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8. 16:39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영화읽기]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쳐다보지 마라>의 초반부에 이런 문제가 나온다. 지구가 둥글면 왜 얼은 호수는 평평한 것인가(If the world is round, why is a frozen lake flat)? 영화 초반부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호수는 미국의 온타리오 호수인데, 어떤 책에 따르면 이 호수는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3도쯤 구부러져 있다고 한다. 얼은 호수가 평평해 보이더라도 그게 진짜 평평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보이는 그대로인 것은 없다(Nothing is what it seems). 이 문제는 대부분 물과 가까운 곳에서 전개되는 <쳐다보지 마라>의 공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문제의 답이 곧 이 영화의 주제라는 것이다. 보이는 그대로인 것이 없다면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진실을 잘못 이해하게 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거나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는 딸인 크리스틴을 사고로 잃은 후 베니스로 간 존과 로라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겨울철의 베니스는 마치 ‘국에 빠진 것 같은’ 습하고 을씨년스러운 도시로 묘사되는데 주인공인 존은 이곳에서 교회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크리스틴이 사고를 당했을 때 존이 보고 있던 것은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자주 만지게 되는 유리와 물의 서로 유사한 몇 가지 속성들은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세계의 속성이기도 하다. 물과 유리는 빛을 반사해서 사물의 상을 비출 수 있다. 또 유리는 깨지는 성질이 있고, 물은 강도가 단단하지 않다. 물과 유리의 성질이 견고하지 못한 것처럼 이 영화의 세계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으며, 그 불안한 느낌이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내리는 비 때문에 연못 표면에 파문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주인공인 로라가 호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보는 책에는 ‘부서지기 쉬운(fragile)’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존과 로라 부부의 아들인 자니는 자전거를 타다 유리 조각을 깨는데,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전주곡이 된다. 그들 부부가 기절하거나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보면, 사람만 쓰러지는 게 아니라 테이블 위에 있던 유리잔이나 병 같은 것들이 전부 다 떨어진다. 각목이 떨어지면서 유리가 산산이 부서질 때 곤돌라 위에 올려놓은 도구 및 유리 타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들은 첫 시퀀스에서 아이가 익사하는 장면과 느낌이 매우 비슷하다. 온전하던 세계가 부서지고 모든 것이 아래로 가라앉거나 떨어지는, 지진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초자연적인 관점 혹은 민속학적인 관점에서 물과 거울-유리가 이승과 저승을 잇는 통로가 된다고 볼 때, 이 영화의 근본적인 불안함은 두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가 약하다는 데서 나온다. 영매는 통상적인 관념에 따르면 이 세상뿐만 아니라 다른 세상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존재다. 세계와 세계 사이의 경계가 약하며 이에 따라 두 세계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이 영화의 세계는 확고한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혼란스럽다. 시간의 혼란, 인과 관계의 혼란, 공간의 혼란은 관객에게 불안감을 안겨주며 이야기를 수수께끼처럼 만들고 있다.
먼저 시간의 혼란. 존과 로라 부부는 베니스를 돌아다니면서 몇몇 장소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처음 와봤는데 언제 와본 듯한, 부부가 한 번씩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나중에 그들은 그런 감정을 느낀 장소를 다시 찾게 된다. 그들이 전에 이 장소에 들렀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중에 거기 들렀기 때문이다. 다음 인과 관계의 혼란.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몇몇 사건들은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존이 식당의 한쪽 문을 열자 갑자기 다른 쪽 문이 벌컥 열리고 그로 인해 로라가 영매를 만나게 된다. 한쪽 문을 열었다고 다른 쪽 문이 열릴 리가 없지만 꼭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공간의 혼란. 중앙에 큰 문이 있고 그 왼편 옆에 작은 문이 보인다. 관객들은 그 안이 욕실이며, 존이 곧 거기서 나올 것임을 알고 있다. 존은 그 문으로 걸어 나오는 대신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나온다. 영국에서 로라와 배비지 부부는 카메라와 가까운 쪽의 열려 있는 문으로 나오려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반대편 문으로 나간다. 자니가 깨진 유리에 손가락을 베였는데 존이 보고 있던 슬라이드 필름에 그 피가 배어나오는 장면도 있다.
