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신부님은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내 친구 정일우>의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내 친구 정일우>를 어떻게 처음 기획했는지 궁금하다.

김동원(감독) 개봉할 생각 없이 만든 작품이다. 요즘 개봉 이야기가 나와서 좀 혼란스럽긴 하다(웃음). 처음에는 예수회나 제정구기념사업회도 이 영화를 만들 계획이 없었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나중에 예수회와 일반 후원회원들에게 지원을 받아서 만들었다.

김성욱 감독님의 작품 중 <한사람>(2001)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작품과 <내 친구 정일우>가 연속 선상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사람>에 대해 감독님이 “한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에 대한 작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는 건 감독과 그 사람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 관객들도 영화를 볼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를 만들 때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김동원 <내 친구 정일우>를 만들 때는 <한사람>의 방법론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두 영화 모두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를 다루기 때문에 영화의 형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두 영화를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일우 신부님이 너무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다큐에 담았을 때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신부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취합해서라도 신부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려고 했다.

김성욱 60~70년대의 청계천, 80년대의 상계동, 그 이후 농촌 생활로 이어지는 신부님의 삶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이때 서로 다른 네 사람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각 시대와 관련된 분들이 나레이션을 한 것 같은데, 이 구성은 어떻게 생각한 건가.

김동원 <송환>에서 과도한 나레이션을 쓰긴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나레이션을 어려워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신부님의 모습은 실제 그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신부님의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하고 묘사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 신부님께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예수회 시절에서 한 분, 청계천 시절에서 한 분, 괴산 시절 한 분. 가장 가까웠던 분들에게 편지를 받았고, 화면이랑 대조해 나갔다.



김성욱 영화에서 느껴지는 시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공동체의 붕괴다. 상계동에서 같이 계셨던 분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걸 거부하기도 한다. 점점 공동체가 붕괴되고 작아지는 것에 대해 감독님이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동원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에 대한 나의 확신이 엷어져 가는 것에 대한 성찰. 괴산의 할머니가 옛날에는 대보름 잔치가 신났는데 이제는 잔치 같지도 않다는 말씀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요즘엔 집들이 같은 것도 없어졌다.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가 변한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공동체의 미덕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상계동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김성욱 영화 첫 장면도 인상적이다. 신부님이 무슨 생각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건너오셨을까. 어떤 생각과 믿음으로 이런 일들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누가 신부님에게 고민을 얘기했을 때 어떤 조언을 하기 보다는 그냥 듣고 있었다는 증언들도 인상적이다.

김동원 내가 신부님을 미화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신부님은 눈에 띄지 않게 일을 했다. 상계동에서 철거가 시작되면 계속 녹음기를 가지고 당시의 정황을 녹음했다. 그 기록들을 통해 상계동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일을 많이 하셨다. ‘복음자리’와 ‘목화마을’을 만든 것도 신부님이었다. 그런데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게 신부님의 신념이었다. 훗날 상계동 사람들에게 배반당했을 때, 복음자리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 신부님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픈 경험은 신부님뿐 아니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거기서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이겨내는 사람이 있는데, 신부님은 후자였다. 버티는 게 목회자나 활동가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관객 1 신부님이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영화 제작을 언제 결심했는지 궁금하다. 또 2007년에 상계동 주민들과 술자리를 갖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빈 테이블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김동원 신부님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고는 했었는데 구체적인 준비는 못 한 상태에서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따로 인터뷰도 한 번 못 했기 때문에 후회를 많이 했다.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 때는 투쟁의 주체는 주민들이어야지, 신부님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괴산에도 몇 번 가지 못했다. 병원에 계실 때의 모습은 간병인들이 찍은 거고, 괴산 장면은 거의 평화방송이 찍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다.

사실 20년 전부터 상계동 주민들의 지금 삶에 대한 영화를 기획했다. 그런데 자꾸만 기획 의도가 달라지더라. 주민들의 지금 삶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뚜렷한 관점을 제시하기 어려웠다. 포기의 순간까지 갔었지만 신부님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다시 상계동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관객 2 영화 중간에 세월호 선체를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김동원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사람들이 앞서서 싸우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장 선봉에 서는 모습을 상계동에서도, 세월호 참사 때도 보았다. 그분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난뱅이가 세상을 바꾼다”는 신부님의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그렇게 될까 싶은 회의도 있다.

김성욱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 계획을 듣고 싶다.

김동원 내 나이는 이제 하나씩 정리만 해도 좋을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일단 <송환>의 다음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 작품을 ‘상계동 올림픽 2’라고 우기고도 싶다(웃음). 또 봉천동 이야기도 정리해야 하고, <상계동 올림픽>의 나레이션을 하셨던 손인숙 수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 아직은 모호한 생각만 있다.


일시 6월 21일(수) 오후 7시 30분 <내 친구 정일우> 상영 후

사진 이한슬 자원활동가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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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배우의 표정에 대한 짧은 생각

-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 배우의 연기를 보고



1.

