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퐁네프의 연인들> - 문명과 원시의 사랑

2015. 2. 6. 15:15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한예리 배우의 선택 -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 The Lovers on the Bridge

1991│125min│프랑스│Color│DCP│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레오 카락스 Leos Carax

출연│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클라우스 미카엘 그뤼버

“지독하게 황홀한 사랑의 연인들”



문명과 원시의 사랑



세기말을 앞둔 1990년대에 왕가위와 함께 레오 카락스가 추앙받았던 것은, 이들의 영화가 당시의 어떤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당스한 사회 분위기와 그 안에서 파편화된 개인의 외로움. 탐미적인 화면과 자의식 과잉. 미치지 않았지만 미친 사람인 듯 행동하며 아웃사이더, 왼손잡이, 이방인을 자처하면서 메인스트림 바깥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표출했던 청춘들. 따라서 90년대를 거친 영화 청년들에게 이 둘은 당연히 좋아하고 숭배할 감독들이었다. IMF 구제금융을 거치고 신자유주의와 그로 인한 경제적 양극화를 겪으며 냉소와 비관으로 무장한 2010년대의 관객들이 보기에, 이 영화들의 과잉은 소위 ‘손발이 오그라드는’ 당황스러움과 어리둥절함을 주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두 감독의 거의 전 작품이 2010년대에 다시 소개되고 있는 현상 역시 흥미롭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레오 카락스의 영화들 중에서도 위에 언급한 특징이 가장 폭발하는 영화이다. 공사로 인해 출입이 금지된 퐁네프는 대도시 파리에서 ‘금지된’ 곳이라기보다 ‘버려진’ 곳에 가깝다. 이곳에 알렉스와 한스가 산다. 한 마디로, 버려진 곳에 사는 버려진 사람들, ‘노숙인’들이다. 이곳에 시력을 잃어가는 병에 걸린 화가 미셸이 불청객으로 합류하게 된다.

알렉스는 애초 태어날 때부터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단 한 번도 소속돼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곡예사라는 그의 직업마저 근대 자본주의 바깥에서 명맥을 이어온 듯한 예술 장르다. 반면 미셸은 중산층 가정 출신이자 ‘문명’의 세계, 그리고 근대에 특히 꽃을 피운 ‘회화’라는 장르의 예술가이다. 그런 미셸을 실명으로, 거리로 이끈 병은 일차적으로는 ‘화가’라는 그녀의 정체성과 욕망을 거꾸러뜨리는 병이자, 동시에 근대 이후 절대적 위치를 차지한 ‘시각’의 상실이라는 면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지위까지 위협하는 병이다. 그녀에게는 이중으로 정체성을 뒤흔드는 병인 셈이다.



미셸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사랑을 잃지 않았다면, 그래서 스스로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둘은 만나려야 만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래서 그들이 만나 사랑 비슷한 것을 나누고 외로움을 공유할 때, 프랑스 혁명 축제일에 하늘을 가득 수놓은 불꽃을 배경으로 버려진 다리 위를 달릴 때, 어스름한 저녁녘 바닷가를 발가벗고 달릴 때, 이들이 누리는 자유는 문명 밖의 자유이자 사회 바깥의 자유이다. 마치 로렌스의 소설 『차탈레 부인의 사랑』에서 차탈레 부인과 산지기가 비 오는 숲에서 발가벗고 춤을 추던 그 장면처럼. 그러나 문명과 예술의 세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평생을 살아오다 쫓겨나듯 나왔던 이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고 했을 때, 과연 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세계의 차이는 ‘돈’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퐁네프의 연인들>이 맞는 결말은, 감독이 작정하고 알렉스의 편을 들어주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들의 사랑은 파리를 떠날 결심을 하고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것이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 없어, 나를 잊어”라며 사랑을 부정했던 미셸이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한 그 순간 자신의 의지로 알렉스와의 삶을, 사랑을 선택하게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 퐁네프 아래로 흐르는 세느강, 언제나 그들이 위에 있었으나 한 번도 내려다 본 적 없는 그 세느강의 강물이었다.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