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6. 16:55ㆍ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이명세 감독이 선택한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이었다. 영화를 감상한 소감에서 이명세 감독은 <샤이닝>을 처음 미국에서 보았던 때를 회상하며 깨끗한 화질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겨울에 <샤이닝>이라는 공포장르를 선택해서 관객들에 송구함을 드러냈던 이명세 감독.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달리 146분이라는 러닝타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추운 날씨에도 극장을 가득 메우고 영화를 감상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은 함께 웃고 놀라며 마치 새롭게 개봉한 스탠리 큐브릭의 최신작을 감상하듯 하나가 되어 영화의 배경인 오버룩 호텔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명세(영화감독) : 십년 전 쯤 뉴욕 필름 포럼에서 <샤이닝>을 볼 기회를 수차례나 놓쳤다. 1년 뒤에 힘겹게 감상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내가 느꼈던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시네마테크 친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이명세 감독님께 어떤 의미의 연출자인가?
이명세 : 완벽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의 영화를 상영할 때 극장의 영사 상태가 완벽하지 않으면 프린트를 보내지도 않고, 정말 철저한 느낌과 자세가 큐브릭 감독에게서 느껴진다. 일시적인 상업적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개인적인 예술을 보여주는 행위자로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허남웅 : 영화 속에서 여러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감독님 개인적으로 꼽을 수 있는 장면은 어떤 것이 있나?
이명세 : 영화를 만들 때 70퍼센트의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성공한다고 한다. 항공 촬영된 시작부의 웅장한 장면과 음악, 스테디 캠의 유려한 이동, 카펫이나 마루를 밟을 때의 세밀한 사운드의 반복 등이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가듯 분위기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식으로 하면 귀신 씌인 사람의 이야기인데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방법이 너무 좋아서 큐브릭의 다른 영화들 보다 유독 상업적이며 동시에 예술적 성취를 얻었다고 본다.
허남웅 : 영화 속 타자기 소리를 이용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명세 : <남자는 괴로워>에서 잠깐, 그리고 <M>에서 타자기는 아니었지만 키보드 소리를 좀 강한 소리로 얹었던 기억이 난다.
허남웅 : 이 영화에서의 많은 해석, 즉 작가로서의 압박,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미국 백인들의 폭력의 알레고리 등에 대해 감독님의 해석은 어떠한지?
이명세 :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영화는 볼 때마다 틀려질 수도 있다. 마지막 장면의 사진 속 7월 4일이 미국인에게는 독립기념일이지만 인디언들에게는 무덤과도 같은 날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압권은 밖에서 아내와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잭 니콜슨의 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연기자의 표정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큰 화면으로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허남웅 : 이렇게 인상적인 연기가 가능한 잭 니콜슨은 감독님에게 어떤 연기자인가?
이명세 : 너무 좋아하는 배우이고 특히 눈매는 알랭 들롱과 흡사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두 배우의 사진을 대조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허남웅 : 아내 역의 셜리 듀발이 배트를 휘두르는 장면이 127번의 촬영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완벽주의는 악명이 높았다. 감독님 역시 70번 이상의 촬영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이명세 : 그렇게 많지는 않고, 한 두 장면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이다. 사실 약간의 빈 곳을 더 채우기 위해 여러 번의 테이크를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결국 두세 번째 테이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게 되는데, 이런 접점 찾기는 배우나 스태프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느낌의 접점을 찾는 시도로 이해해주면 좋을 것 같다.
관객1 : 결말이 잭 니콜슨이 가족을 다 죽이는 데 성공하고, 휴가가 끝난 이후에 사람들에 의해 발견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결말을 피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명세 : 우리는 흔히 우리의 시각으로만 영화의 결말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졸업>이란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해피엔딩일까? 백수건달과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덜컹거리는 자동차는 원래 감독이 암담한 미국의 미래를 그리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허남웅 :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중 좋아하는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
이명세 : 다 좋아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도 좋았고, <미져리>도 좋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샤이닝>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관객2 : 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별다른 해명 없이 지나가서 영화를 분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영화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명세 : 개인적으로 주제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영화를 너무 분석적으로 보면 영화자체의 즐거움을 놓칠 수 있다. 분석적 감상은 한 번으로 제한될 수 있지만 즐기며 감상하면 볼 때마다 영화 곳곳에서 보물들을 찾을 수 있다. 가령, 냉동 창고에 갇힌 잭의 모습은 로 앵글로 표현되는 것이 최선이었는가? 잭 니콜슨의 분위기를 다른 한국 배우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까? 조명과 스모그의 효과나 음악의 베리에이션 등의 요소들을 마치 바둑 두듯 구상해 볼 수 있다. 나처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늘도 영화 감상하는 재미가 이렇게 쏠쏠했다(웃음).
관객3 : <샤이닝>이라는 제목의 의도와 영화 속에서 237호의 의미, 그리고 여자 귀신의 의미가 궁금하다.
이명세 : 시네토크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스탠리 큐브릭에 빙의되었으면 한다(웃음). 일단 <샤이닝>이란 제목은 중의적으로 가장 빛나는 순간이자 피의 순간, 즉 피의 희생을 전제로 한 독립 기념일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자의 정체는 논리적으로 규명 짓기 보다는 느낌으로 형상화 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관객4 :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1921년 사진에서 보이는데 원래 유령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문에서 핏물이 나오는 장면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명세 : 논리적으로 본다면 죽었던 유령의 이야기이거나 환생일수도 있겠다.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드라마와는 다르게 비약될 수 있다. <샤이닝>은 이미지를 통해서 논리적이 아닌 방식으로 호텔 전체를 뒤집어 버린다. 나 또한 색을 강조하고 익숙한 음악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주의를 강조하고 환기시키기 위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관객5 : 영화에서 중요하게 표현되는 미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스테디 캠으로 표현된 미로의 경우 스테디 캠을 활용하기 위해 미로가 선택 된 건지 미로를 표현하기 위해 스테디 캠을 활용한 건지 궁금하다.
이명세 : 미로는 오버 룩 호텔 전체에서 내려다보듯 누구의 관점일수도 있고 작가적 벽에 갇힌 잭 니콜슨의 심경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역사적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미로 같은 느낌과 이미지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테디 캠을 선택한 것 같다.
관객6 : 영화가 예술성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큐브릭 감독의 작품은 어떤 면에서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명세 : 개인적으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나누지는 않는다. 다만 장인의 손에 의해 최선을 다해 꼼꼼하게 빚어진 작품과 기획에 의해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작품과는 구분이 된다고 본다. 영화의 요소들이 얼마나 적절하게 녹아들어가 조화를 이루는 지가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큐브릭의 영화는 성공적이며 예술적이라고 본다.
관객7 : 감독님은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에서도 오마주될 정도로 비주얼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좋은 이미지나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명세 : 189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일본 유명 조각가가 로댕박물관에서 본 발자크 상의 산 더미 같은 스케치들을 보고 절망 끝에 조각을 그만 둔 일화가 있다. 하나의 조각을 위해 수많은 스케치가 필요하듯 하나의 장면이나 이미지를 위해서는 수많은 시나리오의 수정작업이 필요하다. 비주얼이란 그림이나 풍경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영상화 된 것이 이미지이다. 고민과 절망을 이겨낸 몇 장면만이 이미지이며 이런 이미지는 찾기가 쉽지 않다. 한 두 장면만 발견해도 커다란 성과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이러한 많은 보물들을 찾아서 갖고 돌아가시길 바란다.
정리: 김준완 | 에디터
사진: 최용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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