영화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배우의 얼굴이다. 물론 손의 작은 움직임이나 어깨의 떨림으로도 감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건 결국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은 이마의 주름, 눈썹의 각도, 눈가의 주름, 코의 찡긋거림, 굳게 다문 입술 등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다.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에 적절한 표정을 만들어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은 배우가 만들어낸 이목구비의 기표들을 해석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짐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배우가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양 눈썹을 위로 올리고 입을 크게 벌리면 우리는 그 캐릭터가 화가 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즉 배우의 얼굴은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특권적인 신체 기관이다.

이때 연기는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표준적인’ 방식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고, 기쁨을 연기하는 배우는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독자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실험적인 연기’를 한다고 평가받거나, ‘연기를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맥락에서 연기의 의미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기본적인 합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합의’는 자칫 상투적인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만약 슬픔을 연기하는 백 명의 배우들이 모두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존의 익숙한 방식으로만 슬픔을 연기한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의 감정은 느끼지 못한 채 단지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기표만 보게 될 것이다(요즘 한국영화에서 거의 모든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선보이는 ‘감정 폭발’의 연기를 떠올려보자). 결국 배우는 기본적인 연기 양식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진다.

또 다른 문제는 배우가 캐릭터의 감정을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캐릭터의 감정을 꼼꼼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어떤 인물의 마음 상태는 여러 가지 감정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정확한 구성 요소와 비율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개입과 해석을 통해 그 캐릭터의 심리를 상상해야 한다. 같은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보기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며 영화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백을 거의 남겨두지 않은 채 캐릭터의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관객이 캐릭터의 내면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연기의 대부분이 어떤 모호한 감정의 영역을 끌어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그래서 때로는 얼굴, 또는 표정을 지우는 연기가 상투적으로 친절한 연기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의 배우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동경 이야기>에서 하라 세츠코가 이렇게 운다). 이때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지만 그(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감독은 짙은 그림자로 배우의 얼굴을 덮기도 한다(필름 누아르가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스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은 관객이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밖에도 배우가 카메라를 등진 채 연기하거나 가면이나 붕대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방법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배우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배우의 표정을 가리는 연출이 항상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의 표정과 그 감정의 관계, 나아가 ‘좋은 연기’에 대해 더 다양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3.

최근 이런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든 건 <꿈의 제인> 속 이민지 배우가 보여준 연기였다. 이 영화에서 이민지가 연기한 소현은 매우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다. 현실과 환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이야기하자면 소현은 최소 두 명의 친구를 떠나보냈으며 자신 역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게다가 미래에도 별 희망은 없어 보여 당분간은 계속 괴로운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이처럼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소현은, 또는 이민지는 관객에게 (오열이 아닌) 무표정을 보여준다.

이 무표정은 일단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 정도의 힘도 없는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관객은 무표정을 통해 소현이 극도로 지쳐버린, 일종의 감정의 진공 상태에 처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무표정의 두 번째 효과는 관객의 불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의 표정은 그 캐릭터의 감정을 알려주는 특권적인 지표이다. 하지만 이민지의 무표정은 관객이 소현의 감정을 정확히 짐작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소현이 어떻게, 얼마나 슬퍼하고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즉 소현의 심리 상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이때 우리는 캐릭터의 감정을 쫓아갈 표지를 잃어버리고, 이는 결국 어떤 불안함으로 이어진다. 스크린 속에서 따라가고 있던 캐릭터가 갑자기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백지와 같은 이민지의 얼굴을 보며 단지 이런저런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얼굴의 의미는 마지막까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민지의 무표정의 얼굴이 <꿈의 제인>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순간의 정서가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 역시 구체적으로 답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현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이민지의 무표정을 매개 삼아 그 자체로 굉장히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민지의 연기는 관객에게 불안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고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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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는 도처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 <폭력의 씨앗>(임태규)

 

군대는 더는 비밀의 장소가 아니다. 숨겨진 것을 들추려는 욕망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TV 예능 프로그램은 금지된 공간으로서의 군대를 소재로 삼으며 운신의 폭을 넓혔다. 생활관과 훈련 장면을 공개하면서 군대의 본질을 알려주는 듯 굴었던 TV쇼와는 달리 영화 <폭력의 씨앗>은 단 한 번도 생활관 내부로 침투하지 않는 이상한 군대 영화다. 카메라는 생활관은커녕 부대 정문조차 통과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첫 번째 숏에서 단체 외출 이후 복귀하는 부대원들의 발걸음은 정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정문 주변을 배회하다 끝난다. 다음 숏은 다른 날처럼 보이는데 이들은 여전히 외출 중이다.



롱테이크 숏은 영화에 필연적인 현장감을 부여하는데, 이때 관객은 상황 외부의 관찰자가 아닌 개입자로 초대된다. 4:3 비율의 좁은 화면에서 사건의 조망자를 위한 자리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이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속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굳은 채 있는 이병 필립과 무수한 동선의 창조자인 일병 주용의 얼굴이다. 이들의 얼굴은 카메라가 주로 주용을 따라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시각적 방점을 찍는다. 이미 배역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선임들과는 달리 필립과 주용은 아직 자신의 배역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배역을 마지못해 수행하는 듯 보이는 미숙한 배우다. 두 사람의 불안한 하모니는 상부 복종식 군대 시스템을 연약하게 교란하는 동시에, 관객에게는 다소 불안한 안내자가 된다.

