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0. 17:38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영화읽기]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사샤 기트리 영화의 핵심은 ‘역설’에 있다. 역설은 기트리의 영화, 기트리와 영화의 관계를 모두 이해하는 데 근사하게 쓰이는 말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1912년, 연극에 주력하던 이십대의 기트리는 감히 ‘영화는 정점을 지나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감독이 되어서도 그는 영화를 얕보는 태도와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그런 자세는 기존의 영화 관습과 약호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 기트리의 독창성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고, 혹자는 그를 ‘모던 시네마의 아버지’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한편, 그를 옹호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단조로운 희극, 삼각관계 실내극 정도로 취급받는 기트리의 영화는 사실 반코미디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영화 <꿈을 꿉시다>(1936)에 나오는 두 노파는 “관객은 결혼 장면만 나오면 행복해져서 ‘좋은 코미디’로 평가하지. 그건 비극의 시작인데 말이야”라는 내용의 대화를 나눈다. 우디 앨런 이전에 과연 이런 톤의 코미디를 거침없이 창조한 작가가 있었을까 싶다. 기트리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마지막(이자 궁극의) 코미디언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프랑스의 에른스트 루비치’라 칭한 기트리의 전공은 우아하고 화려한 계층의 러브스토리이지만, 그의 영화는 가족 같은 전통적인 관계의 유지보다 분열에 더 흥미를 느끼곤 한다. 기트리의 영화를 대표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는 위의 특성들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영화는 오십대의 남자가 카페에 앉아 쓰는 회고록에 맞춰 진행된다. 부모의 가게에서 돈을 훔친 12살 소년은 벌로 식사를 굶는데, 하필 그날 저녁에 독버섯이 든 음식을 먹은 나머지 11명의 가족이 모조리 죽고 만다. 성실한 자들의 죽음과 도둑의 생존이 불러일으킨 기묘한 의문은 주인공의 삶을 방향 짓는다. 호텔에서 일하며 부유한 삶이 찾아오길 바라던 소년은 성장의 단계마다 비슷한 일을 거듭 겪는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 처벌받는 것과 반대로, 사기가 매번 좋은 결과를 낳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을 따르기로 한다. 20년 동안 국적, 이름, 외모, 직업을 수없이 바꾸며 부를 거머쥔 그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와 재회한 뒤 기로에 선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연출, 각본, 주연을 도맡은 건 물론, 내레이션과 모든 출연자의 목소리까지 혼자 연기한 기트리는 완전작가의 영역을 탐한다. 사진과 다큐멘터리를 삽입하고, 상반된 연기를 대비시키며, 낯선 편집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등 기트리 특유의 스타일들이 빛나지만, 기트리 영화의 진정한 가치는 삶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하겠다. 죽음, 만남, 이별의 과정과 살아온 길을 서술하는 남자의 내레이션에는 일체의 감정이나 낭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한 발짝 떨어져 주인공을 바라보는 영화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성큼성큼 넘나드는 삶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부한다. 거기에다 카드 테이블에 앉아 속임수를 연기하는 기트리가 사기와 기만을 몸소 가르치는가 하면, 영화 또한 사기의 종말 다음에 교훈극을 따로 펼칠 마음이 없다. 기트리는 ‘사기와 기만’이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진짜 규칙이 아니냐고 말하고, 사기꾼들이 훨씬 잘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정치적인 올바름’을 앞세우는 현대인은 독단적인 의견을 눈치 보지 않고 술술 늘어놓는 기트리의 자세가 위험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는 괴변과 야유가 많은 만큼 지혜로운 경구와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이 푸짐하다. 앞에선 예의 바른 척하다 뒷자리에선 본심을 털어놓는 인간보다 언제나 유쾌하고 호탕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간을 지지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자들에게 기트리의 영화는 경전에 다름 아니다. (이용철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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