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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4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전쟁도 끝났고, 사르당 지방에서의 왕 노릇도 끝났다. 4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아들을 보자마자 부모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줄께’라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명문 고등학교 루이 르 그랑에 나는 무난히 입학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전히 권력에 취한 청소년이었던 나는, 이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나는 반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하고만 어울렸다. 나는 그들처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괴짜 시골뜨기로서 별의별것을 후두룩 꿰어 잘 알고 있는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모험담과 삶의 생생한 지식을 펼쳐놓았고, 소중한 동무가 되었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추켜세웠으며,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문학에 푹 빠져 지냈는데, 원문으로 된 그 책자들을 사들여 달달 외울 정도로 읽은 뒤 모조리 비싼 값으로 되팔기도 했다. 나는 상술에 재주가 있었다. 어쨌거나 나의 용돈은 나의 욕망에 비해 늘 빈약했고, 궁여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헤밍웨이나 도스 파소스와 같은 문호들의 친필 사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나는 감히 그들의 사인을 흉내 내어 내 책 머리에다 갈겨썼고, 웃돈을 얹어다 팔았다. 사람들은 나의 사기를 의심하지 않고 책을 챙겨 갔다. 나는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다시 책을 구입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나는 이렇게 사기꾼에다 강탈꾼인데다가 황당한 책들을 읽어댔다.  20세기 초 유행했던 대중 소설 중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키치스런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이었는데, 나는 그러한 점이 너무나 좋았다! 학교와 집에서는 늘 내게 엄격함을 요구하였고 나는 그러한 환경을 잘 견디는 성향이 아니어서, 이와 같은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돌파구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 소설 속 인물들에 영향을 받은 나는 학교에서 엉뚱하고 대담한 행동을 하여 학교 괴짜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대표적으로 라틴어 선생님과의 대결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정말 구질구질했을 뿐 아니라 라틴어의 문법을 엉망으로 가르치는 형편없는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와 대결하기 위해 이중적인 얼굴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평소 나는 샤브롤이었지만, 그에게 대들고 맞설 때는 마냐드라고 자칭하였다. 그에게 빈정거리며 반항할 때면 약이 잔뜩 오른 그가 나를 붙잡고 ‘마냐드, 거기서지 못해!’라고 하면서 뒤돌아서 싱긋 웃으며 ‘선생님, 저는 마냐드가 아니라 샤브롤입니다’라고 해서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냐드와 샤브롤은 이렇게  2년 동안 교내에서 존재해왔다. 교내 벽보에 ‘마냐드는 미친 녀석’, ‘샤브롤은 희롱을 즐기는 녀석’등이 게시되기 시작했다. 우리(마냐드와 샤브롤)에 대해 너무 많은 소문이 나돌았고, 나는 교원회의에 소출되었다. 이틀간의 정학처분이 내려지면서 교장선생님은 내게 마치 공범자처럼 윙크를 했다. 


부모님 또한 교내에서의 나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영화관에 가느라 학교 수업을 빼먹는 것만은 쉽게 용납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부모님은 우리 집 하숙생에게 내 뒤를 밟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날 아침만은 학교를 빼먹지 않을 작정으로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로 가는 길은 팡데옹 극장을 지나가야 한다. 나는 잠시 팡데옹 극장 앞에 멈춰 서서 전날 보았던 영화의 스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뒤를 밟던 하숙생이 내 목덜미를 쥐고는 ‘요 녀석! 너 또 학교 빼먹고 영화관 가는거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나의 목덜미를 끌고 집으로 직행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부모님께 하숙생의 착각을 주장하며 그의 착각으로 인해 진실과 정의가 얼마나 처참하게 무시당하고 있는지를 역설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과장된 언변술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할 거라고 맹세해!’라며 큰 소리를 치셨다.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 몰래 무수히 학교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으로 향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풀리는 일이 없었다. 사르당에서는 여자애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었는데, 파리에서는 여자애들이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했다. 결국 나는 심통이 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여자애들의 엉덩이를 집적거렸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날씬하고도 근육질의 몸집에 사제 같은 얼굴로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럴 경우 으레 엉큼해 보이는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들이 의심을 받고는 모두가 ‘몹쓸 인간이네!’라고 한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나는 몇 번 뺨을 얻어맞기도 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참 실험적인 시절이 아니었던가.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짓을 무려 2년 동안 하고 다녔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까. 나는 항상 행복과 더 인연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원한 것은 꼭 얻어내고야 말았다. 헌데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으니 나는 초조해졌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무슨 일을 저질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파리지엔느들을 꼬시는 방법을 심사숙고하게 되었고, 그것은 ‘부끄러움 타는 방법’으로 결론지어졌다. 여자애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시선을 끈 다음 나는 더없이 부끄러운 남학생으로 돌변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여자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 시절 여자 친구 사귀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은 할머니와 영화관에 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탈선행위에 유일한 공범자였다. 할머니는 내가 영화관에 가기 위해 수업을 빼먹는 것도 괘념치 않았고,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해도 모른척했다. 영화관에 가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동반자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우리는 영사기에 영화 필름이 끼워 맞추기 시작할 아침나절부터 이 극장 저 극장으로 돌아다니며 영화를 보았다.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는 늘 내 책임이었고, 하루 종일 서너 편씩 뛰어다니며 본 영화들을 할머니는 헷갈려하며 내용을 뒤섞기도 하였다. 영화를 뒤섞여 재구성하는 할머니는 매력적이었고, 아름다웠다.


1950년대가 시작되면서 미국영화가 물밀듯이 흘러들었다. 아침에는 빌리 와일더의 1944년작 <이중배상Double Indemnity>을 보았고, 오후 두시에는 오토 플레밍거의 1944년작 <로라Laura>를 보았으며, 연이어 프레스톤 스터저스의 1941년작 <레이디 이브The Lady Eve>, 프리츠 랑의 1944년작 <창가의 여인The Woman in the Window>의 감상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그렇게 영화를 하루 종일 보러 다니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내게 있어서 마치 감정을 맛보기 위해 회화 작품을 보러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는 문화 활동이었다. 물론 영화를 많이 보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었고, 이 영화는 저 영화에 비해 왜 담백한 느낌이 드는지, 영화 속 인물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상대방은 왜 등을 돌리는 가 등등, 자문을 많이 던지기는 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잘 못 찍은 영화는 금방 식별하게 되기도 했다.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부모님에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살짝 비추었다. 부모님의 대답인즉, ‘그런 직업은 게이들이나 하는 거다’. 전혀 놀랍지 않은 답변이었다.(계속)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