군부대 근처를 배회하던 카메라는 주용이 필립의 치과 치료를 핑계로, 실은 누나를 찾아 철원에서 인천으로 향하면서 부대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그러나 인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다른 국면을 창출하기보다는 기시감을 일으키는 반복에 가깝다. 이는 치과의사인 형부의 고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카키색 반소매 티셔츠 차림에 툭툭 던지는 말투, 은근히 위협하는 형부의 눈빛은 주용의 군대 선임들의 태도와 분리되지 않는다. 주용의 누나를 폭행한 사실을 은폐하려는 형부는 군대 내 폭행을 은폐하려는 선임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주용을 압박한다. “처남도 내 덕 좀 봤잖아”라는 형부의 발언은 그 작동원리가 바뀌었을 뿐 군대 바깥은 또 다른 군대일 뿐임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군대를 둘러싼 상하관계의 변주와 생성, 이것이 양산하는 강자와 약자의 대립은 영화가 말하려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주목할 것은 관계의 속성이 아니라 불안한 감정 그 자체다. 인물들의 불안한 표정은 해석을 중지시키고 오직 감정을 전염시키는 힘을 지닌다. 주용의 누나, 주용, 필립은 공고한 사회구조에서 약자의 역할을 떠안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의 변주 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보듬는 대신 끝내 서로 할퀸다. 그렇다면 영화는 결국 연대 불가능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예정된 절망으로 회귀하기 전에 영화가 보여준 잉여로운 순간 하나를 떠올려보고 싶다. 인천행 고속버스 안에서 주용과 필립은 내내 긴장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모처럼 숨을 돌린다. 이 순간은 이들과 동행해 온 관객을 위한 휴지부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대화 내용은 군대라는 테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으나, 그 속에 이례적으로 나른하고 편안한 공기가 깃들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짧은 숏은 하나의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의 지대로 남아 영화의 절망적 결말을 가까스로 유보시킨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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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성은 어떻게 보편성이 되는가

-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정윤석)



“본 영화는 전체적으로 볼륨이 균일하지 못함. 당신의 불편함을 통해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은유하려는 영화적 시도.”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이하 <밤섬>)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이 글은 영화가 다루는 2인조 인디밴드 밤섬해적단이 그들의 1집 『서울불바다』 앨범 속지에 적어놓은 ‘사과에 말씀’(“전 트랙에 걸쳐 볼륨이 평등하지 못함. 이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표현하려는 (청자를 불편케 하는) 음악적인 시도임.”)을 차용한 것이다. 이때 감독 정윤석이 연출자로서 취하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윤석은 밤섬해적단의 몇몇 특성을 끌고 들어와 영화에 차용한다. 가사를 적은 PPT를 띄우며 공연하는 밤섬해적단의 방식은 영화에서 스크린을 꽉 채우는 역동적인 타이포그래피로 번역된다. 말하자면 정윤석이 <밤섬>에서 취하는 첫 번째 연출적 태도는 이 밴드와 동화(同化)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면서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된다.

밴드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음악을 최대한 ‘그들답게’ 보여주는 것이 <밤섬>의 전반부를 거의 채운다. 그런데 한순간 밤섬해적단과 영화 사이의 거리가 벌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김종훈 교수가 권용만의 시를 예술적인 기준에서 평가하는 대목이다. 이때 밤섬해적단은 그들 자신 혹은 그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이 아닌 완전한 외부의 입장에서 얘기된다. <밤섬>에서 무척 이질적인 장면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궁금해진다. 어째서 이들 음악에 대해서 평론가의 말을 듣는 장면이 필요했을까.



김종훈 교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밤섬해적단이 직접 말하지 않는 그들 음악의 성격이다. 그는 권용만의 시가 가진 특성 중 하나로 “나아가야 할 때 멈추는 것”을 말한다. 밤섬해적단의 가사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을 자유. 이 자유는 박정근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을 겪으며 침해당하고 만다. 권용만이 법정에서 해야 했던 증언이 그와 밤섬해적단의 정체성을 강제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박정근은 그렇다고 답한다. 영화가 김종훈 교수의 인터뷰 장면을 넣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밤섬해적단에 동화되는 것만으로는 이 밴드가 직면한 국가의 강압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후반부에서 <밤섬>은 달, 그림자, 밤거리 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밤섬해적단의 정신성을 담는 듯한 이 이미지들은 늦은 밤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한 남성의 모습으로 옮겨간다. 잠시 후에는 장성건이 택배 일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는 어떤 피해와 수고가 따르는가. 국가의 행동권 침해는 각기 다른 형태로 어디서든 일어난다. 영화는 밤섬해적단 그 자체를 스스로 체화한 후 잠시 그들과 거리를 두어 사회를 비판하며, 일순간 이들의 특수성을 우리 모두의 보편성으로 확장한다. 감독 정윤석이 이와 같은 동화와 분리의 방법을 통해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건,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밤섬해적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황선경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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