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작인 <자마>는 청나라 때 양강총독 마신이(馬新貽)가 암살당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가 법정에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발목에 채워진 수갑과 법정의 사뭇 무거운 분위기로 그가 저지른 범죄의 중대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당당하다. 그는 종이와 붓을 요구하고 사건의 진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9년 전 산 중턱에서 길을 지나가는 상인들을 상대로 도적질을 해서 살아가는 두 남자가 있었다. 의형인 황종(진관태)과 의동생 장문상(강대위)이다. 이들은 어느 날 신기에 가까운 무술 실력을 보이는 마신이(적룡)를 만나고 셋은 다시 의형제를 맺어 산채에서 무리를 지어 함께 살게 된다. 둘째와 셋째와는 달리 마신이는 입신양명의 야망이 있었다. 그는 홀로 산에서 내려와 과거에 급제하고 몇 년이 지나 마침내 큰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산채의 형제들을 불러 함께 대업을 도모하려 한다. 그러나 마신이는 둘째 황종의 부인인 미란과 품은 연정이 점점 커지는 것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


1870년 8월 22일 남경에서 양강총독 마신이가 의형제였던 장문상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청조 때 가장 논쟁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역사적 연구에 의하면 장문상과 마신이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장문상이 사형을 당한 이후에도 치정과 배신 등 여러 가지 소문과 추측들이 사람들 사이에 난무했다. 이러한 자극적인 소재들이 가미되어 마신이 사건, 자마안(刺馬案)은 후대 사람들에게까지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장철 감독은 1973년에 <자마>를 통해 이 사건을 재구성했고, 2007년에는 진가신 감독이 <명장>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다.



<자마>는 장철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장 덜 폭력적인 영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베놈스 필름(venoms film)으로 불리며 팔다리가 잘리고 피가 흐르는 장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던 것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자마>에서 칼싸움과 날아다니는 창은 존재하지만 최소한의 피만을 허용하겠다는 듯 창과 칼에 묻은 피로 적의 죽음과 승리를 암시한다. 오히려 <자마>의 초점은 화려한 무술 장면이 아니라 주인공들 간의 섬세한 감정 연기에 향해 있다. 금지된 감정을 품은 마신이와 미란 사이의 팽팽한 긴장, 장문상이 그들에게 갖는 의심은 나날이 커진다. 일반적인 삼각관계의 구도와 다르게 미란의 남편인 둘째 황종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 대신 장문상과 마신이, 미란이라는 삼각 구도의 긴장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홀로 남은 미란은 장문상이 사형당하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지켜본다. 실제로 장문상은 아주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산 채로 살점을 잘라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통을 받게 하는 사형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신체 일부가 마신이의 제단에 바쳐졌다고도 한다. 영화 속에서 장문상을 죽이는 것은 마신이의 수하들이다. 그들은 축제의 한 장면처럼 웃고 떠들며 장문상을 처형한다.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임을 당하는 모든 파국을 지켜본 그녀만이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손소담: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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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자마, 장철

武俠少女 張徹映畫 愛情告白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누군가 취미를 물어보면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라고 답했던 나, 중학교 때 무협드라마에 심취하고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에 관심을 잃었다고 말하던 나, 장철 감독님을 이제야 영접하고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뒤늦게 시름시름 장철 앓이를 하며 이번 특별전에서 꼭 전작을 보리라 다짐했지요. 극장에서 웃옷을 벗어재낀 건강한 남성들을 보며 허허 웃고 있는 젊은 여자가 있다면 아마 저일 겁니다. 덕분에 일상생활에서도 내내 조금 흥분상태입니다. 100편이 넘는 그의 영화들 중에서 고작 7편밖에 보지 않은 장철 입문자일 뿐이지만 이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 설익은 애정고백을 해볼까 합니다.



