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멈추지 않아요

 

극 중 작가인 로버트 해먼(존 카사베츠)은 어린 배우 지망생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너에게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언제였니?" 이에 대해 지망생은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지만 이 질문을 해먼에게 돌려보면 그 역시도 마땅한 대답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술과 담배와 커피에 절어 살며 오랜만에 만난 12살 아들을 혼자 호텔방에 남겨두고 인터뷰를 빙자해 만난 여자들과 하룻밤 사랑을 즐기는 그에게 인생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해먼의 인생에 과연 의미라는 것이 존재할까?

<사랑의 행로>는 인생의 의미 여부를 떠나 적어도 해먼과 같은 이들에게 계속 살아나가기 위한 의지와 삶에 대한 끈기가 있다고 말하는, 그럼으로써 응원하는 영화다. 해서 이 영화에는 우리가 쉽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정 짓는 인물들의 총집합이라 할만하다. 해먼과 함께 극의 중심을 이루는 그의 여동생 사라(지나 롤랜즈)는 괴팍한 성격과 갖은 기행 탓에 남편(세이무어 카셀이 연기했는데 그래서 <사랑의 행로>는 '<별난 인연>의 10년 뒤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이면 어울릴 것 같다.)에게 이혼당하고 하나 있는 딸마저도 등을 돌린 인생 막장에 몰린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기행을 들여다보면 마음의 깊은 우물 속에는 애정결핍이 넘쳐흐를 듯 고여 있다. 사실 해먼과 사라가 불러오는 사건과 말썽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 둘 사람을 찾고 싶지만 워낙 관계와 소통의 기술이 떨어지는 탓에 자신들의 진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연출에 있어서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거리를 유지했던 카사베츠는 주류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소외된 인물에 눈높이를 맞춰 그들의 삶과 태도에 아낌없는 애정과 응원을 보내왔다. <사랑의 행로>에서 특히 두드러지듯 사건의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인물에게까지 숏을 제공하는 카사베츠의 연출은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그와 같은 관심은 곧 타인을 향한 시선의 흐름을 전제한다. 그것은 곧 사랑이 갖는 의미이기도 한데 아닌 게 아니라,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사라가 딸과 함께 살 자격이 충분하다며 항변하는 대사 "사랑은 서로에 대한 관심(streams)이에요. 그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돼요."는 이 영화의 원제가 'Love Streams'인 이유를 직설한다. 해먼과 사라의 각각의 에피소드를 평행하게 진행하며 각자의 외로움을 부각한 후 이들의 조우와 함께 이야기가 하나로 합치는 구조는 관심과 연대가 곧 사랑과 애정이 되는 영화적 주제를 반영한 결과일 테다.

그런 영화적 주제의 실천일까. 존 카사베츠는 일찍이 연출 데뷔작 <그림자들>(1959)의 성공으로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찍을 기회를 얻어 <투 레이트 블루스>(1961)와 <기다리는 아이>(1963)를 만들었다. 하지만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다시는 스튜디오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후에 할리우드를 통해 <글로리아>(1980)와 <사랑의 행로>를 배급하며 스튜디오 시스템과 화해에 성공한 뒷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허남웅 /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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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베츠의 예술적 진화

 

1976년 <영향력 있는 여자>로 아카데미시상식 감독상 후보로까지 지명되었던 존 카사베츠는 휘황했던 전작의 성공을 뒤로 하고 혁신을 위한 도전으로 기운다. <영향력 있는 여자>의 박스오피스 성공을 업고 카사베츠는 직접 투자, 제작한 영화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이하 ‘<차이니즈 부키>)을 발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영화에 대한 시장과 평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카사베츠 역시 영화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카사베츠는 영화의 흠결을 개선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 비용을 지출했다. 결국 134분 이었던 1976년 오리지널 판본은 1978년 108분 길이의 재편집판으로 재개봉하였다. 재편집된 <차이니즈 부키>는 카사베츠의 시각적 스타일을 가장 풍부하게 구현하고 있었고, 내용적, 형식적 진화를 엿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다.

