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4. 15:56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마이크 리는 영국사회의 보수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면서 밑바닥 삶의 불안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특히 정해진 각본 없이 배우들과 협업하는 즉흥 연출과 더불어 영국민의 변두리 삶과 생활 태도에 근거한 자기반영적 유머에서 나오는 풍자적 연출은 그만의 장기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네이키드>는 전작까지 이어지던 블랙 유머가 완전히 휘발됐다는 점에서 마이크 리의 가장 어두운 작품이라 할만하다.
그런 조짐은 이미 오프닝에서 선언적으로 제시된다. 주인공 조니(데이비드 두윌스)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강간에 가까운 섹스를 마친 후 도망치듯 고향 맨체스터를 떠나는 것. 곧이어 카메라는 런던으로 향하는 운전석의 조니에게로 옮겨가지만 그의 시선에서 한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도로 풍경은 목적지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삶을 강하게 은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가 묘사하는 조니의 이틀간의 행적에는 목적의식이 철저히 결여돼있다. 마침 런던에 헤어진 여자 친구 루이스(레슬리 샤프)의 거처가 있어 찾아갈 뿐이고 우연히 그곳에 그녀의 룸메이트가 있어 감정 없는 섹스를 나눌 뿐이며 결국 거리로 나와 정처 없이 방황, 또 방황할 뿐이다.
그것은 배회하는 길에서 조니가 만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진창 같은 현실에서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서로 동정심을 베풀지도 않으며 인생을 개선하고픈 의지도 없는 이들에게서 인생의 의미 따위 거론할 게재가 아니다. 마이크 리는 극중 인물들의 머무를 곳 없는 처지를 곧 희망 없음으로 동일시한다. 예컨대, 루이스 또한 주인집에 얹혀사는 형편이고 주인조차 부재중인 상태이며 결국 집에 모였던 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른다. 표피적인 관계의 지형도, 즉 농담 일색의 대화와 메마른 웃음소리, 그 속에서 언뜻 비치는 분노조차 곧 증발하고 마는 현실은 <네이키드>가 거처 없는 이들의 이야기임을 증명한다.
조니와 주변 인물들이 처한 현실보다 더욱 인상적으로 <네이키드>의 공기를 지배하는 것은 부유(浮游)와 고립의 이미지다. 극중 인물들이 어둠에 쌓인 도시의 빈민가를 홀로 먼지처럼 부유하는 구도와 좁은 골목길에 포박 당한 듯한 고립의 장면화는 마이크 리의 이전 작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감각적인 장면으로 기능한다. 섬뜩하도록 텅 빈 빌딩에서 조니(마이크 리 작품의 단골 배우인 피터 와이트가 연기한)가 경비원과 미래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은 대표적이다. 창문 밖 풍경과 대조를 이뤄 실루엣처럼 제시되는 이들의 모습에는 비관적인 패배주의가 여실히 묻어난다.
마이크 리는 그런 조니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는다. 방황을 거듭하던 조니가 끝내 루이스와 관계 개선을 이루는가 싶더니만 다시 거리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1993년에 발표된 <네이키드>는 포스트 대처(a post-Thatcher) 보수주의 정부 하에서 하층민과 노동 계급이 겪는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세기말적 풍경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2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한 현실이다. (허남웅 영화 칼럼니스트)
▶▶상영일정
1월 19일 (화) 19:00 상영후 시네토크_박찬옥
1월 24일 (일) 19:30
2월 5일 (금)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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