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변하지 않는 세상, 떠도는 아이들 - 제작자 오정완의 선택작 <안개 속의 퐁경>

2014. 1. 24. 13:22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내게 새로운 영화의 세계에 눈 뜨게 해준 계기가 된 영화입니다.”


- <안개 속의 퐁경> 제작자 오정완의 추천사 



[리뷰] <안개 속의 풍경>


변하지 않는 세상, 떠도는 아이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알렉산더는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누나 불라는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고”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매일 밤 불라와 알렉산더는 ‘창조’의 순간을 입에 올리고 귀로 듣는다. 두 아이는 아빠를 보지 못했다. 엄마는 아빠가 독일에 산다고 말했고, 남매는 엄마의 말을 믿고 있다. 남매는 독일에 있는 아빠와 그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삼촌이 미국에 산다고 믿는 것과 아빠가 독일에 산다고 믿는 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미국에 사는 삼촌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어떤 가능성과 관련된 존재이지만, 독일에 사는 아빠는 자신의 근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매는 독일에 사는 아빠에게 마음의 편지를 쓰는 행위를 통해 그들을 창조한 근원과 밀접하게 소통하기를 원한다. 누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엄마가 잠자리를 확인하러 다가올 때면 멈춘다. 엄마가 열어둔 문틈으로 환한 빛이 두 아이를 비춘다. 두 아이의 몸 전체를 비추는 환한 빛은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다시 볼 수 없다. <안개 속의 풍경>은 어둠과 몇 줄기 어슴푸레한 빛으로 시작한다. 어둠을 뚫고 불라와 알렉산더가 등장한다. 잠시 후, 기차는 떠나고 두 아이만 철로 옆에 남는다. 뒤돌아선 두 아이 앞으로는 끝을 짐작하기 힘든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안개 속의 풍경>은 빛과 어둠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빛을 따라가면 아빠에게 도착할 수 있을까. 기차를 훔쳐 타고 자동차를 얻어 타고 길을 걸으며 남매는 북쪽 땅을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그들이 접하는 세상에는 도무지 빛이 보이질 않는다. 알렉산더가 갈매기 아저씨라 이름 붙인 남자는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려 하지만 갇혀 있는 신세다. 눈 오는 밤의 결혼피로연에서 뛰쳐나온 신부는 무슨 사연인지 슬피 운다. 빗길을 걷던 두 남매를 태워준 트럭 운전수는 소녀의 몸을 범한다. 풍경의 작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눈에 잡힌 그리스의 풍경은 하나같이 을씨년스럽다. 발이 묶인 채 말이 끌려가는 장면은 그중 비통하다.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인간의 요구에 따라 말없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던 당나귀는 결국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죽어가는 당나귀 곁으로 무심한 양들만 거닐던 것처럼, <안개 속의 풍경>에서도 눈길에 끌려가는 말을 애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어가는 말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 말의 죽음을 알리는 누나의 말에 알렉산더는 울음을 터뜨린다. 꼬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다.





왜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왜 세상의 풍경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먼 옛날 <유랑극단>에 나왔던 단원들이 그때 그 모습으로, 그러나 더욱 느려진 걸음으로 <안개 속의 풍경>에 재등장한다. 그들의 일은 ‘사람을 웃게 하고 울게도 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다. 그들은 늙었고, 유일하게 젊은 단원인 오레스테스는 곧 군에 입대해야 한다. 오레스테스가 알렉산더에게 “내 친구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자, 꼬마는 “슬퍼 보여요”라고 답한다. 여전히 <양치는 소녀 골포>만을 공연하며, 무대에 오를 극장을 못 구해 항상 가난한 극단은, 어린 소년의 눈에도 슬퍼 보이는 존재다. “시대가 변했어. 모든 게 변했어”라는 오레스테스의 말은 틀렸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세월을 버티지 못한 그들이 늙었을 따름이지 그들이 속한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차갑고 혼돈에 휩싸인 세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 우울한 세계 ‘안’에서 맴돌기만 했던 거다. 다시 질문하자. 어떻게 해야 세상은 바뀌는 것일까? 열차를 훔쳐 탄 남매가 경찰서에 붙잡혀 갔을 때, 바깥에 눈이 온다. 어른들은 모두 눈을 보러 바깥으로 몰려 나간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굳어 있다. 눈 아래 멈춰선 사람들은 흰 눈이 잿빛 도시를 덮어주기를 바라면서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건, 그들 사이로 이동하는 불라와 알렉산더뿐이다. 그날 밤, 꼬마는 또 아빠에게 마음의 편지를 썼다. ‘정말 이상한 세상이에요. 밤은 으스스하고요. 그렇지만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여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 앙겔로풀로스는 움직임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 그의 인물들은 어디론가 이동한다. 그런데 <안개 속의 풍경>의 불라와 알렉산더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유랑극단>의 인물이 결과적으로 갇힌 공간 속에서 떠돌고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의 인물이 과거와 죽음을 향한다면, <안개 속의 풍경>의 불라와 알렉산더는 빛과 앞을 향해 이동한다. 불라와 알렉산더와 오레스테스가 바다에 이른 날, 셋은 바다에서 떠오른 거대한 조각상을 바라본다. 조각상은 위대한 희랍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조각상은 손목 부분이 잘려 있고 손가락 중에서도 검지가 부서져 있다. 몸과 분리된 손은 고대의 문명과 단절된 현대의 그리스인을 닮았고, 검지가 파손된 손은 방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조각상은 지쳐가던 불라의 마음에 불을 놓는다. 천신만고 끝에 국경에 도착한 불라와 알렉산더의 눈앞에는 검은 강이 차갑게 흐른다. 검은 강, 모든 것을 삼켜버릴듯이 지독한 암흑. 두 아이는 두려움을 누르고 조각배에 오른다. 국경수비대가 두 아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암흑. 두 아이는 죽은 것일까. 검은 강은 저승에 이르는 강 스틱스였을까. 짙은 안개가 낀 새벽, 두 아이는 깨어난다. 아니, 죽음에서 부활한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나무를 향해 뛰어간다.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자만이, 죽음을 무릅쓸 수 있는 자만이, 말씀을 굳게 믿는 자만이 빛을 발견한다. 그렇게 ‘다른’ 삶이 시작된다.


이용철 / 영화평론가


<안개 속의 풍경> 2/4(화) 19:30 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