이야기는 ‘크레이즈 호스 웨스트’라는 스트립 클럽의 소유자이자 도박사인 코스모 비텔리(벤 가자라)라는 인물에 초점화되어 있다. 도박 빚으로 갱단의 겁박에 시달리던 코스모는 빚을 탕감하기 위해 자신의 클럽을 넘기는 대신 차이나타운의 거물 중국인 마권업자를 살해하라는 갱단의 제안을 받는다. 갈등 끝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상까지 입은 채 임무를 마치지만 이번에는 갱단들이 코스모의 목숨을 노린다.

표면적으로 갱스터 누아르의 장르 서사를 따라가지만 <차이니즈 부키>는 카사베츠의 정체성이 투사된 자기반영적 영화이다. 영화 안에서 그는 범죄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쇼 비즈니스계의 압박 하에서 살아가는 창조적 감독의 처지를 코스모의 상황에 융해시킨다. 카사베츠 영화의 인물들처럼 주인공 코스모 비텔리는 자신의 삶을 사는 예술가처럼 보인다. 코스모의 주체적 경험을 영화의 표면으로 침투시키기 위해, 카사베치는 대담한 형식의 모험을 시도한다. 조명과 프레이밍, 음악, 카메라 스타일은 독창적이고 풍부한 스타일을 구현한다. 표현적인 조명효과와 중심인물을 옹립하는 프레이밍, 코스모의 인물 됨됨이를 환기하고 그의 심리 상태를 형상화하는 시청각적 기교들이 동원된다.

몇몇 장면들은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을 남긴다. 청부살인을 사주하는 갱들과의 대화 시퀀스, 목표물을 제거한 코스모가 중국인 갱들의 소굴에서 빠져나오는 시퀀스, 코스모가 자신을 찾아온 암살자들을 차례로 제거하는 시퀀스 등에서 신경증적인 핸드헬드, 강박적인 프레이밍, 빛과 그림자의 패턴은 코스모를 흡사 유령과 같은 형상으로 변형시킨다. 대담한 클로즈업과 정형화되지 않은 편집의 리듬, 표현주의적 조명, 프레이밍 효과는 시청각적으로 탁월한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차이니즈 부키>는 1970년대 카사베츠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준다. 바로크적인 시각적 스타일로 구현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을 해쳐가는 한 남자의 엑조틱한 모험은 한 편의 주관적인 판타지처럼 묘사되고 있다. <프렌치 커넥션>과 같은 1970년대 범죄 영화의 경향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차이니즈 부키>는 인디 작가로서 존 카사베츠의 예술적 진화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장병원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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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에 대한 넘치는 애정

 

두 번의 스튜디오 작업은 존 카사베츠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그는 할리우드 시스템 아래에서 영화를 찍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튜디오와 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절대로 상업영화를 찍지 않기로 결심했다(물론 그 결심도 어쩔 수 없이 바뀌지만). 카사베츠는 할리우드의 역겨움을 <얼굴들>의 도입부에서 드러낸다. 시사실에 모여 앉은 영화 관계자 중 한 명이 “이번엔 뭘 팔 거야?”라고 묻자 상대편 인물이 “돈이죠”라고 대답한다. 이어 옆 인물이 “사실, 이건 아주 좋은 영화예요”라고 말하면 다시 다른 인물이 “상업영화 영역의 <달콤한 인생>이라고나 할까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돈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할리우드와 더 넓게는 돈으로 지배되는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카사베츠 영화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풍경이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에서 한 갱스터는 마르크스를 인용해 “돈은 대중의 아편이야”라고 말한다. <얼굴들>에서 회사원들이 창녀 위에 군림하고 협박하기 위한 카드로 들이미는 건 여지없이 돈이다. 1965년, 카사베츠는 만 달러를 가지고 <얼굴들>의 촬영을 시작했고, 삼 년 동안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해 번 이십만 달러를 들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와 장모의 집이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이었으며, 그의 집 차고가 영화의 편집실이었다.