사실 잔인한 걸 싫어합니다. 특히 전쟁 영화에서 툭하면 나오는 대규모 전투 장면은 싫어하는 클리셰 중 하나이지요. 의미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단역들이 불쌍해서 중요한 장면에 집중이 안 되더군요. 그것은 단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과시적인 액션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데 ‘피바람이 부는’ 장철 영화를 볼 때엔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뭘까, 저기엔 다른 뭔가가 있다. 이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급이 다른 무술 때문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봐야만 진가를 알 수 있는 수려한 액션 씬! 각자의 위치에서 합을 맞추는 수십 명의 정확한 호흡! 일 대 다 액션 씬 중에서는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니, 당연히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에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요. 그러나 ‘다른 뭔가’는 아마도 무술 혹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장철 영화에서의 무술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것입니다.


또 강호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그러하지만, 장철의 세계에는 차원이 다른 비장함이 있습니다. 누구나 정의의 편에 선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한 후 영웅으로 추대 받는 모습을 기대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주인공일수록 가차 없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적들을 모두 쓰러트리지만 자신 역시 못지않게 비참히 죽어버립니다.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받아들인 죽음임과 동시에 승리했으나 승리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인 죽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거의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한번 씨익 웃고는 “난 여전히 천하제일의 검객이다”라고 말하는 <심야의 결투>의 은붕(왕우).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적을 마주하고 “모든 사람이 죽지요” 라며 동료를 보내는 <쌍협>의 소비(강대위). 이번 특별전에서는 상영하지 않지만 <복수>의 관소루(강대위) 역시 형을 죽인 사람들에게 모두 복수한 후, 애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시체는 너무나 처참하고 쓸쓸하여 장렬함이 감돌고, 그들의 신념에선 숭고함까지 느껴지곤 합니다.



이때 비장함, 장렬함 이면에 있는 허무함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막연하게 떠오른 느낌이지만, 이 정서야 말로 장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적어도 영화에서는)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철 세계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커다란 악과 싸웠습니다. 악의 수장은 강호에서 명성을 얻은 실력자이지만 진정한 무림 고수는 아닙니다. 무술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다루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더 큰 명성을 욕심내며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사익을 위해 수련하고, 다른 사람을 꺾기 위한 초식을 연마 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이때 장철을 대변하는 주인공이 나타나 무술의 뜻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악의 무리를 모두 처단합니다. 설사 먼저 쓰러질지라도, 오승욱 감독이 언급했듯 죽었음에도 원념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산 자, 즉 무술의 경지에 이른 자는 망설임 없이 강호를 떠나버립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그들에게 있어, 속세의 사사로운 모든 것들은 이내 져버릴 한 때의 꽃과 다를 바 없는 셈입니다. 한편, <복수>의 관소루는 복수는 했지만, 애인에겐 가지 못하고 끝내 원념을 남긴 채 죽어야만 합니다. 앞서 쓴 것처럼 승리했지만 승리했다고도 볼 수 없을 죽음에 이른 것이지요. 그렇다면 관소루가 목숨과 바꾼 장엄한 접전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장철의 세계에서는 어떤 승리든 장렬하면 할수록 그 못지않은 허무함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함, 장렬함, 숭고함 속에 뒤섞인, 어쩌면 철학처럼 느껴지는 허무함이야말로 여타 무협영화와의 차별점이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검은 옷을 입은 주인공이 죽는 경우는 없더라는 겁니다.(몇 편 안 봐서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흰 옷을 입고 전투로 향하는 주인공에게는 죽음을 불사한 결연함이 묻어납니다. 주인공은 항상 피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흰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하얀 옷에 붉은 피가 튀었을 때, 이는 주인공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신호입니다. 그때부터 영화는 진짜로 시작합니다. 그동안 마지막 결투를 위해 쌓아온 것처럼 주인공도, 영화도 모든 것을 다 쏟아냅니다. 마지막 10여 분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지막 전투는 장철 영화의 진수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황폐한 전장의 위로 떠오르는 마지막, ‘劇終’. 아. 정말 그 순간 고독의 무게란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장철의 영화는 동성애 코드로 읽힐 정도의 남자들 간의 깊은 교감으로도 유명합니다. 오히려 여자가 등장할 때 남자들이 불행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잔인한 장면과 약한 내러티브로 인해 남자들의 영화라는 편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자를 위한 특별전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남자들만 나오며, 탄탄한 몸을 드러내고, 남성미가 한껏 폭발하는, 게다가 내용 힘들게 따라갈 필요 없이,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다운 무술 장면을 감상하면 되는 영화를 마다할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왠지 사연 있어 보였던 배우들의 눈빛이 아른거려 집에 돌아가서도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었습니다. 어두운 이면을 안고 있기에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스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영화를 사랑한다면 그건 아직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부정하고 싶습니다. <심야의 결투>에서 차가운 눈빛을 한 왕우(은붕 역)에 매료 되서 한 편 더 보러 왔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정말이지 그에게 무릎 꿇고 구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심야의 결투>의 은붕은 금연자밖에 사랑하지 않으니 포기해야겠네요. 또 격렬한 싸움 후에 머리를 쓰윽 넘기는 여유를 보여주는 강대위느님은 어떻습니까. 특히 강대위는 <복수>에서 다른 배우들과 달리 연인과의 애정 씬을 몇 번이나 소화해내며 여심을 설레게 했지요.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감추지 않고 옷을 걸핏하면 벗어던지는 남자들도 물론 좋습니다!(하지만 사실 적룡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유독 옷 한번 벗지 않고, 싸우기 직전까지 흰 옷으로 멋을 잊지 않는, 양조위와 유희열 그 중간쯤의 강대위에게 솔직히 전 반했습니다. 이번 주는 본격적으로 ‘강대위-적룡’ 콤비가 출연한 작품들을 공략해볼까 합니다. 앞에선 진지하게 장철 영화의 장렬함, 허무함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멋진 배우들을 보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지요. 정말이지, 특별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휴리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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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 식 무협은 직구 같다. 배우들은 탄탄한 몸을 망설임 없이 드러낸다. 특히 <오독>에서는 오로지 맨손, 맨발로 간결한 격투를 한다. 기존의 무협과 비교해보면 특색이 확연히 보인다. 더불어 장철의 전작과도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공중에서 옷을 휘날리며 창이나 칼 등의 도구를 이용하거나 화려한 필살기를 구사하는 우아함은 온데간데없다. 말 그대로 남자들이 맨몸으로 정면승부를 하는 <오독>에는 담백하고 직설적인 매력이 있다.

