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4. 16:38ㆍ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오승욱 감독의 선택 - 로트나 Lotna 1959│90min│폴란드│Color│35mm│15세 관람가 연출│안제이 바이다 Andrzej Wajda 출연│예르지 피첼스키, 아담 파울리코우스키, 예르지 모스 |
“<로트나>는 탱크와 말이 싸우는, 매우 불균질하고 서글픈 영화다. 죽어가는 사람도 슬프고 죽어가는 말도 슬픈 그런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4년의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내 심정 같기도 했다.” |
낭만적 감수성과 역사적 사실의 불균질한 만남
안제이 바이다의 초기작인 <세대>(1955), <카날>(1957, <재와 다이아몬드>(1958)에 이은 네 번째 영화이자 그의 첫 컬러영화인 <로트나>는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폴란드 기병대가 행군 중에 신비로운 하얀 말(로트나)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은 독일 탱크와의 전투, 기병대 전투원의 죽음, 전쟁 중에 피어나는 사랑과 이별을 거쳐 결국 로트나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바이다의 아버지가 기병대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역사적인 왜곡은 영화적인 장치이자 우아하면서도 낭만적인 시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바이다의 새로운 감성으로 다가온다. 1940년 소련군에 의해 자행된 카틴 학살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바이다는 42년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전후, 미술학교와 폴란드영화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간다. 이후 그가 만들어낸 영화들은 폴란드의 역사적 사건과 현실을 다루면서도 동유럽 특유의 낭만주의적 시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딱딱함을 벗어나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바이다는 <로트나>를 통해 아버지가 몸담았던 기병대의 신화적인 위용을 탱크와 맞서는 칼이라는 형태로 시각화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기병대 병사들의 잇따른 죽음과 장례식을 통해 형상화시킨다. 정작 바이다는 이 영화를 실패작이라고 고백했지만, 몇 가지 지점에서 그의 가장 독특한 영화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맑은 가을하늘 아래 펼쳐진 숲을 지나가는 기병대의 행렬이 보인다. 마치 서부극의 기병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행렬 앞에 하얀 말이 등장하는데, 외화면에서 들리는 포탄 소리와 말발굽 소리, 포탄을 뚫고 달리는 말의 형상이라는 구조는 이 영화를 지배하는 형식적인 원리가 된다. 로트나를 따라 기병대가 도착한 오랜 대저택은 마치 유물들이 널린 박물관처럼 그림, 조각을 비롯한 예술품이 곳곳에 놓여 있지만 쇠락한 공간이자, 죽음을 지척에 둔 곳처럼 적막하다.
이 영화의 뛰어난 스펙터클은 대부분 기병대의 달리는 모습을 횡축 트래킹으로 담아내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놀라운 속도감, 기병대의 돌진을 중심에 둔 장대한 리듬에서 비롯된다. 또한 사실적인 피난민들의 행렬, 기병대와 독일 탱크와의 초현실적인 대결 장면으로 연결되면서 웅장한 스케일과 더불어 시적인 리듬까지 획득한다. 마지막 시퀀스인 로트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의 위용에 홀린 사령관과 중령, 하사, 병사의 행보는 두 번의 죽음을 둘러싼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사령관의 주검을 안치하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은 병사와 마을 교사의 결혼과 병치되면서 죽음이 즐비한 곳에서 피어나는 낭만적인 사랑의 현재를 접합시킨다. 반복적인 독일군의 폭격과 그로 인한 참혹함은 로트나를 향한 군인들의 집착과 병행하면서 더욱 어두운 죽음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후반부의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전쟁터의 참상은 다리가 부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로트나를 죽이는 중령과 하사의 모습과 나뭇가지를 말의 주검에 덮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사가 로트나의 등에 실려 있던 마구를 지고 걸어가는 모습과, 멀리 죽음의 무덤에 서 있는 풍차의 실루엣, 그리고 칼을 부러뜨리는 중령의 모습은 독일과의 전쟁이라는 역사적 현실과 카틴 숲에서 학살당한 무수한 폴란드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의적 상징이 통합되는 지점에 멈춰 선다. 칼 대신 나무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걸어가는 중령과 마치 로트나의 운명을 지고 가는 것처럼 보이는 하사의 뒷모습을 통해 바이다가 세공한 낭만적 신화와 역사적인 사실의 접합은 당대 새로운 청년영화들이 지녔던 매력과 새로움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박인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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