 

카사베츠가 ‘<얼굴들>에 대한 소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연극무대용이던 <얼굴들>의 초고를 쓸 당시 카사베츠는 자기 삶에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시나리오가 미국 중산층과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과 공포로 물든 건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인 포스터 부부와 그 외의 인물들은 교외에 살며 편협한 생각을 품은 중산층의 전형으로 제시된다. 서로 진실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지내던 그들은 어느 날 술에 취해 가면 아래 얼굴을 하나씩 드러낸다. 누군가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변하고, 누군가는 본모습을 들킨 것에 놀라고, 누군가는 짧은 자유를 만끽하려 애쓴다. 밤은 끝나지 않을 듯이 길게 이어지며, 몸에 맞지 않는 낯선 악몽에서 깨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얼굴들>은 배우와 카메라가 연주하는 재즈에 다름 아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배우들은 감정의 출렁임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성난 말처럼 널뛰는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과 신체의 조각 위를 더듬는다. 그러므로 얌전히 앉아 인물과 이야기를 분석할 생각은 떨쳐버려야 한다. 영화와 함께 달리기가 우선 급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추해빠진 중년 부부는 각각 젊은 창녀와 제비족과 밤을 보낸 뒤 자신과 상대방의 벌거벗은 얼굴과 마주한다. 마침내 마리아가 남편 리처드에게 “내 삶이 싫어. 그냥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카사베츠는 이제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극은 없다. 악몽에서 깨어났으니 현실을 살 일만 남았다. 카사베츠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인물에 대한 애정을 거둔 적이 없다. 카사베츠는 아무리 나쁜 인물도 미워할 수 없게 그린다. 그는 삶에 있어 ‘애정’만큼 소중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이용철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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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발붙인 사랑이야기

 

<별난 인연>이라는 국내 제목이 이 영화의 내용을 적절하게 압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주인공 '미니와 모스코비츠 Minnie and Moskowitz'는 진짜 별나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모스코비츠(세이무어 카셀) 쪽은 유아적이다 못해 괴팍하게 비칠 정도다. 주차관리원으로 근무하는 그는 퇴근 후 혼자 영화를 보고 술집에 들어가 여자를 희롱하는 게 일상의 전부인 노총각이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미니(지나 롤랜즈)는 모스코비츠처럼 개차반은 아니지만 남자 복만큼은 지지리도 없는 여자다. 사랑하는 유부남은 아무렇지 않게 손찌검을 하고 어쩌다 소개받은 남자는 아뿔싸(!) 이런 비호감이 없다. 이때 미니 앞에 나타난 모스코비츠, 이들은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헤드윅>으로 유명한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은 <숏버스>(2006)를 만들 당시 "영화의 톤이나 스타일 면에서 존 카사베츠의 작품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며 특별히 <별난 인연>에 대해서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별난 인연>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형태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와 관련한 단서는 극 초반 <카사블랑카>(1942)을 관람하고 나온 미니가 동료와 나누는 대화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현실에선 보기(험프리 보가트 애칭)같은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하물며 영화에서처럼 로맨틱한 사랑은 언감생심이지." 그러니까 <별난 인연>은 하늘에 붕 뜬 조각구름 같은 로맨스가 아니라 질퍽한 현실에서 벌이는 진흙탕 싸움 같은 사랑영화다.

 

미니는 선녀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이 눈에 거슬리는 모스코비츠는 선남과 거리가 멀고 멋들어진 레스토랑이 아닌 지저분한 거리의 포장마차가 이들 데이트의 배경이 되며 스포츠카에서의 밀담과 같은 낭만 따위는 저 멀리 나빌레라 엔진 소리 요란한 트럭이 '별난' 이들의 인연을 강조한다. 이렇듯 기존의 장르와 미장센 자체의 격(?)이 다르다보니 진행되는 이야기의 양상도 다르다. 외로움에 사무쳤지만 소통에는 미숙해 사사건건 부딪히기 일쑤인 이들의 삶에는 달콤한 환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간신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그럼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도 됐을 결말을 카사베츠는 굳이 더 들어가 이들의 사랑에 찬물을 끼얹는 에피소드를 마련, 일말의 환상마저도 깨버리는 것이다.