<오독>은 단순 명쾌함이 극대화 된 영화다. 영화는 보물을 둘러싼 다섯 명의 제자들의 신경전에 충실하다. 잔인한 장면도 서슴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자칫하면 죽는다. 단 한 번도 비틀지 않고 화끈하게 치고 박는 장철 식 무협이 당시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만큼의 대리만족을 주었을지 상상이 될만하다.

모름지기 무협에서는 문파 간의 싸움이 주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독>은 친형제보다 가깝다는 같은 문파 사제들끼리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악의 구도에 선 세 제자의 입체적인 성격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선악의 대결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앞장서서 악행을 저질렀던 둘째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와서야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고백할 때는 마음이 짠하기까지 하다. 또 점차 정체를 드러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수수께끼처럼 감춰진 셋째의 존재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겠지만 특히 무협 영화는 기술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되게 포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무협은 향수의 영화인지라, 어쩐지 물감이 분명해 보이는 것을 흘려가며 열심히 한 합, 한 합 맞추는, 그리고 단순 명쾌한 쾌남이 나오는 다소 촌스러운 옛날의 것을 찾게 된다. 어설플지라도 그러한 점 때문에 오히려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게 옛날 무협의 재미이다. 게다가 점점 예뻐지는 남자들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오독>을 보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거다. “그래, 이게 진짜 남자지!”  (김휴리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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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오독, 장철

마을 어귀. 한 사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 이별주를 마시고 있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그가 타고 떠날 백마가 한가로이 꼬리로 파리를 쫓는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그를 전송하는 노인과 마지막 술잔을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탄다. 사내는 암살자. 누군가를 죽이러 길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드디어 사내가 암살을 할 표적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자 이제부터 피가 튀는 혈투가 있으리라 기대를 했는데, 사내는 싸울 생각은 안하고 또다시 악사를 들여 음악을 연주하고,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술타령이다.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는 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원망의 눈길을 보내면서 “싸우면 깨워라” 하고는 잠을 자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던 아저씨가 “뭔 놈에 무협 영화가 주구장창 술타령만 해?” 분노에 찬 한마디를 하고 극장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하하하. 장철의 영화 <대자객>이 상영되던 9년 전 부천 영화제의 극장 안 풍경이다. 이미 영화를 보았던 나는 폭풍 같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라스트 혈투 시퀀스의 감동을 친구가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느 시점에서 깨워야 할까를 생각하느라 영화 보기는 뒷전이었다.


