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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6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스무 네 살의 나는 기혼 남성에다가 아들까지 둔 가장이며 샐러리맨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라고 명명하면서 교회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악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가? 삶에 있어서 죄책감은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고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보라. 나는 그것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물론, ‘세상의 불행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외치며 이기적으로 구는 것보다 죄책감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20대의 나는 이렇게 모든 것에 시비를 걸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도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신부님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나의 방종한 사생활, 교회에 대한 분노 등을 부끄러움 없이 늘어놓았다. 이런 짓은 몇 년 동안 이어졌지만 나의 아내도 부모님도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이중생활이었다.


고해실과 폭스 영화사 사무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카이에’지에 영화평을 썼다. 히치콕에 관한 글 덕분에 나는 ‘카이에’지 군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고수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벨바그 세대를 뜻함- 서로서로에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뜻을 같이 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감스러운 사람은 –지금 떠올려 보면 조금 우습지만 – 자크 리베트였다. 마치 작심이나 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구체적이고 치밀한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 알랭 레네가 가장 먼저 영화를 찍고 자크 리베트는 거기서 조감독을 맡으며 다음 차례는 리베트가 감독을,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조감독을 하는 등등. 그런데 무슨 일이든 예상을 뒤엎는 현상이 발생하는 법, 돈을 쥐는 자가 첫 메가폰을 잡게 되었고, 그건 바로 나였다. 






아내의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내에게 유산이 분배되었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돈 보따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알랭 레네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어떨까?’ 아내의 뜻밖의 대답인즉 ‘흠, 당신이 먼저 영화를 만드는 건 어때?’. 그리하여 <미남 세르쥬>를 찍을 수 있었다. 첫 편집 필름은 2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이었는데, 리베트의 눈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건 너무 길잖아! 한 시간 내로 끊어야지!’ 그런데 트뤼포의 장인 모르겐스타인이 운영하는 제작사에서 배급받는 기회를 그만 놓치고야 말았다. 모르겐스타인은 테뉴지Tenoudji 에게 자신의 제작사를 넘기면서 <미남 세르쥬>’의 배급을 추천했다. <미남 세르쥬>는 흑자를 거두었고, 이윤이 생기자 나는 즉각 <사촌들>의 촬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자본이 넉넉하지 않아 <사촌들>은 난관에 부딪쳤다. <사촌들>은 위험도 많았고, 상징적인 영화가 되었다: 리베트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동안 나는 두 편을 찍은 것이다.


나는 비평을 그만두었다. 남의 고기를 팔아주기 위한 글은 더 이상 쓰지 않았고, 친구들의 영화들에 관해 아첨하는 글을 가끔 써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치켜세워 주었고, 그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룰이었다: 영화 두 편을 찍는 동안 아무도 배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었다. 삶의 다양한 굴곡을 거치면서도 나는 언제가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코 안달하지 않았다. 잠이 들 때면 호주에서 메가폰을 쥐고 있는 나를 꿈꾸었고, 때문에 이루어질 꿈이라고 –자주 말하여지는 것처럼- 알고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장담한 적도 없었다.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두고 보자구’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더욱 곤란한 꿈이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나의 꿈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태연했다. 태연한(serein)그리고 숙맥(serin), 나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순진함이었다: 내가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그건 곧 성공을 의미하리라.


나 역시 영화계에 일찍 발을 들여 조감독 역할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감독들은 첫 메가폰을 잡기위해서 15년 동안 맥주를 날라야 했다. 나는 나를 왕으로 여기며 자랐는데 맥주를 나르라고? 차라리 영화관에서 살겠다! 나라고 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여러 가지 계산을 해보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한 일은 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에두른 방식으로 보이겠지만, ‘카이에’지 동료들과 나는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파리를 세포 조직화 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약아 빠졌었다! 무엇보다 장 콕토를 우리의 손아귀에 넣었던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데뷔시절은 장 콕토의 데뷔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카이에’지 사무실에 직접 거동을 하거나 그의 영화 첫 시사회에 우리를 꼭 초대하여 프랑스 영화계 인맥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닫힌 문을 열어주는 열쇠나 같았으며 큰 보증이 되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인식했고, 그러한 상황에 어느 정도 편승하였다.






나는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 인해 눈이 멀지는 않았다. 뭐든 활용하는 것은 나의 타고난 성질이어서 내가 어떤 계획을 실현할 경우,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만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일이 엉망진창이면 나는 금새 사태를 깨달았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강조하자면 나는 내 영화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이나 의견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점 또한 나의 절대에 가까운 회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교육과 훈육에 대한 반발심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내 첫 영화들에 대하여 ‘카이에’지는 분명 허풍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책략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확실히 틀리다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남 세르주>가 개봉했을 때, 그리고 <사촌들>이 연이어 소개되자 어떤 이들은 나를 두고 발자크에다가 베토벤이 약간 섞여 윤회 했다는 둥, 그것도 모자라 드가나 툴루즈 로트렉의 화법을 연상시킨다고 하였다.


아, 내가 그런 비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오줌 누는 법도 잊어버린 식물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분명 영화감독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코타파비Cottafavi라고, 고전시대 영화 전문가로서 재미있는 감독이었다.  그는 고전에 관한 지식에 통달했으며 그에 관한 디테일한 요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대단한 마니아였다. 그러자 곧 사람들은 그를 세익스피어와 시세론에 비교하였고 ‘카이에’지도 그런 글을 썼다. 문제는 코타파비가 그걸 그대로 믿은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더 이상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파스칼의 ‘팡세’의 수준에 도달하는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물론 장 피에르 멜빌의 경우처럼 허풍스런 비평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칸 영화제 기간, 누군가가 장 피에르 멜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  감독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세요?’멜빌은 심각하게 대답하길, ‘참 지키기 힘든 자리이다’. 나는 그의 대답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자신이 하는 말을 믿고 있었고, 자신의 머리가 너무 커지자 거기에 맞는 모자를 찾을 수 없는 지경이 오고야 말았다. 아무튼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는 부류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삼킬 만큼 겸손하지 않다. 나 자신과 사랑에 빠질 만큼 어리석지도 않으며 나르시시즘에 관한한, 나는 항상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과 유쾌하게 살고 있으며 나 자신이 조소거리가 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끝)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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