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3. 11:19ㆍ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이를테면 지금 판타지나 SF 장르의 인기는 신기할 노릇이다. 문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게임으로 뿌리를 내리고 미드와 마블의 영화산업 진출이 무성한 줄기를 가꾸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판타지의 몇 가지 원조할매 중 하나인 『아발론 연대기』에 기초한 <엑스칼리버>를 우리는 지금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즐길 수 있을까. 바로 이 영화 때문에 나는 온라인 게임에서 캐릭터를 지정할 때 양손검만을 선호하게 되었다. 취미의 근원! 그리고 헬렌 미렌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할 영화. <엑스칼리버>.”
- 변영주 감독의 <엑스칼리버> 추천사
[리뷰] <엑스칼리버>
신화와 전설의 마지막 시대
<엑스칼리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의 전설을 다루지만,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아서나 모가나, 랜슬럿 같은 이들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전설의 명검, ‘엑스칼리버’다. 영화는 이 엑스칼리버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다가 다시 호수의 여신에게 돌려지기까지의 기나긴 서사시를 담는데, 그 때문에 영화의 시작은 어린 아서의 등장이 아닌, 통일된 영토의 왕이고자 했던 우터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이다. 이후 영화가 140분 동안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엑스칼리버 칼을 중심으로 선택되어 배치된다. 과연 이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무엇인가, 혹은 엑스칼리버는 어떤 자질을 가진 누구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거나 거부하는가. 그리고 이 엑스칼리버는 아서와 함께하기 시작한 이래 카멜롯에서 어떤 일들을 겪는가, 또 무엇을 목격하는가. 존 부어맨 감독은 이렇게 엑스칼리버를 중심으로 한 시퀀스를 중심으로, 이 방대하고 변형도 많은 기나긴 서사시를 이어나간다.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간 시간의 경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건너뛰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시간의 차이를 지우거나 강조하기도 한다. 예컨대 방금 전 엑스칼리버를 뽑아 왕으로 추대된 소년이 마침내 적들까지도 자신의 용사로 만드는 데 성공한 직후, 아서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곧장 몇 년 후를 건너뛰어 제법 왕의 풍모를 갖춘 모습으로 호수의 기사 랜슬럿을 만나는 에피소드로 향하는 것이다.
고래의 신화와 전설들은 원래 잔혹한 전쟁과 살육, 골육상쟁과 정복전쟁, 강간과 근친상간, 책략과 복수와 탐욕으로 점철돼 있다. 마법과 신비한 힘이 여전히 작용하는 세계, 그러나 이 세계는 이제 자비와 공평을 함께 갖춘 법과 제도가 다스리는 이른바 ‘인간의 시대’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마법사 멀린이 ‘위대한 왕’을 찾아 “하나의 땅, 하나의 왕”을 세우려는 것 역시 마법의 시대가 다해가고 있으며 자신은 사라져야 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엑스칼리버는 그러므로, 마법의 시대를 끝내고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 숱한 피를 묻혀야 하는 운명의 칼이기도 하다. <엑스칼리버>는 이 마지막 신화와 전설의 시대를 할 수 있는 한 웅장하고도 화려하게, 그러나 곧 바스라질 것 같은 얇은 반짝임의 세계로 그린다. 전투씬들은 최대한 끔찍하고 잔인하며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전투씬이 아니더라도 예컨대 성배를 찾아 떠난 기사들이 맞는 비극의 최후들은 굳이 신체 훼손의 묘사를 피하지 않는다. 반면 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 같은 기사들이 입고 있는 은색의 갑옷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번쩍거린다. 엑스칼리버가 발하는 신비로운 기운을 표현하기 위해 더해진 녹색빛도 마찬가지. 이런 광채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조금 조잡해 보이기도 한데, 이 때문에 자칫 경박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상쇄하고 영화를 더욱 웅장하게 만드는 건 음악이다. 웅장함을 표현하는 데엔 역시 바그너 음악 만한 게 없다. 영화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파르지팔》(퍼시벌) 서곡, 그리고 《니벨룽겐》 중 ‘지그프리트의 장례 행진’ 등을 주로 사용하되, 결정적인 출정 장면에서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중 ‘운명의 여신이여 O Forutuna’를 배치하여 영화의 박력을 높인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죽이는 마지막 장면이 지나 호수의 여신에게 엑스칼리버를 반납하고, 신들의 안식처로 떠나는 아서의 모습을 묘사한 맨 마지막 장면을 보며 우리는 이제 비로소, 신과 마법의 시대가 끝났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1981년 칸영화제에서 공개되어 예술공헌상을 받았다. 지금은 대배우가 됐지만 당대에는 젊고 신인축에 속했던 이들의 활약을 보는 재미가 있다. 용맹하지만 자비는 없는 아서의 아버지 우터 펜드라곤 역으로 출연하는 가브리엘 번이나, 아서의 충직한 오른팔이었으며 랜슬럿과 귀네비어의 불륜을 고발하는 가웨인으로 리암 니슨을 볼 수 있다.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았을 때 곧바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리온데그란스 역으로 출연한 이는 자비에 교수, 즉 패트릭 스튜어트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다가오는 ‘인간의 시대’에 역행하며 마법의 힘을 갈망하고, 이복동생인 아서를 속여 아이까지 낳는 마녀 모가나 역으로 나오는 헬렌 미렌이 눈부시다. 이외에도 존 부어맨의 딸인 카트린 부어맨이 우터에 기만당해 아서를 낳는 이그레인으로, 당시 15살이었던 막내아들 찰리 부어맨이 어린 모드레드로 출연한다. 또한 연출부로 영화에 참여했던 딸 텔체 부어맨은 호반의 여신으로 잠깐이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드러낸다.
김숙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엑스칼리버> 2/9(일) 14:30 상영 & 시네토크 with 변영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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