<대자객>은 사미천의 사기. 자객열전의 수많은 주인공들 중 섭정이란 주인공을 선택하여 만든 영화이다.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멋진 자객들 중 왜 하필이면 섭정인가? 영화 <영웅>의 주인공 형가는 생선 속에 칼을 숨겨 진시황을 암살 하려다 실패한 비운의 자객으로 자객열전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유명한 자객이다. 장철은 왜 형가가 아니라 섭정을 선택 했을까? 섭정이란 자객은 조말처럼 장군 출신도 아니다. 섭정은 시장 통의 개고기 장사치이니 비천한 신분이다. 형가처럼 폭군 진시황을 처단하려는 대의를 명분으로 삼지도 않고, 예양처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칼을 잡은 자도 아니다. 그가 칼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개고기 장사치인 비천한 자신. 장전된 채로 구석에 놓여있는 총이었던(에밀리 디킨스의 시) 자신을 알아보고 불러내 준 이 때문이다. 국가를 위한 충의 때문도, 정의를 위한 대의 때문도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간파한 자를 위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소진하겠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재능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 병졸로 시작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죽지 않았을 때의 경우이니 하늘에 별 따기다. 섭정은 검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재능을 꽃 피울 전장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개고기 장사치로 늙어 죽어야한다. 그런데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이가 나타나 가난한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보살펴 준다. 의리를 맺은 것이다. 의리는 갚아야한다. 섭정이 의리를 갚을 길은 단 하나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다.



장철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칼을 잡은 주인공을 선택한다. 관객들이 지금 보는 이 영화가 무협영화인가? 의심할 정도로 영화는 암살을 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는 섭정의 모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누이를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절대 일을 할 수 없다며 거사를 미뤄 자신의 암살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남은 것. 사랑하는 연인이다. 섭정은 연인과 이별을 하고,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하고서야 암살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장이모우의 <영웅>에서 형가와 진시황이 천하통일의 대업은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한다는 국가와 개인 간의 문제에 대한 파시즘의 혐의가 다분한 긴 대화 신이 있듯이, <대자객>에서는 섭정이 애인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과 빛나는 한순간을 위한 무모한 삶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다. 80년대 고우영은 만화 <초한지>의 한 에피소드에서 섭정을 우매한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정도, 대의명분도 없이 개죽음을 한 자객이라 평한다. 사바 료타로는 막말의 암살자들에서 자신은 암살자들을 혐오한다고 한다. 암살자들이란 그들의 대의명분이 무엇이건 거래에 의해 타깃이 정해지고, 뒤에서 소리 없이 표적을 제거해야 하니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란 말이다. 장철이 <대자객>을 촬영하기 위해 쇼 브라더스의 스튜디오로 출근을 할 때, 거리에서는 학생들의 데모 대문에 최류탄 연기가 자욱했었다고 한다. 그 때는 1967년이었다. 장철은 이런 시대에 이런 영화를 보러 누가 올 것인가? 한숨을 쉬며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에 항거하던 플라워 무브먼트의 젊은이들은 장철의 주인공 섭정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대자객>의 라스트. 섭정을 연기한 왕우는 라스트 대혈투 신을 촬영하기에 앞서 장철에게서 “네가 최고다. 너는 슈퍼맨이다. 당당하고 단호하게 걸어라!”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일백여명의 적군들이 도사린 적진에서 왕우는 강철로 만든 보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나는 슈퍼맨이다”를 되뇌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라스트 혈투 시퀀스가 시작되면 왕우는 단호한 걸음걸이를 너무 과도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뒤뚱거려 관객에게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가 싸움을 시작하고, 그의 하얀 옷이 적들의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왕우는 섭정의 원념을 고스란히 빙한 것처럼 관객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드디어 <대자객>의 가장 빛나는 장면. 암살에 성공하고,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해 칼로 자신의 얼굴 껍질을 도려내는 섭정의 시점 쇼트. 이 단호한 한 쇼트를 위해 장철은 90분을 끌어온 것이다.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자취를 지워버리려는 자. 의협이니, 대의명분이니 하는 모든 것을 무화 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인공. 장철은 자객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국충정과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주인공들 보다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의 울분과 뜻하지 않게 맺어진 함정과 같은 의리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지극히 사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파시즘과 아나키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니힐리즘적인 자객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동시대 무협 영화를 만든 호금전이 액션 장면을 우아한 수평이동 롱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여 중국 무협의 아취를 보여주었고, 서양의 추리소설 줄거리처럼 치밀한 복선과 주인공들의 암투에 주목하여 신 무협을 만들어 냈다면, 장철은 주인공의 원념을 일직선으로 투박하게 그리는 것에만 전념한 영화들을 만들어 낸다. 수호지의 무송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쾌활림>과 <복수>가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 영화이다. 무송 에피소드는 반금련과 무대. 그리고 서문경의 불륜과 치정 살인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거두절미. 장철은 서문경과 반금련의 불륜 에피소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tv의 아침 연속극 팬이라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영화라 분노 할 것이다. <쾌활림>이 시작되자마자 무송은 벌써 반금련의 목을 잘라 서문경이 있는 술집으로 간다. 반금련의 목을 서문경에게 던지며 두 사람의 혈투가 시작되고, 서문경은 무송에게 박살이 난다. 영화가 시작되고 오 분이 넘지 않아 모두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장철의 관심은 무대의 복수를 한 무송의 유배를 떠나 쾌활림에 이르러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두를 죽이는 피의 잔치를 벌이고 피에 젖은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벽에 “무송이 살인하다”라 쓰는 무뢰한의 원념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 했던 것이다.

