 늘 내 책임이었고, 하루 종일 서너 편씩 뛰어다니며 본 영화들을 할머니는 헷갈려하며 내용을 뒤섞기도 하였다. 영화를 뒤섞여 재구성하는 할머니는 매력적이었고, 아름다웠다.


1950년대가 시작되면서 미국영화가 물밀듯이 흘러들었다. 아침에는 빌리 와일더의 1944년작 <이중배상Double Indemnity>을 보았고, 오후 두시에는 오토 플레밍거의 1944년작 <로라Laura>를 보았으며, 연이어 프레스톤 스터저스의 1941년작 <레이디 이브The Lady Eve>, 프리츠 랑의 1944년작 <창가의 여인The Woman in the Window>의 감상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그렇게 영화를 하루 종일 보러 다니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내게 있어서 마치 감정을 맛보기 위해 회화 작품을 보러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는 문화 활동이었다. 물론 영화를 많이 보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었고, 이 영화는 저 영화에 비해 왜 담백한 느낌이 드는지, 영화 속 인물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상대방은 왜 등을 돌리는 가 등등, 자문을 많이 던지기는 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잘 못 찍은 영화는 금방 식별하게 되기도 했다.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부모님에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살짝 비추었다. 부모님의 대답인즉, ‘그런 직업은 게이들이나 하는 거다’. 전혀 놀랍지 않은 답변이었다.(계속)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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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터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온수기 사건’에서 살아남은 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염려와 함께 무제한적 사랑에 둘러싸인 유년기를 보내었다. 그러던 와중 대퇴골 칼슘 결핍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아홉 살 해의 두 달 동안을 침대에 묶여 지내게 되었는데… 그즈음 우리 가족은 오를레앙에서 다시 파리 14구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왔고, 부모님은 마치 루이 14세 시대 럭셔리한 주택이나 되는 것처럼 어린아이들 마냥 날뛰며 행복해했다. 나는? 나 또한 부모님처럼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어야 하겠지만, ‘이건 흥미 있는 경험이다’라고 중얼거렸고, 이왕이면 이 풍족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부모님은 대퇴골 때문에 침대에서 두 달 동안 누워있던 나를 북쪽 영국해협과 근접한 노르망디 메를리몽 해변가로 요양을 보냈다. 거기서 나는 여름을 보내며 해변의 모래 위를 엉덩이로 걸어 다니는 법을 터득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엉덩이 걷기’에 이력이 나서 정상적으로 걷는 사람보다 더 빨리 걷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곧 나는 메릴리몽 해변가의 명물이 되었는데,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는 모래 삽을 들고 잽싸게 엉덩이로 걷는 소년의 친절함과 매력은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해변가에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하였다. 당시 아이들은 모래로 주머니를 만들어 어물전에 파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물전 상인들은 아이들이 가지고 온 모래주머니에 조개를 넣고 도시로 운송했기에 모래주머니가 필요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상술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래주머니에 색칠을 하거나 미리 조개를 넣어 팔았지만 나는 그냥 주머니에 모래를 넣기만 하고 조금 더 싸게 팔았다. 그렇게 하니 중간 상인 노릇을 하는 아이들이 생겨나 내 주머니를 더 많이 구입했고, 그들은 나름대로 색칠을 하거나 장식을 하여 더 비싸게 되팔아야 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순이익을 챙기게 되는 것은 나였다. 메를리몽 해변가의 아이들은 내 발밑으로 속속 들어왔고, 소년시절 나는 이렇게 권력의 맛을 보며 생색을 내는 태도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여름마다 메를리몽 해변가에서 3년을 보내고 난 후 대퇴골도 다시 원상복귀를 하여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 상상해보라, 3년 동안 엉덩이로 걸으며 모래 장사를 하면서 추앙받던 소년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 부모님은 유명한 몽테뉴 고등학교 근처의 중학교 2학년 과정에 나를 집어넣었지만 나는 당연히 학교에 흥미가 없었다. 장난질이 더 멋있고 흥미 있게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파악했던 나는 학교를 가면 교실에 붙어있지 않고 윗반 아랫반 교실을 왔다 갔다 하였다. 들킬까봐 두렵지는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상한 놈이 어슬렁거리는 구나’라고 중얼거리다가 말겠지. 며칠을 그렇게 교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들킨 후로는 내게 지정된 학년 교실에서 별반 움직이지 않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똑똑하면서도 멍청한 학생이었다. 나는 어디서든 왕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동시에 나를 완전히 망각시키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아무 말도 안하면 되니까. 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아주 흥미 있는 표현을 써가며 떠들어대면 그만이다. 내게 있어서 이건 일종의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상관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학교생활은 몇 달을 가지 못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야 말았으니까. 



