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3. 09:11ㆍ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영화읽기] 조셉 로지의 <트로츠키 암살>
조셉 로지가 다수의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미국에서 추방되었을 정도로 정치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분명히 <트로츠키 암살>은 트로츠키를 신화화하여 그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영화는 객관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이 사건을 그려내려고 한 듯하다. 또한 무엇보다도 암살자가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를 그리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실제 시간은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그렇게 느껴진다). 심지어 영화의 엔딩은 암살자의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영웅적인 죽음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엔딩 쇼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의 대부분이 엔딩에 후일담과 추가 사실들을 텍스트로 삽입한다는 것을 떠올려 봤을 때, 이런 식의 엔딩은 다소 당황스럽다.
영화를 보면서 인물들에 대해서 들었던 몇 가지 의구심들. 왜 트로츠키보다는 암살자인 잭슨이 더 강렬하게 그려졌을까? 왜 트로츠키보다는 암살자 잭슨이 더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왜 유독 그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신경질적인 인물로 느껴지며,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이질적으로 다가올까? 물론 <트로츠키 암살>에서 암살자 잭슨 역을 알랭 들롱이 연기하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잭슨이 마치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유령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유령 이미지 그 자체이다. 이 이미지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 영화 속 배경들, 즉 배경을 이루는 멕시코라는 장소가 품은 고고학적 풍경과의 작용 결과이기도 하며, 영화 내내 이미지 주위를 서성이며 풍기는 스산한 음악도 이에 한 몫 더한다.
잭슨이 암살을 사주받는 장소, 즉 암살을 사주하는 사람과 접선하는 장소는 벽으로 둘러싸인 성곽 안이다. 비좁은 프레임 안에 가득 찬 거대한 베이지색 돌로 된 벽들은 잭슨과 그 일당들을 감싸고 있다. 잭슨은 그들과 헤어진 후에도 그 곳을 배회하고 신경질적인 종소리에 놀라서 성질을 내며, 불안감에 사로잡혀 왔다 갔다 한다(마치 어슬렁거리는 것이 삶의 방식인 듯). 이런 이미지는 흡사 전후 영화, 특히 <독일 영년>에서 후반부를 장식하는 아이의 배회 시퀀스와도 유사하며, 그가 육신이 제거된 존재, 즉 이리 저리 떠도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또한 잭슨은 트로츠키의 요새 주변을 서성인다. 요새는 위에서 언급한 성곽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즈텍 문명의 건축물이다. 다만 그는 원경에 위치한 존재로 작게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화면 깊숙한 곳에서 이 요새를 계속 맴돌 뿐이다. 이렇게 그는 끊임없이 어슬렁거리고 배회하며 유령처럼 이리 저리 떠도는 이미지로 존재한다.
잭슨은 행태뿐만 아니라 존재성 또한 불분명하다. 그는 유령같이 끊임없이 어슬렁거리는 것만이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벨기에 인인지 캐나다 인인지도 불분명하고, 정말로 사업가 인지도 알 수 없다. 또한 어머니의 목숨이 담보로 잡혀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정말 있는지 알 수 없다(영화 속에 그의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으며, 그녀가 등장하지 않음은 극적 효과나 긴박함까지도 말살시켜 버린다). 심지어 그는 집도 없다. 여자친구인 기타에게 만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지만, 결국 잭슨은 그녀의 집에서 기생하는 존재다. 가장 파격적이고 인상적인 장면인 투우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카탈로그에 주성철 기자가 썼듯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소의 죽음은 누가 봐도 트로츠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지만, 이 죽음은 꼭 트로츠키에 대한 암시만이 아니다. 영화 말미에 잭슨의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트로츠키의 피로 범벅된 채로 보디가드들에게 끌려가는 잭슨. 한마디로 그는 이미 존재성이 상실된 죽은 존재인 것이다. 그는 유령의 형상으로 <트로츠키 암살> 속에서 계속해서 출몰할 뿐이다.
하지만 기이한 순간이 발생한다. 그 순간은 의식처럼 행해지는 영화적 순간이 있다. 바로 잭슨이 도끼로 트로츠키를 암살하는 쇼트. 이 쇼트는 트로츠키의 비명소리로 극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음에도, 즉 비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히치콕이라면 어땠을까?). 침묵하는 이미지.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텅 빈 듯 하지만 응집되어있는 에너지. 바로 이 장면은 그런 이미지다. 인물들의 행동도 잠시 정지되어 있으며, 이미지는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한다. 이 의식처럼 행해지는 쇼트와 다음 쇼트의 연결을 통해 잭슨은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는 듯하다. 정적의 순간 그는 자신을 찾은 것이다(적어도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그는 트로츠키도 지르지 않는 비명을 질러대며 신경증적 증상을 보여주고, 트로츠키를 호위하던 사람들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잡혀가서 심문받는다. 그리고 이전과 다르게 이야기는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경찰은 잭슨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냐?" "암살의 동기는 무엇이냐" 이 질문은 두 세 번쯤 반복된다. 그리고 그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으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마침내 대답한다. "나는 트로츠키를 죽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트로츠키를 죽인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
물론 <트로츠키 암살>은 잭슨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트로츠키 암살 사건과 트로츠키와 '트로츠키를 죽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트로츠키를 죽이기 전에 묘사되는 그의 존재, 즉 존재하지 않는 이처럼 서성이는 잭슨에 대한 아이러니는 오프닝 텍스트에서 언급된 측면으로 볼 수도 있다. 영화는 "알려진 사실은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은 열어놓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잭슨이 드러나는 방식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적으로 불안감을 풍기고 유령처럼 배회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트로츠키 또한 망명자이고, 영화 초반에 그의 본뜬 거대 가면은 대중들의 오고가는 발길에 밟힌다). 마치 모두가 후안 룰포의 <빼드로 빠라모> 속 유령 인물들 같다. 이렇듯 유령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 유령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생산하고, 그것으로 향해 있는 영화가 바로 <트로츠키 암살>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배회하는 이미지, 혹은 불안감이 깃든 유령 이미지를 보면서 시네마테크가 처해있는 상황이 떠올랐다. 모두들 아는 사실이지만, 서울아트시네마는 2010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마지막으로 유령이 될 수도 있다. 명실상부한 시네마테크로서 전용관을 갖기는 커녕, 집을 잃고 어딘가를 배회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니, 물리적 여건상 배회조차 불가능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트로츠키 암살>처럼 영화적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감독들은 영화를 통해 그런 순간들을 창조해내며 관객에게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다. 우리들은 영화를 통해서 현실 속에서 이러저러한 중요한 순간을 이끌어 가고 만들어 간다. 아마 영화적 순간은 우리에게 현실에서 순간을 만들어 가라는 속삭임일 것이다. 그 순간의 꽃망울이 트는 때, 그 시점은 관객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하며, 시네마테크의 중요성을 깨닫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최혁규_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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