<복수>는 무송 에피소드를 현대로 옮겨 만든 것인데, 반푼 짜리 인간 무대를 멋진 외모와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졌지만, 아내를 만족 시키지 못하는 성급하고, 폭력적인 적룡으로 변모시켜 그를 영화가 시작한지 10분 만에 사기그릇이 깨어진 바닥을 맨몸으로 뒹굴다 죽어 버리게 한다. 장철에게는 적룡을 속여서 살해 한 파렴치한 간부들의 불륜과 음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의 내용을 파악하게끔 아주 최소한의 이삼 분만 그들의 음모 장면에 할애하고, 나머지 80여분은 복수를 하는 적룡의 동생 깡따위(짜장면을 자장면이라 하면 안 되듯 깡따위를 강대위라 하면 왠지 섭섭하다)의 몫으로 만든다. 누가 형을 죽였는지 알아내는 수사와 추리 따위 역시 장철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직 형을 죽인 원수들을 향한 동생 깡 따위의 분노만이 중요하다. 그 분노는 깡 따위가 혈투 끝에 몸은 죽었는데도 정신만이 살아나 좀비처럼 원수를 갚게 만든다. 영화의 라스트에 깡따위가 난간에 기대어 두 눈을 부릅뜨고 서서 죽어 있는 긴 시간을 만나게 된다.
그 몇 초간 깡따위가 죽은 척 했다가 적이 다가오자 기습을 하는 것이라 오해하면 안 된다. 깡따위는 죽은 것이다.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그 원념이 너무나 사무쳐 그는 살아나 원수를 갚고서야 죽는 것이다. 왕우가 <금연자>에서 라스트 혈투 장면을 찍을 때 장철은 “너는 죽었다. 그러나 원념 때문에 부활 해야한다”고 주문을 했다고 한다. 왕우는 “이거 정말. 어떻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 투덜댔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들에게 사지가 묶이고 가슴에 네 개의 말뚝이 박히는 장면을 촬영하며 스스로 광기에 휩싸여 촬영 전까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잊고 다시 살아나 칼을 들었다고 한다. 장철은 그런 감독이다. 투박하고 거친 사내들. 그들은 항상 불만에 차 있다. 결국 그들은 항상 파멸의 길을 선택하고 원념을 내뿜고 죽는다. 말이 되고 안 되고 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사내는 원념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지만 장철이 원하는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1960년대 말. 왜 이런 남성 영화가 만들어 졌을까? 왜 이런 남성 영화가 팬들에게 환호를 받았고, 2012년 한국의 시네마 데끄에서 상영되는 것일까? 어차피 이런 종류의 액션 영화들은 비웃음거리가 되는 남성 판타지들이다. 비웃음은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비웃음도 여러 가지 종류다. 나는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 중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의리. 대의 따위를 맹목적으로 또는 교묘하게 설파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장철이 만든 자기도취 때문에 교만한 주인공들이 기득권자들이 지들 편리한 대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대의. 의리 따위를 무화시키며 파멸하고, 말도 안 되지만 원념 때문에 되살아나 피를 뿌리는 이런 불손한 영화들에게는 반가운 비웃음을 보낸다.

