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5. 13:53ㆍ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겨울비가 내리던 저녁, <평양성>의 이준익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지난해에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추천한 이준익 감독은 올해는 평소에도 자신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곤 했던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선택했다. 이준익 감독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영화에 담긴 의미가 여전히 새롭다며, 전쟁과 이념 대결구도를 풍자한 큐브릭의 작가적 행보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시네토크 현장을 소개한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 작년<평양성> 연출 후 상업영화계 은퇴를 선언 하셨다. 그 이후로 힘들게 보내실 줄 알았는데, 좋게 보내신다고 들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라 평생의 반을 실수하며 산다. 감정적인 인간이라 욱하는 바람에 말실수를 했다. 인간은 실수로 비극을 맞이하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웃음).
허남웅 : <황산벌>을 연출할 때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모범이 되는 영화였다고 말했었다. 추천한 이유를 듣고 싶다.
이준익 : 이 영화는 미국 냉전 이데올로기를 비꼬는 블랙 코미디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경쟁 속에서 과대망상이 만들어졌고, 과학의 힘을 빌어서 핵무기를 생산해 놓지 않았나.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심화되었을 때 큐브릭은 이 영화를 만들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은 핵무기의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쟁이나 이념 대결 구도 자체가 일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1964년에 이런 생각을 한 큐브릭은 50년이 지난 이 자리에서도 공론화 할 수 있는 철학자다. 이 작품은 반영웅주의 영화며 미국의 군사중심주의마저도 풍자한 영화다. 간단한 미학이지만 상징적 비유가 있는 블랙 코미디라서 이 작품을 추천했다.
허남웅 : 한국에서 이런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과거 한국의 목표는 학생들이 권력에 의해 순종적 인간이 되어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거였다. 그런데 현재는 그 사회 시스템이 건강한지를 의심하는 시대다. 내가 20대였을 때에는 정보가 차단되어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은 60년대에 이 시기를 건너갔다. 이 작품을 통해서 이 사회가 다른 나라들처럼 집단 소통이 잘 이뤄졌는지를 가늠해봤으면 좋겠다. 우리가 시네마테크에서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30년 전 재밌게 봤던 영화 속에 담긴 의미가 여전히 새롭기 때문이다. 지금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도 내겐 매우 행복하다.
허남웅 : 이 영화를 접했을 때가 언제인가?
이준익 : 남들처럼 처음에는 할리우드 상업 영화를 열심히 봤다. 데뷔작도 <키드 캅>인데, 당시 <나홀로 집에>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 냈다. 첫 영화가 망한 후, 10년 동안 감독 대신 외화 수입 및 영화 제작 일을 했다. 나중에야 내가 알고 있는 기준과 다른 작품들을 시네필 친구들에게 추천 받았다. 30대 중반 넘어 본 영화들은 내가 모르던 세상이었다. 100년을 넘어 장르를 지탱해 온 영화사에 남아있는 영화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런 영화들을 관람한 뒤 <황산벌>을 만들었다.
허남웅 : <황산벌> 같은 사극을 제작한 것은 이런 식의 코미디를 현대극으로 만들기엔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지금 현대극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할 의향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물론이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젊은 세대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이 적지만 중년층 이상은 바뀌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일상의 많은 부분을 대결 구도가 지배하고 있다.
관객1 :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봤는데, 가진 자들의 횡포를 빗대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세상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나 비꼬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는데, 감독들이 이렇게 세상을 비꼬는 방식을 선택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이준익 : 이상하게도 영화를 찍으면 신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세상을 버즈아이로 보려한다. 제일 윗선에 있는 우두머리들의 뒤통수를 위에서는 볼 수 있다. 관객 전체가 이러한 시각을 가져야한다. 감독은 이를 풀어서 관객들도 똑같이 권력자들의 뒤를 보라고 이야기한다. 채플린이 말했던 것과 반대로,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근엄해 보이고 과도한 의미가 부풀려지지만, 카메라를 가까이 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걸 통렬하게 찔러서 보여주고, 관객들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역할을 이 영화가 한다. 그래서 영화는 돈의 가치만이 아닌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관객2 : 배우들이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감독님 영화에서는 과장되어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자연스러운 것 같다. 어떻게 과장을 절제 하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 얼마 전 중국 아카데미에 초청을 받아 특강을 했는데, 중국 배우들은 연기가 너무 과장되었다고 일침을 놓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중 돌아가시기 전 작품들, 예를 들어 <아이즈 와이드 셧>을 보면 과장이 하나도 없다. <풀 메탈 자켓>도 다큐멘터리적으로 찍은 최초의 베트남전 영화로 생각된다. 1964년도의 연기법이 바로 이건데, 연기 톤이 저 정도면 과장이 아닌 거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장이지만, 그때 기준으로 보면 과장이 아니라 생각한다.
허남웅 : 이 작품이 칼라로 찍으려다가 제작비 때문에 흑백으로 진행했다고 들었다. 선악의 이분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알 맞는 형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전 인터뷰 때 세상 자체를 흑백으로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이준익 : 칼라는 같은 색을 오래 보면 식상해서 그것보다 다른 고급의 색을 찾게 된다. 그게 눈의 사치를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차라리 흑백이라면 비교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다. 흑백 논리가 아니라, 담백하고 조촐한 일상이 행복 지수를 키우는데 유리할 것 같다. 지혜로울 수 있는 방법은 심플하고 가식 없이 사는 거다.
허남웅 : 다음에는 그런 가치관을 갖고 변화한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지?
이준익 :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문을 열어야하는데 너무 사회적, 역사적, 공동체로서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영화만 만든 것 같다. 영화 미학을 포기하는 서투름이 있었는데, 이젠 영화 미학도 추구하고 싶다.
관객3 : 자본주의 사회의 과열 경쟁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어떤 예술이든 제작자가 대중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 감독은 관객들을 계몽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추측하는데, 요즘 사람들한텐 어떤 계몽을 하고 싶은지.
이준익 : 나는 계몽이란 단어를 싫어하기 때문에 계몽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영화를 하다보면 우월한 심리가 스며든다. 감독이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대로 스태프들이 실행해주니까. 여러 편을 찍으면서 메시지 전달이 부정확한 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그래서 더 올바른 가치에 대한 다음 행보는 무엇인가? 찾아야 하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관객4 : 비행기 안에서 폭탄이 작동 안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작동되어 멸망한다. 관객들이 해피엔딩을 원할 텐데, 죽여서 참담함을 안겨주는 감독의 심리가 궁금하다.
이준익 : 당시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는 질문하신 분이 원하는 그런 결말대로 찍었다. 그래서 큐브릭은 반대로 촬영했다. 좋은 결말을 다 알고 있고 그걸 충족시키면,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지금도 할리우드는 폭발을 멈추는 해피엔딩으로 만들고 있다. 30살 전까지 할리우드의 권선징악에 도취되어서 살았는데, 30대 중반 넘어가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입된 그 사고방식을 따를까봐 두렵다고 느꼈다. 반대가치에 대한 발견을 추구하는 것이 작가적 행보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작가가 못되었지만, 큐브릭은 초지일관 작가적 관점에서 끝까지 밀고 간 거다. 나는 큐브릭이 인류에 진정 이바지한다고 본다.
허남웅 : 앞으로의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이준익 : 계획의 희생자였다(웃음). 너무 계획하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젠 인생을 계획 없이 살려고 한다.
정리: 윤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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