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0. 13:16ㆍ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뮤지션 백현진이 선택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1월 20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의 친구로 음악을 만들고 때론 영상연출을, 가끔 디자인까지 한다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인 ‘연남동 사는 백현진’이 왔다.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추천한 그는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사람은 고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도 많지 않다고 소개했다. 특히나 극중 걷는 장면에 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도했다. 또 즉석에서 ‘그 집 앞’이라는 노래를 불러주며, 실비가 내린 날이어서 그랬는지 동요 ‘우산’ 한 소절로 유쾌하게 토크를 마무리 짓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런 영화 끝난 이후에 토크를 하는 게 어려운 일이다. 부뉴엘의 영화만큼 뒷자리가 재밌을 수가 없다. 그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린다.
백현진: 동의한다. 우리는 이거보다 더 재미있게 말할 수 없다.(웃음)
김성욱: 처음에 친구 제안을 했을 때, 빠르게 답변이 돌아왔다. 부뉴엘 영화였고,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또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두 편중 에서 최종적으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상영하게 되었다. 어째서 부뉴엘이란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나, 어떻게 부뉴엘을 영접하게 되었나?
백현진: 사실 한참 영화를 보던 20대 초반에는 부뉴엘 감독 영화를 제대로 보진 않았다. 부뉴엘 영화를 보긴 했는데 마음으로, 몸으로, 뇌로 ‘야 정말 재밌구나’ 이렇게 본 경험은 없었다. 일종의 ‘부뉴엘 빠’라면 늦게 입문한 건데, 오히려 서른 즈음에 ‘이게 재밌구나’ 싶어서 이것저것 찾아봤다. 그중에서도 사실 돌아가시기 전에 만든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자유의 환영>, <욕망의 모호한 대상>, 이 세편을 가장 재밌게 자주 본다. 그중에서 시절도 시절이고 왠지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봤지만 필름으로는 못 봤다. 보통 집에서 혼자보거나 친구들이랑 보는데, 이참에 필름으로 보고 싶기도 했다. 오늘 보는데 집에서 볼 때랑 굉장히 달랐다. 오늘은 별로 안 웃었다. 그전에는 너무 재미있고 너무 웃기고 그랬었는데 오늘 보니까, 모르겠다. 언어로 표현은 잘 안 되는 건데. 평범한 문장이 있지 않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성욱: 부뉴엘 영화를 좋아하는 지점이 궁금하다. 우스꽝스럽고 농담 같은 영화이면서도 형식적으로도 자유롭다.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백현진: 일종의 ‘부뉴엘 빠’라고 말씀드렸는데, 말씀드린 것처럼 돌아가시기 전에 만든 삼부작을 굉장히 좋아 한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나이 든 모든 사람은 더 많이 알거야’ 이런 얘기들은 일단 안 믿는다. 그런데 굉장히 지혜로운 노인이 있는 듯하다. 굉장히 지혜로운 노인의 기록이라는 느낌이 든다. 굉장히 감사한 기록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예로 들어 말하면, 이렇게 딱딱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뭉글뭉글하고 부드럽게 할 수 있는 작업들을 본 경험이 많지 않다. 그래서 계속 보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사실 언어로 어떤 문장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름답다.
김성욱: 단단한 것과 물렁한 것의 결합이라면, 병사가 레스토랑에서 말할 때의 장면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아버지를 우유 잔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잔인한 내용인데, 첫 시작도 재미있다. 멀뚱히 쳐다보다가 멜랑콜리한 청년처럼 등장해서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어본다. 종로 걸어가다 보면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도 있긴 한데(일동 웃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의 진행방식과 털어놓는 내용 간에 엄청난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구나’ 라는 느낌이었다.
백현진: 단단한 것과 물렁한 것을 굳이 결합을 시키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텐데, 이 분 같은 경우에는 그런 반대되는 속성의 것들이 하나로 무리 없이 뭉쳐져 있는 것 같다. 아까 아름답다고 말씀 드린 것을 또 다르게 얘기하면 정말 유려하다. 부뉴엘 ‘후기 삼부작’을 보면 물 흘러가는 것처럼 무리가 없다. 예술하는 사람들이 자기 매체를 가지고 결과물을 낼 때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는 나에게 크게 많지 않다. 부뉴엘은 정말 너무 유려하다. 계속 동어반복하게 되는데 그런 것밖에 없다. 무리 없이 유려하게 너무 아름다운 것 같다.
김성욱: 예전에 홍상수 감독이 추천한 장 비고의 <라 탈랑트>를 상영한 적이 있다. 시네토크에서 계속 ‘아름답네요, 예쁘네요, 귀엽네요’ 그 말만 무려 20분간 했다.(웃음)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아주 예전이지만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에 떠오르는 몇 개의 의문들이 있었다. ‘저 여자는 왜 종교를 싫어할까’, ‘저 군인총각의 두 번째 꿈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더 재밌고 더 흥미를 끄는 것이 말할 것처럼 해놓고는 전혀 말해지지도, 설명되지도, 심지어 이후에 영화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 그런 장면들이다. 작업을 한다는 사람들은 선택을 하지 않나. 어떤 걸 선택하면 다른 건 지워지거나 들어가지 않게 되는 건데 부뉴엘의 영화를 보면 창조의 순간에 선택을 한 다음, 남겨진 것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맴돌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 번 볼 때마다 다양한 경로로 이 영화에 들어가게 되는 효과가 발생하지 않나.