 

존 카사베츠 영화가 갖는 편집의 독특함, 즉 앞뒤 재지 않고 불친절하게 장면과 장면을 뚝 끊어 연결하는 방식은 즉물적인 캐릭터들의 성격과 태도에서 기인한다. 홍상수 영화의 즉흥적인 서술 방식이 극 중 인물들이 그 때 그 때 벌이는 술자리에서의 노닥거림의 반영이듯 존 카사베츠 역시도 미니와 모스코비치의 즉각적인 감정 표현을 편집에 그대로 반영한다. 이는 카사베츠가 사건보다 인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매번 루저에 가까운 인물이 등장하는 그의 영화는 그래서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인디펜던트 영화가 갖는 특유의 생생함이 카사베츠의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는데 그처럼 <별난 인연>의 미니와 모스코비츠도 결국엔 관객들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자리 잡는다. (허남웅 /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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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과 자유에 관한 코미디

- 존 카사베츠의 <남편들>

 

 

 

<그림자들>이 없었다면 뉴할리우드의 시작은 좀 더 늦게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시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 카세베츠는 새로운 영화 청년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젊은 감독들이 스튜디오의 초대를 넙죽 받아들일 때, 카사베츠는 스튜디오에 맞서고자 몸부림쳤고, 젊은 감독들이 현실 바깥에서 방황하는 청춘에 매달릴 때, 카사베츠는 현실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야 하는 중년의 인물을 다뤘다. 카사베츠는 동시대의 문제적 관계의 축소판인 부부 관계를 즐겨 그렸는데, <남편들>은 카사베츠의 가족 드라마를 대표하면서도 (<투 레이트 블루스>가 그렇듯) 한동안 관객들이 만나기 힘들었던 작품이다.

 

 

1969년에 찍어 1970년대의 시작점에 공개된 <남편들>은 이상한 가족 드라마다. 가족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부인과 아이들은 영화에서 거의 지워져 있다. 오히려 남편들의 모험담에 더 가까운 <남편들>은 <행오버>의 거친 선배 같다. 1970년대의 가족문화를 반영하거나 예견한 작품들 - <밥과 캐롤과 테드와 앨리스> 유의 드라마, <아메리칸 패밀리> 유의 TV쇼, <토끼> 시리즈 유의 중산층 남자 소설 - 과 비교해, <남편들>은 이후 다가올 것들에서 의도적으로 달아나려고 한다. 가족 깊숙이 현미경을 들이대고 부부관계를 냉소하고 숨겨진 진실을 까발리는 태도는 <남편들>에 없다. 친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한 세 남자가 집과 직장에서 벗어나 멀리 영국으로 무작정 떠나는 것처럼, <남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꺼리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지닌 영화다.

 

카사베츠는 <남편들>이 아주 개인적인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서른 살에 죽은 형을 기억했고, 영화에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 초래한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줄곧 술에 취한 세 남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슬픔을 달래려 한다. 그들의 행동은 때때로, 아니 대부분 어리석다. 번듯하게 살아가던 세 남자는 느닷없이 정신 나간 행동에 빠지면서 전형적인 카사베츠의 인물로 화한다. <삶과 죽음과 자유에 관한 코미디>라는 부제를 단 <남편들>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의 특성이 그대로 극의 전개 방향을 지시하는 카사베츠 영화의 대표적인 예다. 시작부에서 세 남자가 동의한 선언 - “집에 가지 않겠어” - 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인임과 동시에 세 남자의 내면을 옭아매는 짐이다. 그들은 뉴욕과 런던 사이를 오가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그들은 왜 집으로 가지 않을까, 그들에게 돌아갈 집이 존재하기는 할까. 결국 공항에서 급히 구입한 선물꾸러미를 들고 집 앞에서 서성이는 두 남자(한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의 모습이 시리다. 아이가 덤덤하게 내뱉는 “엄마, 아빠 왔어”라는 말은 그들 - 남편들에게 엄숙한 선고로 들린다.

 

남편이란 존재들이 중년의 모퉁이를 돌며 느끼는 불안감, 죄책감을, 카사베츠는 <남편들>을 통해 전한다. 기실 <남편들>과 <행오버>는 다르다. <행오버>가 사라진 (곧 결혼할) 남자를 찾는 친구들의 이야기라면, <남편들>에서 실종된 자는 (오래 전에 결혼한) 그들 자신이다. 당연히 누군가를 찾는 결말 따위는 없다. (이용철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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