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0. 17:02ㆍ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영화가 당신과 함께한다는 말을 종종 의심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소쿠로프의 이 영화는 그 말을 당신 눈앞에서 증명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정신이며, 그것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영혼이 그 안에서 경험하는 것뿐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해가 지는 순간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 시간 동안 당신께서는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빛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에 당신과 함께 극장에 있겠습니다.”
- <영혼의 목소리> 정성일 평론가 추천사
[리뷰]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영혼의 목소리>
바스라질 것 같은 인간들의 내면
현대 러시아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감독인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는 <어머니와 아들>(1997), <러시아 방주>
(2002), <파우스트>(2010) 등의 극영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편수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역사, 도시, 여행, 농부, 음악가, 작가, 군인, 권력, 죽음과 기억 등 광범위한 주제에 걸친 28편에 이르는 그의 다큐멘터리들은 그 주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특유의 시적인 이미지와 롱테이크를 동반한 관조적인 스타일로 그의 극영화와 잇닿는다. <군인의 꿈>(1995), <고백>(1998)과 더불어 그의 군대 3부작을 이루는 <영혼의 목소리>(1995)에서 소쿠로프의 인장을 발견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아마도 소쿠로프의 극영화에 매혹된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그 어떤 스펙터클도 제시하지 않는 5시간 28분에 이르는 이 시적이고 묵시록적인 다큐멘터리가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아, 물론 이 영화는 고통스럽지만 그건 다른 의미에서이다.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는 1994년 6월부터 그해 마지막 날까지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의 11번 초소에 배치된 러시아 군인들과 함께 지냈다. 그곳은 전장이지만 적은 보이지 않고 전투도 거의 없다. 러시아 군인들은 거기서 밥을 해먹고 담배를 나눠 피우고 빨래를 하고 일기를 쓰고 산을 정찰하고 지뢰를 제거하거나 매설한다. 전장치고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지만 그들이 삶보다 죽음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고립된 이곳에서 그들은 외로움, 불안, 공허와 싸우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들의 임무는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기를 기다린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이 전장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피 말리게 부조리한 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니다. 무위와 공허가 그들의 영혼을 집어삼키는 중이다. 이 전쟁에는 아무런 흥분도, 승전의 희열도, 영웅의 서사도 없다. 간신히 버티고 선 흙집 초소, 최악의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음식들, 흙먼지 속에 널린 빨래, 폭염에 팬티만 걸친 군인들. 이건 유사 이래 우리가 스크린으로 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전쟁이다. 그럼에도 소쿠로프는 우리에게 이 전쟁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설명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가 <영혼의 목소리>에서 포착하려 한 것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바스라질 듯한 내면이었다.
<영혼의 목소리>는 제각기 다르게 배분된 다섯 개의 장(1부 38분, 2부 33분, 3부 87분, 4부 79분, 5부 90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소쿠로프는 거의 정사진처럼 보이는 러시아 설경을 펼쳐놓은 채 모차르트와 메시앙과 베토벤의 음악을 들려준다. 산과 호수를 배경으로 한 시베리아 설경이 38분간 하나의 쇼트에 담기지만(이 쇼트 끄트머리에 두 개의 짧은 인서트가 있다), 하나의 테이크로 99분을 이어간 <러시아 방주>를 떠올리면 놀랄 일도 아니다. 이후 전개되는 네 개의 장과 다소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1부는 음악가들의 이른 죽음 뒤에 남겨진 영속적인 예술적 업적과 그들의 무자비한 삶 간의 모순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가까스로 통합된다. 무엇보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소쿠로프 특유의 회화적인 이미지 조형술일 것이다. 고정된 카메라, 롱샷, 롱테이크로 포착된 설경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하나의 풍경화에 누군가 슬며시 눈과 구름, 땅과 하늘, 새와 달, 사람과 불을 자꾸만 덧칠해 넣는 듯 미묘하게 형태를 바꿔간다. 부분적으로 실제 시간을 담고 또 부분적으로는 디지털 효과에 힘입은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그림’은 롱테이크의 희미한 잿빛 칼라 이미지에서 이후 커트로 나뉜 황갈색 모노크롬 이미지로 전환된다.
2부에서 러시아 군대에 합류한 소쿠로프는 마침내 타지키스탄 고지대에 도착한다. 6월의 그곳은 뜨거운 태양과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산과 흙먼지와 파리로 뒤덮인, 무료한 지옥이다. 3부에서 그들의 지루하고 잡다한 일상들이 세세하게 묘사되고 나면, 4부에선 그 일상과 일상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한 차례 전투가 벌어지고, 5부에서는 1994년을 보내는 조촐한 송년 만찬과 1995년의 새해 새벽이 담긴다. 굳이 말하자면 이렇지만 사실 <영혼의 목소리>는, 다소 독립적인 1부를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군인들의 일상적 삶과 그들의 얼굴을 포착하는 데 할애된다. 그중에서도 소쿠로프의 시선은 유난히 앳된 얼굴의 병사들에게 오래 머무른다. 이름조차 모르는 그들을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마치 얼굴에 그들의 영혼이 투명하게 비춰 보이기라도 할 듯이. 소쿠로프는 자연도 그렇게 바라본다. 사실적인 이미지 안에 드리운 영적인 억압 혹은 시적인 이미지 안에 담긴 영적인 암시라고 할 만한 그것에 비참하면서도 숭고한, 무심하면서도 절박한 감정이 겹겹이 쌓인다.
소쿠로프의 ‘전장 일기’는 1994년에서 1995년으로 넘어가는 그 시간에 멈춘다. 그들 대부분이 가족들에게 전쟁터에 가는 것을 숨긴 채 이곳으로 왔으며, 그들이 지금 쓰는 편지는 3달 뒤에야 고향에 도착할 것이다. 자정의 건배, 소박한 빵, 한 병의 샴페인, 한 곡의 팝음악, 함께 부르는 노래, 서로 나누는 따뜻한 인사말. “나토군이라면 오래 전에 목매달았을 곳”에서 그들은 또 다른 해를 맞는다. 해가 밝으면 소쿠로프는 ‘눈과 침묵으로 얼어붙어 있을 러시아’로 돌아갈 것이다. 영화는 새해가 아직 밝기 전에, 끝난다.소쿠로프는 군인 가정에서 성장한 덕에 유년기 때부터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커서는 자신의 고국을 “끔찍한 전쟁의 경련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영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라고 비판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사용한 일기체 형식의 이 영화에서 그는 이 전쟁에 관해 아무것도 직언하지 않는다. 차분하고 친근한 그의 목소리는 대부분 날씨를 전하고 가끔 기도하는 데 쓰인다.
소쿠로프의 관심이 전쟁이 아니라 그 조건에 놓인 인간에 있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다지 의아한 일은 아니다. 또 그는 ‘먼지와 탄내, 돌, 뜨거운 탄환 파편, 피, 공포의 기미만이 존재하는 이 전쟁에서 미학의 여지는 없다’
(4부 내레이션 중에서)고도 했다. 표면적으로 그는 정치도 미학도 단념한 듯이 보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말이 선선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찍이 소쿠로프의 열광적인 지지자였던 수잔 손택의 찬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잊을 수 없는 감정적 경험을 창조하는 시각적 힘과 도덕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 <영혼의 목소리>에서 소쿠로프가 제시한 것은 영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다큐멘터리 미학이다.
강소원 / 영화평론가
13:00 <영혼의 목소리 1,2>
14:30 <영혼의 목소리 3>
16:40 <영혼의 목소리 4>
19:00 <영혼의 목소리 5> & 시네토크 with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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