부모님은 나를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프랑스 서부 사르당 지방으로 보냈다. 메릴리몽 해변가에서처럼, 나는 그 촌구석에서 며칠 만에 권력을 잡았다. 처음에는 물론 쉽지 않았다. 시골 아이들은 나를 도시에서 온 외계인 취급을 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여전히 못생겼고, 키는 1미터 30센티에도 겨우 못 미치는 열두 살짜리 땅꼬마였다. 거기서 최악이었던 것은 나의 목에 항상 둘러쳐있던 나비넥타이였다. 시골아이들은 내가 등장할 때마다 ‘오 나의 친애하는 !’이라고 부르며 나를 놀려댔다. 그러나 상황은 곧 역전되었다. 아이들은 곧 나의 노예가 되었으니까. 먼저, 나는 한 달 만에 그 시골 중학교에서 월반을 했고 늘 일등을 차지했다. 나는 마치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공작새가 된 것처럼 으스댈 수 있었다. 전학 오자마자 월반에다가 우등생이라는 소문은 사르당 지방에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소년시절, 나는 왜 그렇게 허영심과 권력의 욕망에 시달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폭군의 욕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떠받들어지는 쾌감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런 나의 첫 희생자는 할머니였다. 전쟁 중 생활의 어려움과 부모님의 부재와는 상관없이 나는 걸핏하면 할머니에게 용돈을 요구했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은 무조건 가져야 하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단연코 거절했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니. 네가 어제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가는 것을 이미 보았어 !’ 할머니의 말은 진실이었고, 나는 ‘알았어 ! 세상은 잔인하고 부당해 !’라고 소리치고는 울며불며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물 내리는 짓을 반복하였다. 물론 화장실 문은 활짝 열어둔 채로 말이다. 할머니는 내 뒤를 어기적거리며 따라와서 나의 이상한 행위를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벌벌 떠는 손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셨고, 나는 그걸 최대한 활용하는 몹쓸 소년 이었다 ! 





또 다른 피해자는 사르당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다. 할머니는 내가 신부님에게 수학과 라틴어를 배우라고 성당에 보냈는데, 나는 오만불손하게도 신부님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는 것을 확신해버렸다. 신부님은 끔찍한 몽매주의에 사로잡혀 있어서 프로마송이라는 비밀 권력단체의 어둡고도 어두운 미사 의식에 관해 미소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묘사하였다. 나는 그런 신부님이 이상하지도 싫지도 않았고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와 신부님의 친밀한 관계를 최대한 활용했다. 신부님은 세례식이 있을 때마다 열두 살에 불과한 내게 대부노릇을 맡겼다. 사르당 지방의 주민들은 좌파성향이라 신도 악마도 믿지 않았다(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계는 우익 성향의 사람들을 상징했다). 하여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이미 세례를 받은 성인들을 찾아 대부노릇을 맡기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세례를 받은 열두 살의 내가 어릿광대처럼 대부노릇을 하였는데, 사르당 지방에서 나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는 계기를 제공하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빵집 아저씨와도 친구였고, 카페 주인과도 친구였으며, 사르당 지방 유지와도 친구였다. 그 지방의 사람들은 쉴 사이 없이 나를 초대하고 대접했다. 초대를 받을때마다 나는 노래를 한 곡조 뽑았고, 이내 나는 스타가 되었다. 나르시시즘에 푹 빠진 나는 화장실에 틀어박혀 변기 위에 올라 앉아 거울을 보며 노래를 부르거나 라신의 <페드르> 와 같은 비극의 대사를 연기하면서 읊어대었다. 그런 나를 거울로 관찰하면서 나 자신이 대단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을 뿐이다. 이 정도면 행복한 소년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완전히 그렇지는 못했다. 부모님은 전시 독일 치하의 파리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자유롭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어쩌다 가끔 부모님께 날라 오는 엽서는 검열 때문에 형식적인 인사말만 간단하게 쓰여 있었고 (전쟁 중 검열의 이유로 편지는 금기시되었고 봉투 없는 엽서만이 가능했다) 나는 부모님께 인사말 아래 쉼표와 마침표, 느낌표를 이용하여 암호를 만들면서 의사를 소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딱 두 번 나를 보러오셨는데, 올 때마다 수염이 얼굴에 가득했으며 야밤을 이용하여 소리 없이 왔다가 떠나셨다. 그렇게 사르당에서 소년시절은 끝나고 있었고, 시네 클럽 활동이 곧 시작되었다. (계속)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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