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4. 12:09ㆍ특별전/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고등학교시절 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한 덕분인지 바까롤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시험)을 턱걸이로 겨우 통과했다. 나처럼 똑똑하고 명석한 학생에게는 불명예스러운 결과였는데, 나는 원래부터 시험이라는 제도에 관심이 없었다. 시험은 지루하고 따분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항상 시험 성적이 좋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력은 없으면서 시험은 잘 치는 학생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굳히게 된 이후에도 나를 평가하는 제도나 사람에 관해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세자르 상이니, 황금종려상이니 하는 것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영화제를 나는 경멸한다.
대학에 가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일단 문학부에 입학했다. 특히 영문학에 통달한 나는 오히려 교수님을 가르칠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미국 문학과 문명에 관한 학위도 수료하였다. 문학뿐 아니라 나는 대학에서 법학을 따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건 1년 반 만에 때려치우고 말았다. 너무 지루한 학문이었다. 시앙스 포(Scienc-Po: 프랑스 그랑제꼴계의 정치학교)에도 입학했지만 보름 만에 그만두었다. 정말이지 내 체질에는 맞지 않는 과정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버지의 약국 운영에 2년 동안 동참했던 나는 그것 또한 중단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음과 같은 궤변으로 설득시켰다. ‘아버지는 이제 겨우 48세에 불과해요. 내가 계속 학교를 다닌다면 앞으로 5년은 더 공부해야 하고, 그럼 아버지는 몇 살이죠? 53살!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약국을 물려받는다고 하면,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아깝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와 약국의 수입을 나눠가져야 하니 지금보다 수입이 두 배나 줄어들잖아요? 저도 아버지와 늘 나눠가져야 하고, 이렇듯 우리에게 모두 불리한 사업을 왜 계속해야 합니까?’ 결국 아버지는 약국 운영을 다시 혼자 맡았고, 내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년 반 동안 법학부의 학생노조를 들락거리며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중 르펜(나중에 프랑스 극우단체를 이끈 우두머리가 된다) 과도미나티가 있었다. 3년 동안 우리는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놀았다. 몽마르트를 비롯하여 파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생 미셀의 주점 ‘라볼레 La Bolée’는 우리의 술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라 볼레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난장판을 벌이자!’라고 외치며 라 볼레로 향했고, 우리가 외친 그대로 밤새 내내 주점에서 난동을 부리고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 엄마는 21살이 넘은 내가 숫총각이라고 여겼고, 야밤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낮에는 성실하고 착한 학생의 얼굴로 공부에 전념하는 척하였고, 밤에는 술독에 빠져 이중생활을 즐겼던 나는 아침 8시가 넘으면 어김없이 집 근처에 있는 법학과 사무실로 뚜벅 뚜벅 걸어가서 사무실 안에 있는 피아노를 신나게 쳤다. 이윽고 친구들이 오면 그들과 함께 포커를 치며 놀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에 와서 친구들과 포커를 친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되면 노는데 지쳐서 집으로 쉬러 갔다. 그리고 모두 잠든 시간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고, 새벽이 되서 다시 고양이처럼 집으로 들어왔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양심에 찔리긴 했으나, 내가 하는 짓이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놀 수 있을 때 마음껏 놀고 탈선적인 행동을 하거나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정직함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나 가능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씀을 신조로 삼았다. 아버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하셨다. 거짓말 자체는 좋은 의도에 따라 충분히 존재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러한 가치관은 나중에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도 적용되었는데, 나 스스로 판단하길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면서 명작을 만든다고 착각한 적이 없다. 내가 왜 졸작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에게는 정직했다고 믿는다.