물리적인 법칙이 이렇게 혼란스럽다면 내가 본 것을 확고하게 믿을 수 있을까? 이 영화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들 또한 도처에 널려 있다. 아이는 죽기 전에 빨간 우비를 입고 빨간 장화를 신었으며 죽기 전에 가지고 놀았던 공은 빨간색이 섞인 것이다. 존은 안에 물이 찬 인형을 보면서 익사한 아이를 생각하는데, 베니스에서는 빨랫줄에 걸린 빨래조차도 죽어서 팔을 늘어뜨리고 있는 시신을 떠올리게 한다. 쥐의 빨간 눈과 시신을 인양하는 현장에서 아이들이 쓰고 있는 빨간 모자, 베니스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간판의 빨간 글씨, 사고를 당한 자니가 덮고 있는 빨간 이불까지. 보고 있으면 불길하고 불안해지는데, 이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을 노골적이지 않게, 아주 무심한 태도로 곳곳에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것처럼 배치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불길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쳐다보지 마라>는 시선으로 이뤄진 영화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떤 사물을 보여줌으로써 관객과 주인공으로 하여금 죽음을 연상케 하며, 등장인물들이 누군가를 지켜보거나 아니면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 응시(凝視)하는 행위는 영화의 불길한 느낌을 가중시키며, 이 세계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힘, 사악한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응시하는 자들은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관찰자라는 느낌을 남긴다. 반대로 관찰자가 아니라 음모자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존과 로라 부부를 볼 때의 느낌은 단순히 존과 로라 부부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응시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죽은 자가 산자를 보는 느낌 혹은 그 반대의 느낌을 전해준다. 로라가 웬디와 헤더 자매로부터 딸이 곁에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화장실에는 다른 여성이 분명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평범한 그녀는 이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마치 경악하듯이 지켜보고 있다. 그 때의 응시는 화장실에 붙어 있는 여러 개의 거울을 통해 이뤄진다. 살인 현장에서 존과 로라 부부를 지켜보고 있었던 형사 반장은 존이 경찰서에 찾아왔을 때 창밖으로 존이 이야기하고 있는 자매가 지나가는 것을 보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들을 불러오는 대신 부하에게 존을 미행하도록 한다. 그의 행동에는 어떤 숨은 뜻이 있는 것 같고, 그 음험함과 위험한 느낌이 그의 시선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본 것, 지금까지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가능하게 된다. 존이 호텔에서 짐을 정리하고 떠날 때 쓰레기통에 들어 있던 로라의 사진을 꺼내는데, 그 분위기는 마치 로라가 죽어서 존이 베니스를 떠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형사 반장은 자매의 몽타주에 낙서를 하는데 그럴수록 그 몽타주는 점점 더 죽은 사람의 모습을 닮아간다. 웬디 자매는 죽은 사람인가, 아니면 존과 로라도 죽은 것인가라는.
한편 이 영화는 사운드는 사악한 느낌을 준다. 시체를 건져낼 때 발작적으로 터지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존과 로라가 부부싸움을 할 때 은밀하게 깔리는 아이의 울음소리 등. 이처럼 <쳐다보지 마라>는 즉각적인 공포를 조성하는 대신 불길함을 키워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현대 공포 영화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스타일을 갖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몹시 풍성하고 줌 혹은 슬로우 모션이 극단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쳐다본다는 행동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이 영화를 추천한 박찬욱 감독에 따르면 <쳐다보지 마라>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상의 빈약함을 지적한다고 하는데, 이런 결함과는 별개로 곳곳에 깔린 영화적 상징들, 미로 같은 베니스의 도시 구조가 선사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몹시 강렬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주는 불길하고 기이한 느낌도 쉽게 잊어버릴 수 없다. (홍성원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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