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가족의 친구> - 데카당스 취향의 출발

2015. 1. 22. 14:20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 한창호 평론가의 선택 <가족의 친구> L'amico di famiglia / The Family Friend

2006│110min│이탈리아, 프랑스│Color│35mm│청소년 관람불가

연출│파올로 소렌티노 Paolo Sorrentino

출연│파브리지오 벤티보글리오, 루이자 드 산티스, 마르코 지아리니

상영일정ㅣ 1/24 18:40(시네토크 한창호), 2/3 19:40,

“<가족의 친구>는 데카당스의 미학을 갖고 있는데, 이 점이 이탈리아의 정체성이고, 이탈리아 예술의 특성이라고 봤다. 그런 미학을 표현하는 데는 소렌티노가 가장 앞서 있다. 상상력 뛰어난 그의 표현력을 보면 감탄할 때가 많다.”



데카당스 취향의 출발


해변의 백사장에 수녀가 머리만 내놓고 몸은 다 묻혀 있다. 그녀는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곧 이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두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족의 친구>(2006)의 첫 장면이다. 이탈리아의 특성, 혹은 마피아 영화를 아는 관객이라면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가 왜 모래에 묻혀 있는지, 누가 그런 처벌을 지시하는지는 곧바로 제시하지 않는다. 소렌티노의 내러티브 전략은 늘 이렇게 행위의 인과관계를 지연시킨다. 관객은 마치 꿈을 꾸듯, 다음 장면을 보면서, 앞의 장면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묻는 상상을 펼치는 것이다. 당연히 영화는 스크린의 표면 너머에 더욱 다양한 상상의 장을 펼쳐놓는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광대할지는 관객의 적극적인 태도에 달려 있는 셈이다.


소렌티노의 영화가 매력적이라면, 우선 그의 영화에 일관된 ‘내러티브의 지연’ 덕분일 터다. 브레히트의 ‘중단의 연극 Theater of Interruption’처럼 의도적으로 인과율에 따른 매끈한 서사를 지양한다. 이야기는 중단되고, 생략되고, 지연되어, 가는 선으로 간신히 연결된 것처럼 이어진다. 그 지연과 중단 사이에는 종잡기 쉽지 않은 또 다른 에피소드들이 끼어든다. 그런 에피소드들은 독립적일 정도로, 영화의 전체 이야기와는 대단히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면 분기forking 하는 내러티브인 셈이다. 이것이 소렌티노의 매력이자, 단점이다. 어디서 저런 상상력이 나오는지, 그 상상력만큼은 소렌티노가 늘 존경하는 펠리니의 능력에 비교되지만, ‘중단된 서사’를 진지하게 봐 줄 관객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의 친구>는 장편 데뷔작 <사랑의 결과>(2004)에 이은 두 번째 장편이다. 제목은 마피아 영화의 관행에서 따온 것이다. 이를테면 <대부>에서 마피아들이 자신들을 소개할 때 쓰는 용어를 기억하면 되겠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제목에서 마피아 영화를 의식하고 있음을 밝힌 셈이다. 그런데 그 마피아의 모습이 좀 황당하다. 늙고 냄새 나는 사채업자다. 외부적으로는 재단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무자비하게 이자를 뜯어내는 파렴치한이다. 첫 장면의 수녀는 아마 돈을 갚지 못했을 것이고, 두 남자는 이 늙은 고리대금업자가 보낸 해결사들이다. 말하자면 <가족의 친구>는 마피아 영화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 영화다. 패러디는 소렌티노의 특기다. 그런데 이것도 단점일 수 있는 게, 패러디를 즐기려면 원본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 디보>(2008)가 패러디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제대로 아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이 영화에서 소렌티노의 데카당스한 취향이 적극적으로 드러났다. 주인공이 노인인데, 그는 또 움직이지도 못하는 더 늙은 노모와 함께 산다. 엄청난 돈을 갖고 있지만, 하층민들이 사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그의 집은 노인의 부패한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매끈하고 맑은 이미지도 잘 만들지만, 이렇게 늙고 썩어서 혐오감을 주는 이미지를 더욱 잘 만드는 게 소렌티노의 또 다른 특성이다. 말하자면 타고난 반골 기질이 숨어 있는데, 이런 취향도 대중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노인은 엉큼하게도 젊은 여성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 아파트 뒷 정원엔 여성 전용 배구코트가 있어서 젊은 처녀들이 연습하러 오기도 한다. 노인은 창 뒤에 숨어, 처녀들의 건강한 몸을 훔쳐보며 희열을 느끼곤 한다(배구 코트가 아파트 뒤에 있는지는 영화의 중간쯤 돼야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돈을 아끼기 위해 이런 누추한 곳에 사는지, 젊은 육체를 관음하기 위해 이곳에 머무는지 혼동되기도 한다. 큰 이야기는 이 노인이 젊고 아름다운 신부를 본 뒤, 그만 사채업자로서의 ‘이성’을 잃고, 사랑에 욕심을 내면서 전개되는 추락의 과정이다.


그런 표면적인 이야기가 하나 제시돼 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다양한 작은 이야기들은 관객 스스로 창작할 수 있는 여지를 여러 겹 남겨 놓았다. 소렌티노의 영화가 현기증이 나기도 하고, 간혹 혼란스러운 것은 이런 그만의 영화적 특성 때문이다.



한창호 영화평론가