20대시절의 방탕한 생활에 대가를 치르게 됐다. 나는 병에 걸리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관찰하였다. 술기운에 절은 나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도 행인들은 나의 얼굴을 훑어보고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잠그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온통 붉은 점으로 가득 찬 얼굴! 옷을 벗어보니 몸 전체에도 붉은 점이 퍼져있었다. ‘흠, 음식을 잘 못 먹은 모양이겠지. 한 숨자고 나면 괜찮아 질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침대에 픽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붉은 점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엄마 몰래 살짝 약국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내 몸의 이상한 증세를 드러내었다. 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관찰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 두 가지 중 하나야. 넌 성병에 노출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뒤늦게 수두를 앓는 거라고. 그런데 두 번째 가정은 네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지니…이 몹쓸 녀석, 넌 성병에 걸린거야! ’
아버지는 나를 기분 나쁘게 째려본 뒤 마치 내가 길가의 오물이나 되는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가증스러울 정도로 추악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순간이었으니! 나중에야 밝혀졌지만-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는 오진을 했고, 그것은 수두였다. 어찌되었건 나는 정력을 낭비했음을 깨달았다. 그건 무시무시한 진실로 다가왔다. 수두사건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그 병에서 완쾌되자마자 방탕한 생활에 결별을 고했고, 더욱이 결혼이라는 관습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모님의 친구 분이 수두 후유증으로 버둥대는 나를 스위스 니옹 근처의 공기 좋은 산간 지방으로 요양을 보내라고 귀띔했다. 나는 미련 없이 떠났고, 거기서 나의 첫 아내를 만났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나는 당시 파리의 어떤 카페 직원과 연애중이어서 평범한 만남으로 그쳐야만 했다. 게다가 성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시기를 통과한 후 나는 외출을 극도로 삼가하고 있었다. 헌데 그녀를 두 번째 보았을 때는 평범한 만남으로 방점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니옹 지방의 갑부 딸이었고, 집안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저택에 자주 초대되었다. 대가족이 우글대고 있는 그 집에서 그녀의 어린 동생들의 가정교사도 해주고 그녀의 부모님과 친인척이 모일 때면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치와 말솜씨를 발휘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집안의 공공연한 사위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는 아무개의 남편이 된, 자연스럽게 성사된 결혼이었다. 결혼은 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더 이상 대학에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아내 집안의 풍족한 경제적인 배경덕분에 돈 문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이다. 그러나 결혼한 뒤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영화와 연극관람, 독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누릴 수 있던 사실은 확실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파리의 부르조아 상류층이 모여 사는 네이유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주 즐겁고도 기상천외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는데, 그건 마누라 등에 업혀 산다는 현실이었다. 그걸 오랫동안 좋아할 사내는 드물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고 때가되면 하리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 마음이 무거웠다. 군입대시기가 닥쳐오자, 회의로 덮인 그 시간으로 부터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입대 후에는 병역을 채우지 않는 술수를 부려 3개월 만에 나는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상황 파악에 능란한 나의 감각은 군대에서도 발휘되었다. 군대 행정에 구멍이 난 것을 알아챈 나는 입대한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도 나의 입대가 공식적으로 발효되지 않았음을 항의 했고, 그걸 빌미로 나는 병역 의무일수를 줄이는 빌미를 얻어냈다. 더군다나 나는 군대에서 실적을 올리며 병역 의무일수를 또 줄여나갔다. 당시에는 헌혈이 국방 의무화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내무반 군인들에게 ‘지금 자청해서 헌혈을 하는 것이 나중 의무화 될 때 하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며 부추겼다. 결국 다른 내무반보다 더 많은 헌혈지원자가 생겨나 지휘관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틀이나 더 받아 챙길 수 있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로 다시 아내 덕에 먹고 사는 남편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폭스 영화사에서 홍보담당을 맡는 기회가 생겼다. 영화계에 첫발을 대딛는 셈이었다. 폭스 영화사에서는 영어권 영화의 프랑스어 제목을 찾는 일이나 -그건 너무나 재미 있었다- 혹은 폭스에서 배급하는 영화들에 관한 홍보용 기사를 올리는 일을 주로 맡았다. 예를 들어 프랭크 타쉴린의 1956년작 <The girl can’t help it> 의제작사에서 보낸 홍보 문구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 여주인공을 맡은 제인 맨스필드의 프로필을 나는 이렇게 조작하였다: 제인 맨스필드, 그녀는 방년 11세에 이미 자신의 가슴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예지하였으니..!’ 천박하기 짝이 없는 문구였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적절했었다. 이렇게 폭스사에서 나는 1년 반을 꼬박 채워 일하다가 곧 시간제로 업무를 줄였다. 첫 영화를 준비하기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의 꿈은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특별전 > 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로드 샤브롤의 누벨바그 (0) | 2010.12.30 |
---|---|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6 (2) | 2010.12.25 |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4 (0) | 2010.12.23 |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3 (0) | 2010.12.20 |
내 곁엔 늘 악마가 꿈틀거린다 - 클로드 샤브롤의 <악의 꽃> (0) | 2010.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