(by
오승욱_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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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무리의 젊은 무사들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이들의 위풍을 차례대로 프레임에 담는다. 무려 열 세 명. 그것도 형제들이다. 이들은 영화 내내 협력도 하고 대립도 하며 죽이기도 한다. 극중에서 선과 악을 상징하며 대립하는 인물은 사실 두 명이다. 그럼에도 왜 형제가 열 한명이나 더 필요했을까?

이는 성서에 등장하는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 속에서 이극용이 막내 이존효를 지극히 사랑했듯이, 열두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가진 야곱은 막내였던 요셉을 유독 사랑하지 않았는가.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형제들보다 더 지혜롭고 뛰어난 것, 그래서 더 사랑받고 형제들의 질투를 받게 된다는 것.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장철의 형제들은 해피엔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당 말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변방 사타족의 제후인 이극용은 황제의 명을 받고 이를 진압하려 한다. 그에게는 ‘13인의 무사’로 불리는 뛰어난 아들들이 있었다. 특히 이존효(강대위 분)와 경사(적룡 분)는 남다른 신뢰와 총애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형제들의 시기를 받게 된다. 13형제 중 존효를 비롯한 9명이 황소가 장악한 장안성으로 침투하는데, 이들은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적진을 교란하고 결국 성을 탈환하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간 반목의 불씨를 키우게 된다. 함께 황제의 명을 수행하던 지방관 주원은 이극용을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마저 넘보기 위해 계략을 짜고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던 네 째와 열 두 째를 이용한다. 경사만을 대동하고 주원의 성으로 들어간 이극용은 술에 취해 위기에 빠지게 되고 결국 경사의 장엄한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네 째와 열 두 째는 결국 존효마저 함정에 빠뜨리고 오지절단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그를 살해한다. 그러나 이들의 악행은 결국 다른 형제들에 의해 처단되며 영화는 인과응보의 형식을 갖추며 끝을 맺는다.



장철감독의 트래이드 마크인 피칠갑과 신체훼손 그리고 주인공의 죽음은 <13인의 무사>에서 여전하며 그로 인한 쇼크는 지금 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의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13인의 무사>만의 미학적, 그리고 철학적 지점이 존재한다. 먼저 규모면에서 보자. 캐스팅만 해도 당대 스타들이 총동원 됐음은 물론이고 수많은 엑스트라와 거대한 세트까지 1970년 당시 제작사였던 쇼브라더스의 사운을 걸고 만들었다는 말이 과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감한 줌인과 슬로우모션의 반복은 자칫 커진 스케일로 인해 느슨해 질 수 있는 화면에 적절한 속도의 완급을 줌으로써 긴장감을 부여해준다. 장판교에서 단신으로 적들을 상대하는 적룡의 전투씬은 화려하다 못해 비장하며 특히 눈을 부릅뜬 채 선 채로 숨을 거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그러나 오지가 절단 돼 죽음을 맞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역사적 영웅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강대위가 주조연인 적룡의 용맹하고 아름다운 죽음과는 전혀 다른 끔찍하다 못해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웅의 해체이다. 장철감독은 너무도 간단하게 가장 뛰어난 주인공을 가장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절단시켜 버린다. 이는 관객을 영화에서 분절시켜 버리는 것과 같다. 장철은 영웅들이 그렇게 허무하고 처참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적 표현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김준완: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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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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