백현진: 서교동 작업실 1분 거리에 30년을 한 순대국밥 가게가 있다. 심지어 장사도 잘되니까 작은집이더라도 엄청난 수의 순대국밥을 말았을 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이명박이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걸 부뉴엘은 그 아줌마가 만든 것만큼 엄청난 그릇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을 보면, 그렇게 하셨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많은 생각들을 했는데, 그걸 영화가 80분이라면, 어떤 인간도 그 80분 안에 다 담을 순 없다. 어떤 일을 계속 하다보면 마치 예술가도 장인처럼 더 숙련되는 게 있는 거일 터인데. 그래서 좀 이 시간 안에 이만큼은 녹여내신 것 같다. 한 10만 그릇을 말은 분이 그냥 이렇게 한 그릇 만들었을 때 그 맛은, 오늘 같은 영화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이걸 보거나 먹는데 뭐가 더 있는 거 같고, 더 있는 거 같고, 더 있는 거 같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성욱 부뉴엘의 작법이 굉장히 궁금했었다. 이사람 도대체 영화의 영감이나 작업과정을 어떻게 끌어낼까. 자세히 알려진 바는 많지 않은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장 클로드 까리에르라는 사람이 썼던 책을 보면, 둘이 만나서 영화 준비하는 시나리오 과정 일과가 이랬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까페에 앉아서 어젯밤 꿨던 꿈 얘기를 각자 하고, 친구 얘기를 하고, 봤던 신문 이야기를 하고, 한 가닥 한 가닥씩 영화 얘기를 하다가 그 다음에 밥 먹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뭐가 떠오르면 같이 작업을 하고. 하루 일과가 끝날 저녁 무렵엔 각자 30분은 흩어져있었다고 한다. 카리에르는 자기 방에 올라가서 30분 동안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고, 부뉴엘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바에서 마티니를 먹으면서 생각한 후, 다시 모여서 30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를 하면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까리에르의 요지는 상상력을 키우는 힘을 근육을 단련시키듯이 언제나 부뉴엘과 했다는 것이다. 백현진 씨는 어떻게 상상력을 위한 근육단련을 하는지, 말하자면 종합 예술인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백현진: 오늘은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보고 제가 작업하는 어떤 건 이야기 안하겠다.(일동 웃음)
김성욱: 점점 더 영화처럼 우리들의 이야기의 방향이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다.(일동 웃음) 많은 사람들이 부뉴엘이 가지고 있었던 초현실적이거나 전투적인 태도들을 생각하고 영화를 보러 오는데, 막상 대단히 온화한 느낌이 들어 놀라기도 한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라는 이 제목이 생각보다 알쏭달쏭하다. 부뉴엘 후기 삼부작의 인물들의 상당수가 대부분 부르주아인데, 거기에 담겨있는 태도가 어떤 점에서는 유연하다가 어떤 점에서는 날카로운 걸 숨기고 있다. 그런 점은 어떻게 생각하나?
백현진: 영화가 부르주아라는 그런 사람들한테 칼을 직접적으로 들이댄다. 그리고 아무리 꿈이었어도 다 쏴서 죽여 버린다. 그런데 오늘은 길 걷는 장면에서 계속 이 생각 저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만큼의 역사의 시각에서는 저런 사람들은 계속 저렇게 간다. 소위 어떤 쪽 사람들이 악인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천벌을 받는다, 제 명에 못살 거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 부모님의 원수가 옆 동네에서 끝까지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길 걷는 게 일종의 흐름이면 저런 흐름은 어떤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되어있다. 그리고 모두가 수많은 방향으로 갈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부뉴엘이 이런 식으로 자기가 데이터를 남기고 기록하고 싶었던 거지, 지금 얘 네들 다 때려잡고, 그리고 그렇게 때려잡는다고 잡히는 것도 아니라는 노인들 특유의 체념을 통한 지혜가 있는 듯하다.
김성욱 실제로 걸어가는 장면에 대한 온갖 추측과 설명이 정말 많다. 90% 정도는 아마도 부르주아가 길을 잃었다, 라고 말한다. 1~2% 정도는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었고, 유령이 돼서 정처 없이 떠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길을 잃은 건, 당시 68혁명의 좌절 이후의 1972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도리어 부르주아라기보다는 변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정처 없이 걷는 것 같지만 부르주아는 걸어가고 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방황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 또 하나는 1~2% 정도의 이야기일 수 있는 다른 부분으로, 부뉴엘 자신도 이영화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와 이런 식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백현진: 저 정도 고수면 어디로 갈지 안정한다. 감히 말씀드리면, 저 정도 고수 분들은 방향 없다. 여러분들도 우리 두 사람 얘기 말고 각자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참 좋지 않을까.(웃음)
김성욱: 그럼 관객들 질문을 받지 않는 건 어떤가?
백현진: 나는 사실 질문받기 싫어한다.(일동 웃음)
김성욱: 그럼 노래라도 한번.
(그러자 바로 연남동 사는 백현진 씨는 어떠한 연주도 없이 오늘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그 집 앞’이란 노래와 ‘우산’의 한 소절을 들려준 후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김성욱: 농담인데 진짜로 노래를 불러, 이 자리가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영화예술의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부뉴엘과 만나게 될 거다, 라는 말을 누군가 했었다. 영화에 격식이나 형식이 완고하게 있었으면 부뉴엘은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라 말하는 이도 있다. 백현진 씨가 그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마지막에 노래로써 웅변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웃음)
백현진: 외칩니다!(일동 웃음) 건강하시고 감기 조심하시고 하여튼 각자들 지치지 마시고(웃음). 사실 개인적으로는 최소한 저한테는 이 영화의 부르주아란 굉장히 재수 없는 사람들인데, 어쨌든 저 사람들도 걷는다. 계속 걸을 거다. 우리들 각자도 지치지 말고 쭉쭉 잘 걸으시길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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